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번역 채널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엘리제의 숙소 앞까지 와 있었다.


멍한 채로 무의식 중에 이곳까지 걸어온 모양이다.

주변엔 이미 마물들의 모습이 없고, 이 근처에 있던 마물들 모두 '전설의 신들의 이상향'을 향해 달려갔을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태풍의 눈 같은 것일까.

정적.

살아남은 사람들은 문을 굳게 닫은 채 틀어박히고, 그토록 울려 퍼지던 마물들의 우렁찬 포효도 들리지 않는다.

내가 훌쩍 숙소 안으로 들어가자, 곧바로 레리아나와 이어서 엘리제도 내 모습을 눈치챘다.

숙소에 모여있던 피난민을 돌보던 두 사람이 얼굴을 확 밝게 만들더니 내게 달려온다.


"케인! 아아 무사해서 다행이야..."

"어서와! 마물들이 없어진 걸 보니 이겼나봐!"

"..............아니."


안심하며 눈동자를 적시는 엘리제와 소년처럼 눈동자를 빛내는 레리아나.

위험은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두 사람에게, 나는 애매한 답을 돌려줄 수 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바로 내 모습이 이상한 것을 알아채고 불안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일... 있었어?"

"일단... 2층으로 가자. 여기는 사람들이 있으니."


엘리제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한다.

레리아나가 지키며 데려온 피난민들은 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그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고 둘과 함께 2층으로 향했다.

뭄을 닫고 주위에 인기척이 없는 걸 확인하고 한숨을 돌린다.


"...일단 두 사람이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리고... 엘리제는 그, 내가 알고 있는 엘리제라는 거지?"


우선 확인해야할 점을 그져에게 묻자 엘리제가 웃으며 끄덕였다.


"응... 케인의 노예였을 적 말이지? 물론 기억하고 있어. ...조금 '전의 나' 랑 동화되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어."

"그렇, 구나....아아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확실히 그녀의 입에서 듣자,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정을 느꼈다.

환희, 감사, 안도... 눈물로 시야가 번지고 가슴이 꽉 조인다.

정말로... 내가 사랑했던 그녀인 것이다.

아아, 무슨 기적인가...


"응─......? 무슨 말이야? 에리가 케인의 노예였어?"


사정을 모르는 레리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음 뭐라고 해야 할지..."


복잡한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지 엘리제가 머리를 감싸쥐고 도움을 청하듯 나를 봤다.


"그건 내가 설명할게. 엘리제에게도, 내 비밀을 전부 말해줄게."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숨김없이 말했다.

첫 미궁 탐색에서 볼품없이 죽은 것.

눈을 뜨자 모르는 방, 심지어 이세계였던 것.

거기서는 우리의 세계가 게임... 이야기로서 관측되고 있던 것.

거기서 앞으로의 미래나 칭호 취득 조건 등... '공략 정보'를 얻은 것.


"공략 정보를 얻는 나는 그 지식으로 모든 걸 얻을 수 있다고 자만했어. 힘, 부, 명성 그리고......여자."


나는 거기서 엘리제를 힐끗 보고 눈을 감았다.


"공략 정보로 엘리제가 괴한에게 습격당해 비참한 미래를 보낼 것을 알고 있던 나는 그녀를 돕기로 했어. 미래를 바꿀 수 있는지도 시험해 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엘리제를 구하면 내게 반하지 않을까 생각했고..."


아아, 말해버렸다......

이것으로 그녀는 그 때 내가 구한 게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자신의 위기를 알고 굳이 아슬아슬할 때까지 구하지 않았던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지만 더 이상 숨길 순 없다. 숨기고 싶지 않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말을 이었다.

무사히 엘리제를 구했지만 내가 투기장에서 소동을 피운 탓에 엘리제의 아버지가 고액의 빚을 지게 된 것.

그 결과 엘리제가 노예로 떨어지고 그것을 내가 산 것.

그리고 이야기는 오리올로 넘어간다.


"초보 학살자 소문을 듣고 바로 오리올을 떠올렸어. 아, 이거 마검 소울이터 각성 이벤트네, 라고. 칭호작으로  스테이터스는 압도하고 있었으니 간단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


결과적으로 소울이터는 각성하지 않았고 나는 엘리제를 잃었다.


