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화가를 꿈꾸는 지망생들의 집,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

꿈은 크되 주머니 속 잔돈은 작은 이들이 잠깐 머물다 떠나는 동네.

그리고 수와 존시라는 젊은 여인과 베어먼이라는 젊은 남성의 거주지기도 하다.


위 셋은 모두 역사에 길이 남을 화가가 되길 바란다.

르네상스 삼인방이나 렘브란트, 밀레 같은 화가가.

만약, 저 정도의 화가가 되지 못한다면 나름의 걸작을 남기기라도 바랐다.

그러나 저들은 각자가 가진 재능의 한계를 알고 있기에 지금에 와선.


"입에 풀칠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이 그림이 딱딱한 빵 만큼의 가치라도 있기를."


"굶어도 좋으니까 재료비라도 나올 수 있다면..."


붓을 잡고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릴 때면 이런 말을 내뱉는 습관이 생겼다.


또한 그들은 가난한데 몸조차 약했다.

어쩌면, 가난하니까 몸이 약한 것일지도 모른다.

돈이 있어야 음식을 먹어 살을 찌우고 땔감을 사서 난로를 땔 테니까.


월세부터 식비, 재료비까지 걱정해야 하는 세 명에게 그것은 너무나 버거운 목표만 같았다.

오죽하면 세 명 중 가장 활기찬 수조차 돈 걱정을 할 때는 한숨을 쉬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수와 존시가 공모전에 응모한 그림이 당선되는 일이 있었다.

둘이 그린 그림은 무명일지라도 어엿한 화랑에 전시되었고 상금도 받게 됐다.


아쉽게도 베어먼은 공모전에 떨어졌지만 그래도 셋은 좋아했다.

당선된 둘은 이름을 알릴 기회와 화가 지망생 생활을 연명할 돈을 얻게 됐기 때문이고.

떨어진 베어먼은 순수한 선의로서 둘의 당선을 축하했기 때문이다.


간만에 돈이 생긴 둘은 나름 조촐하게나마 술과 음식을 사서 베어먼과 함께 축하 파티를 열었다.

어둑어둑한 밤, 술이 담긴 유리 잔 세 개가 서로 맞부딪쳐 쨍그랑 소리를 냈으며.

싸구려 자기 그릇에 올라간 음식들이 나이프와 포크에 쓱싹쓱싹 썰리고.

조용하던 방에 오랜만에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슬슬, 배도 부르고 전신에 취기가 도니 자연스레 정신도 풀리기 마련.

입도 정신이 풀린 틈을 타 덩달아 멋대로 움직였다.


"수, 존시."


"왜?"


"어?"


"이번에 공모전 당선된 거 말이야, 어떻게 그렸길래 당선된 거 같아?"


"음... 잘 그려서 아닐까?"


"피이, 존시, 그거야 당연한 거지. 못 그렸으면 당선이 됐겠어? 그리고 어떻게 해서 당선됐냐고? 내 생각에는...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너도 알다시피 그 공모전은 우리 모두가 당선되려고 서로에게 팁이나 조언을 해줬잖아? 그 덕분에 나나 존시나 실제로 당선이 됐지만 정작 가장 많이 도움을 준 네가 당선이 안 된 걸 보면 모를 수밖에."


"그거야 그렇지마는..."


"에이. 너무 신경 쓰지 마. 우리도 이번에야 어쩌다가 당선된 거니까. 너도 다음 공모전에 응모하면 분명 당선될 수 있을 거야."


"말이라도 고마워, 수."


"그래. 너도 보니까 무척 잘 그렸던데? 다음 기회가 있겠지."


"고마워 존시. 다음 공모전에는 내가 당선돼서 한 턱 낼게."


당선되지 못한 남자의 푸념과 그를 위로하는 두 여인.

파티의 분위기는 그렇게 무르익어갔다.


이후로도 공모전은 몇 번이나 열렸다.

그때마다 셋은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렸다.

이번에는 꼭 당선되겠다는 마음가짐과 함께.


