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훈이 눈물을 흘리면서 편전 앞에 조아리고 앉아 있었다. 안에서 쩌렁쩌렁하게 분노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그 호통이 온 전각을 따라 메아리쳤다. 김경훈이 애타는 목소리로 밖에서 외쳤다.


 “폐하, 소신을 벌하시옵고 아들을 살려 주소서!”


 곧 전각이 조용해졌다. 이어서 천천히 문이 열리고, 김민현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환하게 웃는 광만제가 걸어나왔다. 김민현이 전각 계단을 먼저 폴짝폴짝 뛰어 내려와 아버지를 덥석 껴안았다.


 김경훈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광만제가 천천히 걸어서 내려와, 김민현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이미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졸업했다지?”


 “그렇사옵니다.”


 김민현이 고개를 숙였다.


 “허면 이번 대과에 응시하거라. 짐이 사헌부 자리 하나를 내주겠다. 너는 지금부터 짐의 저격수요, 짐의 정밀타격병이 되어, 상소로서 간적들을 하나씩 쏘아 맞히거라.”


 광만제가 빙긋 웃으면서 김민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놀란 김경훈이 벌떡 일어나서 황제 앞에 조아리며 물었다.


 “폐하, 어찌 이러시옵니까?”


 “어찌 이러냐니.”


 광만제가 은은한 미소를 띠고 밝게 대답했다.


 “아들놈 출세하는 거 보기 싫은가 보오?”


 “저... 그것이...”


 김경훈이 눈을 질끈 감았다. 차마 여기서 자기 아들을 정계에 들이지 말아달라 할 수가 없었다. 광만제가 껄껄 웃음을 터뜨리곤 뚜벅뚜벅 걸었다. 김경훈과 김민현이 그 뒤로 쫄래쫄래 따라갔다. 그 중년의 황제가 근정전 앞에서 수군수군거리는 대신들 앞에 섰다.


 홍지아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 지금 즉시 저 아이를 의금부로 압송하고 사헌부 대신들에게 책임을 묻겠사옵니다.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광만제는 김민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칭찬하는 것으로 홍지아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고맙다. 네 덕에 짐이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홍지아는 청천벽력을 맞은 듯 고개를 들고 광만제를 올려다봤다. 광만제가 천천히 근정전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


 “지난 18년간 정전의 전각들과 편전의 전각들에 먼지만 쌓이고 거미줄만 늘어졌는데, 이제 저것들을 다시 쓸 날이 온 것 같구나.”


 홍지아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폐, 폐하. 갑자기 어찌 이러시는 것이옵니까?”


 “어찌 이러냐니. 황제가 나랏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죄란 말이오?”


 “...아니옵니다.”


 그 때 뒤에 서 있던 류주영이 달려나와서 양손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황제 폐하 만세!”


 이어서 황국민정당 당원들이 일제히 양손을 들며 외쳤다.


 “만세! 만세!”


 곧 대한정우회도 양손을 들어 환호했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홍지아도 반 강제로 양손을 들고 황제의 재림을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김경훈도 함께 환호했지만, 여전히 근심 어린 표정으로 자신의 어린 아들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렇게 제국의 가장 큰 두 정당의 당수들이 동의하지 않은 채, 대한제국의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위대한 황제가 대궐로 귀환했다.


 광만제가 김민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집으로 가거라. 곧 과거령이 떨어질 것이니, 반드시 응시토록 하거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김민현이 광만제 앞에 엎드려 절했다. 광만제는 그 어린아이가 하는 절 앞에 자신의 무릎을 반쯤 꿇어 조아리고,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니다. 짐이 더 망극하구나.”


 광만제가 병사 다섯을 불러 김민현을 호위케 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보면서 말했다.


 “지금 당장 각 조의 판서와 참판들, 정승들은 편전으로 모이시오. 국정을 논할 것이오.”


 

+ + +


 

 광만제가 편전에 앉아서 대신들을 둘러보았다. 맨 앞에 앉은 홍지아는 그야말로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죽을 때까지 암군으로 남을 줄 알았는데.


 광만제의 눈길이 대신들을 한 번 훑었다. 그가 곧 입을 열었다.


