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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스를 생각하지 마"






보다시피 뇌는 부정을 이해해지 못해. 워터게이트 사건때 리처드 닉슨이 "I'm not a crook"이라 발언했다가 사기꾼이란 프레임만 쓴 것이 좋은 예시야. 정말 당당했더라면 "사기꾼은 아니다"라는 애매한 부정보다 "나는 정직한 사람이다"라고 정반대의 프레임으로 맞섰겠지


구글의 모토인 "Don't be evil"도 비슷한 경우야. 처음부터 악하지 않았다면 악한 행동을 할 수가 없어. 선한 사람이 나쁜 결과로 이어지는 행동을 했다면 그건 실수로 여겨지겠지. 즉 나쁜 행동을 할 수가 없어. 처음부터 나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나쁘지 말자라는 모토가 필요했던거야


목표를 정할때도 '무언가를 하지 말자'라는 생각은 전혀 먹히지 않아. 예를 들어 '게임을 끊자'라고 다짐을 했을때 게임 대신 할 뭔가가 없다면 절대 끊을 수 없어. 게임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게임을 대체할 더 가치있는 무언가를 찾는 것이 더 도움이 될거야. 그렇지 않고 막연한 부정만 있다면 결국 원래 상태로 돌아올 수 밖에 없어. 금연을 할때도 그냥 담배를 피우지 말자는 생각보다는 차리리 '건강해지자'라는 마음가짐으로 조깅을 시작하는 편이 훨씬 쉬울거라 생각해봄



여기서 개념을 확장해서 프레임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말싸움을 할때 자신에게 씌워진 프레임을 정면반박하는 것은 위험하단 사실은 잘 알려져 있어. 어떨때는 프레임을 상대에게 돌리는 것도 위험할 수 있음. 상대가 나를 '급식충'이라 욕했을때 '너가 급식충 아니냐'라는 식으로 반박하면 급식 프레임이 내게 감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야. 다른 프레임을 이용해서 말을 돌리는 것이 일반적인 대처지. 이 경우 "네다틀"이 온건하고 서로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는 대처법이야


하지만 상대를 공격하려 한다면 상대의 프레임을 이용해야해. '급식충'을 욕설로 쓰는 사람은 아직 자신이 완전히 급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거고, '저능아'를 욕설로 쓰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지성을 조롱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상대에게 자신에게 씌워진 프레임을 전가하려 시도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이건 아주 직접적인 예시일 뿐이고 실재로는 훨씬 간접적인 경우가 더 많음. 하지만 어떤 프레임의 범주가 자신과 긍정적인 방향으로 엮여 있다면 그 범주에 관련한 단어를 욕설로 쓰는 것은 불가능해. 찐틀피홍통씹등의 범주를 일컷는 말이 욕설로 쓰일수 있는 까닭은 그 범주에 관하여 내 자신이 강한 부정적인 감정을 품고 있기 때문이야. 인싸는 사회성과 이성의 범주에 속한 '찐', '피싸개', '한남'을 욕설로 못쓰고 자신의 출신이나 소속에 완전한 만족을 가진 사람, 이를테면 금수저는 출신지와 같은 사회계층의 범주에 속한 단어들을 욕설로 못써. 이들은 이 범주에 대해 긍정적인 감정만을 가지고 있거든. 만일 욕설이 서로 통한다면 비슷한 범주에 있어 불만족을 가지고 있을거야. 아니라면 서로 제대로 싸우는 것조차 불가능할테니까



여기서 중도를 지키자는 소리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기란 어려운데다 중도가 옳음을 보장해주는 것은 전혀 아니기 때문임. 어떤 범주에 관련되는 순간, 혹은 제대로 알게되는 순간 우리와 대상과의 관계가 결정되며 어느 편을 들 수 밖에 없음. 중도를 유지하자는 놈도 싸움판에 이끌린 이상 어떠한 동기를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음. 오히려 중도주의자는 자신의 동기를 숨긴다는 점에서 가장 더럽고 솔직하지 못한 부류라고 생각함


몽테뉴의 후계자인 니체는 귀족이 됨으로써 개인적인 문제에서 발생하는 인지편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던것 같음. '긍정의 철학'을 통해, 삶과 자신을 긍정하는 자세를 통해 프레임에 얽메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임. 귀족은 자신의 판단력과 힘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무의식적인 동기에 이끌려서 편향된 판단을 내리지 않게 됨. 하지만 그 강자 또한 출신에 따른 편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상충하는 프레임에 의해 선악판단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에는 반드시 누군가에게는 악으로 지탄받게 될거야. 니체류의 심리학적인 철학은 악을 옹호하게 될수도 있다는 문제에 봉착하게 돼. '강자는 선악을 초월한다'라는 반론이 가능하겠으나 대다수에게 강자란 우리의 욕망이나 이상을 투영한 사람에 불과하며, 선망과 숭배의 대상에 지나지 않아. 즉 대상화된 강자는 무엇보다 선악에 가장 깊게 얽혀있는 존재가 될수 밖에 없음. 강자를 대상화하는 대신 자기와 동일시하는 망상은 더더욱이 이데올로기적이야. 나 자신을 초인의 작은 분신으로 보는 삶의 자세는 중국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소분홍들, 나치나 일본제국, 종교전쟁의 사례에서 몹시 위험할 수 있단 사실이 알려져 있음. 서툴게 일반화하자면 이게 우파적인 사상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음


부정에서 벗어나 긍정할 수 있는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면 된다는 해결책을 떠올릴 수도 있음. 개인의 가치를 구축하는데 성공한 지도자나 예술가들은 딱히 드물지 않았고 범인들도 천성이나 노력을 통해 긍정하는 삶을 즐길 수 있음. 하지만 득세했었고 득세하고 있는 수많은 이데올로기는 무언가의 부정으로 시작해서 목적을 이루자마자 타락했었거나, 아니면 부정하고자 하는 무언가를 이기지 못하고 사멸하곤 했음.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부정에서 존재의의를 찾았고 페미니즘은 과거에는 가부장제, 그리고 현재는 남성성의 부정에서 존재의의를 찾고 있음. PC는 아예 무언가의 부정으로밖에 존재하지 않아. 이런 식의 관점은 알맹이가 없을 뿐더러 자신을 약자로 규정하며 강자에게 무슨 짓이든 해도 될거라고 생각하는 심리로 이어짐. 서툴게 일반화하자면 이게 좌파적인 사상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음


프레임이 없이는 모든 사건과 대화는 무작위한 소음으로 들릴 뿐임. 선악이나 목표, 특히 무언가의 부정이 관련되고 나서야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단순하게나마 파악할 수 있어. 프레임을 벗어난 객관적인 관점은 허상이고 이해관계를 벗어난 조용한 명상같은게 있다고 한들 그건 훈련받은 소수의 학자에게나 허용된 것이고, 오늘날과 같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작고 나약한 목소리로 드러날 뿐이야. 이런 의미에서 싸움은 좋은 일이고 보통 필요한 일임. 그저 부정만 하다가 서로 몸상하는 일만은 없기를 바랄 뿐임. 잘 알려져 있듯이 일상생활에 있어 부정할만한 프레임으로 자신을 둘러싸는 것은 정신건강을 망치는 지름길임. 다들 편히 쉴수 있기를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