물론, 항상 당선될 수는 없으므로 어느 때는 수만이.

또 다른 때에는 존시만.

운이 좋을 때는 둘 모두가 당선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오직 베어먼만이 번번이 낙선했다.


"힘내... 베어먼. 이번에도 운이 나빴을 뿐이야..."


"수의 말이 맞아. 다음 공모전에는 꼭 당선될 수 있을 거야. 네 그림 실력이 나쁜 편인 건 아니잖아."


그녀의 말대로나 객관적으로나 베어먼의 그림 실력이 나쁜 편인 건 아니다.

어떤 면으로는 오히려 둘보다 더 나은 점이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베어먼은 이유를 모르겠지만 어쨌든 공모전에서 떨어졌다.


잦은 낙선이 반복될수록 지쳐가는 건 베어먼이어야 하지만 그는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지치는 사람은 수와 존시였다.


점차 그녀들이 미술계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자 그녀들의 눈에 베어먼은 이전과 다르게 보였다.

수에게는 거듭된 시도에도 실패만 하는 안타까운 남자로.

존시에게는 헛된 노력을 반복하는 어리석은 남자로.


둘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이든 말든 베어먼은 꿋꿋이 그림을 그려나갔다.

월세를 낼 돈이 없어 집주인에게 사정사정하더라도 붓은 멈추지 않았고.

식비가 없어서 배를 곯을지라도 물감 튜브 속까지 비지는 않았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잡다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벽화를 그리는 일이나 길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려주고 약간의 돈을 받는 등 그림과 관련된 일거리면 오히려 좋아했고,

식당에서 설거지나 서빙을 하는 등 그림과 관련이 없는 일도 돈을 벌 수만 있다면 만족했다.


그렇게 번 돈은 온전히 화가 지망생의 삶을 연명하는 데 쓰였다.

식비를 조금 줄이는 한이 있어도 그림 도구를 하나 더 샀고.

땔감을 사서 난로를 지피는 대신 하루라도 더 살고 있는 집에 머무르기 위해 돈을 저축했다.


그런 삶을 사는 동안 자연스럽게 혹은 당연하게도 베어먼의 몸은 망가질 수밖에 없었다.

식비를 줄인 나머지 그는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지 못해 몸이 약해졌고.

땔감을 살 돈이 없어 난로를 지피지 못한 결과 한 겨울을 고작 헌 옷과 이불 몇 장에 의존해야 했다.


윗집에 사는 수와 존시, 그녀들은 베어먼을 보고도 돕지 않았다.

여기에는 그녀들 나름의 까닭이 있었다.


수는 그를 돕지 않는다면 그가 제 풀에 지쳐 금방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가 고생하는 걸 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밤 늦게 들어오는 걸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기껏 밤 늦게 들어와도 촛불을 키고 그림을 그리는 것까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제 그만 고생하라고, 그건 노력이 아닌 아집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자신과 존시가 돕지 않는다 한들, 일이 고되고 공모전에 번번이 낙선한다 한들 그는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그저 멀찍이서 그가 조금이라도 일찍 포기하고 돌아가길 빌었다.


반면에 존시의 경우는 수와 달랐다.

그녀는 베어만에게 조금의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공모전에 여러 번 당선된 그녀와 단 한 번도 당선되지 못한 베어먼.

그녀와 그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곤 그것 밖에 없었으나 그것 만으로도 존시는 베어먼에게 우월감을 가졌다.


"베어먼, 이제 그림 그리는 거 그만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이쯤 되면 너도 잘 알 거 아냐. 너에겐 재능이 없다는 걸."


"아니, 대체 왜 포기하지 않는 거야? 어째서? 지치지도 않아? 그 정도 했으면 단념할 줄도 알아야지."


"...솔직히 말하면, 너 꼴사나워 보여. 그렇잖아? 어차피 해도 안될 거 왜 계속 시도하는 건데? 사람이 말이야, 단념하는 법도 알아야지."


수가 잠에 들 무렵에도 묵묵히 그림을 그리는 베어먼의 뒤에 서서 존시는 그리 힐난했다.

