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 https://arca.live/b/singbung/77681754

번외 1편 : https://arca.live/b/singbung/77731985

지난 글까지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참호전에 대해 썼었음.


이제 본격적으로 탱크에 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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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인지대와 참호선을 돌파하라 - 독일편


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은 무의미한 소모전이었다.

하지만 각국 장교들이 멍청해서 계속 그렇게 밀어넣었던 게 아니라는 건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다. 방법이 없었을 뿐이지.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밀어넣을 수는 없는 거고, 방법이 없으면 방법을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여럿 나오게 된다.


가장 먼저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현시킨 것은 독일 제국이었다.


▲ Stoßtruppen(슈토스트루펜, 충격대) 혹은 Sturmtruppen(슈투름트루펜, 돌격대)


독일 제국은 기존의 밀집대형 보병전술로 참호를 돌파하려는 시도가 큰 피해가 나는 것을 보고 전술의 전환을 시도한다.

본격적인 대규모 공세 전에 적 전선에 혼란과 균열을 일으키고, 이렇게 만들어낸 혼란과 균열을 통해 본격적인 공세를 실시할 때 공격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정예 병력을 편성한 것이다.


최초의 돌격대는 1915년 3월에 독일 국방부가 제8군의 칼조브 소령(Major Calsow)에게 지시해서 창설한 Sturmabteilung Calsow(슈투름압타일룽 칼조브. 칼조브 돌격대대)다. 이 부대는 강철 방탄복에 방패까지 들었고, 37mm 돌격포(Sturmkanone)를 대동하고 다니는 부대였다. 하지만 이들은 협상국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긴급 지원군으로 소모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이런 돌격 부대에 대한 요구는 계속 있었고, 1915년 9월, Willy Martin Ernst Rohr(빌리 마틴 에른스트 로어) 대위가 이 부대의 새 지휘관으로 오면서 다시 한 번 돌격대가 만들어지게 된다.

새 지휘관으로 부임한 로어 대위는 기존의 방탄복과 방패가 기동성을 너무 저하시키는데 반해 방어 효과는 부실하다고 여겼다. 그는 속도에 좀 더 중점을 두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고, 화력을 보강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군과의 전투에서 노획한 76.2mm 경야포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포를 지급했다.

이외에도 기존의 Gew 98(게베어 1898) 소총이 너무 길고 무겁다는 사실에 착안해 소총을 기병총인 Karabiner 98a (카라비너 1898a, 통칭 Kar98a)로 변경했고, 권총으로는 Lange Pistole 08(랑헤 피스톨 08. 통칭 아틸러리 루거)로 알려진 32발 드럼탄창과 개머리판이 장착된 권총을 지급하기도 했다. 긴 총검 대신 휴대하기도 편하고 참호에서 휘두르기도 편한 새 총검을 지급하고, 특수 베낭을 지급해 더 많은 수류탄과 총탄을 자기가 짊어지고 다닐 수 있게 했다.


이렇게 탄생한 돌격대는 새로운 전술과 결합하게 되는데, 바로 후티에(Hutier. 후티어) 전술이다. 이 전술은 다음과 같은 방식이다.


(1) 중포탄과 독가스탄을 섞어서 짧은 포격을 가하는데, 이 포격은 적을 굳이 파괴하지 않아도 된다. 무력화할 정도면 충분하다.

(2) 포격이 끝나기 전에 돌격대는 분산되어 적진에 공격을 개시한다. 이때 공격은 적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면서 적 전선의 약점을 돌파해 적 사령부와 포진지를 파괴, 점령하는 것이 목적이다.

(3) 경기관총, 화염방사기, 박격포 등을 갖춘 보병 부대를 돌격대의 후속으로 파견한다. 이 부대는 돌격대가 놓친 거점을 타격하고 돌격대가 만든 균열을 확대한다.

(4) 마지막으로 대규모 공세를 가해 균열이 생긴 적의 저항을 일소한다.



2. 무인지대와 참호선을 돌파하라 - 협상국편


독일이 정예 병력을 돌격대로 편성하는 동안, 영국은 아예 다른 발상을 하게 된다.

세계사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을 때, 영국을 찍으면 대충 맞는다는 말처럼, 영국이 다시 한 번 이상한 발상을 했다.


