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오랫동안 쌓여왔던 울분을 토해낸 지 하루가 지났다.


눈물을 어찌나 많이 흘렸는지 자고 일어나니, 앞이 제대로 안 보일 정도로 눈이 부어 있었다.


이런 엉망진창인 얼굴에 붓기라도 빼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아니, 향하려고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발걸음이 무거웠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침실 문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을 때 망설임이 느껴졌다.


이제 밖으로 나간다면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났냐며 다시 마법사에게 추궁을 들을 것이고, 일어날 때부터 느꼈는데 오늘은 컨디션이 최악이다. 그렇다면 오늘 마왕 간부 소탕을 위해 훈련을 해야 하는데 제대로 훈련에 임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또 다시 여기사에게 추궁을 받을 것이 뻔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여기서 맥 없이 박혀 있을 수는 없다.


결국 되기 싫었다고 하지만, 나는 용사이고, 그녀들과 나라, 백성들이 오직 나만을 보고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문고리에 올렸던 손에 힘을 넣자는 결심을 했다. 그렇게 나는 오늘의 지옥이 시작되는 그곳으로 스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


5년 전 일이다.


오랫동안 짝사랑 해왔던 평범하고 청순한 그녀에게 그동안 모았던 돈으로 산 반지를 내밀며 나의 연인이 되어 달라고 하는 지극히 평범하디 평범한 시골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 평범한 일상도 갑옷을 입은 왕국의 기사들이 마을을 찾아왔을 때 산산조각 나듯이 무너져 내렸다.


여태까지 몰랐는데 나는 천사와 악마와 혼혈로, 천사의 힘을 쓸 수 있으면서도 악마의 독기에 내성마저 가지고 있는 유일하게 마왕성에서 나오지 않는 마왕을 소탕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거부했다. 싸우기 싫었다. 그냥 차라리 조용히 내가 고백한 그녀와 여생을 살다가 죽고 싶었다. 마왕군에게 대륙이 점령을 당하든 전쟁에서 승리하든 나에겐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거부를 아무렇지 않게 무시한 채 나를 납치하듯 감옥같은 왕국 기사단의 훈련장으로 끌어갔고, 그곳에 발을 내딛은 그 날 부터 나의 지옥은 시작되었다.


한나절을 쉴 새도 없이 검은 휘둘러 손바닥이 다 까졌으며, 조금이라도 자세가 어긋나면 교관에게 맞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몇 번이고 항의했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세계를 지킬 용사는 완벽해야 한다"라는 말과 함께 돌아오는 것은 더욱 혹독해진 훈련이었다.


그렇게 혹독한 훈련이 끝난 뒤 제대로 걸을 힘도 없는 상태로 꾀죄죄한 숙소로 돌아가 잠을 청하면 하루 일과가 끝이 났다.


그렇게 훈련을 받은 지 2년이 지났을 때였다. 갑자기 오로지 용사인 나의 파티원이 되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훈련을 받았다는 여기사 케이지와 10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 마법사 세실리, 활 쏘는 거라면 그 누구라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실력을 가진 엘프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궁수 체이스가 내 앞에 나타났다.


처음 그녀들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은 기쁨이었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용사로서의 존경과 그녀들의 친절하고 따스한 손길이 2년 동안의 내 가슴 깊은 곳에 박혀 있던 피폐해진 내 감정을 치료해주었기에 그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천사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과 유일하게 마왕성에 들어갈 수 있다는 장점을 제외한다면 그 어떤 재능도 없었기에 언제나 교관에게 일방적으로 구타를 맞고 돌아갔을 때도 친절하게 내 상처 부위를 소독해주며 그 날 동안 쌓였던 감정을 웃으며 받아주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용사로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녀들의 응원과 따스함 덕분에 훈련을 받은 지 3년이 지나자, 드디어 마왕군 소탕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엔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매꿔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형성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하는 강해지는 마왕군 때문에 점점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고, 그 스트레스 분산의 표적은 파티의 가장 큰 구멍인 내게로 향했다.


하지만, 가슴이 조금 아플 뿐 견뎌 낼 수 있었다.


그만큼 그녀들을 좋아했으니까. 2년동안 박혀왔던 대못들을 빼낼 수 있게 도와줬으니까. 견뎌 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도 결국엔 사람이었던지. 그녀들에게 향하는 서러운 감정과 혼혈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용사가 돼야 하는 의문들이 어제 터져 나왔다.


잠시 동안 이렇게 울분을 터뜨린게 후회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그냥 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