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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빨리 도망쳐도, 어디로 숨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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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 속에서 그녀는 울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두에게서 사랑받던 아이가 지금은 모두에게서 미움받고, 멸시받고, 상처받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가 그 아이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고 그 아이를 이유없이 미워하고 있었다. 


 모두가 그 아이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때, 그녀는 그 아이의 편에 서 있었다. 자매들에게 미움을 받아가면서, 다른 이들에게 경멸을 받으면서 모두가 미워하는 아이의 편을 들었다. 


 비록 소수였지만 자매들 중 몇몇이 끝까지 그녀와 그녀가 지켜주고자 하는 그 아이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었고, 몇몇은 그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따랐기에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그녀가 일궈온 모든 것들, 그녀가 쌓아온 모든 명예, 그녀가 하고자 했던 것들을 모두 버리고 그녀는 미움받는 아이와, 몇 되지 않는 그녀와 함께하는 자매들과 함께 어디론가 떠났다. 그 아이를 지켜주기 위해서.


 꿈에서 깨어난 라비아타를 맞이한 것은 무너진 오르카 호의 모습과 여러 의미에서 몰락해버린 자매들, 그리고 안 그래도 몸이 성치 않은 가운데서도 다른 이들을 돌봐주려 애쓰는 콘스탄챠들과 바닐라들이었다.


 꿈 속의 그녀와는 정반대로 현실의 그녀는 눈 앞의 승리를 위해서 지켜야 할 주인을 버린 역적이었고, 고통받는 사람의 슬픔과 절망을 무자비하게 외면해버린 위선자였다. 애덤 존스의 비참한 몰락과 죽음, 에바 존스의 분노를 잊어버린 패륜아였고, 그녀가 그토록 증오해 마지않던 두 괴물,  앙헬과 김지석이 했던 짓을 따라한 멍청이였다.  그녀를 사랑해준 자매들은 물론 그녀를 믿고 따랐던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을 파멸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었고 지금은 혼자서 몸을 가누는 것조차 하지 못해서 자매들을 고생시키고 있는 쓸모없는 돼지에 불과했다. 


 누군가의 숨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오자 라비아타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녀를 고모라고 부르는 더치걸만한 크기의 검은 용이 라비아타가 누워있는 의자에 가까이 달라붙은 채로 자고 있었고, 그녀 주변으로 또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 잔뜩 달라붙어서 자고 있었다. 


 오르카를 떠나지 못하는 바이오로이드들은 자는 시간에조차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때가 있었다. 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이 자는 중에도 육신의 고통에 시달렸고, 그녀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후회와 뒤늦은 죄책감, 그녀들이 겪는 고통 등으로 인해서 악몽을 꾸곤 했다. 이 섬에 온 이후로는 악몽도 육신의 고통도 많이 줄어들었지만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엘프리데가 곁에 있을 때만큼은 악몽에 시달리는 일도, 고통에 몸부림치는 일도 없이 편안하게 잘 수 있었다. 


 엘프리데를 내려다보던 라비아타가 손을 뻗어서 엘프리데의 날개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비록 만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에는 온갖 사고를 치고 다녀서 바이오로이드들로 하여금 뒷목을 잡게 만들었지만, 지금은 그녀의 존재가 오르카의 바이오로이드들에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희망을 주고 있었고, 고통받는 자매들에게 고통과 슬픔을 잊을 수 있게 해 주고 있었다. 또한 어떠한 문명의 이기도 쓸 수 없고 이들이 자랑하던 능력도 모두 쓸 수 없게 된 지금 엘프리데가 일행에게 제공해주는 불과 냉기는 절대로 작은 도움 정도가 아니었다.


 엘프리데가 여러가지 일을 할 수 있고, 여러 부분에서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 바이오로이드들은 조금씩 그녀에게 더 많은 일을 시키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엘프리데도 언니들의 일을 거들어주거나 언니들을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일을 하고 있지만, 이대로 간다면 점점 더 그녀에게 지워지는 일과 부담은 많아질 것이다.  


 마치 유일한 인간이었던 옛 주인에게 지나친 부담을 지웠던 것처럼.


 그런 일이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되었다. 


