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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피곤해~"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레리아나는 그렇게 말하며 기지개를 켰다.

멜론처럼 커다란 가슴이 출렁출렁 흔들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하늘은 석양에 비춰 붉게 물들고 있다.

마을은 퇴근하는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바론 버터플라이가 아니었던 건 아쉽지만 대신 좋은 걸 얻었으니 됐어."


레리아나가 히히 웃으며 전리품인 흰색 팬티를 손가락에 걸고 빙글빙글 돌린다.

왠지 보고 있기 묘해서 눈을 피했다.

여성속옷을 보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랄지.

백화점이나 속옷매장은 마치 결계가 있는것 마냥 피하게되는데도 바람에 날리는 치마는 쳐다보게 되는게... 신기하다.


"케인은 이제 어쩔래? 같이 밥이나 먹을까?"


레리아나는 대충 속옷을 넣고 내게 물었다.


"글쎄... 묵고 있는 여관에서 저녁을 주거든, 난 됐어."

"흐음, 거기 맛있어?"

"아니 전혀."


즉답했다.

엘리제의 여관 밥은 솔직히 맛없다.

그런 여관이 그럭저럭 번창하는 건 순전히 엘리제의 매력 덕분이다.

내 대답을 들은 레리아나는 순간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지만 바로 뭔가를 짐작한 듯 히죽 웃었다.


"맛없다면서 먹다니 하항... 거기 아가씨를 노리고 있나보네."


...예리하네. 딱 들켰어.

놀란게 들켰는지 레리아나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거라면 내가 방해하면 안되지. 여기서 헤어질까."

"아니 레리아나도 와도 괜찮아."

"괜찮괜찮. 신경쓰지 마. ...그리고 맛이 없다그랬지? 거기."


난 쓴웃음 지으며 수긍했다.


"그럼 됐어. 이래봬도 나 입맛이 까다롭거든."

"그럼 해산할까."

"응 잘 가."

"또 봐."


가볍게 손을 흔들며 발길을 돌린다.

그러자...


"케인."

"?"


등 뒤로 불려 돌아보니 레리아나가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조금 기운 났어?"

"...응 덕분에. 고마워."

"하핫! 그럼 다행이야! 다음에 또 같이 모험하자고!"


레리아나가 기쁜 듯 웃더니 아이처럼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쓴웃음 지으며 배웅하고 나도 귀로에 올랐다.


".....후후."


걸으며 생각한다.

죽고 다시 시작한 이후로 나는 어딘가 무겁고 괴로운 기분이 이어지고 있었다.

가벼운 우울증 상태였다.

그건 말할 것도 없이 마인 오리올과의 싸움... 아니, 엘리제를 잃은 탓이다.

시간축을 되돌린 것으로 엘리제라는 인간은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사랑했던 엘리제가 아니다.

한없이 다른 사람에 가까운 엘리제다.

죽음에서 돌아와 엘리제를 보고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강한 상실감에 사로잡혔다.

이 감각을 비유하자면... 그래, 실연이다.

나는 첫사랑에 실연당한 것이다.

이벤트를 따라 엘리제에게 같은 상황을 안겨주는 것으로 내가 사랑한 엘리제로 유도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건 내 과오를 되풀이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것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가장 사랑하는 엘리제를 포기하는 것이기도 했다.

만약 내가 지금의 엘리제와 건전하게 친목을 다지고 연인이 되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분명 예전의 엘리제와 지금의 엘리제를 비교할 것이다.

그 행위는 엘리제를 상처입힌다.

내 안의 엘리제를 강요하는 건 지금의 엘리제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무엇보다 내게 더이상 그녀를 사랑할 자격은 없다.

나는 그녀를 지킬 수 없었...아니, 죽게 만들어린 전과가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엘리제를 포기했다.

나의 이 우울증은 실연에 의한 쇼크였던 것이다.

기분은 늘 자다 막 일어났을때 처럼 무겁고, 낮에는 늘 권태감과 졸음이 오는데 밤에는 잘 수가 없다.

성욕도 없어서 일과였던 자위도 할 기분이 들지 않는다.

당연히 식욕도 없고... 아니 이건 여관 식사가 맛없는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욕구가 적어지고 금전욕이나 향상심도 솟아나지 않는다.

일단 각종 칭호나 스테이터스는 어느정도 전 회차 상태로 되돌려뒀고 투기장에서 그럭저럭 돈도 벌었다.

하지만 그건 슬럼가 놈들이나 빚쟁이를 처리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한 일일 뿐 전과같은 고양감 따윈 하나도 없었다.

