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줄거리) 테니스장에서의 운메이적인 만남으로 황태자비가 된 도내탑티어 엄친딸 미치코 황태자비. 그러나 그녀에겐 최종보스 시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1편: https://arca.live/b/singbung/85547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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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일반인들한테 왕 있는 나라를 물어볼 때 나올 정도로 일본의 황실은 나름 유명한 편이긴 하지만 솔직히 우리나라 입장으로선 ㅈ도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나마 엘리자베스 2세(+다이애나비) 덕분에 어느정도 알려진 영국 왕실에 비해 동조선 황실은 ㅈ도 알려진 게 없다 애초에 알 이유도 없긴 하다만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어찌됐든 양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고 이후로도 영국 통합의 상징이 되며 나름의 존경도 받는 영국 왕실과 다르게 일본 황실은

(정신)승리를 보이며 참피엔딩으로 끝을 마무리 한지라 사실 일본 내에서도 진심으로 현 천황과 황실을 모시는 사람들은 8~90대 애국청년들 뿐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그냥 많이 존경받는 연예인 대하는 듯한 느낌이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가십거리 이상도 이하도 안될 때도 존재한단거지


황실 구성원들도 이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라 권력도 재산도 다 빼앗기고 세금루팡(ㄹㅇ 의회에서 돈 타서 씀)이 된 지금까지도 쥐꼬리만한 권력을 좆아 혹은 다른 무언가를 좆아 상호 언플은 기본에 이지메와 좆간질이 넘쳐나는 역대급 콩가루 집안 같은 모습들을 많이 보여줬는데 오늘은 그 중 일부인 시집살이 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전편에도 이야기 했지만 만세일계 다이닛뽄의 황실 최초로 평민 '주제에' 비가 된 미치코 황태자비는 아래를 읽다보면 알겠지만 진짜 온갖 기상천외한 갈굼과 지랄맞은 공작들을 견뎌야 했는데 하나하나 알아보도록 하자

1. 장갑 사건

1959년 1월의 일이다. 약혼 발표 기자회견이 다가오자 쇼다 가문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지금까지 덴노를 알현한 역사가 없던 평민따리 쇼다 가문은, 시아버지될 히로히토에게 첫 인사를 드리러 황궁에 가야 하는 미치코에게 무슨 옷을 입혀 내보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사숙고하여 의상을 골라 미치코에게 입힌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궁내청에 보내어 문의했다. 이 차림으로 괜찮을지를.

당시 궁내청에 문의했던 사진인데 이에 직원은 짧은 장갑은 예의에 어긋난다는 답변을 남겼고 쇼다 가문은 의례용 긴 장갑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나 평민따리에게 그런 게 있을리가. 결국 궁내청 직원이 긴 장갑을 한개 보내주면서

긴 장갑을 낀 미치코는 무사히 일정을 마쳤다. 근데 분명히 일정을 다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에는 아까의 짧은 장갑을 낀 사진이 보내졌고 이에 결혼 반대파들은 껀수 하나 잡았단 속셈으로 바리바리 쇼다 일가에 전화를 걸어 불같이 항의했다. "이래서 평민은 안 된다!!"라는 식으로. 쇼다 가문은 해명하지도 못하고 일일이 정중하게 사과하느라 혼이 났다. 이 사연은 30여 년 후 친정어머니 후미코에 의해 진상이 밝혀진 것이었다. 외손자들과 외손녀(즉 아키히토 자식들)이 딸을 오해할까봐 걱정했기 때문이라고.

2. 창문 사건

1960년의 일이다. 미치코 황태자비는 병원에서 첫 아들 나루히토(현 천황)을 낳고 병원에서 퇴원하여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자들이 사진을 찍자 살짝 창문을 열어 기자들을 배려했는데 이에 나가코 황후와 황족들이 으으딜 감히 귀한 아들님님이 감기라도 걸리려면 어쩔려고 창문을 열었냐고 지지고 볶았다. 그것도 무려 2주 동안이나!

3. 공항 수치플레이

무려 시집온 지 17년이 지나고 1976년, 히로히토와 나가코 황후가 미국으로 순방을 떠날 때 일이다. 황족들은 모두 공항까지 따라나갔는데 이 때 나가코 황후가 정중하게 인사하는 미치코 황태자비를 싹 무시하고 아키히토와만 인사를 나누고 비행기에 훅 올라타 버렸다. 문제는 이게 전 일본에 생중계 중이었단 거지. 덕분에 이 사건 이후로 일본인들 사이에서 미치코 황태자비=이지메 피해자 이미지가 생겼다.

4. 자식 훈육 문제

나루히토(현 천황, 장남)과 후미히토(차남)이 어렸을 때 일이다.

좆같은 시집살이에도 불구하고 미치코 황태자비는 최초의 평민 출신 황태자비답게 여려 파격적인 행보를 선보였는데,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친부모의 품에서 떼어내 신하들에게 양육을 맡기는 전통을 깨고 2남 1녀를 직접 자신의 품에서 젖을 먹여 길렀다.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도 직접 모유 수유를 했지만 유모도 두었다. 하지만 미치코 황태자비는 아예 유모를 두지 않고 직접 수유하다가 모유가 부족하면 분유를 먹였다고. 또한 가족들을 위해 직접 요리를 했고 아이들의 도시락도 직접 만들었다.

