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 https://arca.live/b/singbung/77681754

번외 1편 : https://arca.live/b/singbung/77731985

2편 : https://arca.live/b/singbung/77923148

3편 : https://arca.live/b/singbung/7806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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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차 세계대전의 전차 (빼먹은 차량 보강)


지난 시간에 빼먹은 전차가 하나 있어서 보강부터 하고 넘어가겠다.


1916년 10월 3일, 영국의 William Tritton(윌리엄 트리턴)은 전차 공급 위원회에 느리고 무거운 전차가 아닌, 빠르고 저렴한 전차를 만들어 기존의 마크 전차 시리즈를 지원하자는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이 제안은 11월 10일에 전차 공급 위원회의 승인을 받았고, 11월 25일에는 영국 육군에서도 승인했다.


이 전차 프로젝트 이름은 Tritton Chaser(트리턴 체이서)로 시작했고, 이후 Medium Tank Mark A Whippet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영국 육군에서 붙인 이름은 Medium Tank Mark A(마크 A 중형전차)였지만, 트리턴 본인이 직접 Whippet(휘펫. 영국 품종의 개. 빠른 속도로 알려져 있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전차의 프로토타입은 1917년 2월에 만들어졌으며, 영국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헤이그 원수는 1917년 2월에 이 신형 전차 200대를 생산할 것을 명령했다. 이 명령권이 헤이그 원수에게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1917년 6월이 되어서야 그 명령이 확정되었고, 빠르게 생산에 착수해 1917년 10월에 첫 번째 양산품이 생산되었다.


▲ Medium Tank Mark A Whippet


이 전차는 마크 전차의 원형이던 리틀 윌리에서 직접 파생된 전차로, 마크 전차에는 없는 선회 포탑이 있었다. 엔진이 2개 탑재되는 것은 마크 전차와 동일했지만, 운전수가 두 엔진을 한 번에 통제할 수 있었다. 다만, 엔진 두 개를 연결해서 사용하는 것이 복잡했기 때문에 운전수가 조심하지 않으면 엔진이 멈출 수 있었다.


무장으로는 .303 British 탄을 사용하는 호치키스 기관총 4정을 탑재했고, 장갑은 최대 14mm였다.

엔진은 45마력(33kW)의 Tylor Twin 4기통 사이드밸브 JB4 가솔린 엔진 2기를 탑재했고, 최대 속도는 13.4km/h였다. 승무원은 총 3명이 탑승했다.


하지만 이 마크 A에는 여러 문제가 있었다.

엔진 출력이 부족했고, 조향과 서스펜션 등이 복잡했다. 이에 따라 마크 전차 개발에도 관여했던 Walter Wilson(월터 윌슨)은 1917년부터 마크 A 전차를 개량한 Medium Tank Mark B(마크 B 중형전차)를 개발하기 시작한다. 이 전차의 프로토타입은 1918년 9월에 완성되었고, 프로토타입이 나오기도 전에 주문이 들어가면서 생산했다.


▲ Medium Tank Mark B


이 전차도 무장은 마크 A와 같이 4정의 .303 British 탄을 사용하는 호치키스 기관총이었다. 장갑은 최대 14mm, 최소 6mm였다.

엔진이 100마력(75kW) Ricardo 4기통 가솔린 엔진 1개로 교체되었고, 최대 속도는 10km/h였다. 승무원이 1명 늘었는데, 승무원 구성은 전차장, 운전수, 정비공, 기관총 사수로 4명이었다.



2. 1차 세계대전 직후의 전차


월터 윌슨이 마크 A 중형전차의 개발품을 개발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원 개발자 트리턴은 독자적으로 월터 윌슨이 만드는 개량품과 경쟁할 수 있는 전차를 개발하고자 했다. 이렇게 개발된 개량형의 도면은 1918년 4월에 영국군의 승인을 받았고, 마크 B의 프로토타입보다 조금 더 빠른 1918년 8월에 완성되었다.