마치 게임에서 작업처럼 레벨업이나 자금벌이를 하는 느낌이다.

어느 정도 스펙이 됐으니 더 이상 공략 지식을 살려 칭호작을 할 기분도 안나고 엘리제같은 고급 노예를 사고 싶지도 않아서 필요이상으로 돈을 벌 생각도 없다.

애초에 강해져서 뭘 할 것인가.

고향에 있을 무렵엔 돈을 벌어 대저택에 살며 미인 노예들을 마구 사들여 하렘을 만드는게 꿈이었지만 지금은 그다지 흥미가 없다.

이성으로는 마인과 동류가 있는 이상 자신을 강화해가야만 한다고 알고 있지만... 도저히 의욕이 나오지 않는다.

이게 바로 사망회귀한 직후 내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내 우울한 기분이 지금은 좀 개어 있다.

...레리아나 덕분이다.

반쯤 억지로 끌려간 미궁 공략이었지만... 즐거웠다.

위험한 함정이나 강적도 나오지 않는 저레벨 미궁이었지만 그게 오히려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뭐랄까 어렸을 적 근처 숲이나 산을 탐험하거나,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모르는 길을 통해 돌아오는 것 같은... 그런 자그마한 모험의 느낌이라고 할까.

일단 안전하다는 걸 알고있는 안심과 그러면서도 약간의 위험을 즐기는 느낌.

오로지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모험.

그것이 내 어릴 적 모험가에 대한 꿈을 떠올리게 해줬다.

큰 돈을 벌어 우아한 생활을 하며 하렘을 만든다는 건 어느 정도 컸을 때의 꿈이고.

더 어린 시절의 나는 그야말로 모험가가 되어 모험을 하는 것... 그 자체가 꿈이었다.

전설의 검 대신 나무 막대기를 들고 여주인공 대신 여동생을 데리고 매일같이 익숙한 숲에 모험을 떠나는 날들.

숲에는 대저택 따윈 없지만 대신 큰 나무의 줄기를 이용해 만든 비밀기지가 있고 거기에 보물을 잔뜩 모아두었다.

금은보화는 구하기 힘들어도 나무 열매와 강에서 잡은 물고기, 특이하게 생긴 돌멩이나 희귀한 곤충을 보물로 삼았다.

그것이 원점.

내 모험가의 시작.

금전욕이나 색욕, 명예욕 따윈 나중에 태어난 불순물이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모험을 하고 싶다.

거기에 주인공을 지탱해줄 예쁜 여주인공이 한 명 있으면 완벽.

이번 모험이 그런 어린 시절의 마음을 떠올리게 해준 것 같다.

야한 모습의 미녀와 예쁜 미궁에서의 작은 모험.

그야말로 내가 어릴 적 상상했던 모험가의 모습이다.


'뭔가 의욕이 조금 생긴 것 같아.'


왜 돈을 벌어야하는가.

왜 강해져야 하는가.

그런 아무 의미 없는 갈등은 이제 필요 없다.

그저 생각하는대로 모험가고 그 과정에서 돈과 강함을 얻는다.

그게 모험가라는 것이다.


"내일부터 다시 힘낼까."


쭈욱 기지개를 켰다.

...아 그래. 레리아나에게 뭔가 보답해야지.

내 동기를 부활시켜 줬으니까.

레리아나에게 감사선물이라면... 역시 그거다.


'문제는 어떻게해야 자연스럽게 넘겨줄까인데...'


나는 해질녘 속에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으며 생각했다.


회귀한 후로 내게 하나의 일과가 있었다.

매일 아침에 '전설의 신들의 이상향'에서 마인 오리올의 봉인을 확인하는 것이다.

저번 회차에선 어느샌가 봉인이 풀려있던 오리올이었지만 이번엔 가능하면 그 부활을 저지하고 싶다...

그게 불가능하더라도 부활 시기를 파악해두고 싶다고 생각한 결과다.

물론 하루종일 감시할 순 없으니 이렇게 아침에 보러 오는 정도밖에 못하지만 안하는 것보단 낫다.


"좋아 오늘도 이상 없고..."


오리올이 봉인되어 있는 방의 통로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의 시기는 엘리제의 강간 이벤트가 일어난 후 정도다.

전회차에선 여기서부터 빚쟁이의 여관 습격이나 엘리제와의 일주일 내내 섹스하던 이벤트가 있었고 내가 초보 학살자의 소문을 들은 게 약 2주 후가 된다.