결혼 전 연애하던 시절 미치코는 아키히토로부터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들었다. "황실의 전통에 따라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품에서 떨어져 자라났고,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 주신 음식을 먹은 적도 없다."하는 말을 듣고 미치코는 아키히토 황태자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다. 그래서 미치코는 따뜻하고 단란한 가정, 보통 사람들의 평범하고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가정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혼 전부터도 미치코는 "결혼하면 아키히토 황태자에게 손수 카레라이스 요리를 해주고 싶다." 말했다고 한다.

미치코 황태자비는 자녀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미국의 소아과 의사인 벤저민 스포크 박사의 저서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를 영어 원서로 읽으며 육아에 대해 공부하여 나름의 육아 지침을 세웠다. 공무 때문에 시종에게 아이를 맡길 때면 이 지침대로 돌보게 했다. 이는 나루 짱 헌법(나루짱은 나루히토의 애칭)이라고 불리며 많은 일본 부모들의 공감을 샀으며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는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에서 더 많이 팔렸다고 한다. 훗날 차남 부부가 낳은 두 손녀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도 '나루 짱 헌법'에 따라 양육되었다.

근데 사실 이 책 나오고 얼마 안되서 아동심리학의 발달로 ㅂㅅ이 된 책이었는데 다이닛뽄 황실에서는 계속 썼다고 한다 나중에 벌어진 사태를 생각하면 흠.........
아무튼 첫째이자 얌전했던 나루히토에 비해 둘째인 후미히토는 개씹잼민이여서 말썽을 부리는 일이 많았는데, 문제는 이때 미치코가 야단을 치려고 할 때 마다 나가코 황후와 황실 사람들이 가암히 평민따리 주제에 으으딜 귀한 황실 핏줄한테 손을 대느뇨!!라면서 존나게 갈궜다.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싶으면 그렇다. 조선시대에 후궁이 받던 취급과 유사하다. 근데 차이점이 있다면 미치코는 엄연한 하나뿐인 황태자'비'였단 거지 게다가 후미히토는 미치코의 친아들이었다

아무튼 이 갈굼 덕분에 후미히토는 제대로 된 훈육을 받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는 향후 일본 황실의 존폐를 결정할 정도의 엄청난 나비효과의 서막이 되고야 마는데...............

5. 의상 이지메

진짜 개씹유치한 초딩식 이지메질의 끝판왕. 뭐냐면 바로

짤처럼 나머지 황족들이 지들끼리만 뭐 입을지 짜고쳐서 미치코 혼자서 양장을 입거나 다른색 옷을 입게 만드는 고도의 수작질이었다.
알다시피 다이닛뽄의 문화는 혼자 튀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데, 이걸 교묘하게 이용해서 미치코 황태자비한테 엿을 맥이는 걸로도 모자라 언플까지 동원해서 쌍엿을 맥이는 경우도 잦았다 이런십

6. 종교 문제

미치코의 친정 쇼다 가문은 가톨릭 집안으로 당연히 미치코도 그리스도교에 조금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다이닛뽄 황실의 종교는 당연히 신토가 되야 함이 분명하므로 미치코는 시집가면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심을 끊었는데 문제는 그리스도교에 관심이 많던 시동생 마사히토 친왕이 미치코 황태자비에게 관련 질문을 몇개 하였고 그걸 받아준 미치코는 또 처맞아야 했다. 대답 안해줬어도 줘팼을거면서 이새끼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93년(!), 오랫동안 시집살이에 시달린 미치코 황후(당시 황후임, 황태자비도 아니고!)는 너무나 힘들었는지 유럽 순방에서 바티칸에 가서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할 수 있냐고 요청했는데 의외로 황실측에선 순순히 받아들여줬다. 뭐 이젠 황후니까 그냥 좆까기에는 좀 그랬지

그 대신 갔다온 후 황실에는 엄청난 갈굼의 폭풍이 몰아닥친다. 근데 당시 황태자비도 아니고 황후인 미치코를 누가 족쳤겠는가? 나가코 상황후지, 덕분에 이 사태 이후로 미치코 황후는 쓰러져 실어증이 생겼을 정도로 맘고생을 많이 했다

지금도 관련 인물들 사이에선 미치코 상황후는 한번 단단히 좆된 이후로 손을 뗐을 뿐 아직까지 가톨릭 신앙을 버리지 못했단 게 중론이라고 한다. 에도 시절부터 박해받던 간악한 귀축영미의 종교가 상황후까지 배출하다니 지옥에서 쇼군과 도조가 부랄잡고 울부짖을 듯

7. 기타 이지메

1. 황궁에 오페라 하우스가 지어졌을 때의 일이다. 그 하우스의 주인인 나가코 황후가 황족들을 초대했는데,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미치코 황태자비만 그냥 투명인간 취급을 하며 기수열외를 때려버렸다고 한다. 요즘은 군대도 이러면 '소원수리' 당하는데

