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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전의 부끄러움의 파도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가시지가 않았고, 그 어떤 유혹보다도 치명적이었던 아스널의 말 한 마디는 내 기억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치 말과 혀로 거사를 치른 것처럼 우리 둘 다 거친 숨을 최대한 들리지 않게 몰아 쉬었다. 그런 말을 스스로 해야 했던 아스널도 부끄러워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도 우리 둘은 문 앞에서 마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 … 그대는 조금 진정이 되었나?”

 

“… 아스널은 어떤데.”

 

"나는… 아직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나도 마찬가지야...”

 

 

아직 우리 둘 다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 언제까지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

 


불행인지 다행인지, 난 아스널보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 같다.



"… … 으으...”

 

"아스널?”

 

 

아스널은 계속 찡그린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내가 알던 이미지와는 너무 딴 판인데.

 

 

"… …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말했건만, 이렇게나 부끄러울 줄은 몰랐다...”

 

"… 그야 그런 이야기를 하면 누구나 그렇겠지.”

 

“나, 나도 그대와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다!

그나마 절제를 해서 말한 것이 그런 것인데, 오히려 그러니 더 부끄러운 것 아니겠나!

차라리 이럴 거면 절제하지 말 것 그랬다...!!”



... ... 절제한 게 그 정도면 머리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걸까?

 


"그대도 머리 속으로는 내가 추찹하다고 생각하겠지..."


"… 추잡한 건 아니지만...”

 

“나도 이렇게 말한 적은 처음이다!

내가 함께 하고픈 사람에게 말한 적은 더더욱 처음이고!

말했잖나! 나도 괴물은 아니라고…

…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일 뿐인데...”



나도 이런 건 굉장히 부끄러운데, 아스널은 유독 면역이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안 그런가? 그대와 같은 사람들은 이런 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건가?

어찌 그렇게 멀쩡하게 서있을 수 있는 건지 궁금할 따름이다...

... ... 난 바이오로이드라 잘 모르겠군..."


 

아스널은 울듯한 표정을 지으며 주저 앉아버렸다. 이렇게 아이 같은 면이 있는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이렇게 직접 보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고. 나는 아스널 앞에 같이 주저 앉고는 아스널은 안아주며 말했다.

 


 

"쩝… 내가 너무 무심했다. 그지?”

 

"… … 어찌 이것이 그대 잘못이겠나.

이렇게 흐드러지게 부끄러울 줄 몰랐던 내 잘못이지...”

 

“그래도 내가 같이 웃어 넘겼으면 이렇지는 않았을 텐데.

미안해.”

 

"… … 그대는 전부터 그러는군.

그대가 미안할 일이 아니면서도 미안하다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내가 그때 괜히 심술 내지만 않았어도 아스널이 이렇게 말할 일은 없었잖아.

아스널이 내 탓을 해도 이상할 건 아니지.”

 

"… 그대는 어떻게 해서든 이 일을 그대 탓으로 만들어야 속이 후련한가?

나는 내가 말하겠다고 했고, 그래서 이런 말도 했다.

그대를 원망할 수는 없다...”

 

“그래도 쉽게 기억에서 떨쳐버리기 쉽지는 않지?”

 

"… … 그 동안 이런 말을 할 상대가 없었으니… 

나도 이렇게 부끄러울 줄은 몰랐다.

내가 이렇게 부끄러움에 격하게 반응할 줄도 몰랐고...”

 


 

아스널은 계속 고개를 푹 박고 있었다. 주변 복도를 걷는 사람들이 없었으니 망정이지, 누가 보면 내가 울렸다고 소문이라도 났을 것이다.

 

 

 

"아스널?”

 

"… 왜 그런가...”

 

“솔직히 놀랐어.

나도 아스널이랑 그렇게 많은 것들을 하고 싶었거든.”

 

"… !”

 

 

아스널은 토끼눈이 되어서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아스널이랑 손깍지 끼고 몇 시간 동안 몸을 비비면서 밤 새우고 싶고,

키스로만 몇 번이나 절정할 수 있는지 실험해보고 싶고,

둘 다 눈 가리고 낮부터 밤까지 계속 서로의 몸을 계속 더듬으면서 애태우고 싶어.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

 

"… … 참 변태 같은 사령관이군. 후후.”

 

 

아스널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변태인 게 잘못인가?

아스널이 그만큼 매력적인걸.”

 

"… … 여기서 날 더 부끄럽게 할 셈인가?”

