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녀가 있었어

소녀는 부유한 집안에 다정한 부모님, 아름다운 외모까지 뭐 하나 부족한 게 없었지


다만 한가지, 소녀에게는 심한 불면증이 있었어

잠을 제대로 못 자니 늘 피곤하고 신경이 곤두서있었지

소녀는 그런 까칠한 태도 때문에 친구 하나도 제대로 사귈 수 없었어

불면증이 심해서 잠을 며칠 동안 못 자는 경우에는 수면제를 먹어야만 겨우 잠에 들 수 있었지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방에서 정원을 구경하던 소녀에게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어

그 아름다운 노래를 들으며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잠에 들었지

오랜만에 마음 편히 푹 자고 일어난 소녀는 하녀에게 어제 정원에서 노래를 부르던 게 누구인지 물어봤어

“어머, 아가씨. 이렇게 푹 주무신 건 오랜만이시네요.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아, 혹시 어제 정원에서 누가 노래 부르지 않았어?”

“어제 정원에서요..? 아! 며칠 전에 새로 일하러 들어온 남자애가 있는데 걔가 부른 거 같네요.

  혹시 그 소리가 시끄러웠나요? 제가 그 애를 따끔하게 혼내서 그러지 않도록 할게요!”

“아냐아냐. 그 노래, 좋았어… 오히려 그 노래를 들었더니 잠이 잘 온 거 같았어”

“어머, 그랬나요? 그거 참 다행이네요. 그 아이 노래 부르는 게 취미인 거 같았거든요”

 

그 말을 들은 소녀는 소년을 찾아갔어

“혹시 어제 정원에서 노래 부르던 게 너야?”

“네, 아가씨. 혹시... 제 노래가 듣기 안 좋으셨나요? 그렇다면 정말 죄송해요...”

“아니, 네 노래… 듣기 좋았어. 그래서 너한테 부탁하러 온 거야. 앞으로 내가 자기 전에 내 방에 와서 노래를 불러 줄래?”

“정말인가요, 아가씨? 그래도 된다면 저야 영광이죠! 누군가 제 노래를 듣고 좋아해주는 게 저한테는 가장 기쁜 일이에요!”

그 후로 소년은 매일 밤 소녀의 방에 찾아와 노래를 불러 주었고, 소녀는 소년의 노래를 들으며 잠에 들었지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면서 소녀는 자기 전에 소년에게 노래만 듣는 게 하는 게 아니라, 같이 이야기도 나누다가 잠들곤 했어

“너는 꿈이 뭐야?”

“저는 나중에 언젠가 유명한 가수가 되고 싶어요. 유명한 가수가 돼서 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해 보고 싶어요”

“그 때가 되면, 제일 앞자리는 내 자리로 예약이야”

“물론이죠. 제 가장 앞자리는 언제나 아가씨의 자리인 걸요”

소년은 소녀와 이야기 할 때면 소녀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고, 

그렇게 소년과 이야기를 나눈 날이면 소녀는 소년이 노래를 불러주기도 전에 따뜻한 소년의 손을 꽉 쥐고 잠에 들곤 했지

지금까지 제대로 된 친구 한번 사귀어 본 적 없던 소녀에게 소년은 첫 친구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소녀는 소년에게 우정을 넘어서 이성으로서 호감을 느끼게 되었어

 



소년의 노래 덕에 불면증이 없어진 소녀는 성격도 밝아졌어

그 덕에 소녀는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사귈 수 있었지

다만, 불행히도 그 중에는 질 나쁜 친구들도 있었어

그걸 알게 된 소년은 소녀에게 그런 친구들과는 어울리지 말라고 충고 했지

“아가씨, 요새 같이 다니는 친구분들에 관해 드릴 이야기가 있어요”

“뭔데?”

“그 친구분들에 대해 좋지 못한 소문을 들었어요…

  자신보다 낮은 사람들은 하찮게 여기고 폭력도 마구 휘두른다는 이야기였어요…”

“아니, 걔들이 겉 보기에 거칠어 보이기는 해도, 알고 보면 좋은 애들이라니까?”