분명, 남의 노력을 비웃는 말일테지만 베어먼은 별 말이 없었다.

존시가 무슨 말을 해도 베어먼은 침묵으로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베어먼이 붓을 놓고 캔버스 앞에 놓인 의자에서 일어난 건 제 풀에 지친 존시가 떠나고도 좀 더 지나서였다.

피로에 절은 머리의 관자놀이 부근을 엄지와 검지로 주무르며 일어난 순간 그는 기침을 했다.


"쿨럭... 쿨럭."


그는 요즘 들어 자신의 몸이 이상하단 걸 느끼고 있었지만 그걸 절실히 깨달은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흉부에서 느껴지는 고통, 일어나면서 머리를 만졌을 때 느낀 이마의 발열.

그리고 기침까지.

이 모든 게 자신이 정상이 아님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전과 같이 아침 일찍 일어나 일을 나가서 밤 늦게 돌아오고,

돌아와서는 그림을 그리다가 새벽녘에 잠에 들어서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걸 반복하는 것 뿐.

이 패턴 어디에도 베어먼이 의사를 찾는다는 갈림길은 없었다.


왜냐하면, 애석하게도 그의 고용주들은 하나같이 그가 의사를 찾아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병약한 그를 계속 고용하느니 차라리 그를 해고하고 다른 사람을 고용하는 게 더 이득이었다.

하여, 베어먼은 끝내 의사를 찾아가지 못했다. 

빈 주머니를 털어서 산 약만으로 증상이 가라앉기를 바랄 뿐, 다른 방도는 없었다.


"쿨럭... 컥... 헉..."


"뭐야? 베어만. 이제는 병까지 앓고 다니는 거야? 나 같으면 여기서 앓고 살 바엔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가서 요양이나 하겠어."


"말을 왜 그렇게 해, 존시! 괜찮아, 베어먼? 어디 아픈 데라도 있는 거야?"


"나는... 쿨럭... 걱정하지 마. 감기를 좀 독하게 걸린 것 뿐이니까. 약을 샀으니까 먹고 좀 쉬면 금방 나을... 컥... 거야..."


베어먼은 그렇게 말했으나 이 셋 중 아무도 베어먼이 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또다시 일터로 나갈 테니까.


수는 그런 그를 보고는 입술을 안절부절 움직이다가 이내 결심했다.


"베어먼, 이제 그림 그만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밀린 월세는 내가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잘 말씀드릴 테니까."


"...됐어. 걱정하지 말래도. 내가 하루 이틀 이러는 것도 아니잖아."


"수 말이 맞아. 베어먼, 네 몸을 좀 봐! 그 몸으로 어떻게 그림이나 그릴 수 있겠어? 게다가 너는 우리가 몇 번이나 당선된 공모전에 단 한 번도 당선되지 못했잖아. 내가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너는 재능이 없어! 재능이 없으니까 여태껏 길거리에서 초상화나 그리는 거지. 안 그래?"


"...그래서 뭐 어쩌라고. 재능이 없으면 그림 그리면 안 돼? 그림은 뭐 재능이 있어야만 그릴 수 있는 거야? 그래, 니네 시선으론 내가 포기할 줄 모르는 멍청이로 보일지도 모르지. 근데, 잘 알아둬라. 내가 이 고생을 하고도 그림을 그리는 까닭은 오로지 그림 그리는 게 좋기 때문이다. 안 그랬으면 진작에 고향으로 돌아가든 했겠지. 그러니 더는 간섭하지 마라."


그 이후로 존시와 베어먼은 서로를 못 본 것처럼 대했다.

이 일이 있기 전에는 우연히 마주치면 짧은 인사라도 나눴건 만, 지금에 이르러선 없는 사람인 것 마냥 무시하고 지나쳤다.

오로지 수 만이 베어먼을 볼 때마다 우물쭈물하다 말을 더듬으며 작은 손짓과 함께 인사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끝내 베어먼이 약 없이는 살지 못할 때, 동네에 폭풍우가 들이닥쳤다.

