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나약하게 보는 이씨 조선..


시조()는 영웅()의 자질로, 금와()의 여러 아들에게 미움을 당하자, 난을 피하여 졸본()에 이르러 우거진 숲을 헤치고 나라를 세워, 새로 제도를 마련하기에 겨를이 없었고, 위엄과 덕망이 날로 융성하여 돌아와 붙좇는 이가 또한 많았으며, 송양()을 항복받고 말갈()을 물리쳤으며, 행인()을 취하고 옥저()를 멸망시켜서, 한 지방에 웅거하여 삼한()을 호시탐탐 날카롭게 노려보았으니, 어찌하여 이렇게도 쉽게 성공을 할 수 있습니까?

유리()는 유복자()로 다른 나라에 있으면서, 그가 승습()하기는 어려운 일인데, 다행이 왕위를 이어서 선비()를 항복 받고 양맥()을 멸하였으며, 나라를 개척하여 점차 넓히어 나갔으나, 작은 죄에 분개하여 두 신하를 베고, 용맹스러운 것을 미워하여 태자()를 죽였으니, 이는 한탄스러울 따름입니다.

대무()는, 총명하고 굳세어서 괴유()를 미천()한 데에서 발탁하고, 두지()에게 군국()을 위임하였으며, 구도()는 탐욕스럽고 비루하였기 때문에 배척을 당하였고, 발소()는 지능()이 있기 때문에 포상되었으며, 개마()를 정벌하고 낙랑()을 멸망시키자, 부여()는 달아나 숨어 스스로 피하고, 구다()는 위엄을 두려워하여 와서 항복하니, 나라를 넓게 개척함에 나라의 형세가 더욱 번창하였으나, 애석하게도 부인()의 참소를 믿어 호동()과 같은 어진 아들이 있었는데도, 오히려 스스로 밝히지 못하고 죽게 하였으니, 그가 일을 처리한 것을 더듬어 보면, 진()나라 헌공()의 부류라 하겠습니다.

민중()은 상()을 당하여서도, 연회를 즐기고 사냥하는 데 빠졌으며, 향년()이 길지 못하였고, 모본()은 사납고 어질지 못하여, 간하는 신하를 해치고 죽였으니, 그가 좋게 죽기는 어려웠던 것입니다.

태조()는 나라를 향유한 지 90여 년에, 늙고 혼미하여 정사에 게을러지자, 후사를 부탁함에 사람을 제대로 임용하지 못하였으므로, 화가 충신과 사랑하는 아들에게 미쳤으니, 아무리 영토를 넓히고 나라를 강하게 한 공훈이 있었다 하더라도, 무엇을 족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차대()는 총애받던 아우로서, 왕위를 엿보아 온 지 여러 해였는데, 그가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는 데도 마음을 고치지 않고 주살()을 자행()하였으니, 천도()는 되돌려 주기를 좋아하므로, 그에게 화가 미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신대()는 난을 피하여 도망나갔으나, 나라 사람들이 마음이 쏠려 그를 추대하여 왕위에 세웠으니, 의당 답부()가 시역()한 죄상을 먼저 밝혀서, 대의()를 폈어야 할 것인데, 자기를 끌어다 세워준 공을 덕으로 생각하여, 도리어 그를 총애하여 임용하였습니다.

고국천()은 영명()한 자질로서, 무언가 해보려는 뜻을 분발하여, 권세를 가진 간신을 죽이고 유일()로 있는 인재를 찾아내었으며, 초택()에서 을파소()를 초빙하여, 국상()으로 발탁해 임용하여 정성을 다해 국사를 위임시키고, 또 인재를 천거한 자에게 상을 주었으니, 진실로 쇠퇴한 세상에서 없었던 성대한 일이었으나, 후사()가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죽은 시체가 식기도 전에 우비()가 음란한 추행으로 궁방()을 어지럽혔던 것입니다.

산상()은 우비와 간음()하여 나라를 얻었으니, 천륜()을 어지럽힌 데 대하여 언급해야 하겠지만, 말하기조차 추잡한 일입니다.

동천()은 천성이 관인()하여 임금의 도량이 있었으나, 충신의 간함에 성을 내었으며, 상국()을 침범해서 갑자기 승리하자 곧바로 교만하더니, 한번 패하게 되자 자신이 도망가는 신세를 낭패하여, 망국()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음은 어찌된 일입니까?

중천()은 비록 일컬을 만한 덕은 없으나, 능히 총희()의 무고()를 분변하여 의심치 않고 죽였으니, 어찌 그리 용단이 있었습니까?

서천(西)은 숙신()을 방어하고 단노성()을 빼앗자, 여러 부락이 두려워하였는데, 만년에는 시기함으로 인해 동기()를 죽였습니다.