 “짐이 서류들을 보니, 본래 중추원의관 만민투표(국회의원 선거)가 5년에 한 번씩 이루어져야 하는데, 지난 18년간 투표 세 번이 모두 취소가 되어 중추원의관들이 투표 없이 4연임을 하고 있다 들었소이다.”


 “그렇사옵니다.”


 “하여 시급히 투표를 시행하고 중추원을 쇄신하여야 한다 보오.”


 그러자 홍지아가 다시 한 번 마른침을 삼켰다. 이미 299석의 중추원에서 168석을 장악한 대한정우회였다. 그동안 벌인 실책을 생각한다면 황국민정당에게 중추원 의석을 무더기로 빼앗기고도 남을 것이다.


 홍지아가 고개를 숙이며 아뢰었다.


 “폐하, 허나 만민투표에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하옵니다. 현재 제국의 재정상태로는 그 많은 예산을 감당할 수가 없나이다.”


 그러자 광만제가 싸늘하게 명령했다.


 “허면 영상 그대가 투표비용을 대도록 하시오.”


 “예?”


 홍지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광만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광만제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홍지아를 보며 말했다.


 “왜, 싫으면 우리 세무조사 한 번 할까?”


 그 말을 듣자 홍지아가 격하게 반발했다.


 “폐하! 이러시는 법이 어디 있사옵니까. 어찌 나라의 일을 소신의 사재로 하란 말씀이시옵니까!”


 “사재로 하면 아니되니까 그대의 사재를 좀 공재로 만들어야겠다는 뜻이오. 싫으면 말고.”


 광만제가 밖을 보며 외쳤다.


 “밖에 있느냐!”


 문이 열리고 병사들이 걸어들어왔다. 광만제가 곧바로 명령했다.


 “의금부에 영상의 사재를 조사하여 부당하게 취한 재물이나 토지를 한 치도 남김없이 찾아내라 명하라. 부당하게 취한 재물이 있을 경우 모두 몰수하고 그 경로를 조사하여 저지른 부정에 연루된 자들은 삭탈관직하고 형정원에 기소하고 유배 삼천 리를 구형하고 재물을 취하는 과정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있었다면 참형을 구형하고 토지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라. 만약 영상의 당여들이 이에 반발하면 총살하라.”


 그러자 홍지아가 다급히 광만제 앞에 우당탕 엎드리면서 외쳤다.


 “폐하! 폐하! 폐하!”


 그녀가 덜덜 떨면서 빌었다.


 “선거 비용을... 선거 비용을 모두 부담하겠사옵니다.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광만제가 눈을 찌푸리고 명했다.


 “방금 내린 하교를 철회하노니 병사들은 물러가라.”


 병사들이 조용히 물러났다. 광만제가 천천히 일어나면서 홍지아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잘 들으시오, 영상.”


 홍지아가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그 강력한 황제 앞에 굴복했다. 광만제가 다가가서 홍지아의 앞에 주저앉으면서 말했다.


 “뭔가를 부당하게 취했다는 것은, 부당하게 빼앗길 것을 각오했다는 뜻이오.”


 홍지아가 머리를 땅에 다시 처박으면서 소리쳤다.


 “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니다, 폐하!”


 광만제가 몸을 일으키고 명했다.


 “예참!”


 김경훈이 고개를 조아렸다.


 “예, 폐하.”


 “기자회견을 준비하시오. 짐이 기자들을 직접 만나 그동안의 직무 태만을 백성들에게 사죄하고, 부마광합의 난을 진압할 때 흘린 피에 대하여 보상할 것을 알리겠소.”


 광만제가 홍지아를 다시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보상금은 유족들에게 각각 5천 냥씩 나누어줄 것이오.”


 홍지아가 고개를 들면서 현실을 부정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 그걸 왜 소신을 보시며 하교하시옵니까?”


 “세무조사 한 번 할까요?”


 “아, 아니옵니다. 당연히 소신이 지출하겠사옵니다.”


 “부마광합의 난에서 군에 의해 죽어간 백성은 모두 이백삼십만. 그럼 대략 115억 냥 정도 지출하면 될 것 같소.”


 비록 조정이 퇴락했다지만, 여전히 막대한 세수의 종착지인 조정의 1년 예산보다 많은 어마어마한 액수. 홍지아가 기겁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광만제가 차갑게 물었다.