즉, '동류'는 그 사이에 오리올을 부활시켰을 가능성이 높고 운이 좋다면 마주쳐서 저지할  수도 있다고 희미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라곤 해도 그 가능성은 매우 낮아서, 최종적인 내 목적은 이렇게 순찰하는 것으로 '동류'에게 경계심을 주며 오리올의 부활을 견제하는 것이 메인이다.

일단 노예라도 사서 여기에 감시를 세울것도 생각해봤지만 이 통로는 누구나 다니는 길이며 오리올은 마검을 지닌 자가 지나가는 것만으로 부활하기에 '동류'를 찾아내는 것은 곤란했다.

문제는 또 있다.

오리올이 부활했을 경우 놈을 어떻게 쓰러뜨릴 것인가 이다.

회귀한 덕에 내 마검 소울이터는 각성 전으로 돌아가 버렸다.

즉 지금의 나는 놈에게 피해를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내 안에는 아직 놈을 향한 증오와 살의가 머물고 있다.

놈을 다시 눈 앞에 두었을 때 그것이 재연해 마검 소울이터가 호응하여 각성해주는 걸 기대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그 밖에도 마인을 대처할 방법은 있지만 솔직히 그건 내키지 않는 방법이다.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고 귀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일과인 봉인 순찰이지만 사실 왕복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끝나버린다.

때문에 시간 단축을 위해 나는 달려서 왕복하고 있었다.

짐은 최소한으로, 방어구도 없이 무기는 가벼운 숏소드 뿐.

거기에 수통만 들고 아침마다 미궁 마라톤을 하는 것이다.

루트는 최단 코스로 전력질주.

중간에 만나는 몬스터는 지나가며 일격으로 벤다.

드롭 아이템도 무시하고 서둘러 간다.

전회차는 엘리제와 둘이서 하루에 걸쳐 3계층이었지만 지금은 혼자인것과 짐이 없는 것 그리고 높은 스텟과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의 힘도 합쳐져 지금의 나는 왕복 한시간이라는 속도로 봉인 지점까지 갈 수 있었다.

...솔직히 이런 이상한 짓을 하는 건 나 뿐이라 주위에서 무슨 눈으로 보고 있을지 조금 무섭다.

분명 괴짜 취급을 받고 있을 것이다.

일단 사람이 적은 이른 아침을 선택해 달리고 있긴 한데...


다만 작은 성과도 있다.

우선 내구 스텟이 0.30 정도 올랐고 새로운 칭호 '초급미궁주자'도 얻었다.

'초급미궁주자'는 총 25층을 이동한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다.

오랫동안 모험가를 하면 자연스레 얻는 칭호다.

스테이터스 증가는 아래와 같다.


[초급미궁주자] : HP+10, MP+10, 근력+1.00, 내구+1.00, 의지+1.00.


초급 모험가보다 조금 떨어지는 상승량이지만 없는것보단 훨씬 좋다.


"도착!"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약 56분... 훗, 또 1분 단축했다.

어제 레리아나와의 모험이 멘탈에 좋은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달리는 방법을 피치 주법에서 스트라이드 주법으로 바꾼게 좋았던 걸까?

보폭을 크게 하는 스트라이드 주법은 피치 주법보다 체력 소비가 적지만 그만큼 발에 충격이 가서 신체에 부담이 커지고 근력도 필요하다.

높은 스텟의 내구와 근력을 가진 내게는 피치 주법보다 스트라이드 주법이 더 맞는걸지도 모른다.

후후, 이거라면 내일은 시간을 더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쿨다운으로 가볍게 조깅을 하며 숙소로 돌아간다.

이른 아침의 공기는 미궁의 무거운 그것과는 달리 상쾌해서 기분이 좋다.

혈액에 쌓인 미궁의 사악한 무언가가 씻겨나가는 것 같다.

거리에 드문드문 성실한 모험가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들을 목적으로 하는 포장마차들도 나오기 시작하고 젊고 귀여운 여자아이가 호객행위를 하는 곳에는 긴 남자들의 줄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때 전방에서 모험가 집단이 걸어왔다.


'오... 클랜의 원정인가.'


클랜이라는 건 대규모 미궁의 답파를 목적으로 한 모험가들의 그룹이다.

고정 미궁을 제외한 모든 미궁에 존재하는 던전 코어...

마력이 허락하는 한 다양한 소원을 이뤄준다.

부상의 완치, 병의 근절, 회춘, 장수... 코어는 권력자들이 눈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원하는 물건이며 막대한 부를 가져다준다.

일류 모험가에게 있어 코어의 획득이야말로 모험가의 일이다.

