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국 허리를 만지작거리며 메릴에 기댄채 식당칸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짐승 같은 메릴은 업무로 받은 스트레스를 푸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사랑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날 대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좋았어..."

"뭐라고?"

"아...아냐."

이렇게 날 아껴주고 사랑하는 사람과 속궁합도 좋다는 건 너무 사기였다.
한 마디로 천생연분이라는 단어가 이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허리 아파서 어떻게 해?"
메릴은 걱정스러운 눈치로 날 바라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식당 칸이 멀지 않았다는 거야."
나는 손가락으로 식당 칸을 가리켰다.

문이 열릴고 안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는데 분주한 웨이트리스, 레베카가 날 발견했다.

"어머, 벨라?"

"아..안녕? 레베카. 저녁 먹으러 왔어."
나는 메릴에 기댄채 볼품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서 조금 부끄러운 느낌이었다.

"어서 와 벨라. 그리고 아침에 뵈었지만 다시 인사드릴 게요. 레베카라고 합니다."
레베카는 싱긋 웃으며 메릴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메릴이라고 해요. 벨라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오늘 사귄 친구라고 자랑하더라구요."

"헤헤. 벨라가 벌써 이야기했어요?"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내 남자친구 한테 말해야 했으니까."
나는 장난스레 말했다.

"뭐, 좋아. 그래도 다행히네. 자리가 있어.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아 고마워요 레베카 씨."

"편히게 레베카라고 불러주세요. 벨라 남자친구 분이라면 언제나 환영이에요."

"고마워 레베카."

메릴은 나를 부축한 채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앉혔다.
나는 앉으니 조금 허리가 낫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네가 너무 날 험하게 다뤘다고 생각은 안 해봤어?"

"그거야...네가 새로운 걸 하고 싶다고했으니까."
메릴은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제발, 그런 이야기는 침실에서 해줘. 식당에서 말 하고 싶지는 않아."

"좋아."
메릴은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메릴은 후배를 잘 챙기는 선배였나 보네."

"메.릴!"

나는 결국 소리를 치고 말았다.

"벨라 무슨 일이야?"
레베카가 내 소리를 듣고 나에게 다가왔다.

"하하. 아니야. 잠깐 흥분해서."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

"미안해. 레베카."
나는 사과를 하고는 메릴을 노려본 다음 운동화로 메릴의 발등을 밟았다.
메릴은 표정하나 바뀌지 않았다.

"뷔페식이랑 저녁 주문을 받고 있는 데 어느걸로 할래?"
레베카는 온 김에 내게 주문을 받으려고 하는 듯 보였다.

"뷔페는 내가 아껴두고 싶어서. 오늘은 단품으로 먹어보려고 해. 추천해 줄 수 있어?"
나는 메릴의 발을 밟은 채 웃으며 말했다.

"음...버터 밀크 치킨은 어때? 미국식이지만 한국에서 온 사람들도 잘 먹더라고. 러시아 음식도 추천하고 싶은 데 아직은 네게는 무리인 거 같아서."
레베카는 미안 한 표정을 지었다.

"맞아. 이국적인 음식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도 좋지만 천천히 다가가는 방법도 좋은 방법이지."

"그리고 열차에서 네가 고통받는 걸 원치 않거든."

"배려 고마워 레베카. 오늘은 편히게 먹고 내일부터 러시아 음식에 도전하고 싶어."

"좋은 서택이야 레베카. 그리고 메릴 씨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나한테도 말 놓아줘 레베카. 네가 그렇게 이야기했으니까."
메릴은 아픔을 참아내며 가능한 웃으며 말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밟고 있던 그의 발에서 내 발을 치웠다.

"휴우..."

"응? 무슨 일이야 메릴?"

"아, 아무 것도 아니야. 그리고 말 놓아줘서 고마워. 레베카. 나도 음식하나 추천해 줄래?"
메릴은 능숙하게 표정을 관리 하면서 말했다.

"음... 스테이크는 어때? 나도 메릴에게는 내일부터 러시아 음식을 먹길 추천해."

"배려 고마워 레베카. 그런데 난 조금 도전적인 사람이라서 러시아 음식을 먹어보고 싶은 데 수프 같은 것 있을까?"

"수프? 아, 첫 러시아 음식으로 좋은 선택이야. 러시아의 빵들은 맛있으니까. 곁들여 먹을 수프는 많지."

레베카는 메뉴판에 그려진 그림을 보여주며 말했다.