폭풍우는 세찬 비를 동네 전체에 뿌리고 다녔고 셋이서 사는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탁 타닥 빗방울이 거세게 부서지는 창문을 침대에 누운 존시가 바라보고 있었다.


"존시. 약 먹을 시간이야."


"...수."


"기운을 차려야 약을 먹어도 효험이 돌지. 어서 일어나."


지금, 존시는 폐렴에 걸린 상태였다.

그녀가 폐렴에 걸린 원인은 과거의 두 가지 요인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하나는 그녀의 수입원이 씨가 말랐기 때문이다.


요즘 진행 중인 공모전이 그다지 별로 없기 때문인지 수나 존시나 최근 들어 수입이 없었다.

저축한 돈은 떨어져만 가는데 수입은 없으니 둘은 애가 탔고 결국 존시도 베어먼처럼 일거리를 찾았다.

따라서 존시 역시 베어먼과 마찬가지로 몸을 혹사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는 곧 몸이 약해진다는 뜻이었다.


나머지 하나로는 동네에 들이닥친 악천후가 원인이었다.

여전히 창문을 두드리는 빗줄기에서 알듯이 동네에 폭풍이 덮쳐왔다.

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존시는 그 폭풍을 직격으로 맞았고 그런 나머지 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약해진 몸에 설상가상으로 독감까지 겹치니 합병증이 생기고 말았고 독감은 폐렴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그래서 존시는 지금 침대에 누워 꼬박 앓고 있었다.


"쿨럭... 하악... 됐어. 약을 먹어봤자 일 거야. 정말로 약에 효험이 있었으면 진작 침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지. 아... 젠장, 왜 갑자기 베어먼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네. 걔도 나처럼 만만찮은 병을 앓고 있을 텐데 그 몸으로 일을 다니는 걸 보면 노력 하나는 인정해야겠네."


"맞아, 베어먼은 무척 대단한 사람이야. 삶이 부단할 테지만 끈질기게 그림을 그리려는 의지를 계속 표출하는 것 만으로도 그래. 만약 나였으면 벌써 고향으로 내려갔겠지. 하지만 베어먼은 단순히 그림 그리는 게 좋다는 이유 만으로 이 동네에 머무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잖아? 그런 점 만큼은 배울 가치가 있지."


"하아... 하하... 이 병이 낫는다면 베어먼에게 사과라도 해야겠네. 노력을 몰라줘서 미안했다고 그렇게 말이야."


"그러려면 우선 약부터 먹어야겠지, 존시?"


수는 존시에게 웃으며 약과 물컵을 건네줬다.


"어디서 약을 살 돈이 났다고... 요즘 우리 모두 공모전으로 번 돈이 거의 떨어져서 빈털털이 신세잖아."


"아껴둔 돈이랑 베어먼에게 빌린 돈으로 부른 거야."


"베어먼이 빌려줬다고?"


"내가 사정사정하니까 잠깐 고민하더니 빌려주더라고. 나중에 베어먼에게 사과할 때 그것도 고맙다고 해."


"하아... 정말이지... 제 몸 걱정이나 할 것이지."


그리 투덜대면서도 존시는 고마움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보다 약간 더 길어진 입꼬리나 누그러진 말의 높낮이 등.

여러가지 단서가 존시의 기분이 좋아졌음을 가리켰다.


한창 둘이서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순간,


쾅쾅쾅! 쾅쾅!


누군가가 거칠게 문을 두드렸다.


"쉬고 있어, 나는 누가 왔는지 보러 갈 테니까."


수는 존시에게 그리 말하고 1층으로 내려가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낯선 사람과 눈을 감은 채로 그의 어깨에 의지하고 있는 베어먼이 있었다.

그는 전신이 몸에 젖은 채로 있었는데 특히 앞섶이 흙탕물에 젖은 것처럼 거뭇거뭇했다.


"베...베어먼? 이게 대체..."


