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시절의 히틀러임. 칫솔 수염은 저때부터 유지했던 모양. 히틀러 미술지망생 드립이 가끔 나오던데 그림을 함 보겠심.























다 세밀하고 수려하긴 한데, 보면 딱 그거 생각남. 이발소에 붙어 있는 풍경화 그림.



그래 바로 이 아재가 존나 잘 그리던 방식의 풍경화. 남아 있는 히틀러 그림을 보면 거진 자연의 풍경이나 건축물 등을 주로 그렸음.









하지만 히틀러의 그림은 시대에 너무 뒤떨어지는 화풍이었음. 히틀러가 무조건 짐싸들고 갔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에서는 당시 분리파(Secession)의 화풍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화가가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였음.  










그리고 여전히 문화를 선도하고 있던 프랑스에서는 인상주의, 상징주의, 그리고 아르누보(Art Nouveau), 즉 새로운 미술이라 불리는 화풍이 유행하고 있었음. 


쉽게 설명하자면 인상주의는 일상에서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거고 상징주의는 외국의 문물이나 신화 등을 재구성해서 묘사한거고 아르누보는 일본의 그림인 우끼요에의 영향을 받아 기존의 인물 중심의 정형화된 풍경이나 인물상이 아닌 인물이나 배경 묘사를 단순하게 하되 균형있게 가득 채우는 형태의 새로운 형태의 미술이었음. 


대표적인 화가로는 인상주의에는 피에르 르누아르나 뭉크, 상징주의에는 귀스타브 모로, 아루느보는 알폰스 무하 등이었음.




르누아르의 '부지발의 춤'  / 인상주의






모로의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 상징주의







무하의 작품들  /  아르누보









히틀러가 1913년에 그린 아기 예수를 안은 마리아




그리고 낭설에는 히틀러가 입학서류 냈는데 광탈했다고 얘기되지만, 히틀러는 빈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려고 시험 보기도 함. 3시간씩 총 6시간 안에 주어진 상징적인 장면과 성경에 나오는 장면을 그리는 예비시험 때는 준수하게 합격함. 문제는 다음 시험이 심사위원에게 보여주기 위해 미리 만들어 둔 포트폴리오를 제출하는 거였는데 히틀러가 그린 그림은 묘사된 사람의 대가리가 비례에 안 맞게 작게 그려진 점이 있었음. 그래도 위 사진처럼 건축물 묘사에 탁월했기 때문에 학교에서 차라리 건축학교를 가라고 권유를 한거지 히틀러를 쫓아낸 건 아님.











히틀러가 빈에서 빈곤하게 살았다 뭐 이런 내용도 있는데 그건 대략 1-2년이나 그랬고, 히틀러는 의외로 금수저였음. 아버지 알로이스는 세무서장 출신이어서 남긴 유산이 많았고, 엄마 클라라는 아들이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서 지속적으로 용돈을 보냈음. 그래서 수중에 있는 돈이 어지간한 판사 초임 월급보다도 많았음. 


거기다 나이 많은 고모들은 재산을 물려줄 자식이 딱히 없어서 히틀러한테 아낌없이 돈을 줬음. 그래서 히틀러는 돈이 많이 드는 오페라 관람이나 전시회, 미술관 등을 다니며 한가롭게 살 수 있었음.











그리고 나중엔 자기 미술 실력의 한계를 깨달았는지 편지지나 연하장에 들어가는 그림이나 찌라시 등을 그려서 팔았고 그게 잘되니까 아예 빈에서 뮌헨으로 옮겨서 더 많이 벌어들였음. 하지만 1차대전이 터지고 히틀러는 나름 젊은 시절의 꿈이었던 미술을 접고 본격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됨. 
















"Ich bin Künstler und kein Politiker. Sobald die Polenfrage gelöst ist, möchte ich mein Leben als Künstler beenden."

(나는 정치가가 아니라 예술가요. 폴란드 문제가 해결되면 예술가로서 삶을 끝내고 싶소)


- 영국대사 네빌 핸더슨(사진의 악수하는 인물 뒤에 있는 인물)에게 한 말. 물론 폴란드 침공으로 2차대전 불씨를 당긴 탓에 저 말이 지켜지는 일은 없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