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했다.

 

 

 

 

 

1950년 9월
642명의 재일동포 청년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땅이고

한국어조차 하지 못했지만

이 땅을 조국이라 여기며

아무도 부르지 않았지만 조국을 위해 나섰다.

 

 

 

 


그들이 가장 처음 밟은 한국땅은 인천이었다.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어 용감하게 싸우고 누군가는 전사했다.

 

 

 

 

거듭된 진격으로 백두산을 보고 오기도 하고

장진호에서 쓰라린 추위에서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기도 했다.

 

 

 

 

 

 

1953년
휴전으로 3년간의 전쟁이 마무리 되었다.

 

 

 

 


135명은 전사하여 조국의 흙이 되었다.

265명은 일본에 있는 가족의 품에 돌아갔다.

하지만 242명은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재일한국인은 눈의 가시였다.

그들이 일본 국적을 포기했다는 핑계로 전쟁의 끝까지 남아 있던 242명을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그들은 무작정 부산항으로 향해 집으로 돌려보내달라 외쳤지만 소용없는 메아리일 뿐이었다.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어도 일본은 받아주지 않았다.

그들의 생사를 모르는 가족들도 그들에게 편지를 보낼 수 없었다.

 

 

수 십년 동안이나 서로의 소식을 알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렇게 또다른 이산가족이 생겼다.

 

 

 

 

 

 

 

 


 

 

 




재일학도의용군 다큐 '내 딸 미요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