 

"아니, 그냥… 생각을 해봤지.

만약 내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내 그런 말을 했는데, 그 여자가 아무 말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어떨지.

내가 싫어졌을까? 혐오하면 어쩌지? 내가 괜한 말을 했나?

아마 온갖 걱정이 들겠지? 난 그 여자 마음을 모르니까.

그러다 보면 서럽기도 하겠지? 그런 말을 했던 것이 후회되니까.

그 걱정들을 떨쳐버릴 수가 없으니까 부끄러움이 계속 머리에 남을 것 같더라고.”

 

"… ...”

 

“그래서 아스널이 오해하지 않게 분명하게 말해야겠더라.

나도 아스널은 무엇보다 아끼고 있고, 아스널이 원한다면 아스널이 하고 싶은 모든 걸 다 해주기 위해 노력할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나도 아스널과 함께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싶으니까.

내가 너무 무심했다는 거지. 미안해. 먼저 말을 했어야 했는데.”

 

"… … 반칙이지 않나...”

 

 

아스널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얼굴을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그러지를 못하고 있다. 나도 나름 내 성적 취향을 열심히 말했는데, 이런 반응이면 어색해진다. 아마 아스널도 그런 기분이었겠지.

 

 

"아스널?”

 

"… ...”

 

“전에 말했잖아. 난 아스널을 엄청 좋아한다고.

그러니까 이제 내 얼굴 좀 봐주면 안 될까?

나도 엄청 부끄럽단 말이야.”

 

“… … 시간을 조금만 줄 수 있나?”

 

"얼마든지.”

 

 

아스널의 호흡이 점점 차분해졌다. 원래 한 번도 부끄러웠던 적 없던 사람이 유독 이런 것에 약하지 않은가.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잘 모르니까. 아스널도 그랬던 것 같다. 우리들이 왜 흑역사를 잘 잊지 못하는지 생각해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흑역사가 생겼는데, 고개를 못 들만도 하지.

 

 

 

 

"… 후우...”

 

 

아스널은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촉촉한 것을 보면 오죽 서러웠나 보다.

 

 

“… 미안하다. 내가 말을 하고 내가 이런 꼴이라니, 우습기 짝이 없군.”

 

“누구라도 그럴 거야.”

 

“… … 고맙다. 그대 덕분에 부끄러움이 조금은 가신 것 같다.”

 

"그래, 이제야 내가 아는 아스널답네.”

 

 

아스널은 약간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 그대가 아는 아스널은 섹스 괴물 아스널 아닌가?”

 

“난 한 번도 아스널을 괴물로 본 적이 없어.

왜, 이전에 했던 말을 아직도 담아 두고 있는 거야?”

 

"… ...”

 

 

아스널의 뺨이 터질 듯이 빨개졌다.

 

 

“하하, 귀엽네.

꼭 처음 봤을 때 우리 같지 않아?

그 때는 나보고 숙맥이라면서 놀렸지.

지금은 정반대지만.”

 

"… … 그대도 이런 기분이었던 건가?

… 내가 싫어졌어도 할 말은 없겠군...”

 

"아냐, 아냐. 난 그런 아스널이 제일 좋은 걸.

그렇게 유혹 받아 본 적도 없었는걸.

너무 귀한 경험이었어.”

 

"… …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 고맙다.

 

“고마워 할 것도 아니고, 부끄러워할 것도 아니잖아?

우리가 앞으로 보낼 시간이 얼마나 긴데.

앞으로 같이 살고, 같이 자면서 아스널이 하고 싶은 건 전부 다 할 거잖아.

그렇지?”

 

"… … 나보다는 그대가 더 섹스 괴물 같군...”

 

“하하, 그럴 지도 모르겠네."


"... ..."


"근데 안 할 거야? 난 하고 싶은데?

아스널이 말했잖아. 실제로 할 것들인데, 고작 말 한 것 정도로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 그랬지.

내가 추한 모습을 보였군.”

 

“그래도 귀여웠어.”

 

"… ...”

 

"정말이라니까? 볼을 빨간색으로 칠한 것 같은 아스널의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는데!”

 

"… 여기서 나를 더 부끄럽게 할 생각인가?

문 밖에 서있는 것도 힘들다. 이제는 들어가지...”

 

"알았어. 들어가자.”