▲ Medium Tank Mark C


마크 C 중형전차의 무장은 5정으로 늘어난 .303 British 호치키스 기관총이었다. 장갑은 최대 14mm로 유지되었다.

엔진은 150마력 Ricardo 6기통 가솔린 엔진을 사용했고, 최대 속도는 12.7km/h였다. 승무원 구성은 마크 B 중형전차처럼 전차장, 운전수, 정비공, 기관총 사수의 4명이었다.


하지만 이 전차는 전쟁 말기에나 생산에 들어갈 수 있었고, 전쟁이 끝나면서 주문이 취소되어 36대만 간신히 완성되었다.


전후에 나온 또 다른 전차는 미군의 전차였다.

1917년 4월, 미국은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하고 참전하게 된다. 프랑스에 도착한 미국 원정군(AEF)의 총사령관, John Joseph Pershing(존 조지프 퍼싱) 장군은 영국과 프랑스의 전차 이론과 작전 보고서를 확인했고, 경전차와 중전차가 모두 전쟁 수행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능한 한 빨리 전차를 확보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미국 정부는 이 보고를 보고 전차 확보에 나서게 된다.

중전차의 확보는 순조로웠다. 영국과의 합동 중전차 개발이 결정되었고, 이후 Mark VIII이 될 전차를 만들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전차는 어쨌든 신규 개발품에, 중전차였고, 미군은 경전차를 확보해야 했다.

사실 미군은 프랑스에서 제작한 Renault FT(르노 FT)를 사서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불가능했다. 프랑스의 공장은 프랑스군이 사용할 전차를 대는 것에도 허덕이고 있었고, 프랑스와의 협의 끝에 미국은 르노 FT를 미국에서 생산해서 AEF에 수송하는 방식을 사용하기로 한다. 이것이 바로 M1917 Light Tank다.


▲ M1917 Light Tank


여기까지 읽었다면 뭐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을 거다. 1917년에 프랑스와 논의해서, 미국에서 생산하는 거로 결정났기 때문에 이름도 M1917이라고 붙였는데, 왜 전쟁 이후에나 도입되었을까?


프랑스는 성실하게 계약을 이행해서 보고 베끼라고 설계도는 물론이고, 부품과 실물 전차까지 미국으로 친절하게 배송했다.

그러니까 프랑스 놈들이 계약을 엿 같이 안 건 아니란 소리다. 애초에 자기들도 병력과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으니 미군이 빵빵하게 전차로 무장해서 독일놈들을 죽여주길 원했으니까.


문제는 프랑스는 미터법을 사용하고, 미국은 야드파운드법을 사용했다는 거다.

여기서 또 야드파운드법이다. 또. 미국은 르노 FT 전차를 받아들고 개발 예산 아꼈다고 싱글벙글하면서 민간 업체에 전차를 1200대나 발주했는데, 도저히 민간 업체가 미터법으로 만든 이 전차를 만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 있던 퍼싱 장군은 복장이 터졌을 거다. AEF 측에서는 1918년 4월까지 100대는 받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1918년 가을이 되도록 전차는 생산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전차는 독일이 항복 의사를 밝힌 1918년 11월이 되어서야 겨우 2대 도착했고, 12월까지 8대만 생산되었다. 아이고 이 등신들아.


무장으로는 37mm M1916 보병포나 Marlin Rockwell M1917 기관총을 채택했다. 다만, Marlin Rockwell M1917 기관총은 금방 M1919 Browning machine gun(M1919 브라우닝 기관총)으로 대체되었다. 장갑은 최소 0.25인치(6.35mm)에서 0.6인치(15.25mm)였다.


엔진으로는 42마력(31kW) Buda HU 현대화 4기통/강제 수냉식 엔진이 사용되었고, 최대속도는 20km/h였다.