"어서 이 사람을 눕힐 침대로 안내하시오! 지금 당장!"


낯선 사람의 노호성에 수는 즉각 베어먼의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베어먼은 곧 자신의 방에 있는 침대에 눕혀졌다.


"그가 왜 그런 건가요?"


"저도 모릅니다. 대문 앞에 쓰러져 있길래 일단 이 집으로 데리고 왔는데, 다행히 그의 집인가 보군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방이 정말로 춥군요. 그는 왜 난로를 틀지 않는 건가요? 아직 한겨울은 아니지만 트는 편이 건강에 좋을 텐데요."


"돈이 없어서 그래요. 가난한 화가 지망생이라 땔감을 사는 대신 월세나 식비, 재료비에 충당하거든요."


"그럼, 아가씨가 좀 도와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저 베어먼이란 남자의 삶을 잘 알 정도면 어느 정도 친분은 있었을 텐데, 알고서도 방관하신 겁니까?"


"이건 다 그를 위해서였어요. 그의 어려운 처지를 애써 무시한다면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거라고요. 그러면 더 이상 그림을 그리느라 건강을 망칠 일은 없을 거라고 애써... 생각하며..."


"그래서 사람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방관했습니까? 그 덕분에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기는커녕 침대 위에서 앓고 있지 않습니까? 차라리 제 처지가 어려워서 미처 돕지 못했다고 하는 게 더 그럴싸했을 겁니다."


"저도... 저도... 그가 싫어서 방관한 건 아닌걸요. 단지, 그가 너무 불쌍해서 그랬어요... 일과 작업을 반복하느라 점점 야위어가는 그의 모습을 시시각각 봐야만 했다고요."


수는 말을 하다 말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물을 본 낯선 남자는 당황하더니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사과했다.


"후우... 그래요. 제가 말을 좀 험하게 했군요. 그건 사과드리지요. 어쨌거나 지금 베어먼이란 남자는 누가 봐도 안정과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니 곁에서 그를 돌봐주십시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바깥으로 외출해선 안됩니다. 지금 비도 억세게 쏟아지고 있으니까요. 이 상태에 비까지 맞는다면 정말로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낯선 남자의 신신당부에 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수의 간호 끝에 베어먼이 깨어난 건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으으... 여긴...?"


"어? 베어먼! 일어났구나!"


"수? 네가 왜 내 방에 있어?"


"너 집에 오는 길에 쓰러졌었어. 마침 어떤 행인 분이 널 집까지 부축해가지고 데려와서 망정이지 너 까딱했다간 정말 죽을뻔했어. 그리고 나는 네가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간호했고."


"고마워, 수. 그나저나 오늘이 며칠이야? 일을 나가야 하는데 늦은 건 아닐지 모르겠네."


"네가 쓰러진 날로부터 사흘이 지났어. 아마도 진작 다른 사람을 고용했겠지. 그냥 너는 푹 쉬어. 그리고 존시가 돈 빌려준 거 무척이나 고맙대."


"수."


"어? 왜? 어디 아파? 의사 선생님이라도 불러올까?"


"어차피 돈도 없는데, 무슨 의사 선생님이야. 그냥... 고향으로 돌아갈까 해. 아쉽지만 나는 여기까지인 거겠지."


"...그래. 잘 생각했어. 그림보다는 건강이 우선이지. 그럼 언제 돌아갈려고?"


"몸이 좀 나아지면 그때 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갈려고 해."


베어먼은 자신의 말대로 조금씩 건강을 되찾아 갔다.

하던 일을 그만 두고 회복에만 전념하니 약해진 몸도 예전보다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회복은 되었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존시는 베어먼과는 반대로 날이 갈수록 쇠약해졌다.


우르릉 쾅!


존시는 침대 옆 창으로 한 줄기 번개가 여러 갈래로 우거지는 걸 보았다.

그녀의 눈은 아래로 가라앉아 담벽에서 자생하는 담쟁이 잎으로 향했다.


위태롭게 팔랑이는 담쟁이 잎들.