 

 

아스널은 내가 자기를 놀리는 거라 생각했는지, 잠시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래도 아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게 마음을 내어준 것 같아 기쁜 마음이 앞섰다. 고작 문 앞에서 이렇게 시간을 보낼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더할 나위 없이 값진 시간이었던 것 같아 마음에 충만함이 가득하다. 어쩌면 내 섹스 판타지에는 한 줄이 더 들어갈 지도 모르겠다. 부끄러워하는 아스널의 얼굴을 보면서 함께 자는 것. 만일 그럴 수만 있다면 아스널과의 섹스에 중독될 지도 모르겠다. 그토록 사랑스러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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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여기가 숙소였다고...?”

 

"그랬지. 예전에는 말이다.”

 

 

아스널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방은 전구 불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수평선 위에 지고 있는 노을의 빛만 겨우 방 안으로 들어와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낡은 2층 침대가 몇 개 나열되어 있었고, 작은 서랍장이 방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 또한 낡아빠진 옛 가구였을 뿐이다. 나와 아스널 둘 만 있기엔 충분한 공간이었지만, 한 부대 전체가 있기에는 턱없이 작은 곳이었다.

 

 

"… 감옥 같네.”

 

“우리 부대는 수가 많지 않아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었다.

더 넓고 쾌적한 방을 쓰는 지금도 가끔은 추억 삼아 들릴 정도니 말이지.

아, 물론 좋은 추억은 아니다. 다시 떠올리기 싫은 기억일 뿐이지.”

 

"그래도… 이건 좀…”

 

“우리가 괜히 그 때의 시간을 지옥 같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순간, 정말 잠에서 깨어 다시 잠들기 직전까지 끔찍하고 괴로웠던 기억뿐이었기에 그랬던 것이지.

우리가 살고 지내던 숙소도 좋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 맞는 말이야.”

 

 

잠시 방 안을 거닐어보았다. 걷는다고 표현하기에도 애매할 만큼 작은 방에서 아주 작은 창문으로만 빛이 겨우 들어왔다. 사령관실은 벽 한 켠이 전부 유리창이었는데, 마치 그것에 대비되는 것처럼 작은 창문은 노을이 지는 빛으로 가득한 세상과 단절된 것 마냥 방 안은 어두컴컴하게 만들었다. 빛이 조금이라도 더 들어왔다면, 이 애들도 조금은 숨을 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한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옆 침대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으음… … 

… … 아스널 대장이야...?”

 

"으엑! 깜짝이야!”

 

"아, 자고 있었나, 에밀리.”

 

 

에밀리가 내가 앉은 침대 옆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무심하다고 해야 할지, 세상 초월하며 산다고 해야 할지, 이런 곳에서 잘도 자는 구나 생각이 들었다. 나였다면 이런 추억이 있는 곳에서는 절대 못 잘 것 같은데.

 

 

“… … 안녕? 사령관...”

 

"그… 아스널?

에밀리는 왜 부른 거야…?”

 

“내가 그대와 만나겠다고 했더니 자기도 함께 하겠다더군.

그래서 그냥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 했다.”

 

“… … 얘가 나 싫어하면 어떡해?

안 그래도 어리숙한 애를 말이야.”

 

“하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어리숙하긴 해도, 에밀리에게는 내가 그대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힐 만큼 좋게 말해두었으니까.”

 

"… 그런다고 해도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닌데…

… 안녕? 에밀리?”

 

"… … 응.”

 

 

기대했던 대로의 시니컬한 반응이다. 잠에서 막 일어났던 것인지, 아니면 그냥 평소에도 이렇게 멍하게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쩜 이렇게 무덤덤할 수가 있을까?

 

 

"…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뭐, 원한다면 내가 잠깐 나갔다 와도 되고.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겠네.”

 

"대장… 딴 데 가지 마...”

 

“간다고 해도 문 밖에 서있을 뿐인데, 너무 걱정 말아라, 에밀리.”

 

"… … 알았어...

나… 참을게…”

 

 

아스널은 에밀리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더니 다시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면서 말도 없이 나가버리네. … 하긴, 세 명이 함께 뭔가 말할 만한 것도 없고, 나도 에밀리랑 단 둘이서 말해보고 싶으니까 나쁘진 않겠지. 그래도 나를 보고 너무 싫어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 안녕? 에밀리?”

 

"… 인사는… 아까 했어.”

 

“하하… 맞네…

인사는 아까 했지.”