▲ Ernest Dunlop Swinton(어니스트 던롭 스윈튼)


1914년 10월, 프랑스에 있던 대영제국 육군 공병 장교, 어니스트 스윈튼은 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된다.

몇 개월 전인 1914년 7월, 남아프리카에 있던 광산업자 친구로부터 미국의 Holt tractor(홀트 트랙터)에 관한 편지를 받았던 것이다. 그 당시에 어니스트 스윈튼은 이 트랙터를 전장에서 운송용으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해 군과 정부에 보고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영국은 자국이 전쟁에 뛰어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 이 트랙터 아이디어는 유용할 것으로 여겨졌고, 어니스트 스윈튼은 홀트 트랙터처럼 무한궤도를 갖추고, 기관총을 막을 수 있도록 장갑을 두른 차량을 개발해 무인지대와 참호선을 돌파하자는 아이디어를 낸다.


※ 스윈튼이라는 성이 익숙할 수 있는데, MCU에서 에인션트 원으로 나온 그 틸다 스윈튼이랑 같은 집안이다. 당장 틸다 스윈튼도 앨런 스윈튼 준장이고, 아버지는 스코츠 근위대 출신에 빅토리아 훈장 기사지휘관장(Knight Commander of the Royal Victorian Order, KCVO)까지 받은 존 스윈튼 경이다. 애초에 군인 집안이었던 셈.


하지만 이 아이디어는 거부되었다.

아예 무시된 건 아니고, 1915년 2월에 영국 육군성 위원회는 홀트 트랙터 시연회를 갖기도 했다.


▲ 1914년 경의 The Holt 120 tractor


하지만 육군성 위원회는 이 트랙터의 비용과 장갑을 둘렀을 때의 무게를 고려할 때, 비효율적이라고 보았다.

지금 보면 병신 같지만, 사실 거부하는 것도 일리는 있었다. 아무리 무한궤도와 장갑이 있다고 해도 민간 차량을 군에? 지금도 군은 보수적인데, 검증되지 않은 물건을 사용했다가 실패하기라도 하면 예산 날아간다고 의회에서 처맞는 건 군 상층부였다. 게다가 지금은 전쟁 중이고, 사람도, 말도, 심지어 가벼운 트럭도 푹푹 빠지는 진창에 장갑 두른 차량을 올렸다가 빠지면? 그냥 병사들 생목숨 다 날아가는 거였다.


그런데 이 기괴한 아이디어를 덥석 문 사람이 있었다.


▲ 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 1918년에 찍힌 사진이라고 한다.


해군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후일 가장 위대한 영국인이라고 불리는 사람 아니랄까봐 이 기괴한 아이디어를 채용해 "육상전함"을 만들어보자고 결정한다. 1915년 1월, 해군 장관 윈스턴 처칠은 이미 장갑 차량을 이용해 철조망을 파괴하고 참호를 건너 병력을 참호 너머에 투입하는 편지를 보냈다.


사실 이전까지 해군 육상전함 위원회(Admiralty's Landship Committee)는 온갖 이상한 아이디어를 논의하고 있었고, 1915년 2월에는 대형 바퀴 차량이나 무한궤도 차량 중 하나를 선택하기로 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에는 신뢰할 만한 궤도 차량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으로 장교를 파견해 Killen-Strait 트랙터와 Bullock Creeping-Grip 트랙터를 구매했고,  1915년 7월 중순에서 7월 말 정도에 Bullock 트랙터의 긴 버전을 바탕으로 장갑 차량을 만들기로 했다.


▲ Killen-Strait Tractor


▲ Bullock Creeping-Grip Tractor


Bullock 트랙터를 기반으로 한 장갑 차량은 Lincoln No.1 Machine(링컨 1호 머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Lincoln No.1 Machine


▲ 덮고 있는 천을 제거한 Lincoln No.1 Machine


하지만 이 차량의 테스트는 실패했다.