하지만 회춘이나 중병의 치료가 가능할 정도의 코어가 있는 미궁은 그 깊이가 최소 30층이 넘어가는 대규모 미궁이기에 공략도 몇 개월 단위가 된다.

전이의 크리스탈이 있으면 얘기는 다르지만 이는 국가가 인정한 용사에게만 전해지기에 당연히 물자 보급은 스스로 해야한다.

그렇게 되면 물자 관리나 보급도 다른 미궁과는 전혀 다른 형태가 된다.

클랜안에는 그런 물자 보급 임무를 주로 하는 부대도 있어서 단순한 모험가의 모임과는 다르게 군대같은 성질을 갖게 된다.

클랜의 소속되어 있다는 건 모험가 사이에서 명성이다.

대부분의 클랜은 업적이 있는 일류 모험가들만 들어갈 수 있기에 대형 클랜에 소속됐다는 건 일류 중의 일류라고 간주된다.


쉽게 비유하자면 클랜은 프로야구 구단이다.

클랜에 소속하지 않은 모험가 파티는 고등학교의 야구부.

많은 모험가(고등학교 야구부)들은 언젠가 클랜에 들어가는(프로야구에 진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파티의 동료(부원)과 밤낮으로 모험에 임한다.

그리고 중규모 미궁의 답파(고등학교 야구대회)등의 실적을 올리면 클랜(구단)에서도 주목받고 그 중에서 재능이 있다고 판단되면 클랜에서 스카우트가 오기도 한다.

스카우트가 오지 않았던 모험가도 직접 클랜의 문을 두드려 입단 시험을 받아 합격하면 입단할 수 있다.


라는 느낌인가.

대충 맞을 것이다.

클랜에 소속된 모험가는 다른 모험가들에게서 존경의 눈으로 봐지고 그 수입도 현격히 다르다.

그야말로 회사원과 프로야구 선수만큼 수입이 달라진다.

당연히 못생겨도 여자에게 인기가 많아진다.

클랜 안에서도 특히 유명한 초일류 모험가는 이명을 붙여서 국내에서 영웅시 되고 있다.

재상이나 대신의 이름을 모르는 아이들이라도 이명을 가진 사람은 몇 명이나 알고 있을 것이다.

당연히 나도 유명한 클랜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

그런 어린이들의 동경의 존재에 조금 흥미를 느껴 멈춰섰다.

거리에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길을 내주곤 흥미로운듯이 멀리서 바라본다.

문득 내 근처 모험가들이 흥분한 기색으로 서로 속삭이는 게 들렸다.

젊은 남녀 2인조다.


"'미궁 성기사단'인가."

"선두에 있는 거 제 1왕자 크리스님이야."

"하아~ 멋있구만. 나도 언젠가 저런 일류 클랜에 들어가고 싶네."

"너는 100년이 걸려도 안 되지. 이 미궁도시 탑클랜인데."

"알고 있다고. 꿈이라도 꾸게 해 줘."

"뭐 미궁 성기사단 정도 클랜에 들어가면 너처럼 못생겨도 인기 많아지겠지~?"

"시끄러!"

"꺄하하!"


나는 왠지 승리자 냄새가 나는 남녀 모험가를 곁눈질하며, 선두를 걷는 기사 갑옷의 청년을 보았다.


'저게 크리스 마르크티아 인가...'


중성적인 미모를 가진 20세 정도의 청년이다.

키는 160cm 정도로 작고 전체적으로 가녀린 인상을 느낀다.

머리카락도 남자치고는 길고 보석같은 푸른 눈은 상냥하고 둥그스름했다.

눈부신 금발엔 무지개색 브릿지가 섞여 있는데 그게 왕가의 증거였다.

이 미궁 도시에 왕족은 한 명 밖에 없다.

제 1 왕자 크리스 마르크티아...

이 미궁 도시의 영주이자, 최강의 클랜 '미궁 성기사단'의 리더.

...그리고 미궁의 아르카디아의 히로인 중 하나.


그래.

그녀도 공략 대상 중 한 명인 것이다.


왕자인데 히로인이라는 모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흔히 말하는 남장여자다.

본명이 크리스티나인 그녀는 정치적 사정으로 어릴적부터 남자로 키워졌다는 과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몇 년 전에 진짜 남자인 제 2왕자가 태어난 것으로 역할이 필요없어졌고 그녀도 그것을 알고 뒤에서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꽤나 복잡한 배경을 가진 캐릭터다.


평소엔 마도구의 힘으로 남자로 변신하지만 어쩌다 주인공이 그녀가 사실 여자라는 걸 알아버린다.