그러다가 한 장이 똑하고 바람에 날려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수."


"또 담쟁이 잎을 보는 거야?"


"저 담쟁이... 잎이 얼마 남지 않았더라. 꼭 나같아. 끝없이 야위어서는 지금에서는 붓조차 잡지 못하는 것처럼."


"그런 말 하지 마, 존시. 삶에 의욕이 있어야 건강해지지. 그리고 방금 다녀가신 의사 선생님도 오늘이 고비라고 하셨잖아. 오늘만 버티면 건강해질 거야."


수가 삶에 부정적인 존시를 걱정하거나 말거나 그녀는 푸념을 계속했다.


"바람에 날리는 담쟁이가 꼭 내 처지랑 다를 바 없어. 그저 무력하게 바람에 날려 잎이 다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담쟁이나 침대 위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나나 뭐가 다를까?"


"존시..."


"아, 방금 또 한 장 떨어졌네. 이제 마지막 잎새만 남았어. 수는 저 잎이 언제 떨어질 거 같아? 아마도 오늘 밤이나 새벽 즈음에는 떨어지겠지. 저 담쟁이 잎이 떨어지는 동시에 나도 죽을 거고."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수는 존시를 걱정하다 못해 울기까지 했으나 존시의 주의는 오직 창문 너머 담벽의 담쟁이에만 쏠려 있었다.


"나는 나가 볼게, 존시. 제발 나쁜 생각 하지 말고 푹 쉬어줘. 베어먼이 고향으로 떠나고 너까지 죽으면 나는 혼자가 된단 말이야..."


수는 존시의 방을 나가다가 우연히 베어먼을 만났다.

병세가 가시긴 했지만 아직은 요양이 더 필요한 그를.


"존시는 어때?"


"...좋지 않아. 오늘 밤이 고비지만 긍정적인 생각은커녕 담벽의 담쟁이 잎에만 정신이 쏠려있어. 존시 말로는 저 담쟁이의 잎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잎이 떨어지면 자신도 죽을 거라고 하더라..."


"쯧... 바보같긴..."


"어떡하지 베어먼? 좋은 방법이 있을까? 존시의 방에 있는 창문을 못 보게 검은 물감으로 칠할까? 아니면, 강제로 수면제를 먹여서 담쟁이 잎이 떨어지는 걸 못 보게 할까?"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걱정하지 말고 쉬고 있어. 그 동안 존시를 간호한다고 자도 한잠만 잤으니까."


그리 말하는 베어먼의 눈길은 자신의 물감과 붓에 가있었다.

무엇이 그리 불안했던 걸까, 수는 베어먼의 눈을 보더니 제 옷깃만 만지작거렸다.

지금 밖에선 거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쾅! 우르르릉! 


탁! 타다닥!


존시는 누워서 창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린 채로 있었다.

창문 너머 저 멀리에서는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렸고 바로 앞 창문에선 기다란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빗줄기가 창문에 부딪쳐 투둑 소리를 내며 물방울이 되어 내려가는 모습이나.

번개가 먼저 지면을 향해 고개를 처박고 천둥이 뒤따라 우르릉 소리를 내는 광경은 한 번 즈음 눈길을 보낼만하나 존시는 그러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시선은 하염없이 담쟁이 잎에 꽂혀 있었다.


비를 동반한 바람에 무력하게 흔들리는 담쟁이 잎.

그 많고 많던 담쟁이 덩굴에 달린 잎은 어느새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무력하게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땅에 내린 뿌리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모양새에 존시는 슬퍼했다.


그림도 그리지 못하고 침대에서만 지내야 하는 자신이 저 담쟁이 잎과 다를 바가 뭐가 있는가.

그녀는 이리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거나 하나 남은 이파리가 떨어져 나가는 모습을 예상했다.