참호를 건너려고 할 때, 무한궤도가 벗겨지는 문제가 있었고, 차량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한궤도의 궤도 연결 자체가 끊어지는 문제도 있었다. 그리고 포탑을 설치하면서 무게 중심이 높아지는 바람에 차량이 불안정해지는 문제도 있었다. 따라서 이후 차량에서 위쪽에 포탑을 올리는 건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이 링컨 1호 차량의 문제를 일부 개선한 모델이 바로 세계 최초의 전차로 알려진 Little Willy(리틀 윌리)다


▲ Little Willy(리틀 윌리)



3. 세계 최초의 전차 개발까지 - 프랑스


같은 시기, 프랑스도 영국과 비슷한 장갑 차량을 개발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전, 엔지니어였던 샤를 마리우스 푸쉬(Charles Marius Fouché)는 에두아르 켈레넥(Édouard Quellennec)과 그 아들인 자크 켈레넥(Jacques Quellennec), 슈네데르(Schneider & Co. 혹은 슈나이더라고도 함.) 사의 외젠 브릴리(Eugène Brillié)와 협력하여 무한궤도 트랙터를 프랑스 농업 환경에 맞게 개량하는 업무를 한 적이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자크 켈레넥은 보병 부사관으로 징집되었으며, 제1차 마른 전투에 참전했다. 이 전투에서 자크 켈레넥은 자기 부대원들이 기관총에 학살당하는 것을 목격했고, 그 자신도 1914년 10월 말에 부상을 입어 후송되었다. 자크 켈레넥은 부상을 치료하는 동안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독일 기관총 진지를 파괴할 수 있는 장갑 차량에 대한 장갑 트랙터 아이디어를 생각하게 된다.


이 아이디어는 부사관으로 복무한 자크 켈레넥의 아이디어였기 때문에 당시의 보수적인 유럽 군 문화에서는 묻히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자크 켈레넥과 같이 일했던 샤를 마리우스 푸쉬가 차량화를 담당하는 육군 부서에서 중위로 있었고, 외젠 브릴리도 프랑스의 주요 군수업체의 수석 설계자로 있었다. 인맥을 동원하면 해볼 만한 아이디어였다.

1914년 12월, 자크 켈레넥은 샤를 마리우스 푸쉬를 만났고, 두 사람이 외젠 브릴리에게 장갑 트랙터 아이디어를 설명했지만, 외젠 브릴리는 트랙터에 무장과 승무원 모두를 탑재할 공간이 없다고 생각해 이 아이디어를 거부했다. 1915년 2월, 자크 켈레넥이 외젠 브릴리를 설득하지 못한 채로 훈련기지에 발령나면서, 이 아이디어는 잠시 묻히게 된다.


그 사이인 1915년 1월, 프랑스 정부는 슈네데르에게 중포병 트랙터 개발을 명령했다.

슈네데르 사는 1월 말에 자사의 엔지니어였던 외젠 브릴리를 미국으로 파견해 American Holt Company의 무한궤도 트랙터를 조사하라도록 지시했고, 미국에서 돌아온 외젠 브릴리는 회사 경영진에게 장갑 트랙터 개발 성공 가능성을 설득해냈다.

1915년 5월, 슈네데르 공장에서 75마력 바퀴 모델 트랙터와 45마력 무한궤도 모델 트랙터가 비교 시험에 들어갔다. 여기서 무한궤도 트랙터가 우월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auto-mitrailleuse blindée à chenilles(추적 장갑 차량)에 대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1915년 6월에 이 실험 차량은 레몽 푸앵카레 프랑스 대통령 앞에서도 시험이 이루어졌고, 9월에는 철조망 절단기 프로그램과 합쳐졌다.


1915년 12월, 수앵(Souain)에서 이 슈네데르의 프로토타입 장갑 차량이 프랑스군 관계자들 앞에서 시연에 들어갔다.


▲ Henri Philippe Benoni Omer Pétain(앙리 필리프 베노니 오메르 페탱)


▲ Jean Baptiste Eugène Estienne(장 바티스트 외젠 에스티엔)


▲ 시연 당시의 사진


이 실험을 본 에스티엔 대령은 시험 차량이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이전에 전장이었던 수앵의 지형은 굉장히 험난했지만, 슈네데르의 실험 차량은 놀라운 기동성을 보여주었다. 1914년 8월부터 기갑 전투 차량을 주장한 에스티엔 대령은 이미 1915년 12월 1일에 프랑스 최고사령부에 궤도형 장갑 트랙터를 사용하자는 제안을 올린 상태였고, 이 차량은 그 기대를 만족하고 있었다. 그리고 1915년 12월 12일, 에스티엔 대령은 프랑스군 사령부에 구체적인 "추적 장갑차" 부대에 대해 제안했다. 여기서 에스티엔은 구체적인 차량의 스펙이 언급되었다.

