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번역 채널

눈을 뜨니 좁은 방이었다.

하얀 벽에 반짝반짝하는 플로어링.

벽에는 만화책이 가득 찬 책장이 있고, 목제 책상에는 빛을 내는 컴퓨터가 놓여 있다.

모리이 렌의 방이다.


────나는 자신이 최초의 내기에서 이긴 것을 확신했다.


그때, 내가 떠올린 것은, 자살하는 것으로 다시 이 방에 돌아와 '세이브 포인트'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죽을때마다 이 방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인가.

소울이터를 각성시킨 이상 죽으면 영혼이 흡수되는 게 아닐까.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엘리제의 죽음을 뒤집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건 것이다.

그리고 그 도박은 나의 승리였다.

하지만 내게는 여기서부터가 가장 중요하다.

나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컴퓨터에 다가간다.

거기에 비친 것은 쓰러진 엘리제와 머리가 없는 나의 모습.


'게임오버 컨티뉴하시겠습니까? Y/N'


이것을 누르면 나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는가.' 다.

미궁의 아르카디아에는 수동으로 저장할 수 있는 보통 세이브&로드 와 게임에서 멋대로 저장하는 오토 세이브 2가지 저장 기능이 있다.

이것은 플레이어가 저장을 까먹고 플레이했을 때도 직전 지점까지 오토 세이브 되는 친절한 기능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오토 세이브 기능이 어디까지 됐는지 내 안에서 공포가 되어 있었다.

통상의 오토 세이브는 여관에 묵을 때마다 멋대로 저장되지만 1장을 클리어해도 멋대로 저장한다.

말하자면 '오리올을 쓰러뜨린 직후.' 가 된다.

즉, 엘리제가 죽었거나 치명상을 입고 쓰러져 있을 때라는게 된다.

나에겐 두개의 세이브 포인트가 있다.

하나는 모리이 렌이 수동으로 저장한 최초의 날 아침 포인트.

다른 하나가 이 오토세이브.

그 어느쪽이 적용될 지는 ...모른다.

실제 플레이어였다면 알겠지만 나는 실제로 플레이 한 적은 없다.

그저 공략사이트를 봤을 뿐이다.

때문에 여기서 제 2의 도박.

여기서 지면 엘리제는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Y를 클릭했다.



────그리고 눈을 뜬 것은 그리운 여관은 방이었다.


나는 천천히 현실을 이해하고 한희의 소리를 질렀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이 엘리제의 집 여관에 돌아왔다는 건 나는 아마 오늘 용의 달 13일, 최초의 날인 것이다.

즉, 엘리제는 당연히 살아있다.


────엘리제를 보고 싶어.


갑자기 가슴을 찌르는 충동이 나를 움직였다.

문을 활짝 열고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간다.

몸이 무겁다.

칭호가 없는 몸이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그리고 단숨에 1층까지 뛰어내려와 나는 빠르게 눈으로 엘리제를 찾아냈다.

밤의 술집과도 비슷한 식당에서 팔랑팔랑 춤추듯이 오가는 소녀.

나는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려고 했다.


".............아."


어쩐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활기찬 미소를 짓고 일하는 그녀는 정말 맑고 깨끗한 일상의 상징처럼 보였다.

나는 그것에 강한 충격을 느끼고,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엘리제가 식당 입구에서 멍하니 서 있는 나를 깨닫는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침 식사는 어떻게 하실래요?"

"아........."


그 태도, 그 말로 나는 그녀가 내가 사랑했던 엘리제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사랑했던 엘리제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도.

막히는 말을 어떻게든 쥐어짜낸다.


"아침식사는, 필요 없어, 아니 음. 지금은, 괜찮아."

"? 그런가요."


나는 휘청휘청, 불안한 발걸음으로 출구로 향한다.

그런 나를 엘리제가 불러 세웠다.


"저기..."

"응?"


순간 가슴에 기대감이 스쳐 바로 뒤돌아본다.


"저기, 모험가를 하려면 몸조심 해야죠. 우선 식사부터 잘 챙겨요."

"......아, 응. 고마워. 괜찮아 오늘은 미궁에 안들어가."

"아 그렇군요. 그럼 괜찮겠네요. 그럼."


그렇게 말하며 배웅하는 그녀에게 속마음을 숨겨 미소짓고 발길을 돌린다.

여관을 나오며 슬쩍 그녀를 본다.