 

 

내가 은근슬쩍 에밀리의 옆 자리에 앉으려 했을 때 에밀리는 덮고 있던 이불을 주섬주섬 싸들고 반대편 침대로 가버렸다. 얼굴을 최대한 가리고 눈만 치켜 들면서 나를 멀리서 주시한다. 아직 나는 에밀리에게 예의주시해야 할 상대인가 보다.

 

 

 

"… 너무 가까이 오지는 마…

아직 못 믿겠어...”

 

"… 그래, 이게 정상 반응이지.”

 

"에밀리는… 정상 아니야...”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에밀리는 고개를 저었다. 자기가 들고 있는 이불 위에 계속 얼굴을 비볐다. 이런 반응은 예상 못했다. 대체 뭐가 스스로를 정상이 아니라 시인하게 만든 것인지, 나는 알 방법도, 알 만한 단서도 없었다. 그냥 먼 발치서 앉아 의미 없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 에밀리는 밥 먹었어?”

 

"… … 

… 먹었어.”

 

“뭐 먹었어?”

 

"… … 그냥 밥...”

 

“밥은 맛있었어?”

 

“… … 별로...”

 

“에밀리는 케이크 좋아해?”

 

"… 케이크...!”

 

 

에밀리는 케이크 소리를 듣자 눈을 반짝였다. 그나마 지금까지 봤던 표정 중 가장 밝은 표정이었다. 이런 걸 보면 애는 애다. 

 

 

"… 좋아해.”

 

“케이크는 많이 먹었어?”

 

“… 대장이 한 번에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했어.

나눠서 먹으라고 했어…

… … 살찐다고...”

 

"… 하하… 살찌긴 하겠지.”

 

"… … 에밀리는 살쪄본 적 없어...”

 

 

당연한 소리다. 살 걱정은커녕 당장 내일 먹을 밥도 없었을 상황에 누가 다이어트 같은 것을 하겠는가? 에밀리의 지능 수준이 유치원에서 초등학생 수준에 멈춰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쩌면 여기서 만들어진 에밀리는 그보다 더한 수준일 수도 있다. 그러니 이렇게 아이 같이 말하는 것도 당연한 거겠지. 

 

 

“에밀리는 살찌고 싶어?”

 

"… 아니. 그러기 싫어.”

 

“왜 그렇게 생각해?”

 

"… 대장이 살찌면 안 좋다고 했어.

보기 흉하다고 관리해야 한다고…

그래서 예전에도 일부로 많이 안 먹었어. 살찌면 안된다고...”

 

“얼마나 먹었는데?”

 



에밀리는 우물쭈물 말을 아끼다가 겨우 입 밖으로 자신의 기억을 내뱉었다.



“하루에 죽만 한 번 먹었어…”

 

“… 뭐?”

 

"… 가끔은… 고기도 조금 먹었어.

… 맛있었어... 

그래도… 살찌면 안 되니까 대장이 많이는 못 준다고 했어.”

 

 

 

... 이게 맞나? 하루에 죽 한끼? 상식적으로 그때 주는 죽이 좋은 죽일 리도 없었을 것이다. 끽해야 미음 수준이었겠지. 그런데 그런 걸 하루에 고작 한 번 먹고 끝? 고작 그걸 먹이고 전투를 시켰던 건가?

 

 

"… 에밀리는 살 쪄본 적 없다고 했지?”

 

“… … … 응...”

 

 

에밀리가 조금 느슨하게 앉자 얇은 목선과 쇄골이 여실히 들어났다. 옷의 상태는 좋았지만, 민소매 런닝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실험기였던 에밀리에게는 지정된 유니폼이 없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아이들보다 옷이 빨리 헤어지는 것 같았다. 그 런닝 위로 들어나는 쇄골은 보는 내가 미안해질 정도로 처참했다. 눈을 돌려보니 몸의 이곳 저곳이 내가 알던 에밀리의 모습보다 조금 말라있었다.

 

 

“에밀리는 그 때 배고프지 않았어?”

 

"… 배고팠어. 

그래서 대장이 맨날 자기 밥을 나한테 덜어서 줬어.

자기는 에밀리보다 더 살찌기 싫었다고 나보고 먹으라 했어…”

 

“… ...”

 

 

아마 원래부터 밥을 많이 줄 수 없던 시절에 아스널이 어떻게든 상황을 돌려서 설명해준 것이리라. 아스널이 에밀리를 많이 아껴준 것이겠지. 하지만 아직도 예전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것은 그 이상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스널이 지금도 못 먹게 할 리는 없으니까.