봉상()은 사납고 강퍅함이 더욱 심하여, 숙부와 아우를 죽였으며, 간하는 말에 성을 내고 스스로 방자하여 궁실을 높이고 담장을 조각하였으니, 백성들이 학정()에 시달리고 마침내 자신에게까지 화가 미쳤으며, 미천()은 일찍이 황야()로 달아나 어려운 일을 골고루 겪었으므로, 의당 지혜로운 덕망과 술책이 있었을 것인데도, 일컬을 만한 덕이 없고 한갓 상국()을 침범하는 것으로서 일을 삼았습니다.

고국원()은 모용씨()의 변란을 당하여 패해 도망가 숨고, 어머니와 아내는 사로잡혀갔으며, 아버지의 시체 또한 발굴되고, 성곽()과 궁실()은 불에 타 거의 없어졌으며, 늙은이·어린이, 진귀한 보물들을 빠짐없이 약탈해갔으므로, 사직()을 거의 보존할 수 없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무릎을 꿇고 신()이라 청하고 볼모를 바치며 조공을 보냈으니, 이는 의당 와신상담()할 때인데도, 도리어 자신의 원수는 잊고 자신의 가까운 이웃을 씹어대어, 백제와 흔단을 만들어 적봉()에 피를 묻히게 하였으니, 애석한 일입니다.

소수림()은 태학()을 세워 자제()를 가르쳐서 무엇인가 일을 해보려는 것 같았으나, 이단()과 사설()에 의혹되어 동진()의 중을 맞이하고, 사찰을 세워서 부처 받드는 데 더욱 마음을 썼으니, 동한()에서 부처에 아부하는 처음의 군주가 되었습니다.

고국양()은 강한 이웃 나라를 침략하고, 중국()을 소요스럽게 하여 전쟁으로 피폐해졌는데도, 오히려 또 부처를 섬기고 복을 구하였으나, 복은 얻지 못하고 갑자기 죽었으니 의혹된 일입니다.

광개토()는 웅장하고 위대하고 기이한 재주가 있어, 능히 싸우면 이기고 치면 취하였으며, 장수()는 더욱 오랜 수명을 누리어 나라와 군사가 부강()하였습니다.

문자()·안장()·안원()은 모두 중재()로서 평범한 군주였으며, 양원()은 무략()이 굳세지 못하여 나라의 형편이 날로 위축되었고, 평원()은 한재()를 만나 걱정하여, 쓸데없는 경비는 정지시키고 급하지 않은 업무는 제쳐놓았으며, 농상()을 권장하고 궁핍한 자를 진휼()하였으니, 훌륭한 점이 있었습니다.

영양()은 처음 즉위()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할 뜻을 두었으나, 하늘을 두려워하고 대국을 섬기는 의리를 알지 못하여, 말갈()과 작당하여 상국()을 침략하였으며, 수()나라 문제()가 장수에게 명하여 토벌함에 온 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였으니, 의당 순리를 본받아 죄를 뉘우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도, 바야흐로 또 신라를 치고 백제를 침범하여 병화()를 좋아하였으므로, 다시 수나라 양제()의 토죄()를 빚게 한 것이며, 백만 대군이 요갈()을 지나 살수()를 건너와서, 소혈()을 공격해 전복시키는 것이 목전에 다다랐던 것입니다. 을지문덕()의 응변()과 양현감()의 반란이 없었더라면,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었습니다.

영류()는 어리석고 나약하여, 적신() 연개소문()이 시역()의 마음을 가졌으나, 능히 조기에 분변하지 못하여 견빙()의 화를 이르게 하였고,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제압하려고 하였으나, 치밀하지 못하여 화가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보장()은, 연개소문이 왕위에 세운 바 되어 권세가 신하에게로 옮겨지고, 정령()이 임금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았으니, 나라는 모두 연개소문의 나라이고 백성도 모두 연개소문의 백성으로, 모든 일을 마음대로 자행하여 한없이 흉악하였으며, 제()의 조서()를 어기고 사신을 가두므로 죄역()이 가득하였습니다. 당나라 태종()이 노()하여 친히 6사(, 천자()의 군대를 말함)를 거느리고 토벌하였는데, 아무리 주필()의 전역()이라도 뜻을 얻지 못하고 돌아가고, 고구려의 나라 형편도 또한 위태로워졌으니, 이는 비록 연개소문의 죄악이라고 하나 또한 보장이 임금답지 못한 소치였습니다. 그 후 태종은 유감이 풀리지 않아, 자주 해마다 장수를 명하여 나가 토벌하게 하고, 장차 재차 거병()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 군신()이 협력하여 나라의 보존을 도모할 때인데도, 임금은 위에서 어둡고 신하는 아래에서 포악하여 사치는 한도가 없었으므로, 나라의 일이 날로 그릇되어 갔던 것이며, 연개소문의 여러 아들은 제각각 서로 다투어, 심지어는 중국()에 호소하여 향도()가 되었으니, 아무리 고종()이 보통 재질의 군주라 하더라도, 하나의 늙은 장수를 보내어 일거()에 섬멸하기를 썩은 나무 꺾듯이 하여, 고씨() 7백년의 종사()가 하루 아침에 폐허가 되었으니, 슬픈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