“저도 그렇게 믿고 싶지만, 그런 이야기가 들려오는 게 한 두 번이 아니라…”

“그만해. 지금 겨우 그런 소문 때문에 나보고 친구들을 만나지 말라는 거야? 나는 너 아니면 친구도 만들면 안돼?

  나한테 너 말고도 다른 친구들이 생겨서 질투하나 본데,

  더 이상 내 친구들의 험담을 한다면, 네 말이라도 더는 듣지 않겠어”

“아가씨…”

“그만 하라고 했지! ...나는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서 나갔다 올게”

그렇게 말하고 소녀는 친구들을 만나러 갔어

 

“야,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왜 그래?”

“괜찮아, 별 거 아니야”

“에이, 별 거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무슨 일인지 말해봐”

“아니, 내가 전에 말한 우리 집에서 일하는 애가 말이야…”

“아, 그 하인 놈? 걔가 왜?”

“그 애가 자꾸 너희들이랑 만나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잖아… 너희 만나러 간다고 할 때마다 그러니까 귀찮아 죽겠어”

“이야, 하인 주제에 건방지네… 내가 그 녀석 잔소리 못하게 해줄까?”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아주 잘~ 먹히는 거 하나 알고 있지”

“아, 나 조금 있다가 다른 애들이랑 상점가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까먹고 있었네. 그럼 그건 부탁할게. 다음에 또 보자!”

소녀는 별 생각 없이 그렇게 해달라고 하고 또 다른 친구들과 쇼핑을 하러 상점가에 갔지

 


 

그 시각, 소녀의 친구들은 소녀가 부른다며 소년을 뒷골목으로 불러냈어

“저… 아가씨는 어디 계시죠? 아가씨가 저를 찾는다고 들었는데요..?”

“아, 걔는 지금 여기 없어. 대신에 걔가 우리한테 부탁한 게 있어서 말이야. 킥킥. 얘들아, 이놈 팔 잡고 입 벌리게 해”

“이게 무슨..! 이, 이거 놔 주세요!”

소녀의 친구들은 소녀의 부탁이라며 소년의 혀를 잘라내 버렸지

“어딜 건방지게 하인 주제에 주인님한테 이래라 저래라 야. 이런 건방진 혓바닥은 잘라 버려야지.

  그래도 죽으면 안되니까… 얘들아, 자른 곳 불로 잘 지져줘라~”

 

그렇게 소년은 그토록 좋아하던 노래를 다시는 할 수 없게 되었어 

 



아무것도 모르고 집에 돌아온 소녀는 밤이 되자 잠자리에 누워 여느 때처럼 소년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소년은 소녀의 방에 오지 않았어

지금까지 하루도 이런 일이 없었기에 소녀는 소년이 어딘가 아픈가 걱정이 되어서 소년의 방에 찾아갔지

소년은 자신의 방에서 웅크리고 앉아있었어

소녀는 그런 소년의 모습을 보자 어디 아픈 건 아니구나 하고 안심이 되는 한편,

밤이 되었는데 소년이 자신의 방에 오지도 않고 자신이 왔는데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게 괘씸하게 느껴졌지

“뭐야. 너, 아까 내가 나갈 때 네 말 안 들었다고 삐진 거야?"

소녀는 소년에게 오늘 자신의 친구들 때문에 뭐라고 해서 그런 거냐고 물었지만, 소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어

소년이 자신에게 화나서 자신과 말도 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라는 생각이 들자, 소녀도 화가 났지

“야, 너. 하인이면 하인답게 행동해. 네 일은 밤에 내가 잘 수 있게 노래 불러주는 거야.