 비록 바이오로이드들이 불만을 가지거나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아직 모래성을 쌓으면서 놀고 싶어할 어린 아이에게 너무 많은 일을 시킬 수는 없었다. 엘프리데의 날개를 어루만지던 라비아타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콘스탄챠를 부르자, 그녀가 조용히 라비아타에게로 다가왔다. 


 오르카 저항군을 설립하기 전부터 그녀와 함께했던 콘스탄챠-416은 모든 바이오로이드들 중에서 라비아타와 가장 가까웠던 바이오로이드였고, 지금도 대다수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미움이나 원망을 받는 라비아타를 돌봐주는 몇 안 되는 이들 중에서 가장 라비아타와 가까운 사람이었다. 물론 그녀 또한 라비아타에게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기는 하지만, 설령 라비아타가 옛 주인의 편을 들었다 하더라도 자신들이, 그리고 오르카 바이오로이드들의 대부분이 옛 주인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던 이상 결국 똑같은 결말을 맞이했을 거라는 생각 또한 하고 있었기에 다른 이들만큼 그녀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가만히 서서 자신의 말을 기다리는 동생에게 라비아타는 다른 지휘관들이 일어나거든 엘프리데와 관련해서 꼭 할 이야기가 있다고 전해줄 것을 부탁했다. 대부분의 지휘관들도 라비아타를 원망하거나 멸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최소한 엘프리데와 관련된 이야기라고 하면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으러라도 올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콘스탄챠-416이 물에 적신 수건으로 라비아타의 몸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콘스탄챠가 라비아타의 몸을 거의 다 닦아주었을 때 엘프리데가 몇 번 몸을 뒤척이다 날개를 펼치면서 일어났다. 라비아타와 콘스탄차, 그리고 옆에 누워있는 노움과 이그니스를 날개로 쳐 버리고, 꼬리로 레이븐을 잘못 건드린 엘프리데가 확 잠이 깬 듯한 모습으로 자신이 친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사과했다. 대상만 바꾸면서 사과의 말을 반복하는 엘프리데에게 미소를 지은 라비아타가 아침 인사를 건넸다. 


 "잘 잤니, 엘프리데?"


 [미안해, 고모. 잘 잤어?]


 "잘 잤단다."


 그녀가 실제로 저지른 일들 및 현재 그녀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슬프기 그지없는 꿈이기는 했지만, 잘 잔 것은 사실이다. 


 힘없이 자신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자신의 거대한 가슴에 엘프리데가 얼굴을 파묻자, 라비아타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엘프리데의 날개를 다시 어루만졌다. 엘프리데의 고모들과 이모들이 그녀에게 좋은 가족이었을지는 몰라도 이런 부분에서의 교육은 많이 미흡했든지, 아니면 엘프리데의 종족이 이런 쪽에서 엉큼한 기질이 충만한 모양이었다.


 한참동안 라비아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엘프리데가 고개를 들어올리자마자 레이븐이 엘프리데를 끌어안았고, 노움과 마리아, 이그니스와 스노우페더, 파니가 여차하면 엘프리데를 빼앗아가려는 것처럼 레이븐에게 가까이 달라붙었다. 그 모습을 본 콘스탄챠들은 그저 쓴웃음을 짓거나 보지 못한 척 넘어가고, 바닐라들은 하나같이 혀를 차거나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쯤이면 지휘관들이 일어났으리라고 생각한 콘스탄챠-416이 함교를 나서자, 엘프리데와 레이븐, 파니, 그리고 엘프리데와 항상 함께하는 네 바이오로이드들이 그 뒤를 따라서 함교를 나섰다. 


 "엘프리데가 있으니 아침부터 시끄럽군요."


 바닐라들 중 하나가 라비아타에게 꿀물을 가져다주면서 투덜거리듯 말했다. 언제나 엘프리데가 함교에 오면 시끄럽네 뭐가 어쩌네 투덜거리는 바닐라들이었지만, 그녀가 함교에 있으면 분위기도 그렇고, 어쩐지 모르게 그녀들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여러 번 들어온 바닐라의 불평 아닌 불평에 라비아타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편안한 표정을 지은 채로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라비아타를 여러 감정이 뒤섞인 눈빛으로 쳐다보던 바닐라가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돌봐야 할 사람도 많고 일도 많은 바닐라에게 일이 적어지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모래사장에 엘프리데와 그녀를 따라나간 바이오로이드의 모습이 보일 때쯤 지휘관급 바이오로이드들이 함교에 들어섰다. 몸을 가누는 것조차 불가능한 라비아타와는 달리 나머지 바이오로이드들은 약해지거나 불편한 곳은 있을지라도 최소한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가능했다. 지휘관들과 함께 들어온 콘스탄챠-416과 다른 콘스탄챠가 라비아타가 앉은 의자를 지휘관들 쪽으로 돌렸다.