거기에 있던 건 아버지와 사이좋게 대화하는 엘리제의 모습이었다.




"헉, 헉, 헉."


나는 무작정 달리고 있었다.


'이걸로 됐어...'


엘리제가 살아있다.

그렇다면 그걸로 됐다.

최고의 결과다.


'이걸로 됐어...'


설령 그것이 내가 사랑한 엘리제가 아니더라도, 엘리제는 확실히 이 세계에 존재하니까.


'이걸로 됐어...'


그러니 이걸로 됐다.


'이걸로 됐어...!'


설령 두 번 다신 엘리제를 껴안지 못한다 해도.


────나는 엘리제와 다시 그 관계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


엘리제는 나와 엮이는 것으로 바뀌었다.

다양한 불행이 연속으로 그녀를 덮치고 가족의 유대가 붕괴되고 나와 음탕한 나날을 보내게 되고 그 활기찬 미소가 사라지고 마지막엔 어두컴컴한 미궁에서 덧없이 목숨을 잃었다.

엘리제라는 인물 자체가 애초에 비극적인 인생을 보내는 운명이라고 말한다면 뭐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최고의 결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자신의 욕망을 최우선으로 한 결과 엘리제의 결말을 최악으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엘리제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


그것을 통감했다.

때문에 나는 엘리제를 포기한다.

내 손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너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 것 정도는, 해도 괜찮지?'



"심심하네. 야, 뭐 재밌는 일 없냐."


슬럼가에 있는 깡패들의 집합소에서 그들의 리더인 빌리가 느닷없이 말했다.


"으음, 또 여자라도 잡아서 즐길까요?"


부하 한 명이 말한다.

짬을 주체하지 못하겠으면 적당히 여자를 납치해서 놀다가 질리면 죽이거나 판다.

그들이 일상적으로 반복하는 행위였다.


"적당한 후보 있냐?"


빌리의 물음에 다른 부하가 대답한다.


"헤헤, 그게 말이죠 형님. 내가 묵는 여관집 딸이 존나 미인이거든요."

"호오. 얼마나?"

"그게..."


부하가 잠시 생각하고 말했다.


""세계 최고지, 니들한테 아깝다고." 정도입니다."

"......뭐?"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부하가 의문의 목소리를 낸 순간 목이 어긋나 땅바닥을 나뒹군다.


"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어리둥절하고 굳어있는 가운데 빌리의 판단은 빨랐다.

빠르게 무기를 들고 목소리를 높인다.


"어떤 놈이냐! 나와라!"


빌리의 목소리에 답하듯,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녹아내리듯이 나타났다.

그 남자는 온몸을 검은색 옷으로 가리고, 얼굴에는 팬텀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 거드름피우는 모습에 빌리가 부서질듯이 이를 간다.


"별 좆같은 차림을 하고 자빠졌어. 죽이기 전에 들어주마. 넌 누구냐."


그 물음에 남자가 가볍게 웃었다.


"────칠흑의 어둠."


그것이 빌리의 인생 마지막에 들은 말이었다.



"후우, 이걸로 일단 안심인가."


빌리 집단을 몰살한 나는 집합소를 떠나 변장을 풀었다.


"설마 이걸 또 입게 될 줄이야..."


나는 조금 복잡한 심정으로 칠흑의 어둠 변신 세트를 본다.

안좋은 추억만이 가득한 칠흑의 어둠 변신 세트지만 이것의 정보 은닉성은 높다.

결국 저번 회차에서 내가 칠흑의 어둠이라는 게 들키지 않았으니까.


'뭐 역시 입는 건 이번이 끝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변신세트를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슬럼가를 나와 시내를 걷기 시작한다.


'이걸로 엘리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벤트는 전부 없앴나.'


엘리제의 불행 이벤트는 이 괴한 이벤트와 아버지의 빚.

괴한 이벤트는 이걸로 없앴고 빚 쪽도 사무실에 잠입해 증서를 불태웠다.

엘리제의 아버지 것만 태우면 의심받으니 다른 것들도 다 태워버리고 내친김에 사무실을 통째로 태웠으니 지금 쯤 사채업자들은 난리가 났을 것이다.

이미 술집에서 사무실이 불타고 증서가 소멸됐다는 소문을 냈으니 앞으로 갚으라고 해도 증서를 보여달라고 따지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다.

그렇게되면 소액인 아버지 쪽보다는 액수가 많은 다른 쪽부터 회수하려할 것이기에 아버지쪽은 놓칠 가능성이 높다.