"엘리제를 잃은 나는 뒤따라가기로 했어. 그 때는 엘리제가 없는 세상따윈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고, 죽으면 다시 그 방으로 돌아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타산도 있었어."

"그렇게 케인은 두 번째... 아니, 세 번째 인생을 살 게 됐다는 거구나."

"응.... 하지만 바로 깨달았어. 내가 사랑하는 엘리제와 3회차의 엘리제는 닮기만 한 다른 사람이라는 걸."


나는 분명 엘리제를 사랑하고 있었다. 첫눈에 반했다.

하지만 첫눈에 반한 게 사랑으로 바뀐 건 그때까지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간신히 진정한 의미로 엘리제를 잃은 것을 이해했다.


"나는 내가 엘리제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해서 거리를 두기로 했어. 그 뒤로는...... 레리아나를 만나고 모험하는 날들이었지."


이야기가 끝나고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이윽고 레리아나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과연... 그래서 엘리제가 케인의 노예였다는 건가. 으음, 내 머리론 조금 이해가 어렵네."


레리아나는 그렇게 말하고 팔짱을 끼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좀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이니 무리도 아니다.


"케인."


엘리제의 목소리에 나는 얼굴을 들었다.

그녀는 조용한 표정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얘기에서 이해가 안가는 건데... 왜 케인은 자기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한거야?"

"그건..."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그건... 나와 만난 후로 엘리제는 전처럼 밝지 않게 됐고, 여관이랑 아버지도 그렇게 됐고... 내 이기심 때문에 엘리제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시선을 돌린 채 그리 말하는 내게 엘리제가 더욱 물어봤다.


"하나 더 질문. 이번 세계에서 나는 슬럼가 사람들한테 당하지 않았어. 그리고 정기적으로 오던 빚쟁이도 안오던데... 케인이 한 거지?"


그 말에 나는 순간 놀랐지만 납득했다.

그렇구나, 지금 엘리제는 기억이 있다.

그럼 전 회차와의 차이도 알겠지.


"응, 내가 했어."

"그렇구나... 저기 케인."

"응?"

"나 있잖아. 행복했어."

"어?"


무심코 엘리제를 보니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사랑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케인의 노예라서 행복했어. 그야말로 죽기 직전까지도 행복에 젖어 있었어. 여관은 없어지고 아버지도 그렇게 됐지만 나는 조금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엘리제..."

"그러니까... 케인과 함께라면 불행해진다니, 그런 슬픈 말은 하지말아줘..."


눈물을 글썽이며 코막힌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엘리제, 눈치채니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꼬옥 하고 가녀린 몸을 끌어안아 그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는다.


"미안... 엘리제!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떨어져 있어서 미안해! 그리고...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야...! 고마워...!"

"응...! 응! 나도, 고마워... 그동안 몰래 지켜줘서 고마워. 사랑해..."


아아, 간신히 되찾았어. 이 온기...

잠시 껴안고 있던 우리들이었지만 갑자기 울린 헛기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음─... 나도 있는데, 이건 좀... 질투가 나는데..."

"미, 미안 레나.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아니 뭐 기분은 알겠는데... 약속을 잊은건가 했지."

"기억하고 있어 기억하고 있어!"

"저기, 뭔가 사이 좋지 않아? 그리고 무슨 약속?"


엘리제와 레리아나의 거리감이 가깝게 느껴지는 대화에 당황했다.

레나라니... 그러고보니 아까 레리아나도 엘리제를 에리라고 불렀던가?


"아 뭐, 여자끼리의 약속이야."

"그래그래, 케인은 몰라도 돼."

"그, 그래..."


발을 디딜 수 없는 여자들의 세계를 만드는 두 명에게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케인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어떡하냐니..."

"아니 뭔가, 지금 소동 아직 해결 안됐지? 게다가 케인의 지식이 있어도 소용 없을 정도로 위험한 거 아냐?"

"그건..."


레리아나의 말이 나를 단숨에 현실로 되돌렸다.


"말해줘.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언제까지나, 어디든 따라갈테니까."


그녀의 말에 끄덕이는 엘리제를 보고 나도 각오를 다졌다.


"...성의 봉인이 깨졌어. 이대로라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마신이 부활할거야."

""...................................................................................................""


