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벽두, ‘미래파’라는 새로운 시 사조로 알려졌었던 시인 황병승의 시집, 육체쇼와 전집을 리뷰해 보겠다.


‘미래파’란, 2005년 권혁웅 평론가에 의해 쓰이기 시작한 용어로, 신세기인 21세기에 들어 기존 서정시 유파와 완전히 상반된 길을 걸어 2000년대 초 시단을 강타한 유파이다.


사실 미래파 시의 경우 일반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편은 아니다. 미래파의 대표주자로 손꼽히는 황병승의 경우에도, 길거리 아무나 붙잡아다 시인 황병승을 아느냐고 묻는다면 9할 9푼 9리가 모른다고 할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현대시, 그것도 21세기 들어 새롭게 발흥하기 시작한 현대시의 경우, 대중적인 인기가 처참한 수준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자면 이는 12년에 걸친 학교 생활 속에서 ’시‘라는 대상을 공부하듯 배우게 되면서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시‘는 막연히 지루하고 구태의연한 대상이라는 편견을 심어 놓은 탓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교과서에 나오는 시들은 대부분이 20세기 초중엽에 나왔기 때문에 현대의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기 힘들다는 점도 단점이 아닌가 싶다. 시에 대해 질릴 대로 질려버렸기 때문에 어른이 되고 난 후로도 서점가에 들러 현대 시집을 찾아볼 엄두를 못 내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교과서에 나오는 시들과 필자가 앞으로 소개하고자 하는 ’미래파‘의 시들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교과서에 나오는 시들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이딴 게 시냐, 이렇게 써도 되느냐 하는 거부감이 들지도 모른다. 새삼스러운 반응은 아니다. ‘미래파’가 처음 나왔을 때의 기성 문인들의 반응도 이처럼 반발에 가까웠다.

이런 게 시냐는 것이다.


우리가 ‘시’ 하면 떠올리기 쉬운 윤동주 시인의 시와 황병승의 시집 육체쇼와 전집에 나오는 시 한 편을 비교해 보겠다.


윤동주—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다분히 서정적인 분위기, 특정 글자수의 반복과 운율감이 눈에 띈다. 행과 연의 구분도 뚜렷하다. 때때로 스며드는 자연물(달, 구름, 하늘…)에 대한 표현도 많다.


이번에는 황병승의 시이다. 그의 첫 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황병승—여장남자 시코쿠


하늘의 뜨거운 꼭짓점이 불을 뿜는 정오


도마뱀은 쓴다

찢고 또 쓴다


(악수하고 싶은데 그댈 만지고 싶은데 내 손은 숲 속에 있어)


양산을 팽개치며 쓰러지는 저 늙은 여인에게도

쇠줄을 끌며 불 속으로 달아나는 개에게도


쓴다 꼬리 잘린 도마뱀은

찢고 또 쓴다


그대가 욕조에 누워 있다면 그 욕조는 분명 눈부시다

그대가 사과를 먹고 있다면 나는 사과를 질투할 것이며

나는 그대의 찬 손에 쥐어진 칼 기꺼이 그대의 심장을 망칠 것이다


열두 살 그때 이미 나는 남성을 찢고 나온 위대한 여성

미래를 점치기 위해 쥐의 습성을 지닌 또래의 사내아이들에게 날마다 보내던 연애편지들


(다시 꼬리가 자라고 그대의 머리칼을 만질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약속하지 않으련다 진실을 말하려고 할수록 나의 거짓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어느 날 누군가 내 필통에 빨간 글씨로 똥이라고 썼던 적이 있다


(쥐들은 왜 가만히 달빛을 거닐지 못하는 걸까)


미래를 잊지 않기 위해 나는 골방의 악취를 견딘다

화장을 하고 지우고 치마를 입고 브래지어를 푸는 사이

조금씩 헛배가 부르고 입덧을 하며


도마뱀은 쓴다

찢고 또 쓴다


포옹을 할 때마다 나의 등 뒤로 무섭게 달아나는 그대의 시선!


그대여 나에게도 자궁이 있다 그게 잘못인가

어찌하여 그대는 아직도 나의 이름을 의심하는가


시코쿠, 시코쿠,


붉은 입술의 도마뱀은 뛴다


장문의 편지를 입에 물고

불 속으로 사라진 개를 따라

쓰러진 저 늙은 여자의 침묵을 타넘어


뛴다, 도마뱀은


창가의 장미가

검붉은 이빨로 불을 먹는 정오


숲 속의 손은 편지를 받아들고

꼬리는 그것을 읽을 것이다


(그대여 나는 그대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강렬한 거짓을 말하련다)


기다리라, 기다리라!



시 제목부터 일반적이진 않다. 여장남자 시코쿠.