  나한테 노래 못 불러 주겠으면 우리 집에서 당장 나가. 그런 하인은 필요 없으니까”

소녀는 소년에게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어

소년은 소녀의 그 말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지

 



밤새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며 울던 소년은 얼마 안 되는 자신의 짐을 챙겨 소녀의 집에서 나왔어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힘겹게 옮기던 소년의 눈에 머나먼 다른 마을로 향하는 마차가 눈에 띄었고, 

소년은 한참의 고민 끝에 그 마차에 몸을 실었지





 

방으로 돌아간 소녀는 억지로 잠을 자려고 했지만 역시나 소년의 노래 없이는 잠에 들 수 없었어

결국 뜬 눈으로 밤을 지샌 소녀는 어제 자신이 소년에게 너무 심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소년에게 사과하기 위해 다시 소년의 방을 찾아갔지


그러나 그 방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어

당황한 소녀는 집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소년을 찾았지만, 

그때 소년은 이미 마차를 타고 다른 마을로 가고 있는 중 이였지

다른 하인들과 하녀들을 모두 불러 온 마을을 다 찾아봐도 소년을 찾을 수는 없었어

 

그 때, 혼란스러워 하는 소녀의 앞에 소녀의 친구들이 나타났지

“야, 어때? 그 놈 이제는 조용~하지?”

“너… 너, 그 애한테 뭘 한 거야?”

“잔소리 하는 게 시끄럽다고 했잖아? 그래서 다시는 그 건방진 입 나불대지 못하게 해줬지”

“그게... 무슨 소리야..? 걔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러니까, 니 부탁대로 그 놈 혀를 뽑아줬다고”

 

그 말을 들은 소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어

“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어떻게 그런…”

한동안 얼이 빠진 듯, 멍하니 있던 소녀는 잠시 후, 친구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지

“내가 언제 그렇게 해달라고 했어! 돌려내! 그 아이를 돌려달라고!”

친구는 자신의 멱살을 잡은 소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어

“아이 씨, 겨우 하인 하나 가지고 왜 이래? 일 못하게 팔다리를 자른 것도 아니고”

“뭐라고?! 너... 너! 당장 꺼져! 다시는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마!”

“참나, 얼굴은 반반해도 성격이 더러워서 친구가 없었다는 말이 진짜였구나. 그래, 나도 이제 너 같은 건 필요 없어”

친구는 그렇게 말하고는 떠나갔고, 

소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눈물을 흘리며 허공을 향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미안해… 그러니까 제발 돌아와줘… 노래를 못 불러도 괜찮으니까… 내 옆에 있어줘…”

라며 중얼거릴 뿐이였지

 




 

마차를 타고 다른 마을에 도착한 소년은 갈 곳 없이 멍하니 마을만 쳐다보고 있었어

그러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지

소년이 음악 소리를 따라가서 도착한 마을의 광장에서는 한 아름다운 여자가 처음 보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고, 

그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둘러 앉아서 여자의 연주가 한 곡 한 곡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치며 노래를 듣고 있었어

그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소리에 소년도 그 여자를 넋을 잃은 듯 멍하니 바라봤지

마침내 마지막 곡이 끝나고, 사람들은 여자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며 여자 앞에 있던 가방에 돈을 넣고 천천히 흩어져갔어


소년은 사람들이 다 흩어지고 나서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저 그 여자를 바라만 보고 있었지

그러고 있는 소년을 발견한 여자는 그런 소년이 귀여웠는지 소년에게 말을 걸었어

“뭐야? 너도 나한테 반한거야? 후후”


그러나 소년이 아무 반응도 없자, 그제서야 여자는 소년이 자신이 아닌 악기를 보고 있었다는 걸 알아챘지

여자는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살짝 빨개져서 다시 소년에게 말을 걸었어

“너, 이 악기에 관심 있는 거야? 한 번 만져볼래?”