 "무슨 일로 불렀나, 라비아타 전 통령?"


 "혹시라도 엘프리데를 우리 지도자로 삼아서 오르카 저항군을 부흥시켜 보자든가 그따위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길 바래."


 별다른 감정이 실리지 않은 마리의 말과 그와는 정반대로 빈정거리는 투가 역력한 레오나의 말을 들은 라비아타의 미소가 쓴웃음으로 변했다.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고 그렇게 할 이유도,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엘프리데가 하는 일이 너무 많이 늘어나는 것 같아서, 그것 때문에 이야기를 나눴으면 해서 불렀어요."


 "......확실히 엘피에게 이것저것 많이 시키고 있지요, 요즘."


 세레스티아가 라비아타의 말에 제일 먼저 긍정의 뜻을 나타냈다. 아무런 안전장비도 첨단장비도 없고 몸도 예전같지 않은 지금 벌꿀이나 벌집을 채집하는 것은 매우 위험했기에, 이러한 일을 나설 때마다 항상 엘프리데를 대동했다. 


 벌꿀이 먹고 싶다고 꿀벌집도 아닌 말벌집을 건드렸다가 호된 맛을 본 경험이 있었던 엘프리데인지라 처음에는 안 따라가려고 했다가 자기가 안 가면 언니들이 벌들한테 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벌꿀 먹고 싶다는 욕심에 결국 엘븐 및 페어리 시리즈 바이오로이드들과 함께 벌꿀 채집에 동행했고, 전기 브레스의 위력을 다소 약하게 하는 대신 범위를 넓게 잡으면 벌들을 쉽고 안전하게 잡으면서 벌꿀과 벌집을 채집할 수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전기에 튀겨진 벌들이 제법 괜찮은 간식거리가 된다는 사실을 안 이후로는 적극적으로 벌꿀 채집에 따라나서곤 했다.


 비록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은 엘프리데가 벌을 집어먹는 것을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엘프리데 양이 도와주면 편리하기는 하옵니다."  


 소완을 비롯한 요리 담당 바이오로이드들 역시도 엘프리데에게 이것저것 일을 시키고 있었다. 엘프리데가 모래로 벽돌을 만드는 것을 본 이후로는 그릇 등의 간단한 토기 만드는 일을 맡겼고, 전기 브레스가 벌레들을 잡는데 효과적인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안 이후로는 브레스를 사용해서 말린 고기나 생선에 달라붙는 파리들과 벌레들을 튀겨버리는 일도 맡겼다. 순간적으로 강력한 화력이 필요할 때에는 엘프리데에게 불을 뿜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음식 쓰레기들을 비롯한 쓰레기들의 소각 또한 엘프리데가 주로 담당했다. 위험한데다 제대로 작동할지 장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각되었지만 포츈과 그렘린 등의 엔지니어들이 엘프리데를 데리고 빙고(氷庫; 얼음창고) 및 불가마를 만들려고 하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엘프리데에게 계속해서 일거리를 떠맡기는 것은........ 역시 문제가 있겠네요."


 레아의 말을 들은 칸이 뭐라고 이야기하려다가 말았다. 다른 이들도 그녀와 똑같은 생각을 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지금 그녀들이 처해있는 상황에서는 엘프리데가 많은 일을 떠맡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떤 전자장비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빠르게 높은 화력의 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와 전기와 냉기를 다룰 수 있는 존재는 엘프리데가 유일했고, 아직까지 활용하지는 않고 있지만 비행이 가능한 것 역시도 그녀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엘프리데에게 일을 계속해서 몰아주게 되면, 그녀에게 몰리는 일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결국 그녀의 불만이 쌓이다 폭발하거나, 심신 양면으로 지쳐버린 나머지 무너지거나, 혹은 엘프리데에 대한 기대치를 멋대로 높인 바이오로이드들이 멋대로 그녀에게 실망하게 되는 세 가지 중 하나의 결과만이 남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벌집과 벌꿀을 채취하는 일에 있어서는 엘피의 도움이 불가피할 것 같아요."


