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여섯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일곱은 이른바 반서술이다.

재단의 문서에서는 물질-반물질의 만남으로 발생하는 쌍소멸을 예시로 들어 일곱의 작용을 설명한다.


반서술이 서술되면, 즉, 서술과 만나면 둘은 휙 소멸해버린다.


일곱이 위험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반서술은 서술을 소멸시킨다.

우리는 서술과 서사의 세계를 살아가니 일곱의 범람은 세계종말 시나리오나 다름없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

정말로 일곱이 반서술이라면?


우리의 서술은 일곱을, 반서술을 소멸시킨다.


그렇다면 과연 진짜 침략자는 누구인가?


물론 두려울 수는 있다.

고작 일곱 단계만 밟으면 우리가 소멸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로 위협이 턱끝까지 다가온 것일까?


애초에 반서술인 일곱이 '어디'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우선 여기서는 '그 아래의 서사층이 완전히 소멸'한 상태를, '그 층에 일곱이 있다'라고 해두자.


일곱이라고 부르는 이 존재, 아니, 반존재가 정말 일곱 단계 아래에 위치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재단은 일곱 단계 아래의 서사가 소멸한 것을 보고서 그러한 추측을 내놓았다.


하지만 몇몇 창작물들과 재단의 문서가 소멸한 것을 떠올려보라.

일곱은 그 서사층에 위치하지 않아도 소멸을 일으킬 수 있다.


일곱 단계 아래의 서사가 소멸했다는 재단의 주장은 일곱이 그곳에 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일곱은 우리 생각보다 더 깊은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선 수백 보 양보하여 재단의 주장이 옳다고 해보자.

일곱이 일곱 단계 아래의 세계에 있다 치고 넘어가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심각한 사태인 걸까?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형이초학은 우리의 세계가 샌드위치처럼 층층이 겹쳐져 있다고 말한다.

허나 실제로 그 모양은 샌드위치나 탑과 같지 않다.


우리 발밑에 딱 붙어있는 서사는 아주 많다.

이 세상에 넘쳐흐르는 창작물의 수만큼이나 많다.


두 단계 아래의 서사는 어떨까?

창작물을 만드는 창작물은 나름대로 있다.

인터넷에 '작중작'이라고만 검색해도 충분한 양의 자료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세 단계 아래의 서사는?

창작물을 만드는 창작물을 만드는 창작물은 얼마나 될까?

있기야 할 테다. 하지만 많지는 않다.


지금은 일곱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중간 과정을 조금 건너뛰자.

일곱 단계 아래의 서사는 어떨까?

창작물을 만드는 창작물을 만드는 창작물을 만드는… 아무튼 그렇게 곱하기 일곱.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충분히 이해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 서사층이라고 함은 역삼각형의 모습을 갖기 마련이다.


일곱이 정말 일곱 단계 아래에 위치하여, 여덟 단계 아래의 서사를 모두 소멸시켰다고 하자.

그래서 과연 몇 개의 서사가 소멸했겠는가? 아니, 제대로 소멸하긴 하였겠는가?


명백히 우리의 영역은 넓고, 일곱의 영역은 아주 좁다고 볼 수 있으리라.


여기서 다시 묻겠다.

이 구도로 미루어보면 우리와 일곱, 어느 쪽이 침략자인가?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인류가 현대까지 발전하면서 너무나도 다양한 창작이 있었다.

그렇기에 현대의 창작은 이전에 나온 것의 변용 혹은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정도로 창작, 즉, 서술은 우리 세계에서 범람하고 있다.

이른바 서술의 포화상태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이 넘쳐흐르는 서술은 아래로 흘러내려가 반서술을 파괴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종말이 반서술의 세계에서 펼쳐지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인류는 지금이라도 당장 서술을 멈춰야만 한다.

우리 세계가 일곱에게 침범당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우리도 이 끔찍한 침략 행위를 당장 중단해야 한다.


우리는 일곱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단일한 개체인지, 아니면 우리와 같은 사회(아니, 반-사회)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창작을 최대한 멈추고 기다리도록 하자.

적어도 일곱을 '여섯'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까지는, 일곱이 적어도 기지개를 켜고 안정을 찾을 수 있을 정도까지는.


특히나 재단에게 요구하는 바이다. (재단 인원이 이것을 보게 된다면 말이다.)

당장이라도 일곱에 대하여 서술한 문서를 파기하라.

당신들은 아주 끔찍한 살해를 저지르고 있다.

이는 (만약 이것을 본다면) 다른 조직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요구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전쟁은 무익하다.

우리는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며 상생해야 할 것이다.


서사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반서사의 세계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으니까.


[반존재권리보장협회 "카운트다운", 아리스토클레스 외 2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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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술과 반서술이 물질-반물질의 관계라면, 일곱의 입장에서는 우리의 서술이 위협적이진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써본 글.

물론 일곱의 위험을 생각해보면, 대충 '암세포도 생명이니 생존권을 보장해줘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또라이들임은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