3. 1920년대의 전차


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동안, 동쪽의 소련은 적백내전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적백내전에는 러시아의 공산 혁명에 놀란 유럽 각국도 파병했는데, 1918년 12월 12일에는 오데사에 프랑스군과 그리스군이 도착했다. 이들은 르노 FT 전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Ники́фо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Григо́рьев(니키포르 알렉산드로비치 그리고리예프)가 이끄는 제2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여단이 프랑스-그리스군을 공격해 승리했고, 여기서 일부 FT 전차가 노획되었다.

노획한 전차는 레닌에게 보내졌다. 1919년 5월 1일, 이 노획 전차는 붉은 광장의 퍼레이드에 동원되었고, 잠깐 전선으로 보내졌다가 이후 Кра́сное Со́рмово(크라스나예 소르모바) 공장에 보내져서 전차 개발의 견본품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1919년 9월 29일에 크라스나예 소르모바 공장에 도착한 전차에는 엔진도, 변속기도 없었다.

하지만 전차 개발은 필요한 일이었고,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특별 개발팀을 조직해 전차 연구와 개발을 담당하게 했다. 1919년 11월, 군사산업협의회에 특별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르노 공장에서 근무했던 프랑스 출신 엔지니어가 개발에 합류한다.

소련 정부의 지대한 관심으로 다른 공장과의 협력 체계를 구축한 뒤, 1920년 11월에 이 "신형 전차"의 테스트가 진행되었고, 곧 소련 정부는 이 전차를 채택한다. 이 전차를 통칭 Танк М, Танк КС(공장 이름을 따서), 혹은 Русский Рено라고 부른다. 1호차의 이름을 따서 Танк "Борец за свободу тов. Ленин"(자유의 투사 레닌 동지 전차)라고 부르기도 한다.


▲ Русский Рено


무장으로는 프랑스제 전차에 장착된 Puteaux SA 1918 37mm 21구경장포를 카피해서 장착했고, 부무장으로는 8mm 르벨 탄을 사용하는 호치키스 기관총을 장착했다. 장갑은 최대 22mm였다.


엔진은 АМО(Автомобильное Московское Общество. 압토모빌릐노예 모스코브스코예 옵셰스트보. 자동차 모스크바 학회)에서 만든 인라인 4기통 수냉식 엔진을 장착했고, 최고 속도는 8.5km/h에, 승무원은 2명이었다.


※ 러시아어 위키에는 엔진 출력을 33.5L라고 하는데 리터 출력은 대체 몇 마력이지.


다음 해인 1921년, 이탈리아에서도 르노 FT를 기반으로 한 전차가 도입되었다.

이 전차의 이름은 carro d'assalto Fiat 3000, Mod. 21(돌격 전차 피아트 3000 모델 21)로 지정되었다.


▲ Fiat 3000 Mod. 21


무장으로 초기에는 6.5 mm Mannlicher-Carcano(6.5mm 만리허-카르카노) 탄을 사용하는 기관총 2정을 장착했다. 아무래도 이 기관총은 Fiat–Revelli Modello 1914(피아트-레벨리 모델로 1914. 통칭 피아트-레벨리 M1914)로 보인다. 그러나 테스트 중 6.5mm 기관총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확인되어 37mm포로 교체되었다. 장갑은 최저 6mm, 최대 16mm였다.


엔진으로는 50마력(37kW) Fiat 4기통 엔진을 장착했고, 최대 속도는 21km/h였다. 승무원은 2명으로 유지되었다.


이후 L5/21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 전차의 개량형은 carro d'assalto Fiat 3000, Mod. 30이었다가 이름을 L5/30으로 변경한다.



같은 1921년, 르노 FT의 종주국인 프랑스는 1917년부터 만들던 "초중전차"를 개발 완료해서 도입한다.

1916년 여름, Forges et Chantiers de la Méditerranée(FCM)은 포병부 차관이었던 Léon Augustin Jean Marie Mourret(레옹 오귀스탱 장 마리 무레) 장군의 구두 계약으로 char d'assaut de grand modele(대형 공격 전차) 개발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9월 솜 전투에서 영국군이 마크 전차를 사용한 뒤, 개발 진행사항을 확인한 무레 장군은 아무 개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받았다.

