8편






부산 해군 기지


“너희들..!”


마침 지휘관의 심부름을 다녀오던 도이칠란트가 안내 데스크에 머무르고 있던 엔터프라이즈와 뉴저지를 발견했다. 도이칠란트 역시 그녀들의 악행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도.. 도이칠란트, 호.. 혹시 지휘관을 만나게 해줄 수 없겠는가? 꼭 그를 만나봐야마 한다..! 부탁하지..”


엔터프라이즈는 도이칠란트 앞에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분명 절박함이 묻어나왔지만 도이칠란트에게는 그저 가증스러울 뿐이었다.


“하..! 양심도 없지. 그만큼 지휘관을 괴롭혀놓고는 이게 뭐하는 짓이지?”


“우리가 염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이렇게 염치불구하고 부탁할께.. 지휘관을 만나게 해줘..!”


엔터프라이즈, 그리고 뉴저지는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도이칠란트에게 애원했다.


“… 흐음.. 그래, 귀빈 자격이 아닌 방문자 자격이라도 좋다면야 한 번 허가를 내려주지, 어때?”


도이칠란트는 가학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엔터프라이즈와 뉴저지라는 유니온 내 의전 서열 4위의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귀빈이 아닌 일반 방문자로 처리한다는 것은 엔터프라이즈, 뉴저지의 명예를 무시한다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래주겠나?! 아아, 정말로 고맙다..! 지휘관을 만날 수만 있으면 그런건 별로 상관없다..!”


엔터프라이즈와 뉴저지를 그런 명예따위는 이미 우선순위에서 밀린지 오래였다.









그렇게 엔터프라이즈와 뉴저지는 한국 해군 소속 함선소녀들의 시찰을 다녀온 지휘관을 근 2시간만에 접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몇 달만에 재회한 지휘관은 그녀들을 대놓고 싫어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휘관.. 이런 말.. 정말 염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 벽람항로는 와해되기 직전이다..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이제 오직 지휘관 밖에 없어.. 제발.. 제발.. 돌아와다오..!”


엔터프라이즈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뉴저지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풋..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 혹시 나가토와 짜기라도 한 거냐?”


“무.. 무슨..! 그럴리가 없지않나..”


쾅!


지휘관은 마시고 있던 차가 담긴 찻잔을 강하게 탁자위에 내려놨다. 엔터프라이즈와 뉴저지는 그런 지휘관의 행동에 공포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그렇게 결백을 주장해도 귓등으로도 안 들었잖냐. 사실 너희들을 믿고 있었다. 중립을 지키고 있으니까 언젠가 내 결백이 밝혀져 날 도와주겠지..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 희망 하나만으로 억척스럽게 버텼다. 노시로가 내 발바닥 가죽을 모조리 벗겨서 불판 위에 던져놓아도, 시리우스가 검으로 내 허벅지를 찔러가며 몇 날 며칠을 못자게 했어도.. 나는 버텼다. 바로 너희를 믿고! 


하지만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네 년들이 은근히 저 년들의 편에 섰을 때.. 나는 모든 걸 포기했다. 아무리 저항하고 싶어도 차마 목구멍에서 말이 떨어지질 않더군..


그런 네 년들이 한 번만 말을 들어달라고 해? 한 번만 도와줘? 용서를 빌어?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


지휘관은 강한 어조로 엔터프라이즈와 뉴저지에게 일갈했다. 하지만 그 어조에는 분노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 지휘관이 느꼈던 절망과 공포가 한껏 묻어있었다.


“읏.. 그건.. 정말.. 정말로.. 할 말이 없다.. 벌을 받아야 한다면 모두 달게받겠다.. 하지만.. 지금은 위기 상황이다.. 부디.. 부디.. 한 번만 도와다오..”


“거절한다. 아니, 싫다.”


“지.. 지휘관..!”


엔터프라이즈의 간곡한 부탁에도 지휘관은 요지부동이었다. 사실 당연한 사실이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반 병신으로 만들어놨으니 말이다.


그 때, 잠자코 있던 뉴저지가 나섰다.


“지휘관.. 구축함 아이들이 불안해하고 있어..”


“..!”


순간 지휘관이 움찔했다. 뉴저지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


“아이들이 지휘관은 어디갔냐며 울고 있어.. 우릴 용서 못하는 건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그 아이들을 봐서라도 한 번만 우릴 도와줄 수 없을까..?”