"보르쉬라는 비트로 색을 낸 맛있는 수프가 있어. 어때? 고기도 들어 있고 맛있어. 겨울에는 이 수프만 한게 없지."

"그걸로 할게. 고마워 레베카."

"천만에 말씀. 잠시만 기다려줘. 벨라 그리고 메릴."
그녀는 주문을 받고 주방으로 향했다.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지?"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맞아. 네가 내 발을 풀어줄 정도라면 최소한 아리스 정도 는 되는 거 같은 데."

"다시 고통 받아볼래?"

"아니 사양하겠어."
메릴은 능글맞게 이야기했다.

"그나저나 회사일 많이 바쁜거야?"

"아니, 네가 나가기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대부분 결제건이라서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어. 하지만 조금 걸리는 게 있어서 말이야."

"걸리는 거?"

"아, 잠시만."

레베카가 다가와 우리들의 물컵에 물을 담아주었다.

"고마워 레베카."

"아니야. 벨라."

그녀는 물을 주고는 다시 사라졌다.

다시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본 메릴은 말을 시작했다.

"GLL관련 협약이 HK그룹과 직접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서 말이야."

"무슨 말이야?"

"타나 씨랑 법률 지원팀의 말에 의하면 정부 보증인 아래 GLL과 HK그룹이 협약한 게 맞지만 3자가 개입되어 있었나 봐."

나는 머릿속에서 신문에서 보았던 한 그룹이 생각났다.

"RusTek?"

"어떻게 알았어?"
메릴은 놀란 눈치였다.

"아니 오늘 카페에서 신문을 봤어. RusTek가 Andeg라는 마을을 개발한다는 기사를 봤거든."

"놀라운 관찰력이야 벨라."

"칭찬 고마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세히 말해줄 수 없지만 GLL 관련한 일이 조금 복잡해졌어. 사장님이 괜히 6 개월이라는 시간을 준 게 아니라고 생각이 들더라고. 그리고 이 편지도 말이야."

사장님이 건네 준 편지를 꺼낸 메릴이었다.

"엠마 씨라고했지?"

"맞아, 사장님의 가족이라고 했지만 세대가 엄청난 차이가 있어서 설명을 듣는데 고생했지."
사장님이 그녀를 소개하기 위해 사장님과 그녀의 연결고리를 설명하는 그 시간이 그것을 증명했다.

"엠마 씨가 생각보다 중요한 인물 같아. 그러니까...정확하게는 TS단체의 고위 인물인 것 같아."

"무슨 말이야?"

"유럽 쪽 TS 그러니까 GB 단체 중에 과격파라 불리우는 그룹의 지도부더라고."

"...세상에."

사장님 가문은 역시 혈기 왕성한 듯했다.

"엠마 씨는 그중에서도 독일에서 GLL 앞에서 하도 시위를 많이 해서 독일에 입국 불가한 위험 인물로 되어 있어."

놀라운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응?"

메릴은 손 짓을 했는데 그곳에는 스테인리스 서빙용 트레이 위에 음식을 가져 오는 레베카였다.

"러시아 사람들은 정말 많이 먹나 본데?"
나는 보고도 믿겨지지 않았다.

버터 밀크 치킨이라해서 몇조각이 올라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한 마리가 통째로 튀겨진 상태로 있었다.
그리고 엄청난 그릇에 담긴 보르쉬라는 수프와 두툼한 빵덩이가 같이 오고 있었다.

"어...우리가 잘못시킨건 아니지 레베카?"

"아니야. 보통 러시아 사람들은 이렇게 먹으니까."
웃으며 말 하는 레베카를 한 번 보고 다시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내미는 영수증을 봤는데 우리가 정확하게 시킨 것은 맞았다.

"어..."

"디저트를 너무 많이 먹은 걸 후회하고 있지 벨라?"
메릴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응."
부정할 수 없었다.

"빵이 부족하면 말해줘. 러시아예서는 빵은 무료니까."

"세상에..."
메릴은 보르쉬와 같이 온 자신의 팔뚝만 한 길이의 빵을 보고 놀라워 하고 있었는데 레베카의 말을 듣고 더 놀란 표정이 되었다.

우리의 상을 가득 채운 저녁 음식을 보며 우리는 놀라워 하고 있었는데 인근 테이블에서는 우리를 재밌다는 듯 바라보았다.

"저희가 잘 시킨게 맞죠?"
나는 다른 테이블에서 식사를 마치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중년의 노신사 분에게 물었다.

"맞네. 잘 시켰지. 러시아는 처음인가?"

"네, 처음이에요."