내가 말한 건, 세계가 멸망했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

두 명은 얼굴을 경련시키며 무언이 되었다.


"그, 그렇구나... 꽤, 꽤나 상상 이상이네..."

"아하하... 확실히 밑에서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확실히 이 소식이 밖에 새어나가면 사람들은 단번에 세기말 모드로 들어갈 것이다.

레리아나가 머리를 쓸어올리고 나를 본다.


"어쩐지 케인의 고민을 알겠어. ...다시 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지?"


그녀를 보자, 레리아나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나를 보았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선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없어. 하지만 그렇게되면 우리들의 기억이 없어질지도 몰라. 이번 엘리제의 기적은 처음 한정이었을지도... 그런 느낌?"


어어...? 거기까지 알 수 있어?

...설마 큐바슈는 사실 마음을 읽을 수 있는건가?

내가 속으로 떨면서 레리아나를 보자, 그녀가 작게 쓴웃음 지었다.


"생각보다 여자라는 건 남자들이 생각하는 걸 알 수 있어. 특히 케인은 그... 알기 쉽기도 하고."

"아하하......"


레리아나의 말에 쓴웃음 짓는 엘리제를 보고 나는 고개를 푹 떨궜다.

그런가... 내가 생각하는 건 그녀들에게 전부 보였던 건가.


"솔직히 케인이 어떻게 해야 좋은지 나는 모르겠어. 다시 한다는 건 케인이 죽는다는 거고... 한다고 해도 안한다고 해도 분명 케인밖에 모르는 고뇌가 있을거야. ...그걸 무책임하게 어떻게 하라곤 말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

"그래도."

"?"

"케인의 걱정 하나를 없애줄 순 있다구."


내 걱정을 없애?


"그건 있지, 케인이 어떤 선택을 해도 우리는 케인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 케인이 재시작을 하지 않아 이대로 세계가 멸망한다고 해도... 우리는 절대 후회하지 않아. 설령 그 앞이 파멸뿐이라도 케인만 있으면 돼. 그러니까 조금도 무섭지 않아. 어디까지나 따라갈거야."

"레리아나......"

"그리고 다시 시작하게 된다면... 처음부터 다시 반하게 만들어줘. 백 번, 천 번, 몇 번이고 만나서... 다시 사랑에 빠지면 돼."

"케인은 너무 어렵게 생각해. 기억이 있든 없든... 우리가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설마 케인은 지금 우리가 기억상실에 걸리면 좋아하지 않게 되는거야?"

"!"


엘리제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구나... 기억상실인가.

그래, 만약 그녀들이 갑자기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해서 사랑이 식지는 않는다.

괴롭고 힘들어도 다시 처음부터 추억을 쌓으며 사랑을 키워가면 될 뿐이다.

뭐야... 그 정도였을 뿐이구나.

나는 그저, 그 때 그녀의 타인을 보는 듯한 눈이 무서워서 도망치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고마워... 뭔가 개운해졌어."

"후후, 별거 아냐."

"평소에는 케인한테 의지만 했으니 이 정도야 뭘."


내가 감사인사를 하자 엘리제는 웃고 레리아나는 쑥스러운 듯 뺨을 긁었다.


"조금 생각할 게 있어, 잠시 혼자있게 해줄래."

"응 알았어. 아래에 있을테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불러 줘."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가는 그녀들을 배웅한 뒤, 나는 허리의 샴쉬르를 뽑았다.

...답은 나왔다.

세계가 나쁜 쪽으로 변해가는 것에 대한 공포는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들을 잃는 공포는 사라졌다.

그렇다면 남은 건 그녀들을 살리고 싶은가, 함께 죽느냐의 문제.

그런 건 생각할 것도 없다.

게다가 나를 위해 몸을 내던져준 타우로마조네스들도 있다.

즉 이런 것이다.


────나는 죽을 만큼 그녀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검을 가슴에 꽂은 것이었다.




"음............"


천천히, 의식이 떠오른다.

무거운 머리와 몸을 일으키자, 그곳은 완전히 익숙해진 모리이 렌의 방이었다.

책상으로 걸어가 화면을 보니 여관의 방에서 가슴에 검을 꽂은 채 숨이 끊어진 내 모습이 있었다.

...이걸로 내가 죽는 건 세 번째.