“흥, 너희들이 한 짓을 그대로 설명해주지 그랬냐.”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지휘관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져갔다. 아무리 흉계에 사용되었다고 해도 아이들이 직접적으로 지휘관에게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저 저 가증스러운 년들의 계략에 놀아난 또 다른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젠장”


원래 아이들을 좋아했던 지휘관의 철옹성 같은 마음에 점점 균열이 생겨갔다. 아이들이 훌쩍거리며 자신을 찾고 있을 생각을 하니 조금씩 마음이 아파왔다.


“도이칠란트..”


도이칠란트를 부르는 지휘관의 어조에는 무슨 일인지 힘이 하나도 들어가있지 않았다.


“응?”


“슈페 좀 불러와줘. 너희에게 할 말이 있어..”


“알겠어. 바로 다녀올께.”









잠시 뒤, 슈페가 도이칠란트와 함께 지휘관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지휘관은 슈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는 물었다.


“너희라면 어떻게 하겠니..?”


슈페와 도이칠란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더 이상 지휘관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던 둘은 지휘관에게 따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지휘관이 매일 트라우마 때문에 괴로워하는 건 싫어.. 맨날 약의 힘으로 겨우겨우 버티는 것도 싫어.. 언제나 밝고 늠름한 지휘관이 좋아. 난.. 지휘관이 떠난다고 하면 어디든 따라갈거고, 남는다고 하면 언제까지나 지휘관의 곁에 남아있을거야..”


“하등ㅅ.. 아니.. 지휘관, 차라리 다녀와. 언제까지고 지휘관만 괴로워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 차라리 시원하게 복수해주고 돌아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


지휘관은 눈을 지긋이 감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엔터프라이즈, 뉴저지, 도이칠란트, 그리고 슈페의 시선은 모두 지휘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래.. 아이들을 봐서라도 가지.. 단, 몇 가지 조건이 있다. 만일 이 조건들 중 한 가지만 지켜지지 않아도 난 바로 사임하겠다.”


그러자 엔터프라이즈와 뉴저지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졌다. 


“그.. 그래..! 어떤 조건인가! 뭐든지 들어주겠다..!”


지휘관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첫째. 슈페, 도이칠란트도 함께 간다. 그리고 비서함은 오직 슈페와 도이칠란트로만 한다.”


“읏.. 그.. 그건..”


“왜? 싫나?”


“아.. 아니야..”


뉴저지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리고 둘째, 로열 메이드대의 접근은 엄금한다. 내 가사 및 보급은 내가 따로 손을 쓴다. 작전 관련 이외에 메이드들의 출입 및 접근은 엄금하겠다.”


당연한 말이었다. 로열 메이드대의 메이드들이 돌아가며 지휘관에게 한 고문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래..! 그건 내가 로열 측에 전달해두도록 하지..!”


엔터프라이즈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저 내용은 자신들 유니온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 내가 뭘 하든 간섭하거나 거들지 마라.”


“응.. 반드시 전달할께..!”


“그리고 마지막.. 너무 당연한 말이겠지만 미리 못박아두도록 하지. 그 누구와도 서약은 없다.”


“!!!”


엔터프라이즈, 그리고 뉴저지 마저 큰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로 지휘관을 쳐다보았다. 애초에 지휘관을 되돌려 놓는 목적 중 최종장은 지휘관에게 진정으로 용서받고 서약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휘관은 애초에 그 섬의 그 누구와도 서약을 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을 망가뜨린 이와 결혼하고 싶어하는 이는 없다시피 할 테니 말이다.


“하.. 하지만..!”


뉴저지는 거의 울 것같은 표정으로 지휘관에게 항변하려했다. 하지만 지휘관은 그런 뉴저지를 완벽하게 무시하였다.


“왜, 싫나? 싫으면 언제든 말해라. 난 거기에 가든 안가든 크게 상관없다.”


엔터프라이즈 역시 뭔가 크게 낭패를 본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었다. 서약을 포기하고 지휘관을 되돌려 놓을 것인가, 아니면 그냥 모든 걸 포기하는가. 


“… 아니다.. 알겠다. 전 진영에 전해두도록 하지..”


“좋아. 그럼 그렇게 된걸로 알고 있겠다. 아, 그리고 너희들.”


“으.. 으응..?”


“일 다봤으면 꺼져. 꼴도 보기 싫으니까.”


지휘관은 그 말을 끝으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엔터프라이즈와 뉴저지는 지휘관이 닫고 나간 문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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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오늘은 쉴려고 했는데 꼭 그렇게 마음 먹으면 아이디어가 존나 잘나오농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