그런 주인공을 암살하려는 등 우여곡절 끝에 주인공에게 마음을 열게 되고, 이후 진정한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서 주인공에 대한 집착이 깊어지는 얀데레 특성을 가진 캐릭터이기도 하다.


공략 난이도는 모든 캐릭터 중에서 가장 높고 선택지에 따라 배드엔딩도 있다.

게다가 그녀는 마검 소울이터를 잃은 후에 핵심 아이템인 성검 이벤트에 관련된 중요한 캐릭터이기에 마신을 쓰러뜨리는 트루엔딩을 목표한다면 무조건 공략해야하는 캐릭터다.

그런 귀찮음 덕분에 플레이어들에게서 인기는 그다지 높지 않다.

솔직히... 나도 관련되기 싫은 캐릭터다.

선택지를 잘못고르면 누명으로 투옥, 처형이라는 배드엔딩은 마음껏 세이브로드가 가능한 플레이어라면 몰라도 당사자로서 반드시 피하고 싶은 이벤트고, 그 계기인 그녀와는 아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일단 그녀를 공략하지 않아도, 마신을 쓰러뜨리지 않고 봉인하는 노말 엔딩은 볼 수 있기에 현재 나는 그녀와 관련될 생각은 없었다.

지나가는 '미궁 성기사단'을 대충 보고 있던 나는 그들의 틈새로 길 건너편에 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20살 정도에 붉은 머리가 매력적인 여성이다.

기복이 있는 육감적인 몸을 과시하는 듯 노출도가 높은 옷을 입고 있다.

유횩하는 것 같은 금색 눈동자와 두툼한 입술이 매우 관능적이고 눈을 떼기 힘든 마성을 가진 여자였다.

겉모습만 보면 퇴근중인 창녀같지만 나는 이상하게 그녀가 신경쓰였다.

딱히 그녀에게 열정을 품은 것은 아니다.

확실히 성적으로 매력적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녀의 존재 자체에 위화감을 느낀 것이다.

만난 적이 없는데 만나본것 같은 이상한 감각...

그 감각에 답답해하고 있자 어느새 여자가 내게 다가와 있었다.

살짝 감도는 관능적인 장미향수....

나는 갑자기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녀는 그런 나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

"...안녕하세요."


설마 말을 걸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나는 조금 당황하면서도 간신히 대답을 돌려줬다.


"나한테 무슨 용건이라도 있는걸까?"

"아, 아뇨..."


허리에 손을 얹고 당당히 물어보는 그녀에게, 실례스럽게 빤히 바라봤던걸 들킨게 어색해서 시선을 돌렸다.

그런 나를 보며 그녀는 '아아' 하고 납득한 듯 손뼉을 치더니.


"혹시... 창녀라고 착각한거야? 저 여자 얼마일까, 처럼?"

"아 아뇨. 그런 건 아니고."


나는 당황하며 부정했다.


"전에 만난 적이 있나 싶어서요. 네."

"아하 뭐야 그게? 헌팅?"


나의 대답을 들은 그녀가 이상한 듯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은 생각보다 어려보여서 어쩌면 내 나이 정도의 또래처럼도 보였다.


"아쉽지만 지금은 아니야. 옛날에는 그런 적도 있었지만말야."

"그런가요..."


내가 뭐라 답해야할지 몰라 붙임성 있는 미소를 짓자, 문득 그녀가 요염하게 웃으며,


"그런데... 너 귀여운게 오늘만 창녀로 돌아가도 괜찮을까?"

"엇."

"아핫, 농담이야. 귀엽네 정말."


큭, 완전히 손바닥 위에서 굴려지고 있다.

레리아나도 그렇고 요즘 연상 여자에게 놀림받기만 하네.

내가 낙담하고 있자 그녀도 웃으면서 사과해왔다.


"후후 미안해. 너무 놀렸나봐. 이름은?"

"...알케인이요. 케인이면 됩니다."

"나는 올리브. ...케인, 지금은 조금 할 게 있어서 안되지만..."


거기서 그녀가 스윽 몸을 갖다 대더니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게 끝나면 하룻밤 상대해줄게."

"윽."

"후후 그럼 이만."


그리고 그녀는 손을 흔들며 떠났다.


'저 여자... 어느틈새 나한테 온거지...대체 누구야?'


조금 방심하고 있었다고 해도 마검의 기량을 계승한 내게 저렇게 갑자기...

확실히 보통내기는 아니다.


'지금은 할 게 있다고 했던가? 대체 뭘...?'


나는 그녀의 뒷모습에 파란의 예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