이쯤 되면 나는 죽을 때마다 이곳에 오는 게 확정이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이번엔 곧바로 컨티뉴를 하는 게 아니라 조금 조사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창을 최소 모드로 놓고 인터넷을 열어 미궁의 아르카디아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이번 죽음으로 나는 겨우 죽을 때마다 세계가 크게 바뀐다는 것을 알았다.

그 결과 게임의 이벤트나 설정이 크게 바뀌어 시나리오에 큰 차질이 생겼다.

과연 이 변화가 이쪽 세게에선 어떻게 관측되고 있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변화도 없는건가."


공략 사이트의 정보는 내 기억 그대로였다.

즉, 나의 세계와 '미궁의 아르카디아'는 본격적으로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깊게 한숨을 내쉰다.

겨우 2번의 죽음으로 이렇게까지 바뀐 것이다.

3번째에는 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제 시나리오에 대한 공략 지식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겠지.

...미지에 대한 공포가 서서히 마음 속에 퍼져간다.

지금까지는 이 세계의 미래를 알고 있다는 만능감과 안도감이 있었다.

때문에 오리올의 부활이나 미궁범람 이벤트라는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날 때마다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세계는 내가 알고 태어나고 자란 세계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선 이세계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조금도 무섭지 않아. 어디까지나 따라갈거야.

────케인은 너무 어렵게 생각해.


갑자기 두 명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런가... 그렇지.

미래를 모른다니, 당연하다.

누구나 1초 앞의 일도 모른 채 열심히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있던 지금까지가 이상했던 것이다.

그리고 미지이기에 인생이 재미있다.

미지를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가져 위험에 몸을 던지는 것을, 사람들은 모험가라고 한다.

우리들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모험가인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주저는 없다.

나는 '미궁의 아르카디아'를 통상 윈도우로 되돌렸다.

그리고 컨티뉴를 클릭하려던 그 때,


"응?"


드디어 그것을 깨달았다.

'미궁의 아르카디아  ──Ver.3.0'

테두리에 어느샌가 추가되어 있는 그 숫자.

그것을 보고 나는 히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ver.3.0 인가... 재밌잖아.

그리고 나는 모험을 컨티뉴했다.




──짹짹! 짹짹짹짹짹짹짹!!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화창한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나는 눈부셔하며 눈을 떴다.

무사히 첫날 아침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자동 저장 가능성도 있었기에 일단 안심.


"......응?"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본 나는 위화감에 조금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는 엘리제의 여관이다.

그건 틀림없다.

그런데 그 내부가 내 기억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청결감이 느껴지고 가구도 조금 호화로워졌다.

마루바닥도 새것까진 아니지만 나름 깨끗하게 되어 있다.

처음부터 이건가...

극적인 차이는 아니지만 사소한 부분에서 지금까지의 차이를 느끼게 해줘 조금 낙담했다.

일단 나 자신도 뭔가 차이가 있는지 확인해보니, 큰 차이는 없었지만 초기 스테이터스가 조금 올라있었다.

그 외에는 딱히 다른점이 없어 안도의 숨을 내쉬고 방을 나와 1층으로 향했다.

...심장이 두근두근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떠오르는 건 2회차의 죽음에서 돌아온 아침, 타인을 보는 듯한 엘리제의 눈.

설령 그녀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이번엔 도망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괴로운 건 괴로운거다.

최고의 상황은 그녀가 나를 기억하고 있는 것, 점차 나를 떠올리는 것.

최악의 상황은 그게 단 한번의 기적이었을 경우.

등줄기를 땀으로 흠뻑 적시며 아래층으로 내려간 내가 본 것은...


"아... 안녕하세요. 아침 식사는 어떻게 하실래요?"


나를 보자마자 영업용 스마일을 띄우며 다가오는 엘리제의 모습이었다.

푸른 감정이 혈액을 따라 흐르고 체온이 내려간다...

나는 색채가 급속히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엘리제에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은 됐어."

"그런가요..."


...각오는 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역시 가슴이 찢어질 것 처럼 괴로웠다.


"────그럼 이따봐. 케인."


그래서 스쳐지나가며 귓가에 그렇게 속삭여졌을 때, 나는 번뜩 그녀를 보았다.

엘리제는 내게 장난이 성공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윙크를 하고 떠났다.