2. 나가코 태후가 1989년 남편, 사촌동생, 두 딸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정신적 충격이 클 때였다. 이에 감정을 풀 곳이 필요했던 나가코 태후는 대대적으로 언론을 동원해 "미치코 황후 때문에 히로히토가 생전에 아끼던 궁성의 숲이 파괴되었다", "연회 등 각종 행사도 미치코 황후의 승낙이 없으면 진행되지 못한다", "한밤중에도 과일을 깎으라거나 라면을 끓이라는 주문을 하기 때문에, 시종들이 쉴 틈이 없다" "시종들을 상대로 갑질을 한다" 등등의 온갖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아까 이야기했던 바티칸 사태+나가코 태후의 궁극기를 처맞은 미치코 황후는 실어증으로 쓰러지면서 GG를 치게 되고, 이 사태 이후로도 나가코 태후는 무려 2000년까지 살아서 미치코 황후를 괴롭히다가 죽었다.

그렇게 2000년 6월 16일 나가코 태후가 사망하면서 미치코 황후는 장장 40년에 걸친 지옥의 시집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계속 전편에서 강조했던 진실이 기억나는가? 아키히토와 미치코의 결혼은 테니스 코트에서 시작된 낭만적인 결혼이라고 온갖 매스컴에서 다루어졌지만, 사실 이 모든게 치밀하게 계획된 공작이었다면?


진실은 이렇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닛뽄은 많은 변화와 혼란을 겪었고, 이는 황실도 마찬가지였다. 천황의 직계들을 제외한 수많은 방계 황족들과 귀족들이 신적강하로 인해 평민으로 전락했고, 신으로 숭배되어 오던 천황 일가는 인간선언을 했으며, 황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잃고 '상징'으로 전락했다. 따라서 황실이 폐지되지 않고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동안 살아오던 방식들을 버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야만 했다.

나가코 태후와 나머지 귀족들의 반발과 다르게, 현 황실 인사들은 황실이 국민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선 이제 구시대적인 귀족집 아가씨가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연예인' 같은 황태자비가 필요하다고 여겼고, 황실의 '개혁파' 인사들은 비밀리에 여자대학교를 중심으로 기준에 걸맞는 여성들을 탐색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미치코 상황후도 있었던 것이다. 개혁파 인사들은 상당히 부유한 평민 가문 출신이며, 서구적이고 현대적이며, 아름답고 총명한 미치코 상황후를 새로운 시대의 황태자비에 적합한 인물로 꼽았고, '우연한 만남'을 가장하여 극비리에 황실 휴양지인 가루이자와의 테니스 코트에서 아키히토 황태자와 미치코 상황후가 만나 가까워지도록 만들었다.

어떤 식이었냐면 첫 만남에서 황실 인사들이 직접 "황태자 전하, 이쪽은 이번에 명문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를 수석 졸업한 쇼다 미치코 양입니다. 미치코 양, 이분은 황태자 전하이신데 아직 나이에 맞는 여자친구가 없으시니 가끔 함께 테니스라도 쳐 주세요."라는 식으로 양념을 친 후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둘의 관계에 관심을 가졌다.

즉 의외로 황실에서 결혼이 만장일치로 통과된 이유는 애초에 이 모든게 영화처럼 계획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이어진 두 사람의 연애 결혼과, 황실 입성 후 미치코 상황후가 보여 준 파격적인 면모들을 생각하면, 개혁파 인사들의 작전은 대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면 미치코 상황후는 구시대의 '관습'을 버리지 못한 나가코 태후+보수파 황족들과 구시대의 황실 '직위'를 버리지 못한 개혁파 황족들 모두에게 철저히 이용당한게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이런 뒷 사정과 다르게 아키히토와 미치코의 사랑만큼은 찐 사랑이었고 이후로도 미치코가 온갖 갈굼을 먹을때마다 아키히토가 은근히 감싸주는 등 부부 금술은 좋았다고 한다.

둘의 단란한 시간 모음. 아래는 그 씨발놈의 테니스가 맞지만 아직도 부부는 테니스를 자주 즐긴다고 하더라

어쨌든 2000년 나가코 태후가 죽고 나서 그렇게 자유의 몸이 된 미치코 황후, 이제 미치코 황후 이후로는 그렇게도 지독히 당했으니 황실에서 이지메가 완전 근절되고 크-린 시월드가 되겠지?

그러나 그게 가능하면 군대 똥군기도 한세대만에 사라지겠지. 애초에 거대한 황실을 미치코 혼자서 바꿀 수 있을리도 없었고, 덕분에 아직 남아있는 황실의 구시대적 문화+아까 언급했던 나가코 황후가 일으켰던 나비효과+황실의 권력다툼 덕분에 아키히토의 큰며느리인 마사코 황후(미치코 상황후 아님)은 더 개ㅈ같은 시집살이를 당하게 되는데......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