황병승은 그의 시에서 lgbtq와 관련된 등장인물들을 자주 등장시킨다. 레즈비언, 게이 등등… 사회에서 소수자로 여겨지는 사람들. 현재에는 어찌저찌 각 성소수자별 축제도 열리는 등 그나마 그들의 자유가 보장되는 편이지만.


황병승이 이 시를 썼을 때만 해도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그는 이 시를 2005년에 썼다.


‘시코쿠’란 일본의 한 섬의 명칭이기도 하면서 이 시에서는 인명처럼 쓰인다. 시코쿠, 시코쿠 하며 마치 사람을 부르는 듯한 인식을 풍긴다. 이 또한 꽤 신기한 부분인데 황병승은 당시 사회 전반에 쉽사리 퍼졌던 반일 정서를 완전히 거스르는 행위를 선보이기도 한다.


일본인 등장인물을 가져온다든지, 다양한 일본 문물(특히나 만화)에서 레퍼런스를 가져오기도 한다. 때로는 너무 일본어 번역투가 아닌가 싶은 등장인물의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때문에 일본 문물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그의 정서나 시의 분위기가 잘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또한 자신의 욕망(그것이 설령 사회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정서이더라도)을 드러내기를 서슴지 않으며 욕설이나 자학적 구절, 똥과 같은 날것의 이미지들을 적극 활용한다. 읽다 보면 버겁지만 끝까지 읽게 되는 날것의 맛이 있는 것이다.


황병승의 시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구태의연함과 지루함의 늪에 사로잡혀 있던 기존 시단에 새바람을 일으켰다는 평가, 혹은 그저 그가 서브컬처(티브이 영화, 게임, 만화 등등…)의 아류작을 쓴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


필자의 경우 기존의 방식이 아닌 새 방식, ‘낯설음’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가 좋은 시라 생각하기에 황병승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기존의 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되레 시를 읽다 지쳐 시집을 덮게 만드는 반작용이 생기기도 한다.


길이 많이 샌 것 같아 마지막으로 필자의 해석을 곁들여

육체쇼와 전집에 수록된 시, 가죽과 이빨을 리뷰해 보겠다.


황병승—가죽과 이빨


사랑과 헌신을 전면에 내세우고 돌아서는 즉시 파기하며 악의에 차 봉사하고 극기를 비웃으며 재활의지를 꺾고 좀먹게 하고 자신의 진정한 노예로 태어나 모든 형제자매들의 잔혹한 주인으로 군림하며 오로지 타인을 짓밟을 때에만 의지를 불태우고 조용히 단호하게 음탕한 정신을 찬양하며 성심 성의를 다해 술과 약물에 의존하고 열렬히 과거에 집착하고 화해를 원하면 입구를 투쟁을 요구하면 출구를 봉쇄하고 정당화하고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외치며 타인의 자유를 강력히 구속하고 체력을 과시하고 난장판을 사랑하며 뒷거래에 주력하고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위중한 몸으로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끝없이 요구하고 뭉개고 뭉개고 앉아서 자신을 향한 경멸에 찬 시선을 모조라 무시하며 기침으로 끝없는 기침으로 회피하며 입 속에 고인 가래가 기도를 막을 때까지 조용히 그리고 단호하게 마지막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


셰퍼드가 사람을 구분하는 데 3초…… 너무 길다



시의 제목 ‘가죽과 이빨’은 인간의 특성임과 동시에 셰퍼드의 특성이기도 하다.


가죽을 사람의 피부를 낮잡아 이르는 말로 쓰기도 하며, 이빨 또한 사람의 이를 낮잡아 이르는 말로 쓰기도 한다.

일단 시의 호흡이 참 길다. 줄바꿈을 하지 않은 채 끝없이 써 내린 듯한 시이다. 점입가경으로 마치 사람의 말이 하면 할수록 빨라지듯, 누군가에게 토로하듯이 침을 튀기면서 읊는 듯하다. 시의 내용은 대부분이 인간의 모순과 역겨운 면모, 바람직하지 않으며 마치 인간이 아닌 인두겁을 쓴 짐승 같은 면을 말하고 있다. 


그러다 시인은 잠시 숨을 고르고 나직이 한탄하듯 읊조린다.


’셰퍼드가 사람을 구분하는 데 3초…… 너무 길다‘


셰퍼드가 사람을 구분하는 데 3초가 걸리는데, 그 시간이 너무 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셰퍼드의 시선으로 시에서 말하는 그런 인간의 역겨운 면모를 볼 때, 짐승인 자신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구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은 아닐까?


처음에는 그들을 동류로 인식하다 다시금 그들이 인간임을 깨닫는 데에 3초나 걸린다는 것. 이런 풀이를 지닐 수 있는 구절이 아닌가 싶다.


다음으로는 또다른 현대 시인 김경주 시인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라는 시집을 리뷰해 보겠다.

리뷰글에 능수능란하지 않아 부족하긴 하지만 열심히 해보겠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