소년은 그제서야 여자의 말에 반응하듯 고개를 끄덕였지

그리고 여자에게 악기를 건네 받은 소년은 여자가 악기를 다루던 모습을 흉내 내는 듯이 악기를 이리저리 만져봤어

“어, 어... 야! 그거 그렇게 막 누르면 고장…”


그 순간, 악기에서 여자가 연주했던 곡과 비슷한 노래가 악기에서 흘러 나왔어

여자가 연주할 때 보다 조금은 느리고 중간중간 틀리기도 했지만, 

여자가 방금 전에 연주했던 곡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 할 정도는 아니였지

“뭐야, 너 이 악기 연주 할 줄 알고 있었어?”

소년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지

여자는 놀란 표정으로 다시 소년에게 물었어

“거짓말 하지마! 이 악기를 처음 다뤄보는데 내 노래를 따라 연주했다고?! 그것도 단 한 번 들어보고?”

소년은 또다시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지


“너… 보아하니 어디 갈 곳도 없어 보이는데, 나를 따라오지 않을래? 내가 악기 연주하는 법 알려줄게”

소년은 여자의 갑작스런 제안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어

“나를 따라오면 밥도 주고, 잠 잘 곳도 마련해줄게! 대신에… 집안일은 네가 하는 거다”

소년이 그 말을 듣고도 고민하는 것 같자, 여자는 급히 다시 제안했지

“아니, 그, 집안일 너 혼자 다 해야 한다는 건 아니고… 나, 나도 좀 도와줄게!

  음... 그리고... 아! 나랑 같이 연주하면 연주 하고 받은 돈도 나눠줄게!”

소년은 왠지 초조해 보이는 여자의 모습에서 자신이 좋아했던 한 소녀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어

소년은 쓴 웃음을 지으며 여자에게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지

그렇게 소년은 그 여자의 손을 잡고 여자를 따라갔어






소년이 마을에서 사라지고 며칠이 지났어

소년이 사라진 후로 소녀는 또 다시 잠에 들 수 없었지

소년을 만나고 나서는 먹을 일이 없었던 수면제를 다시 먹기 시작했는데도 소녀는 잠에 들 수가 없었어

눈을 감으면 그날 마지막으로 봤던 웅크리고 앉아있던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지

수면제를 먹고 침대에 누우면, 자신은 너 때문에 혀가 뽑혀서 꿈도 잃어버렸는데 

너는 잠이 오냐는 소년의 비난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어

잠을 자지 못하니 소녀는 성격도 다시 까칠해졌고, 소녀의 그런 성격과 짜증을 받아주는 친구들은 없었지

소녀는 다시 외톨이가 되고 말았어

 

그날도 소녀는 잠에 들기 위해 침대에 누워 수면제를 한 알 먹어보았지만, 소녀는 역시나 잠에 들 수 없었지

소녀는 적정량이 한 알인 수면제를 한 알 더 입에 넣었어

그래도 잠이 오지 않자, 소녀는 한 알, 또 한 알 계속 해서 수면제를 먹다가 

결국 수면제를 한 손 가득 입에 털어 넣고 삼켰지



잠시 후, 소녀의 방 문이 열리고 소년이 들어왔어

“아가씨… 저… 돌아왔어요…”

“이 바보야..! 나만 두고 어디 갔던 거야…”

“제가 바보같이 그 날 화를 참지 못하고 아가씨를 버려두고 떠났었어요…”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내가 얼마나 널 보고 싶어했는지 알아?”

“죄송해요… 저도 아가씨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어요”

“다시는 내 옆에서 떨어지면 안돼”

“앞으로는 쭉 아가씨 옆에만 있을 거라 약속할게요”

그렇게 말하고 소년은 소녀를 꼬옥 안아주었지

“나, 네 노래도 너무 듣고 싶었어. 노래… 다시 불러 줄 거지?”

“물론이죠. 자, 침대에 누우세요. 언제나처럼 아가씨가 주무실 수 있게 제가 노래 불러 드릴게요”

소년은 소녀의 손을 꼭 붙잡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


그렇게 소녀는 소년의 노래를 들으며 행복한 표정으로 다시는 깨지 못할 깊고 깊은 잠에 들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