이걸로 빚 쪽도 해결.

엘리제는 앞으로 아버지와 여관을 계속하면서, 언젠가 좋은 남자를 만나 여관을 이으며 행복한 가정을 꾸릴 것이다.


그게 내가 아닌 건 유감이지만.


".............."


잠시 마음을 비우고 시내를 걷는다.


"어이쿠."

"아 죄송합니다!"


멍 때리며 걸었기 때문인지 사람과 부딪치고 말았다.

게다가 젊은 여성이다.

이건 위험하다.

황급히 사과하고 상대의 얼굴을 보고 알아차린다.


"아... 레리아나."

"오?"


여성──레리아나가 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 실수. 처음 만난 사람에게 할 태도가 아니었다.

그런데 레리아나는 딱히 화가난 게 아닌 듯 내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어라-? 우리 어디서 만났었나?"

"아, 아뇨. 제가 일방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고..."


아 위험하네. 완전 스토커같은 말을...

그러나 레리아나는 어째선지 그걸로 납득한 듯.


"아 그런가 그런가! 과연 그런거였구만-!"

"예?"


뭐가 그런걸까?


"너 내 팬이었냐! 이야~ 곤란하구만! 투기장에 나간지 얼마 안됐는데 벌써 팬이 생거버렸어-!"


하하! 하고 웃는 레리아나.

그리고 나는 일찍이 레리아나가 투기장에 나왔던 것, 그리고 거기에 걸어 한 밑천 벌었던 것을 떠올렸다.


"아아 네. 맞아요. 아하하 이렇게 만나서 영광이네요."

"됐어! 됐어! 신경쓰지마! 앞으로도 신나게 싸워서 이길테니까 나한테 걸면 대박날거야!"

"아하하."

"아 그렇네. 싸인이라도 해줄까? 지금이라면 서비스로 해줄게!"

"아, 아니. 그건 좀."


사실 싸인같은 건 필요없다.

하지만 이렇게나 기뻐하는 레리아나에게 말하기 어려웠다.


"신경쓰지 말라니까!"


그렇게 말하며 레리아나가 어디선가 펜을 꺼내, 거기서 내 얼굴을 보고는 움직임을 딱 멈췄다.

그대로 레리아나가 내 얼굴을 응시한다.


"저기?"

"너 있지. 방금 무슨 일 있었어?"

"네?"

"울었잖아. 잘 보면 눈이 빨개."

"........."


무심코 말문이 막혔다.


"좋아! 싸인은 없는걸로!"


레리아나는 그렇게 말하고 펜을 집어넣었다.


"가자!"


그리고 갑자기 내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네? 저기! 어디 가나요!"


레리아나가 얼굴만 뒤돌며 말했다.

그 얼굴엔 함박웃음이 피어있다.


"모험이야! 모험! 우울할 때는 가슴뛰는 모험이 최고야!"

"모, 모험이라니...!"

"신경쓰지 마! 사인 대신이야!"


아니 그게 아니고. 뭐야 이 급전개!


"자 모험 출발이다-!"


나는 레리아나에게 끌려가듯이 달리며 확실히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새벽, 엘리제는 갑자기 눈을 떴다.


"......또 이 꿈이야."


엘리제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침대 옆 주전자에 직접 입을 대고 목을 적셨다.

엘리제는 요 며칠 계속 이상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여관에 묵고 있는 소년... 케인과 자기가 사랑에 빠지는 꿈이었다.

꿈 속에서 케인에게 데이트를 신청받은 자신은 장보는 김이라며 승낙한다.

데이트 자체는 성공으로 끝나지만 귀가하던 엘리제가 남자들에게 습격당한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절묘한 타이밍에 케인이 구해줘서 자신은 사랑에 빠진다.

그런 꿈이었다.

꽤나 로맨틱한 꿈이지만 자신은 이런 꿈을 꿀 정도로 케인이라는 소년과 교제가 없다.

확실히 얼굴은 잘생겼다고 생각하지만 모험가는 좀, 이라는 마음도 있다.

그런데 이 꿈은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현실적이라 마치 실제로 겪은 일을 재현하는 것 같아서... 사실 최근엔 케인을 볼 때마다 조금 두근두근하게 됐다.


"...다음에 데이트라도 해볼까."


엘리제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케인......>>


잠들기 전, 그런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