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사학계는 기자 조선을 믿지 않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은()나라 태사() 기자()는 주()의 제부()였다. 주가 법도가 없이 하자, 비간()은 간하다가 죽고, 미자()는 버리고 떠났으며, 기자()는 곧 머리를 흩뜨리고 미친 체하면서 종[]이 되고는 일찍이 말하기를, ‘상()나라가 망하게 되면 나는 (다른 왕조()의) 신복()이 되지 않겠다.’고 하였다. 주()나라 무왕()이 주()를 토벌하고 기자에게 찾아가 이야기하니, 기자는 홍범 구주()를 진술()하였다. 무왕이 조선()에 (기자를) 봉()하니,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는 백성들에게 예의()와 밭에 나가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쌈하는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백성을 위하여 금법 팔조()를 설시하였는데, 서로 사람을 죽였으면 당시에 죽이는 것으로써 보상()하고, 서로 상해()하였으면 곡식으로써 보상하며, 서로 도둑질한 자에게는 남자는 몰수하여 그 집의 사내종[]으로 삼고 여자는 계집종[]으로 삼게 하였다. 스스로 속죄()하려면 사람마다 50만 금을 내게 하였는데, 비록 면죄되어 양민이 된다 하더라도 세속에서 오히려 그를 수치스럽게 여겼으므로, 시집가고 장가가는 데 배필이 되어 주지를 않았다. 이러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마침내 서로 도둑질하지 않아서 문을 닫아 놓는 일이 없었다. 부인()은 정절과 신의를 지켜 음란하지 않았고, 그 전야()와 도읍()을 열었으며, 변두()에 담아 마시고 먹도록 하여 인현()의 교화()가 있었다. 그 후손이 대대로 조선의 후()로 있었는데, 주()나라가 쇠하게 되자 연()나라가 왕()이라 칭하며 장차 동쪽으로 땅을 노략질하려는 것을 보고 또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는 군사를 일으켜서 연나라를 치고 주나라를 높이려 하였다가, 대부() 예()가 간하므로 그만두고, 예를 시켜 서쪽으로 가서 연나라를 달래니, 연나라도 또한 멈추고 공격하지 않았다. 
그 후 자손이 점차 교만하고 사나워지자, 연나라가 이에 장수를 보내어 그 서쪽을 공격하여 2천여 리의 땅을 차지하고는 만번한(滿)까지 경계로 삼으니, 조선이 드디어 약해졌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에 이르러서는 장성()을 쌓고 요동()까지 이르자, 40대손() 기비()가 왕위에 올라서는 진나라를 두려워하여 드디어 진나라에 복속하였다. 기비가 죽고 그 아들 기준()이 즉위한 지 20여 년에 진항()이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나라·제()나라·조()나라의 백성이 근심하고 괴로워하다가 차츰 도망하여 기준에게로 돌아왔다. 노관()이 연()나라 왕이 되기에 이르러서는 기준이 연나라와 패수(浿)를 경계로 삼았으며, 노관이 배반하여 흉노()로 들어가고, 연나라 사람 위만(滿)이 망명()하여 무리 1천여 인을 모아 북상투를 틀고 오랑캐의 옷을 입고서,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와 영원히 서쪽 경계에 살면서 번병()이 되니, 기준이 그를 믿고서 제배하여 박사()로 삼고 규()를 주었으며, 백리()의 땅을 봉()하여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이 도망친 무리들을 꾀어서 점차 많아지자, 이에 사람을 보내어 기준에게 거짓으로 고하기를, ‘한()나라의 군사가 열 갈래의 길로 온다’고 하고는 들어가 숙위(宿)하려 하면서 드디어 기준을 습격하니, 기준이 싸우다가 대적하지 못하고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달아났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범엽()이 말하기를, ‘기자()가 쇠퇴하는 은()나라의 운수를 버리고 조선() 땅으로 피해 와서 팔조()의 규약을 설시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금법()을 알아서 고을에는 음란하거나 도둑질하는 짓을 없게 하고 밤에는 문을 걸지 않으며, 유순()하고 삼가는 것이 풍습이 되어 도의()가 보존되었는데, 교조()를 생략하고 간편하게 하면서도 신의()를 적용하게 하였으니, 그는 성현()이 법을 제작한 원리를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함허자()는 또한 말하기를, ‘기자가 중국()에서 5천 인을 데리고 조선에 들어왔는데, 그 가운데 시서()·예악()·의무()·음양()·복서()의 무리와 백공기예()가 모두 따라갔었다. 이미 조선에 이르자 언어()가 통하지 않아 통역하여 그것을 알게 하였으며, 시서()를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중국의 예악 제도()와 부자 군신()의 도리와 오상()의 예의를 알게 하였고, 팔조()로써 가르쳐서 신의()를 숭상하고 유술()을 돈독하게 하였으며, 중국의 풍교()를 양성()하여 군사로 싸움하는 것을 숭상하지 말게 하고, 덕으로써 강포()한 것을 굴복시키게 하니, 이웃 나라가 모두 그 의리를 사모하여 서로 친하여졌고, 의관 제도()가 모두 중국과 같기 때문에 시서 예악()의 나라니 인의()의 나라니 하는 것이 기자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는데,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ㅡ 조선조 동국 통감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