 잠시 생각한 세레스티아가 이에 있어서는 물러서지 않으려는 듯한 어조로 말하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리데 없이 별다른 능력이 없는 바이오로이드들만으로 벌집을 건드리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사냥 쪽에서는 엘프리데의 도움은 딱히 필요없을 것 같군."


 반면에 사냥을 주로 하는 칸과 레오나, 마리, 홍련은 엘프리데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엄밀하게 말해 엘프리데는 사냥에 짐이 되면 짐이 됐지 도움이 되는 존재는 아니다. 이들이 사냥을 하는 곳은 탁 트인 들판이 아닌 숲이라서 엘프리데가 정찰을 해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고, 오히려 주된 사냥감이 되는 동물들은 엘프리데의 존재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다 엘프리데의 사냥 솜씨는 한 물 간 브라우니보다도 못했다. 한 번 데리고 간 사냥 때 허탕만 열심히 치다가 결국 한 마리도 못 잡은 엘프리데의 모습을 본 군용 바이오로이드들은 엘프리데가 야생의 존재나 수렵을 주로 하는 사회의 일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조리 쪽에서는 엘프리데 양이 도와주는 편이 도움이 되기는 합니다만, 꼭 필요하다 싶은 경우나 엘프리데 양이 자발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하는 것 이외에 일을 시키는 것은 자제하겠사옵니다."


 ".......고마워요, 소완 주방장."


 엘프리데가 빠지면 바이오로이드들의 일이 그만큼 늘어날 텐데도 선선히 협조하는 소완에게 라비아타가 감사의 말을 건넸다. 그런 그녀에게 겉으로는 미소를 지은 소완이 마음 속으로는 과연 라비아타가 생각하는 것만큼 엘프리데의 일을 줄일 수 있을까, 그리고 그녀와 함께 일하는 조리 담당 바이오로이드들을 포함해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의 일이 얼마나 늘어날까를 걱정했다. 엘프리데의 성격이라면 결국 보다 못해서 도와주려 할 것이고, 결국에는 라비아타가 이야기를 꺼내기 전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까 싶었다.

 

 홍련은 굳이 이들이 엘프리데의 일거리를 줄이네 어쩌네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만일 엘프리데가 힘들다고 하면 그때 가서 일을 줄이면 되는 일인데, 굳이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하기 싫어하는 것도 아닌데 그녀의 의견도 묻지 않고 일거리를 줄이네 마네 하는 것은 오히려 엘프리데의 뜻을 무시하는 행동이 아닌가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엘프리데가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무리할 가능성이나, 엘프리데에게 바이오로이드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일거리를 자꾸 떠맡기는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도 부정하지는 못했다. 결국 의미없는 이야기가 된다 하더라도, 다시 엘프리데가 많은 일을 떠맡게 되고 언젠가 다시 이야기가 나오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이야기를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마친 지휘관들이 모래사장에서 노는 엘프리데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이제는 모래성 쌓기가 아니라 모래 벽돌 도시 건설 프로젝트가 되어버린 엘프리데의 작품은 오르카의 함교에서도 그 대략적인 형태를 볼 수 있을 정도의 규모가 되어 있었다. 파니와 레이븐도 이제는 나뭇가지나 흙으로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 엘프리데와 같이 어디에 뭘 짓는 것이 좋을까, 이번에는 뭘 만드는 게 좋을까를 의논하면서 바닥에다가 뭔가를 지을 장소를 표시하거나 자기들 나름대로의 청사진 같은 것을 모래사장에다 그렸다. 


 "요즘은 나무 막대와 아교를 이용해서 뭘 만드는 모양이예요."


 최근 들어 소완과 포츈, 엘븐 및 페어리 시리즈 바이오로이드들이 아교와 어교, 밀랍을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엘프리데는 이를 이용해서 이것저것 다양한 장난감을 만들려고 시도했고, 바이오로이드들도 이를 이용해서 이전의 것보다 조금 더 나은 장비를 제작하고 있었다. 물론 현재 사냥에 나가는 바이오로이드들의 숫자에 비해서는 만들어지는 아교와 어교의 양이 그리 많지 않아서 시간이 걸리겠지만, 지금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교와 어교를 만들 수 있다는 것과 그것으로 지금 쓰는 것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점점 다양한 걸 시도하네."


