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얼굴에 자그마한 미소가 지어졌다.

 

여왕의 관을 쓴 공주가 전장으로 달려나간다.

 

죽은 기사가 뚫어 놓은 길을 따라 적의 심층부를 향해 달려나간다.

 

가로막는 이는 모두 베어버린다.

 

백의 병사

 

백의 기사

 

백의 궁사

 

혹은 백의 성벽조차 여왕의 관을 쓴 공주를 막을 수는 없었다.

 

빗속을 뚫고 공주는 달렸다.

 

흑의 병사가 공주를 지켰다.

 

흑의 기사가 공주를 지켰다.

 

흑의 궁사가 공주를 지켰다.

 

흑의 성벽이 공주를 지켰다.

 

이윽고 흑의 공주는 왕의 눈 앞까지 도달했다.

 

"체크"

 

"....으음"

 

흑의 공주가 백의 왕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하아..."

 

백의 왕은 충성스러운 기사를 바쳤다.

 

백색의 기사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왕의 명령을 따랐다.

 

"체크"

 

하지만 욕심이 많은 공주는 그것으로 부족하다.

 

 

 

 

 

 

 

천둥소리가 몰려왔다.

 

"............"

 

하지만 공주는 천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체크"

 

병사가 공주를 지켰으니.

 

기사가 공주를 지켰으니. 

 

궁사가 공주를 지켰으니. 

 

성벽이 공주를 지켰으니. 

 

공주가 두려워 할 것은 없다. 

 

공주는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체크"

 

"아, 이런.."

 

공주의 검이 백의 왕을 겨누고 있다. 막다른 길이다.

 

"체크 메이트, 내가 졌어. 엘, ......너 체스만 하면 사람이 바뀌는 것 같아"

 

그녀가 백색의 킹을 넘어뜨리면서 패배를 말했다. 

 

그녀가 뭔가 이상한 말도 했지만. 


어쨌든 이번에도 이겼다. 승리는 항상 좋은 것이다.

 

"선생님은 체스를 할 때마다 그대로인 것 같으세요"

 

"엘, 네가 잘하는 거야. 이래 보여도 체스 클럽에서..."

 

늘 듣던 소리였다. 그렇지만 이런 분쟁 지역에 체스 클럽이 과연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굳이 알고 싶지는 알았다. 


괜히 나서고 싶지 않다, 라는 이유가 있기도 했다.

 

"네, 네. 체스 클럽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셨다구요?"

 

체스의 기물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은 참지 못했다.

 

"하아. 내가 체스 마스터에게 뭔 말을 하겠니"

 

그녀가 조그맣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처음 그녀와 체스를 둔 이후로, 그녀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체스 마스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닌데, 뭐라고 해야 할까.

 

"아하하하... 그 마스터라는 칭호는 과분한데요"

 

"뭐어, 가 보면 알 거야. 나중에 데려다 줄게"

 

예전의 그리운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 내가 체스를 배웠을 때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에서 배웠을 때 


..내가 남자였을 때


기물을 정리하던 두 손을 바라봤다.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구나.


"음, 사양할게요. 바쁘시잖아요"

 

"....하여튼, 나만 이렇게 지니까 화가 나서 그래. 화가 나서"

 

굳은 살이 박힌 손으로 그녀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좋은 느낌이긴 해도, 어린애 취급은 언제라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하하, 그래도 져주는 건. 엄청 싫어 하시잖아요"

 

".....어서 치워, 나 잘 거야"

 

그녀가 손을 치웠다. 그녀의 손이 머물던 곳에서 묘한 아쉬움과 해방감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체스 클럽의 실력자 선생님. 아하하하하"

 

"내가, 말을 말아야지.."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