"──하하."


환희의 함성을 지를 것 같은 몸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고개를 숙였다.

누가 봐도 기분 나쁠 정도로 히죽거리는 걸 느낀다.

차가워진 몸이 급속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아아...! 엘리제의 기억은 제대로 계승됐다.

게다가 이번엔 처음부터!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를 꼭 껴안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보류, 나중에 싫어할 정도로 껴안아 줄 것이다.


'그래... 레리아나!'


그녀는 어떻게 됐지?

엘리제는 한 번 기억을 찾은 경험이 있으니 알겠지만 레리아나는?

엘리제는 가호로 인한 특수 체질이라는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안절부절해졌다.

나는 엘리제의 숙소를 나와 기억에 있는 레리아나의 숙소로 향했다.

스테이터스가 낮아져 빠르게 뛰지 못하는 자신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숨을 헐떡이며 달려간다.

스쳐지나가는 3회차의 미궁도시 풍경은 역시 기억과는 조금 달랐다.

언뜻 보기엔 모르겠지만 세세하게 꽤나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이렇게 도시 통째로 바뀌었다면 도시의 역사 자체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 식으로 시내를 관찰하며 달리고 있자,


"이, 이봐!!"


갑자기 등 뒤에서 말이 걸려왔다.

새된, 어린 아이의 목소리다.

뭐지? 하며 멈춰서서 보니 일본에서 말하는 초등학교 5, 6학년 정도의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갈색 피부에 측두부에서 뻗은 한 쌍의 양 뿔을 가진 금발 소녀.

외모가 매우 갖춰져있어 장래가 두려운 미소녀였다.

소녀는 그 진홍색 눈동자를 적시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누구지, 아는 사람은 아닌데? 그런데 어디선가 본 기억이... 아니, ...아니 잠깐만?

금발, 갈색 피부, 양 뿔... 설마.


"......레리, 아나?"


조심스레 내가 묻자, 큐바슈 소녀가 확 얼굴을 빛냈다.

그 표정은 확실히 내가 잘 아는 레리아나의 그것...


"여, 역시 케인이였어! 꿈이 아니었구나!"


로리아나가 그리 말하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잠깐, 잠깐잠깐잠깐만!!

뭐야 이거! 레리아나가 완전 로리 모드가 됐잖아!

가슴도 납작해졌고!

서,  설마 이것도 재시작의 영향?

큐바슈의 병이 퍼진 게 앞당겨진 건가?

아니, 그보다...


"로리... 레리아나, ...기억이 있는거야?"


어깨를 잡고 진지하게 묻자 레리아나가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 응... 아직 현실감이 좀 옅지만 케인을 보니 한번에 감정이 살아났어!"

"그렇, 구나..."


아... 다행이다.

나는 로리아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꽃 향기가 물씬 나는 금발에 얼굴을 묻는다.

내가 좋아하던 레리아나의 냄새다.

해바라기의, 태양의 꽃 향기.

레리아나가 로리아나가 됐다는 문제는 있었지만 기억이 있다면 그런건 사소한 문제다.


"레리아나... 사랑해."

"....아, 케인. 나도... 사랑해."


레리아나가 내 허리에 팔을 감아 안는다.

어린아이 특유의 높은 체온을 느끼며 서로 껴안고 있자,


"...어머나 길거리에서 저렇게."

"나참 요즘 젊은 것들은..."

"저거 아직 어린애 아냐?"

"경찰을 부르는 게..."


그런, 주위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레리아나는 새빨갛게 되어 떨어졌다.

맞다, 그만 길거리였다는 걸 잊어버렸다.


"레, 레리아나. 일단 가자!"

"으, 응!"


황급히 레리아나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작아져버린 그녀의 손 감촉을 느끼며 문득 떠올린다.

그러고보니 이런 식으로 레리아나에게 손을 잡혀서 끌려다닌 적이 있었지.


"아하하하하하."


기이하게도 반대 상황이 된 것이 이상함을 느껴 웃음이 터져나온다.

레리아나는 그런 나를 보고 순간 어리둥절하던 뒤 똑같이 웃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웃음소리를 창공에 울리며 굳게 손을 잡고 길거리를 달려나갔다.


이렇게 내 3회차 인생은 시작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