 "얼마 전에는 커다란 악어 모양 같은 걸 만들려고 했었어요."


 비록 재질의 문제와 더불어 화력 조절 실패 등등의 문제로 인해서 실패하고 있기는 하지만, 모래로 벽돌을 만들어 도시 모양을 만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동물이나 여러가지 형태로 뭔가를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지금 레이븐과 파니와 함께 도시 근처에 뭔가 커다란 것을 만들려 하는 엘프리데를 지켜보던 지휘관들의 얼굴에 기묘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뭔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실패하던 옛 주인의 모습이 이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처음에는 그런 옛 주인에게 격려와 위로를 하던 그녀들은 나중에는 비난과 매도를 퍼부어댔다. 니가 그러면 그렇지, 니가 제대로 하는 게 뭐가 있냐, 내 그럴 줄 알았다,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가 하는 일마다 이런 식으로 그를 대했고 어쩌다가 결과가 좋게 나왔어도 그에 대해서 제대로 칭찬해주지 않았다. 나중에는 그가 뭘 하든지, 그것이 성공했든지 실패했든지,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지 아예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레오나가 입술을 깨물었고, 마리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라비아타와 레아, 콘스탄챠와 세레스티아, 홍련과 소완은 주변의 바이오로이드들의 도움을 받아서 무언가를 만드는 엘프리데의 모습을 머릿속에 확실히 담아두겠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칸과 아스널, 블러디 팬서, 샬럿과 슬레이프니르의 눈에 비친 엘프리데의 모습 위로 그녀들이 버렸던 옛 주인의 모습이 잠깐씩 어른거렸다.


 그녀들이 처음 이 곳에 왔을 때만 하더라도 오르카 호의 바이오로이드들의 분위기는 그녀들의 몸 상태만큼이나 엉망이었다. 능력도 무기도 부하들의 신망도 모두 잃은 채 절망과 죄책감에 사로잡힌 지휘관들은 무기력했고, 나머지 바이오로이드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정도로 심신이 피폐해져 있거나 서로 싸우기 바빴다. 부하들은 이 모든 것이 상급자들과 지휘관들의 잘못이라면서 비난을 퍼부어댔고, 제조사별로, 혹은 부대별로 파벌을 나눈 바이오로이드들은 서로에게 원망과 책임을 돌렸다. 


 그런 그녀들을 불완전하나마 하나로 묶어준 것이 엘프리데의 존재였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사람 말을 할 줄 알고, 입에서 불과 번개와 냉기를 뿜어내는 커다란 도마뱀 정도로만 여겼던 그녀가 오르카 호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바이오로이드들은 서로에게 원망과 증오를 돌리는 것을 자제하게 되었다. 그녀의 존재가 없었다면 오르카 호의 바이오로이드들은 증오와 경멸을 견디지 못해 서로를 죽이고 죽어버림으로서 전멸했든지, 아니면 그나마 마음이 맞는 바이오로이드들끼리 뭉쳐서 이 섬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져버렸을 것이다. 


 이들의 옛 주인이 오르카 호의 바이오로이드들에게 가져다준 가장 큰 선물은 서로간에 불신과 불화가 존재하는 각자 다른 제조사와 다른 배경을 가진 바이오로이드들을 하나로 묶었다는 것과 더불어 그녀들에게 살아가야 할 확실한 이유를 제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바이오로이드들은 그녀들의 사령관에게 더 많은 것을 바랬고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것을 사령관이 제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자 옛 주인에게 실망했고 그를 버렸다. 버려지는 존재의 기분이 어떤지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엘프리데를 쳐다보는 지휘관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솟구쳤다. 이전에 그녀들이 옛 주인에게 저질렀던 죄악을 이번에는 그녀에게 저지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두려웠다. 언제까지 엘프리데와 그녀들이 지금과 같은 관계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먹구름이 잔뜩 끼는 그녀들의 마음 속과는 달리 바깥의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고, 그녀들이 어떤 마음인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리 없는 엘프리데는 해맑게 웃으면서 그녀 주변의 바이오로이드들과 함께 노는 데에만 열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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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들이 버린 사령관에게 버림받은 오르카 호나 음경(ㅈ.......)같은 작자가 집권하던 오르카에 비하면 여기는 레알 파라다이스이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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