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이 우글우글하게 모여서 경복궁 경회루 누각에 꽉꽉 들어차게 앉았다. 1932년 중건할 당시 복층으로 중건한 경회루는 황제의 기자회견을 위한 장소로 상정되었다.


지난 18년간 단 한 번도 쓰이지 않아 거미줄에 토끼굴까지 드리웠던 경회루가 깨끗하게 치워졌고 반짝반짝하게 닦이는 마룻바닥에 기자들이 늘어서 앉아 있었다. 경회루 남쪽을 향하여 놓인 간이 용상에 천천히 광만제가 나타나 앉았다.


기자들이 일제히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광만제가 천천히 용상에 앉아 심호흡을 하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18년 전의 그 기자분들은 몇 분 안 계시군요. 대부분 새로 들어오신 분들이시겠지요. 아니지, 짐의 입장에서나 새로 들어오신 분들이지, 10년 이상씩 계셨던 분들도 계시겠구려."


그가 마이크 없이도 우렁우렁하게 온 경회루를 메우는 목소리로 말했다.


"결자해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맺은 매듭은 자기가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부로 짐은, 짐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종양을 직접 도려내기로 하였습니다.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은 다 짐의 책임입니다."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저 전제황정에 미쳐 있던 황제가 갑자기 왜 저러는 것인가? 황제가 한번 둘러보면서 말했다.


"또한 앞으로 30일 뒤에 중추원의관 만민투표를 시행하고, 군인들의 낡고 위험한 병장기들도 쇄신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18년 전, 짐이 우매하고 불매한 탓에 벌어졌던 부마광합... 민주화운동에 대한 배상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민주화운동! 부마광합의 난이 아니라, 부마광합 민주화운동! 그 말을 듣는 순간 기자들은 저 황제가 정말로 그 과거의 광만제가 맞는지 큰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광만제가 천천히 용상에서 일어나더니,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행동을 했다. 그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면서 외쳤다.


"만백성 여러분께 이 우매한 사람이 용서를 비노니, 부디 백성들에 대한 학살과 만행을 용서하시고, 이 사람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옵소서."


물론 그런 사죄 하나만으로 그가 짓밟고 파괴하고 불태웠던 230만 명의 백성들이 살아 돌아올 일은 없었고, 그 원한이 풀릴 일도 없었다. 광만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가 한 마디 덧붙였다.


"그때의 진압에 참여했던 장병들이나 무신들에게 비난을 가하지 마시옵고, 부디 이 용렬하고 부덕한 군왕에게 비난의 화살을 겨누시오소서. 국정의 쇄신과 조정의 정리가 끝나면 모든 책임을 지고 황제의 자리를 태자에게 넘기겠으니, 백성들은 나라의 재건과 중흥을 지켜보아 주시오소서."


광만제가 천천히 일어나서 다시 용상에 앉았다. 기자들이 일제히 손을 들고 질문을 퍼부었다. 광만제가 한 중년의 기자를 지목했다.


"그래요. 질문하시오."


"DHS의 정치부 기자 박주염이라 하옵니다. 폐하, 본디 부마광합의 난이라면 치를 떨고 털이 곧추서시던 분께서 어찌 부마광합의 난에 대해 이와 같이 사죄를 하시옵니까?"


"죄를 지었으면 필히 속죄를 해야 하는 것. 짐은 오히려 속죄가 늦었습니다. 18년이나 걸렸으니까요."


광만제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곧 다른 기자가 질문했다.


"폐하, 조정을 쇄신하겠다고 작심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옵니까?"


광만제가 의미심장하게 미소지었다.


"스승이 있었습니다."


"스승이라니요, 형정원의장 김한래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그 분 말고."


광만제가 바닥을 보며 꿈을 꾸듯이 대답했다.


"그보다 좀 젊은 스승님이 한 분 생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