 “왜요, 세무조사 한 번 할까요?”


 “아, 아니옵니다.”


 “도승지는 짐의 뜻을 형정원에 전하라. 형정원의장이 판단하여 적정액을 책정할 것이다.”


 “예!”


 도승지가 급히 밖으로 나갔다.


 

+ + +

 


 기자들이 우글우글하게 모여서 경복궁 경회루 누각에 꽉꽉 들어차게 앉았다. 1932년 중건할 당시 복층으로 중건한 경회루는 황제의 기자회견을 위한 장소로 상정되었다.


 지난 18년간 단 한 번도 쓰이지 않아 거미줄에 토끼굴까지 드리웠던 경회루가 깨끗하게 치워졌고 반짝반짝하게 닦이는 마룻바닥에 기자들이 늘어서 앉아 있었다. 경회루 남쪽을 향하여 놓인 간이 용상에 천천히 광만제가 나타나 앉았다.


 기자들이 일제히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광만제가 천천히 용상에 앉아 심호흡을 하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18년 전의 그 기자분들은 몇 분 안 계시군요. 대부분 새로 들어오신 분들이시겠지요. 아니지, 짐의 입장에서나 새로 들어오신 분들이지, 10년 이상씩 계셨던 분들도 계시겠구려."


 그가 마이크 없이도 우렁우렁하게 온 경회루를 메우는 목소리로 말했다.


 "결자해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맺은 매듭은 자기가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부로 짐은, 짐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종양을 직접 도려내기로 하였습니다.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은 다 짐의 책임입니다."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저 전제황정에 미쳐 있던 황제가 갑자기 왜 저러는 것인가? 황제가 한번 둘러보면서 말했다.


 "또한 앞으로 30일 뒤에 중추원의관 만민투표를 시행하고, 군인들의 낡고 위험한 병장기들도 쇄신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18년 전, 짐이 우매하고 불매한 탓에 벌어졌던 부마광합... 민주화운동에 대한 배상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민주화운동! 부마광합의 난이 아니라, 부마광합 민주화운동! 그 말을 듣는 순간 기자들은 저 황제가 정말로 그 과거의 광만제가 맞는지 큰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광만제가 천천히 용상에서 일어나더니,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행동을 했다. 그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면서 외쳤다.


 "만백성 여러분께 이 우매한 사람이 용서를 비노니, 부디 백성들에 대한 학살과 만행을 용서하시고, 이 사람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옵소서."


 물론 그런 사죄 하나만으로 그가 짓밟고 파괴하고 불태웠던 230만 명의 백성들이 살아 돌아올 일은 없었고, 그 원한이 풀릴 일도 없었다. 광만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가 한 마디 덧붙였다.


 "그때의 진압에 참여했던 장병들이나 무신들에게 비난을 가하지 마시옵고, 부디 이 용렬하고 부덕한 군왕에게 비난의 화살을 겨누시오소서. 국정의 쇄신과 조정의 정리가 끝나면 모든 책임을 지고 황제의 자리를 태자에게 넘기겠으니, 백성들은 나라의 재건과 중흥을 지켜보아 주시오소서."


 광만제가 천천히 일어나서 다시 용상에 앉았다. 기자들이 일제히 손을 들고 질문을 퍼부었다. 광만제가 한 중년의 기자를 지목했다.


 "그래요. 질문하시오."


 "DHS의 정치부 기자 박주염이라 하옵니다. 폐하, 본디 부마광합의 난이라면 치를 떨고 털이 곧추서시던 분께서 어찌 부마광합의 난에 대해 이와 같이 사죄를 하시옵니까?"


 "죄를 지었으면 필히 속죄를 해야 하는 것. 짐은 오히려 속죄가 늦었습니다. 18년이나 걸렸으니까요."


 광만제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곧 다른 기자가 질문했다.


 "폐하, 조정을 쇄신하겠다고 작심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옵니까?"


 광만제가 의미심장하게 미소지었다.


 "스승이 있었습니다."


 "스승이라니요, 형정원의장 김한래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그 분 말고."


 광만제가 바닥을 보며 꿈을 꾸듯이 대답했다.


 "그보다 좀 젊은 스승님이 한 분 생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