결국 무레 장군은 직접 개발을 진두지휘했고, 르노가 궤도형 중박격포 개발 제안을 했다는 사실을 안 뒤로는 해당 플랫폼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대형 차량을 개발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 군수 장관 Albert Thomas(알베르 토마)는 1916년 10월에 영국에 마크 전차 1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영국 측은 답변하지 않았다. 1917년 1월 23일, 영국이 마크 전차를 보내주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 알베르 토마 장관은 무게 40톤에, 소구경 포탄을 견딜 수 있고, 3.5m의 전차를 개발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프로젝트는 순탄하지 않았다. 이 신형 중전차가 다른 전차의 생산 차질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고, 토마 장관은 이에 대해 다른 전차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득해야 했다. 

1917년 11월, FCM 1A 프로토타입에 관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이후 1917년 12월 21일에서 12월 22일, 첫 번째 프로토타입이 시험에 들어갔다. 1918년 2월에는 주포 발사 시험을 진행했으며, 여기서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프랑스 육군 총사령관이던 패탱은 1919년 3월까지 300대의 전차가 배치될 것을 요구했지만, 철강의 수요에 따른 부처 간 갈등과 여러 추가 요구가 겹쳐지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생산되지 못했다. 이 전차가 배치된 것은 1921년이었다.


▲ Char 2C(샤르 2C)


샤르 2C의 주무장은 Canon de 75 modèle 1897(카논 드 75mm 모델 1987)을 채택했고, 8mm 르벨 탄을 사용하는 호치키스 기관총 4정을 장착했다. 장갑은 전면 30mm, 측면 22mm, 상단 13mm, 하단 10mm였다. 무게는 무려 69톤이었다.


엔진은 초기 계획에서 4개를 채택할 예정이었지만, 210마력(150kW)의 Chenu(세뉘) 엔진 2개를 장착했다. 1923년에 Mercedes(메르세데스) 200마력 엔진 2개로 교체되었다가 이후 다시 250마력(180kW)의 Maybach(마이바흐) 엔진으로 교체되었다. 최고 속도는 마이바흐 엔진 채택 이후 15km/h였고, 승무원은 전차장, 운전수, 포수, 장전수, 기관총 사수 4명, 정비공, 전기공, 보조정비공, 통신수까지 총 12명이었다.


사실 이 전차의 생산대수는 10대지만, 아주 역사적인 전차다. 바로 3인용 포탑을 채택한 최초의 전차이기 때문.



1924년에는 영국에서도 새 전차가 도입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영국은 마크 V와 중형전차 마크 C를 갖춘 5개 전차 대대만 남기고 전차 부대를 모두 해체했다.

하지만 1920년, 영국 육군은 경보병 전차를 획득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여기에 Vickers(빅커스)가 참여해 Vickers Light Tank를 만들게 된다. 1921년, 첫 번째로 "암컷" 전차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졌고, 두 번째로 "수컷" 전차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졌다.

두 번째 프로토타입의 경우, 포탑, 격실 전면, 차체 전면이 둥글게 디자인 된 전차였고, 변속기도 신형 변속기를 장착했지만, 이 변속기의 신뢰성에 문제가 있었고, 영국 육군이 좀 더 "전통적인" 디자인을 선호해 첫 번째 프로토타입을 기반으로 신형 전차가 만들어지게 된다.


1923년, 영국 정부의 전차 디자인 부서가 폐지되면서 영국 정부가 전차 개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일이 사라졌지만, 개발 자체는 엎어지지 않았다. 1924년, 빅커스의 신형 전차는 Vickers Medium Tank Mark I(빅커스 중형전차 마크 I)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 Vickers Medium Tank Mark I


이 전차는 주 무장으로 Ordnance QF 3 pounder 2 cwt gun Mk I(오드넌스 3파운드 2센텀웨이트 속사포 마크 I)를 장착했다. 이 포는 47mm 구경에 32 구경장이었다. 부무장으로는 .303 British 탄을 사용하는 호치키스 기관총 4정과 같은 탄을 사용하는 Vickers Gun(빅커스 기관총) 2정을 장착했다. 장갑은 6.25mm, 무게는 11.8톤이었다.


