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샤란의 기사장 드라코니스 나인 레온하르트는 셀 수 없이 많은 전장을 거닐어 온 역전의 용사로서, 전 아샤란의 지지를, 나아가 아샤란이 이전에 있던 세상의 대부분의 이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그렇게 빛나는 사람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태생이 고아였고, 아샤란 이전의 야만의 시대에서 지켜줄 부모가 없는 삶이란 굉장히 고된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그를 지칭하는 이름조차 그때에는 없었습니다.


그가 일할 수 있던 곳이라고는 위험천만한 굴뚝 청소나 탄광의 광부 정도였고, 그마저도 벌이가 시원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그는, 불행히도 '어두운 세상'의 존제를 알게 됩니다.


수상한 상자를 나르는 것 만으로도, 여자를 조금 꼬시는 것 만으로도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가 있는 세상을.


배고픔과 고통에 신음하던 그는 그 세계에 매료되었고, 결국 그곳에 발을 딛어.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만두면 입막음으로 죽음. 실수하면 죽음. 높으신 분이 심기가 나쁘면 죽음... 그가 발딛은 세계에조차 낙원따위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놀랍게도 폭력과 잔꾀의 제능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제능을 갖고 그 세계에서 필사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이간질하고, 책임을 모호하게 하고, 줄을 타고, 싸움을 배워 암살자들로부터 살아남았죠.


그러던 그는 어느날 어느 기사의 연인을 잘못 건드려서 죽을뻔 했습니다.


그 기사는 정말 터무니없이 강했습니다. 손에 잡히는 물건을 마구잡이로 흩뿌려 시야를 어지렵혀도 그를 놓치는 법이 없었고, 완력은 어찌나 강한지 당시에도 체구가 꽤 컸던 해도 드라코니스를 한 손으로 들고 가볍게 집어던질 수 있었으며, 제아무리 제물로 유혹하거나 이간질을 하려 해도 조금의 방심조차 없는 그 마음에는 어떠한 심리전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기사의 마지막 자비로 바로 죽임을 당하는 대신 감옥에 갖히게 된 드라코니스가 깨달은 것은, 인과응보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기사의 무자비한 힘 앞에는, 그가 지금껏 해온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압도적인 힘.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지혜를 쌓아도, 주먹 한 방이면 그것을 부숴버리는 사람이 세상에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재판장에서 현란한 말놀림으로 사형을 당하는 대신 마법적인 노예의 낙인을 이마에 세기고 노예로서 군에서 종군했습니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힘을 얻기 위해서.


자신이 어떤 수를 써서든 감옥에서 탈출한다 한들, 또다시 운이 없어서 그런 기사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그대로 끝장날 인생 따위는 살고 싶지 않았다나요.


지금껏 검을 써왔던 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창을 손에 들고, 몇번이고 위험한 전장에 뛰어들기를 반복했습니다.


자신이 왜 싸우려 들었는지를 잊을 정도로 싸움은 반복되어, 그의 나이가 스물을 넘고 그가 넘어온 사선의 숫자를 세는 것이 무의미해졌을 즈음.


그의 모든 노력을 부정하는 듯, 악몽이 그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세계의 찢어진 틈세에 기거하며, 보라색의 번개를 전신에 두른 무자비한 왕, 에레보스가.


에레보스가 나타난 이유를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알았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에레보스는 그가 나타났던 단 하룻밤만에 제국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것이었습니다.


그의 주인 되는 제국이 사라져버리자 드라코니스의 이마에 세겨져 있던 노예의 낙인은 허망하리만치 쉽게 스러지고, 그는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대신에 그는 이제는 살기를 포기했습니다.


이미 빈사 상태였으니 살기를 포기하기 이전에 살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몸이 멀쩡했더라도, 그는 이제는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성직자들이 자주 지껄이는 업보이고, 신의 벌이라면 나는 그 시궁창에서 대체 어떻게 살았어야 했지?


내가, 살고자 했던 것 자체가 잘못이었나..?


행복을 찾은 것이 잘못이었나?


그렇게 목숨만 간신히 붙어있던 시체에게서 마지막 숨이 흘러나오려던 순간.


툭, 하고 따뜻한 손이 그의 가슴 위에 닿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23년의 인생 동안에 처음으로 마주한, 세상의 따뜻함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