자신이 보는 눈 앞에서 바람에 뚝 꺾여 허무하게 땅바닥에 가라앉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이 자는 새에 떨어져 떨어지는 모습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찌 됐건, 그녀의 예상 속에서 이파리는 떨어져나간지 오래였고 의사가 자신의 얼굴에 하얀 천을 덮어주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

이 지상의 생명체는 모두 언젠가 죽게 될 따름이고 존시, 그녀도 자신이 예외는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죽기 싫어... 아직 그리고 싶은 것도 많단 말이야..."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아직 젊은 여인이었고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많았으니까.

그런 그녀에게 죽음이란 때 이른 불청객에 불과하다.


"흐윽... 흑... 흐으윽..."


하염없이 울던 여인은 울음을 반복하였고.

문 밖에서 새는 울음소리를 듣는 베어먼은 그녀가 얼른 잠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하룻밤이 지났다.


언제 폭풍우가 쳤냐고 묻는 듯 하늘은 맑게 갰다.

태양빛은 잠든 존시의 눈가를 하얗게 비춰 기상을 재촉했다.


"음... 으음..."


존시는 눈이 부셔서 더 이상 잠을 청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비비던 그녀는 아차 하더니 가장 먼저 창문 너머 담쟁이를 바라봤다.


멀쩡히 달려있는 담쟁이의 마지막 잎새.

저 잎새도 밤새 앓던 존시와 함께 폭풍우를 버틴 것이다.


이파리가 하나 남고 다 떨어지긴 해서 멀쩡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존시의 눈에는 그 어떤 담쟁이보다 멀쩡해보였다.


벅차오르는 뜨거운 감정에 그녀의 눈은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고 있었지만 입 만큼은 웃고 있었다.


"수! 이리 와봐! 얼른!"


존시의 큰 목소리에 수는 우당탕탕 그녀의 방에 들어왔다.


"저 담쟁이 좀 봐! 잎이 멀쩡하게 붙어있어! 자다가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꿋꿋이 붙어있다니깐?"


"다행이네 존시. 네가 말한 대로 꼭 너랑 닮은 담쟁이 잎이야. 거센 폭풍우를 버틴 걸 보면. 그나저나 어디 아픈 데 없어?"


"아직 머리가 좀 어지럽고 미열이 있긴 한데 어제보단 확실히 나아졌어."


"그럼 베어먼에게 가자. 예전 일을 사과해야지?"


"그래. 네 노력을 알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해야지."


수와 존시, 둘은 베어먼의 방으로 향했다.

닫힌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가 잠든 베어먼의 몸을 흔들어 깨우려니.


"베어먼? 몸이 불덩이같...? 베어먼? 정신 좀 차려봐!"


그는 그저 신음 소리만 내고서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수? 존시? 몸은... 괜찮아?"


"지금 내 걱정을 할 때가 아니야! 일단 약부터... 약 어디 있어?"


존시의 물음에 베어먼은 떨리는 팔을 들어올려 찬장을 가리켰다.


"저...기 찬장에 찾아보면 해열제가 있을 거야..."


존시는 찬장으로 가서 해열제를 찾기 시작했고 베어먼의 곁에는 수가 남아있었다.


"베어먼... 왜 이러는 거야? 어젯밤만 해도 멀쩡했잖아... 어떻게 하룻밤 새에 이렇게 몸이 안 좋아질 수가 있어..."


"그런 일이 있었어, 수. 고향에 돌아가기 전 인생의 걸작을 그리느라..."


"그게... 뭔데...?"


"담쟁이 말이야... 왠지 이상하지 않아? 비가 왔는데도 전혀 젖어있지 않는 걸 보면?"


그제야 수는 담벽의 담쟁이를 봤다.

비가 그쳤더라도 이슬 정도는 이파리 끝에 달려있어야 하지만 이파리는 아무런 수분도 머금고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조금의 미동조차 없는 것 또한 이상한 일이었다.

진짜 담쟁이라면 산들바람에라도 위아래로 흔들릴 텐데.


"너... 설마 그 폭풍우를 맞으면서 밤새 담쟁이 잎을 그린 거야?"


"존시가 저리 불안해하는데 어쩌겠어? 그래도 이웃인데 이 정도 도움은 줄 수 있겠지."