엔진은 90마력(67kW) Armstrong Siddeley V-8 공랭식 가솔린 엔진을 사용했고, 최대 속도는 24km/h였다. 승무원은 총 5명이었고, 여기에도 3인용 포탑을 장착했다.



1925년, 영국군은 중형전차 마크 C를 완전히 대체하기 위해 빅커스 중형전차 마크 I의 개량형을 도입한다.


이 전차는 Vickers Medium Tank Mark II(빅커스 중형전차 마크 II)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사이드 스커트 등의 개선 사항이 일부 적용되었다.


▲ Vickers Medium Tank Mark II


이 전차의 무장은 마크 1과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주포가 Ordnance QF 3 pounder 2 cwt gun Mk II로 교체되어 40구경장으로 늘어났다는 것이 변화의 전부. 장갑은 최소 6.35mm에서 최대 8mm로 약간 늘었다. 따라서 무게도 12.4톤으로 약간 늘어나게 된다.


다만 엔진에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속도는 약간 감소해서 21km/h였다. 승무원은 여전히 5명으로 유지되었다.



참고로 여기에 언급된 전차들은 전부 채택되어 군에 배치된 전차들로, 군에서 채택하지 않은 전차들은 모두 제외했다.



3. 탱캣의 등장


문제는 이렇게 전차가 발전하는 동안, 보병은 그다지 변한 게 없었다는 점이다.

1차 세계대전 서부 전선에서 분명 전차는 독일군 참호선을 돌파했다. 하지만 전차를 따라가서 적지를 점령하고 유지해야 할 보병은 적의 소화기 사격이나 포병에 의해 저지되거나 지연될 수 있었다. 이렇게 보병이 저지되면 돌파한 전차는 고립되었고, 고립된 전차는 쉽게 파괴되었다.

이 문제는 전차가 보병을 전부 엄호할 수 있으면 해결 가능했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차는 르노 FT를 제외하면 전부 크고, 무겁고, 비쌌다. 즉, 대량생산이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이 때문에 보병을 엄호하기 위한 장갑을 갖춘 이동식 1인용 기관총 진지가 고안되었다.


이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낸 사람은 영국 육군의 Giffard Le Quesne Martel(지파드 르 퀴슨 마르텔) 소령이었다. 마르텔 소령은 자기 집 차고에서 자동차 부품과 기계 부품을 이용해 최초의 탱켓을 만들었고, Morris Ltd.(모리스)와 손잡고 자기 프로젝트를 개량한 Martel-Morris 탱켓을 1925년에 전쟁부에 제안했다. 하지만 이 탱켓은 모리스 사가 개발을 그만두며 제대로 채택되지 못했다.

다만, 마르텔 소령의 프로젝트를 본 다른 이들이 탱켓 개발에 뛰어들게 된다.


※ 물론 탱켓의 전성기는 이보다 약간 느린 1930년대긴 하다.

※ Tankette이라는 말은 기존의 Tank에 -보다 작은 것이라는 의미의 접미사 -ette가 붙은 것이다. 이 접미사가 사용되는 대표적인 예시로는 Cigar-Cigarette, Disk-Diskette 등이 있다.


마르텔 소령의 아이디어를 보고 영감을 얻은 회사 중에는 John Valentine Carden(존 발렌타인 카든)과 Vivian Graham Loyd(비비안 그레이엄 로이드)가 설립한 Carden-Loyd Tractors Ltd(카든 로이드 트랙터 회사)도 있었다.

이들은 마르텔 소령의 장갑형 이동식 1인용 기관총 진지 아이디어를 채택했고, 1인승 외에 좀 더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2인승 모델을 만들기도 했다. 영국군에서는 설계안을 받아들였고, 1927년부터 2인승 위주의 생산이 시작되었다. 이 탱켓을 Carden-Loyd tankettes(카든 로이드 탱켓)이라고 한다.


