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메타픽션이란?

우선 '메타'라는 접두어의 뜻부터 짚고 넘어가보자.

메타는 '자기 자신에 관한' 이라는 뜻이다.

메타논리학= 논리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루는 논리학.

메타수학= 수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루는 수학

메타데이터= 데이터에 관한 데이터

메타픽션은? 그렇다. 소설에 관한 소설이다.

즉, 메타픽션은 소설이라는 것 그 자체에 대해 다루는 소설이다. 

흔히 알려져 있는 두근두근 문예부나 SCP-001데이터베이스 같은 작품은 메타픽션의 일면에 불과한다.


2. 돈케호테와 메타픽션

메타픽션의 선구자로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있다. 

돈키호테는 싸구려기사소설(현대로 치면 양판소 격)을 패러디한 존재 자체부터가 소설에 대한 소설을 지향하고 있다. 세르반테스는 여기에 더 나아가 상당히 실험적인 장치를 넣었다.

첫번째로 돈키호테의 저자가 자신이 아니라고 한 점. 그는 이 책이 아랍어 판본의 스페인어 번역본이라고 주장한다. 실제 저자는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이후의 필사본을 찾을 수 없다고 하며 중간에 장이 끊기기도 한다. 이 점이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넘나들며 돈키호테를 더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둘째로 돈키호테 1부의 성공 이후 쏟아져 나온 가짜 후속작들에 대한 패러디 또한 들어있다. 이 역시 픽션에 현실의 것을 집어넣음으로써 메타픽션으로써의 정체성을 확립시켰다.

이러한 독특함은 후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 메타픽션에 대한 시도가 많아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메타픽션

메타픽션 저자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있다면 단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일 것이다. 이사람의 책은 특히나 한번쯤은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SCP재단의 작가인 칼라닌과 그레이트 히포의 작품에서 꽤나 많이 언급된다. 특히 칼라닌의 경우 보르헤스의 광팬이라 할 정도로 아예 그의 스타일을 흉내내어 001까지 작성한 바 있다.(SCP-001 과거와 미래)

어쨋든, 보르헤스는 주로 단편소설을 썻다. 그의 철학은 '한마디 말을 위해 수백 페이지의 글을 쓰는 것보다 수백페이지의 생각을 하게 만드는 몇페이지 글이 더 훌륭하다'이다. 그렇기에 그의 대부분의 글은 단편소설로 되어 있으면 그중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 두개만 훑고 가자.

<바벨의 도서관>

있을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가 담긴 책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도서관을 방황하는 이들에 대한 소설이다. 뱀의 손의 방랑자의 도서관에서 부터 시작해서 SCP-4001영원의 알렉산드리아, 인터스텔라의 책장 뒷편, 장미의 이름의 도서관(사서장 이름이 호르헤임 ㅋㅋ), 메트로 2033의 레닌 도서관 같은데에서도 많이 오마주 됨.

이 도서관에 사는 사람들은 모든 진리를 담은 책이 어디엔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책을 찾아 방랑한다는 컨셉임. 모든 경우의 수의 책이 다 있으니 과거에 쓰인 모든 책부터 미래에 쓰일 모든 책까지 모두 다 있는거니깐...

근데 과연 그게 의미가 있을까? 또, 우리가 뭔가를 창작한다는 행위는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바벨의 도서관 어딘가에 있을 텐데?거꾸로 그렇게 바벨의 도서관에서 돈키호테를 찾았다고 해 보자. 텍스트 자체는 완전히 똑같은데, 그렇다고 그게 의미가 있을까? 과연 그 책에서 세르반테스의 모든 의도가 다 배여 있을까? 그냥 단순히 랜덤한 문자열중 하나에 불과한데?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형이초학 많이 본 재단러라면 피에르 메나르라는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을것이다. SCP-4028라만차의 돈키호테에서 형이초학부의 이사관으로 등장한 그 인물이다. 그 이름이 바로 여기서 따온 것.