"베...어먼? 그게 그림이었다는 거야? 저 담쟁이 잎이?"


"듣고 있었구나, 존시. 그래 맞아. 진짜 담쟁이 잎은 너가 잠든 새 떨어진지 오래였고 그 자리에 티 안 나게 새로 하나 그린 거야."


"왜? 어째서? 수한테 들어서 네 몸 상태가 안 좋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 몸으로 폭풍우를 맞으면서 그림을 그린 거야?"


"안 그랬으면 네가 정말 죽을 거 같았거든. 마지막 잎새가 떨어짐과 동시에 사람이 죽는다니, 웃기는 이야기지만 네 말씨를 들으니까 정말 그럴 거 같았어. 그래서 그렸지."


"지금 이 꼴이 될 줄 알면서도 그랬어?"


"당장 사람이 죽을 거 같은데 일단 살리고 봐야지."


"젠장... 내가 말했잖아! 네 걱정이나 하라고! 근데... 너는... 너는... 왜 항상 남을 먼저... 걱정..."


존시는 걱정까지만 말하고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명치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와 가슴이 부글부글 끓은 나머지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됐어. 피곤하니까 약만 놓고 나가줘. 좀 쉬어야겠거든."


그게 베어먼의 마지막 말이자 유언이었다.

우는 존시를 데리고 나간 수가 삼십 분 뒤, 다시 방으로 들어와보니 이미 베어먼은 숨을 거둔 상황이었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던 것도 한때.

수가 다시 그의 몸을 만졌을 때는 이미 차갑게 식은 상태였다.

그녀가 아무리 몸을 흔들고 일어나라고 소리를 질러도 베어먼은 눈만 감은 채로 있었다.

결국, 수는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고 그녀의 울음소리에 따라온 존시 또한 그의 죽음을 알고 제자리에 주저앉고 흐느꼈다.


이제 저 두 여인을 제외하고 방에 남은 것은 녹색과 황색이 뒤섞인 물감과 주인을 잃은 붓, 미쳐 다 그려지지 못한 캔버스 뿐.

그 외에 다른 것은 없었다.


수십 년 뒤, 도시의 유명한 화가 둘이 그린 그림이 사람들의 화제에 올랐다.

그 그림은 한 사내의 죽은 모습을 그린 것인데, 하나는 사내의 정면에서, 다른 하나는 담쟁이 잎을 포함한 사내의 옆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전자는 수가, 후자는 존시가 그린 것이었다.


사람들의 화제에 오른 까닭은 그림이 그려진 사연에 있었다.

그녀들이 아직 무명이었던 시절에 불과했을 때, 그녀들과 함께한 사내의 죽음을 다뤘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매정하게 대한 이웃을 살리기 위해 앓는 몸으로 폭풍우를 맞아가며 그 이웃에게 희망을 북돋아준 사내.

베어먼.


그 헌신적인 사내의 이야기는 도시 곳곳의 호사가들의 입을 타고 전파됐고 이내 도시의 미담으로 기억되었다.


지금도 그가 살던 집의 담벽에는 그가 그린 담쟁이 잎이 남아있다.

다시 폭풍우가 찾아와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담쟁이 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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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시면 바로 알 수 있듯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각색해서 쓴 후회물입니다.


후회물을 보면 후붕이와 후순이의 관계가 대부분 연인이나 부부 관계라 조금 질려서 새롭게 이웃의 후회를 쓰고 싶었는데 쓰면 쓸수록 이게 뭔가 싶어지네요.


이래서야 새로운 시도는커녕 오히려 후회물은 연인이나 부부가 가장 어울리는 장르란 걸 반증하는 꼴이 돼버린 것 같습니다.


게다가 후붕이와 후순이의 관계가 이웃이라 그런지 후회의 깊이가 무척이나 얕다는 느낌도 들고요.


새벽에 밤을 새면서 써서 그런지 글에 두서가 없는 느낌도 나고요.


아무래도 필력을 늘리려면 좀 더 노력해야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