"환영한다네!"
노신사 분은 손뼉을 치며 말했다.

"하하...감사합니다."

"너무 놀라지 말게나. 러시아 사람들은 먹는 것에 대해서는 아일랜드인 못지 않으니까. 부족하면 저 귀여운 웨이트리스에게 말하게 빵은 더 가져다줄걸세."

"어...이미 들었는데 다시 들으니 더 놀랍네요."

"하하! 재밌는 친구들이군."
노신사 분은 웃으며 내게 묵례를 하셨다.

나도 그 예의 바른 묵례에 인사를 했고 올바른 청년인 메릴도 엉겁결에 따라 했다.

"음... 먹어볼까 메릴?"

"응... 일단 먹어보자."
나와 메릴은 굳은 결심을 하고 이 음식의 바다에 빠질 잠수부처럼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버터 밀크로 껍질을 바삭하게 튀긴 닭 다리를 뜯어서 내 접시에 옮겨 담고 가슴살 부위는 메릴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 벨라."

"치킨은 식으면 맛이 없으니까."

"그건 이 수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그는 말 하지 않아도 내 앞에 수프가 작은 그릇에 담겨 왔다.

정말 빨간색의 수프라 놀라웠다.
비트 그러니까 한국으로 따지면 빨간 무가 들어 가서 그런 것 같은 데 수프 스푼으로 조금 떠서 맛을 보니 왜 레베카가 추천한 지 알 수 있었다.

"정말 마음까지 따듯하지는 맛이야."

"놀라운데?"
나와 메릴은 호평 일색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지금은 2월에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열차안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난방이 잘되어 따듯하다고 하더라도 창문밖에 보이는 하얀 것들이 주는 시각적인 추위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것마저 녹이는 이 따스한 수프는 마음을 녹이는 수프와 같았다.

양배추 우린 물에 고기와 당근, 양파 그리고 비트의 맛이 느껴졌는데 나머지 재료는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엄청 건강한 고깃국 같은 느낌인데?"

"정확한 표현이야 메릴. 네 표현력이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것 같아."

"보고 좀 배워 벨라."

그의 장난스러운 으스대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시적인 표현이나 어려운 표현을 하기 어려웠다.
직관적이고 솔직하다는 것에 다른 말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단순했다.

단순하다는 게 무식하거나 멍청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이 단순함이 좋았다.

"사랑스러운 표정이야 벨라."

"다시 부끄러워지잖아."

"그것도 귀여운 걸?"
메릴은 능글맞게 말했다.

"오늘은 그만할 거야."
나는 그에게 선을 그었다.

"무슨 말이야?"

"오늘은 그만하겠다고. 그저편안 하게 너를 안고 이 기분 좋은 배부름을 즐기고 싶어. 오늘은 첫날이니까 밤하늘을 수 놓은 별들을 보면서 말이야."

"낭만적이야."

"그러니까 맛있는 음식 식기 전에 어서 먹도록해. 레베카가 힘들게 가져다 준 음식이니까."

메릴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맛있는 음식을 식혀서 제맛을 못 느끼거나 혹은 남긴다면 후회할 것 같았다. 아니 아무래도 무슨무슨 신이 진노할 것 같았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에 대한 모욕이라면서 말이다.

치킨을 베어 물었는데 맛있게 튀겨진 튀김 옷이 한국스러운 매콤한 맛이 느껴지지 않아서 놀라웠다.
버터밀크라고 해서 버터맛이 날 줄 알았는데 그대로 버터맛이 나서 놀라웠다. 이상한 표현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무슨무슨 맛이라고 해서 막상 먹으면 그 맛이 안 나는 경우가 더러있으니까.
그런면에서는 러시아 음식도 꽤 직관적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벨라. 버터밀크 치킨은 미국 음식이야."

"상식이 부족해서 미안해..."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니, 방금 전에 레베카가 이야기 해줬잖아."

어디에라도 숨고 싶었다.

"이런..."

"귀여워 벨라."

"아니 이건 내가 부끄러워서 그래."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인정하는 모습도 좋다고 생각해."

"네 눈에는 다 좋게 보여서 다행이라 생각해."
나는 나도 모르게 바보처럼 배시시하면서 웃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거기에 이 마음이 풍족해지는 음식을 나누며 이야기하는 것은 행운이라 생각이 든다.

조금 아쉬운 것이라면 메릴 뿐만 아니라 모두와 이 감정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느낀 것을 나누면 모두 행복해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예전부터 생각한 글 쓰기를 해볼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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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작가가 될 생각을 하는 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