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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신천지에서 이러쿵저러쿵하는거에요.


e-2 소귀씨의 사정



철이 들었을 때부터 쭉 함께였다.

어른이 되면서, 다른 남자들과는 다른 그에게 끌려 어느샌가 그의 옆에 있는 게 당연하게 됐다.

모험가로 활약하는 그를 지지하며 그의 아이를 낳고 가족으로서 지낼 자신의 미래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런 헛된 꿈은 그의 손으로 무너졌다.


□■>>소귀씨의 사정. ↲


숲에 겨울이 찾아와 새로운 피난민도 받아들여 진정됐을 무렵.

드물게도 눈이 오지 않는 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오늘 몫의 빨래를 전부 널은 나는 하얀 입김을 내며 집으로 돌아왔다.

기온 완화 결계 덕분인지 집 주위는 온통 백색 세계인 것에 비해 추위는 약하다.


아무리 그래도 얇은 옷차림을 할 정도는 아니고 옷을 제대로 입으면 얼어 죽을 걱정은 없을 정도다.

전부터 굉장한 사람이라곤 생각했지만 이런걸 직접 보면 역시 주인님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래, 주인님.

내가 노예였을 때의 주인님이며 지금의 고용주.

밑바닥이었던 나를 구해준 두 명 중 한 사람.


믿고있던 소꿉친구에게 팔려 절망의 늪에 빠져있던 내게 아가씨가 찾아왔을 때, 솔직히 말하면 때리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단순한 피해망상이었지만 당시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고급스런 옷을 집은 주인에게 길러지는 작은 여자아이.

피부색도 이쁘고 좋은 걸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게 보이는 노예.

나에게는 아가씨가, 애인에게 버려진 나를 놀리기 위해 왔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날 구해줬다.

자기가 막대한 빚을 지면서까지 나를 사는 걸 부탁했다는 걸 알았을 땐 속으로 뭐가 목적인지 억측하기도 했었다.

그 후에 고백을 듣고 멍해진 건 지금 와선 우스운 얘깃거리...지만 그 때의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아가씨의 성격이면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주인님과 아가씨와의 생활은 행복했다.

무엇보다 둘은 웃는 얼굴로 감사해준다.

매일 방을 청소하는 걸 인정해주고 내가 만드는 요리가 맛있다며 웃어주셨다.

그다지 풍족하닥곤 할 수 없는 마을에서 자란 나에게 봉사한다는 입장은 당연했다.

케인은 나에게 한번도 고맙다고 해준 적이 없다.


이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으로 나는 처음, 케인이 나를 아무렇게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슬프고 분했다.

그렇기에 주인님께 부탁해 단련받아, 조금이라도 그 녀석을 돌아보게 하려고 생각했다.


그런 나날을 보내는 동안 나는 어느새 주인님을 좋아하게 됐다.

하지만 주인님은 아가씨에게 푹 빠져있고, 아가씨도 주인님과 사이가 좋다.

아가씨에겐 은혜가 있고, 연애감정은 아니지만 그 천진난만한 미소가 너무 좋아서 둘의 사이를 갈라놓는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도 없어 몇번이나 루루에게 상담해서...

주인님과 관계를 가지게 됐다.

행복했고 만족했지만 아가씨와도 동침하고 주인님이 절대 내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주인님은 상냥하게 사랑해주신다.

원하는 것은 어찌 아시는 지 정확하게 채워준다.

확실히 애정을 느껴 기쁘지만 아가씨를 대하는 모습을 보고, 내가 첫번째가 아니기에 나오는 태도라는 것을 알았다.


주인님은 아가씨에게만 감정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다.

우리에게 보여줄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강하고 격렬하게.

그것을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있다고 생각할만큼 난 어리석지도, 눈치없지도 않았다.


다행히 주인님과 아가씨도 우리가 첩으로서 있는 걸 허락해주시고, 아가씨 다음이라면 아이를 가져도 좋다고 말해주셨다.

루루의 기분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복잡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좋아한다는 마음만은 바꿀 수 없다.


이걸로 좋다고 타이르는 마음이 언젠가 진심이 되길 바라며, 나는 오늘도 손이 많이 가는 아이들을 돌본다.

이건 이거대로 나에게 있어 마음이 채워지는 시간이었다.



"아가씨. 또 코타츠에 틀어박히시고..."


작업을 마치고 잠시 쉬기 위해 거실로 가자 아가씨가 커다란 코다츠 안에 들어가 농성하고 있었다.

한숨을 쉬며 말을 걸어도 반응은 좋지 않다.


"...일하고 싶지 않소에요..."


겨울이 오고 나선 아가씨의 게으름이 심해지고 있다.

지금까진 이러쿵저러쿵 해도 나보다 일찍 일어나 아침 준비를 하고 빨래나 청소를 했지만 최근엔 하루종일 침대나, 주인님이 새로 만드신 '무서운 겨울 마물' 을 재현했다는 코타츠라는 마도구에서 축 늘어져있다.

나름 최소한의 일은 하고 있지만 확실히 양이 줄어들어 있다.


"일은 안하셔도 괜찮은데 거기서 자면 감기 걸려요."

"으~"


아가씨가 불만이라는 글자를 써둔 것 같은 표정으로 노려본다.

어린애가 삐진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아 박력은 없다.

주인님도 말하셨던 '코타츠에서 자는 건 몸에 좋지 않다.' 라는 걸 떠올려 계속 주의를 준다.


"아가씨...?"

"나가고 싶지 않아요- 추운 건 싫은거에요-"


시야의 끝에서 몰래 다가온 주인님이 조용히 손가락을 입가에 대는 제스처를 취하며, 커다란 테이블 반대편으로 기어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가씨는 눈치채지 못한 듯 코타츠에서 상반신만 내민 채 늘어진 목소리로 계속 저항하고 있다.


"겨울에는 겨울잠을 자야하는거에요. 저는 이만."

"그러다가 코타츠 요괴한테 먹혀도 몰라요."


주인님이 농담삼아 말해주신 코타츠 얘기를 떠올리며 말한다.

코타츠라는 요괴는 추운 겨울날 사람을 입 속으로 유인하고, 따뜻해져 방심한 틈을 타 먹어버리는 것 같다.


"풋 그런 이야기를 믿다니 유리아도 의외로 어린애앳!?"


놀리던 아가씨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단번에 가슴팍까지 코타츠 안쪽으로 끌려들어갔다.

아가씨는 당황한 모습으로 카페트를 잡으며 발버둥치고 있다.


"뭔가요 대체!?"

"아 너무 늦었나 봐요."

"잠깐, 잠깐!? 하지마아아아!?"


저항따위는 신경쓰지않으며 코타츠 요괴가 아가씨를 거침없이 끌어들여간다.

아가씨도 필사적으로 뿌리치고 있지만 결국 아이의 힘이라 이불 밖에는 손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잠시 후, 흐려진 비명을 음미하듯 코타츠가 덜컹덜컹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이불을 잡고 있던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움켜쥐고 작게 떨리기 시작했다.


"적당히 해주세요."


이건 꽤 걸리겠네, 생각하고 점심식사 식재료를 가지러 창고로 향한다.

거실을 나가기 직전 슬쩍 봤을 때, 힘없이 내던져진 팔이 코타츠 안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정말 사이가 좋아서 부럽고, 질투가 난다.


그리고 그토록 주인님에게 사랑받으면서도 퉁명스러운 태도를 하는 아가씨가 아주 조금 밉살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