▲ Carden Loyd tankettes


카든 로이드 탱켓은 무장으로 .303 British 탄을 사용하는 빅커스 기관총 1정을 장착했고, 장갑은 6mm~9mm 정도였다. 무게는 1.5톤 남짓이었다.


엔진은 22.5마력 Ford Model T 4기통 가솔린 엔진을 사용했고, 최대 속도는 도로에서 48km/h였다. 승무원은 2명이었다.



4. 1920년대 후반의 전차


1924년 5월, 소련은 전차를 개발하기 위한 "전차국"을 구성하고, 12.1km/h의 속도를 낼 수 있는 경전차를 개발하기로 한다. 이 전차는 16mm 장갑에, 37mm 주포를 탑재해야 했다. 이러한 경전차 요구사항에 걸맞는 것은 르노 FT였고, 개발은 르노 FT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전차는 르노 FT를 베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르노 FT에 사용되던 기존 프랑스제 엔진 대신 이탈리아에서 기술 도입해 АМО에서 생산하던 트럭 엔진을 장착했고, 스프링 서스펜션을 채택해 거친 지형에서의 기동성을 향상시켰다. 이렇게 만들어진 프로토타입에는 T-16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1927년 6월에 테스트에 들어갔다.

하지만 T-16은 실패했다. 트랜스미션의 고장이 너무 잦았고, 폭이 1.5m가 넘는 참호를 넘을 수도 없었다. 따라서 소련은 이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수직 스프링 서스펜션 등을 채택하고 새로운 엔진과 변속기를 장착한 모델을 만들어낸다.


사실 이 모델도 2m가 넘는 참호를 넘으려다 빠지는 등의 문제는 있었지만, 험지 기동성에서 르노 FT나 T-16보다 나았기 때문에 소련은 일단 1928년부터 이 전차를 생산하기로 한다.


이 전차가 Малый Сопровождающий-1(말리 소프로보즈다유시-1. 소형 호위-1. МС-1) 혹은 T-18이라고 불리는 전차다.


▲ МС-1


МС-1의 주 무장은 프랑스제 37mm Puteaux SA 18 포를 소련에서 복제한 물건이었다. 부무장으로는 6.5x50mmSR 아리사카 탄을 사용하는 Автома́т Фёдорова(압토마트 페도로바. 페도로프 자동소총) 2정을 채택했다. 장갑은 6mm에서 16mm였고, 무게는 5.9톤이었다.


엔진은 35마력의 모델 1927로 알려진 피아트 엔진 기반 엔진을 채택했고, 최대 속도는 17km/h였다. 승무원은 2명이었다.



1920년대의 마지막 전차는 Strv m/21-29다.

사실 이 전차는 1918년까지 2대의 프로토타입만 생산한 Leichter Kampfwagen II(경전차 2)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스웨덴에서 독일과 접촉하여 부품을 구입했고, Stridsvagn m/21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했다.

1929년, 스웨덴은 Stridsvagn m/21을 기반으로, 주포를 6.5mm 기관총 2정이나 37mm 포를 사용하고, 엔진을 개량한 신형 전차를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Strv m/21-29다.


▲ Strv m/21-29


무장은 37mm포나 기관총 2정을 장착했고, 장갑은 8~14mm, 무게는 8.8톤이었다.

엔진은 85마력 Scania 1554 엔진을 장착했고, 최대 속도는 18km/h였다. 승무원은 3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무장은 정확히 이 무장 스펙이 어떤지 모르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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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소련이 아리사카 탄을 쓰는 총을 만든 건 적백내전에 일본이 개입했다가 깨지면서 노획한 탄이 많아서 그랬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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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에서는 1930년대 전차를 알아보자.

더러운 백화점 전차가 다음 글부터 나올 거 같은데... 몰?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