화자인 보르헤스의 친구중에 피에르 메나르라는 사람이 있음. 그는 돈키호테를 다시 쓰겠다는 일념 하에 중세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세르반테스 이후 세대의 역사를 잊어버리고 하는 등의 노력을 하지만 실패한다. 그리고 그는 피에르 메나르로써 돈키호테를 다시 쓰는데 성공한다. 말 그대로 텍스트 하나 틀리지 않고 다시 쓰는데 성공한다. 단순한 컨트롤 C, V가 아니라 억겁의 퇴고를 통해 빚어낸 결과 완전히 동일한 책을 얻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세르반테스와 피에르 메나르는 같은 텍스트를 쓰더라도 동일한 의도로 글을 썼을까? 같은 글이더라도 세르반테스와 피에르 메나르는 다른 인물이기에 다른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고, 그렇기에 같은 글을 쓰더라도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즉, 작품은 텍스트만으로만 존재하는게 아닌, 콘텍스트도 포함한다는 것.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그것을 읽는 독자의 시선도 포함한다는 이야기 이다.

그렇다면 작품을 본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써 작품을 쓴다는 행위와도 같다. 작품의 일부를 만들어 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4. SCP-3309에 대하여

결국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먼 길로 돌아왔다. 그래서 결국 SCP-3309는 무엇인가?

재단의 입장에서는 SCP-3309는 현실의 일부가 도려내지는 현상이다. 재단은 이를 이용해 위험한 개체를 없애려 하지만 그들은 SCP-3309의 본질을 간과하였다.

SCP-3309의 정체는 바로 재미없는 컨텐츠의 종착지. 삭제, 혹은 망각이다.

그렇게 스몰스 연구원은 현실에서 도려내지고, 댓글 창에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당신을 잊으리라는 걸 깨달을 때] 삭제 투표를 개시합니다.

그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건 사랑해 주는 사람들, 독자들이 있었던 것이었고, 이제 독자들은 더이상 그들을 사랑해 주지 않는다.

스몰스 연구원은 자신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들, 정보들을 나열하지만 의미가 없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우리'가 말한다.

널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은 너 말고는 없어.
그리고 이런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너에게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을까?

스몰스 연구원은 이제는 기억될 만한 가치가 없다. 그렇기에 잊혀진=소멸한 것이다.

SCP-3309는 단순한 형이초학부 메타픽션을 넘어 픽션에 관한 '보르헤스'스러운 접근을 보인다.

스몰스 연구원은 자진해서 자신이 포함된 작품을 재미없게 만들었고, 그렇게 그는 삭제되고 만다.

SCP-3309는 매우 자연스러운 컨텐츠의 흐름이다. 수시로 다양한 컨텐츠가 쏟아져 나오는 지금, 재미없고 낮은 퀄리티의 작품은 묻혀 사라지고 만다. 그 작품들이 '존재'하기 위해선 재미있어야 하고, 양질이어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만 존재할 수 있다.

뾰족한 창 규약과 스몰스 연구원은 이러한 흐름에 반대된다. 재단 입장에서야 위험한 개체의 현실을 도려내야 안전한 세계를 만들 수 있으니깐.. 그런데 SCP 재단의 존재 이유는 바로 공포감을 통한 재미이다. 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도려낸 것이다.


정말 기가막히게 잘만든 SCP 이다. 아마 보르헤스옹이 이걸 보셨다면 정말 만족해하셨을 듯 하다.

특히나 댓글창을 통해 독자를 끌어들이는 연출은 단순히 '신기하다'를 넘어선 작품의 일부가 되는 경이를 선사한다.

진짜 이런 작품을 무료로 언제든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나중에도 이런 SCP를 해설하는 글을 종종 올릴 생각이다. 대신 내 인문학적 소양이 영 꽝인 고로, 되게 느리게 올라갈 듯 하다. 이거도 사실 군대 있을 때 돈키호테랑 픽션들 대충 훑어복 쓴 것에 불과하다. 정말 이야기 해 주고 싶은 다른 SCP가 많으니 언제한번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ㅂ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