1915년 12월 20일, 에스티엔 대령은 Louis Renault(루이 르노)를 찾아가 해당 장갑 트랙터의 개발과 생산에 관한 협조 요청을 했지만, 거부되었다. 이 사이, 1915년 12월 15일에 슈네데르는 공식 계약을 체결하고 12월 22일에는 생산 준비에 들어간 상태였다.


1916년 1월 7일, 에스티엔의 제안은 Joseph Jacques Césaire Joffre(조제프 자크 세제르 조프르) 총사령관의 승인을 받았다.

1월에 프랑스 국방부는 육군 차량 서비스에 해당 차량의 개발을 지휘하도록 했다. 그리고 기존의 슈네데르 차량에 더 긴 서스펜션을 채용하기로 했고, 기존 슈네데르의 차량은 샤를 마리우스 푸쉬 중위와 그의 소규모 엔지니어 팀이 맡아서 2월 2일부터 새로운 차량으로 개조되었다. 2월 17일, 개조가 끝난 새로운 차량이 테스트되었고, 2월 25일에 주문되었다.


▲ 1916년 2월 21일, 서스펜션 연장형 8륜 트랙터의 궤도 시험


2월 27일, 슈네데르에 장갑 상부 구조를 제공할 것이 지시되었다.

하지만 슈네데르는 궤도형 장갑 차량의 생산 경험이 전혀 없었고, 1916년 8월 4일에야 첫 차량이 납품되게 된다.



4. 세계 최초의 전차 개발까지 - 영국


프랑스가 1915년에 열심히 장갑 트랙터를 개발하고 있던 1915년 7월에서 9월 사이, 영국의 Royal Naval Air Service(왕립 해군 항공 서비스)에 복무하던 Walter Gordon Wilson(월터 고든 윌슨) 소령은 기존 리틀 윌리의 문제점을 개선한 새로운 설계를 제안한다.


이 설계에서는 기존 링컨 1호 차량과 리틀 윌리가 험지와 참호 돌파 능력이 떨어지는 것을 개선하기 위해 마름모꼴의 궤도로 차체 측면 전체를 커버하도록 했다. 또한, 기존의 차량 상부에 있던 포탑이 무게 중심이 높아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부 포탑을 제거하고, 기존 포탑이 없어져서 생길 수 있는 화력 부족 문제는 측면에 각각 1개의 포탑을 다는 방식으로 해결한 것이었다.

▲ 1916년 영국의 Mark I "Male" 전차. 당시 설계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육상전함 위원회는 이 설계를 보고 만족했고, 이때 막 육상전함 위원회에 참여한 영국 육군 측에서는 해당 설계안에 대해 장갑과 무장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

영국 육군의 요구 사항에 따라, 1915년 12월 Mark I "Mother" 전차의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졌고, 1916년 2월 2일에는 이 프로토타입이 영국 정부의 내각과 육군 고위 장성들 앞에서 시험 주행에 성공했다. 이 시험 주행 코스는 참호는 물론이고 울타리나 철조망, 포탄으로 생긴 구덩이까지 만들어진 코스였고, 참관인들은 모두 이 장갑 차량의 성공적인 주행에 감명 받았다. 군수부 장관 Lloyd George(로이드 조지)는 이 차량의 생산을 군수부에서 담당하도록 지시했다.


이 결정 이후 Landship Committee는 Tank Supply Committee(전차 보급 위원회)로 변경되었다.

1916년 2월 12일, 첫 전차 주문이 이루어졌고, 4월 21일에는 두 번째 주문이 이루어졌다.


이 Mark I 전차는 QF 6-pounder Hotchkiss(호치키스 6파운더 속사포)를 2개 장착한 "Male(수컷)"과 .303 British Vickers machine gun(.303 브리티시 탄 사용 빅커스 기관총)을 4정 장착한 "Female(암컷)"으로 구분되었다.


초기형은 위 사진에서 보듯이 조향 보조용 바퀴가 있었지만, 이후에는 삭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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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부터는 쭉쭉 진행할 수 있으면 좋겠다.


다음 글에서는 1차 대전 시기의 전차로 돌아오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