 

 

“… 그럼 아스널이 케이크 가지고 온 적 있어?”

 

"… 많이 있었어.”

 

“그런데 왜 못 먹었던 거야?”

 

"… …”

 

"에밀리?”

 

"… 말하기 싫어...”

 

 

에밀리는 고개를 저었다. 전부터 고개를 푹 숙이고는 내게 입을 열 생각도 하지 않는다. 분명 무언가 더 있는데, 그것을 더 파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그냥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 에밀리는 딸기 좋아해?”

 

"딸...기?”

 

"그래, 빨간 과일 말이야.

잘 익은 거 먹으면 엄청 달아.

단 거 좋아해?”

 

"에밀리는… 그런 거 먹어본 적 없어…

… … 단 거면 먹어보고 싶어...”

 

“그럼 내가 딸기 케이크 가지고 왔는데 먹어볼래?

그냥 케이크도 아니고 딸기 케이큰데?”

 

"… !”

 

 

에밀리는 다시 눈을 반짝였다. 여기 오기 전에 아스널이 미리 언질을 해두었기에 고민을 좀 해서 가지고 온 선물이다. 소완에게는 내가 먹을 디저트니까 솜씨 발휘 좀 해서 만들라고 했지만, 나보다는 에밀리가 먹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보다 에밀리가 훨씬 더 좋아할 것 같았다. 나중에 소완에게는 미안하다고 말은 해야겠지.

 

 

"케이크… 먹어도 돼?”

 

"에밀리를 위해 가지고 온 건데 당연하지.”

 

"… 대장이 뭐라 그러면 어떻게 해?”

 

“내가 지켜줄게.”

 

“… … 사령관이… 나를?

… 왜?”

 

“그야 나는 에밀리가 좋으니까.”

 

"… 왜?”

 

“에밀리가 세상에서 제일 좋으니까?”

 

"… 그러니까 왜...?”

 

"음… 에밀리가 예뻐서?”

 

"… 내가 예뻐…?”

 

"응. 너무 예뻐.”

 

“… 왜?”

 

 

… 끝이 없다. 정말 애 돌보는 느낌이 드는 수준인데, 뭐라고 해야 할 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계속 답을 해줘야 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역으로 질문을 해야 하는 건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에밀리를 지켜줄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리고 아스널도 뭐라 하지는 않을 걸? 내가 주는 선물인데?”

 

"… … 사령관이 대장보다 쎄?”

 

"어… 아마도?”

 

"… … 못 믿겠어.”

 

 

에밀리가 꿈틀거리면서 나에게서 더 멀리 떨어진다. 의심의 눈초리가 내 얼굴을 찌르는 것이 느껴진다.

 

 

“… 나중에 보여줄게...”

 

"… 대장은 엄청 쎄…

… 조심해.”

 

“걱정해주는 거야?”

 

"… ... 몰라.”

 

“고마워.”

 

"...”

 

“그럼 케이크 먹을래?”

 

 

나는 가지고 온 케이크 박스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소완에게 부탁을 했더니 조각을 주는 것이 아니라 무슨 케이크 한 판을 전부 가지고 왔다. 맛있는 걸 많이 먹으면 좋지만, 그래도 디저트 용이라고 했는데 이건 조금 심하지 않나… 

 

 

“… 케이크… 전부...?”

 

 

눈이 땡그래진 에밀리를 보면, 그래도 다 가지고 온 것이 헛짓거리는 아니라 생각이 든다. 다행이네.

 

 

"응, 전부 다 에밀리 꺼야.”

 

“에밀리… 꺼...”

 

"어때? 지금 아스널 몰래 먹을래?”

 

"… … 케이크...”

 

 

에밀리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저었다.

 

 

“… 아니, 대장이랑 같이 먹어야 돼.

그리고… 헌터랑도 같이 먹어야 돼...”

 

“이건 에밀리 껀데?”

 

"… 옛날에 대장이랑 헌터가 자기 먹을 거 전부 나한테 줬어.

이제는 에밀리도 나눠줘야 해...”

 

"착하네.”

 

"… ...”

 

 

에밀리는 눈이 빠지게 케이크를 쳐다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먹고 싶어했던 것 같지만 나눠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간신히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안쓰럽기도 하고, 또 장하기도 하다. 딸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그럼 밖에 있는 아스널 불러서 같이 먹을까?”

 

"… 으응...

.... 내 케이크…”

 

 

말로는 나눠먹자면서 팔로 케이크 박스를 꼬옥 껴안고 있었다. 이걸 빼앗기도 뭐하고, 어떻게 할 바를 몰라 그냥 문 밖으로 목만 살짝 넣어 아스널만 슬쩍 불렀다.

 

 

“아스널?”

 

“이야기는 다 했나?

생각보다 짧게 끝냈군.”

 

“아니, 그건 아닌데,

가지고 온 케이크는 꼭 나눠 먹어야 한다고 해서”

 

“나와 말인가?”

 

“응”

 

“내가 잘못 키운 것 같진 않아 다행이군.”

 

“… 엄마 노릇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여기 엄마 없으면 밥 안 먹겠다고 떼쓰는 애 좀 어떻게 해 봐.”

 

“따지고 보면 그대가 아빠 노릇도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 … 내가 뭘 잘못 했다고…”

 

“하하, 농담 한 번 한 것 가지고 뭘 그렇게 구나?

나중에 정말 그대와 나 사이에 자식이 생기면 그 때 아빠 노릇 좀 잘 해주게나.”

 

 

기묘한 웃음을 보이며 아스널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저런 말도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아까는 뭘 그리 부끄러워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긴 하겠지만… 이게 그걸로 설명이 될 수 있는 건지 아닌지 의심스럽다.

 

아무튼 다행스럽게도 아스널이 들어가자 에밀리도 케이크 박스를 열어 담겨 있던 케이크를 먹었다. 에밀리를 다루는 아스널의 솜씨가 여간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에밀리 역시 아스널이 하자는 대로 잘 따라주는 것을 보면 이 둘이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맛있어? 에밀리?”

 

“… 응, 맛있어.”

 

“다행이다. 에밀리 먹으라고 가지고 왔는데 에밀리가 싫어하면 나도 슬펐을 거야.”

 

“… 사령관… 슬퍼?”

 

“아니, 에밀리가 맛있게 먹으니까 사령관은 안 슬퍼.”

 

“… … 고마어… ”

 

“고맙긴.”

 

 

케이크를 입 안에 한 가득 머금으면서 우물 우물 먹고 있는 에밀리 옆에 나도 은근슬쩍 껴서 케이크의 맛을 보았다. 소완이 마음 먹고 만든 디저트라 그런지 몰라도 환상적인 맛이었다. 크림 하나에서 이렇게 풍부한 맛이 느껴질 수 있나? 요즘 단 것을 많이 먹어보지 못해서 단 맛에 더 예민해진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정말 고급스러운 단 맛이 입 안 가득 퍼져나갔다. 맛있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우와… 이거 맛있네.”

 

“흠? 그대는 이런 것 자주 먹지 않나?”

 

“자주는 무슨, 밥도 제대로 안 챙겨 먹는데.”

 

“밥은 주방장이 알아서 챙겨준 것으로 알고 있다만.”

 

“내가 적당히 달라고 했어.

나 말고 너희들 밥까지 챙겨야 하는데, 괜히 부담주기 싫어서.”

 

 

그러자 아스널이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하, 그대가 그런다고 부담을 안 가질 것 같나?”

 

“그렇다고 매번 진수성찬을 가지고 오라 할 수도 없잖아.

소완이 차려준 밥상을 보면 괜히 나까지 부담스러워진다고.”

 

“그건 명확하게 구분해야지.

그대’까지’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대’만’ 부담스러운 거다.”

 

“응?”

 

“주방장이 무슨 마음으로 그대의 식사를 책임지고 있을 것 같나?

그대가 그런다고 편하게 밥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나?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게 해야지.

그대가 그런다고 편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불편하면 더 불편했지.”

 

“… … 아스널이 못 봐서 그러는 거 같은데, 그 애가 한 번 마음 먹고 차려오면 뭔 짓을 하는 지 상상도 못 할 걸?

누가 봐도 적어도 10명은 함께 먹을 양을 코스 요리로 가져오던데?

당장 우리가 쓸 자원도 많이 없잖아...”

 

“거참, 자원 관리를 우리 지휘관들이 한두 번 했겠나?

물론 그 정도를 매 끼니 하게 할 수는 없지만, 설마 그대 밥 한 끼 제대로 못 차릴 만큼 각박하게 계획을 짰을 것 같나?

그대는 우리를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는군. 실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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