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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격히 브레이크가 걸리는 공에 하릴없이 돌아가는 방망이, 어김없이 헛스윙 삼진이다.


"어때요?"

"장난 없어, 종슬라도 첸쟙도 못 건드려. 나는 투구수 빼는게 다다...5년만 더 젊었어도."

지수 선배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며 더그아웃으로 돌아간다.


이제 내 차례다.

7회 말, 세 번째 타석, 원아웃 주자 2,3루. 다음 이닝은 아마 불펜을 돌릴 테니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이게 내 마지막 타석이 될 것이다.


첫 타석에서는 브레이크가 무시무시하게 걸리는 체인지업에 속아 스윙 삼진, 두번째 타석엔 몸쪽 투심을 나름대로 잘 받아쳤으나 아무래도 투심이다보니 타구가 힘없이 내야로 떨어지는 바람에 땅볼 아웃, 그래도 이제 슬슬 놈의 투구 패턴이 보인다.


-퍽!

150km/h를 초과하는 직구가 살벌하게 미트에 꽂힌다.

초구는 무조건 한가운데 포심, 놈은 여자가 된 나를 한껏 얕보고 있는데다 내가 웬만하면 초구를 지켜보는 성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일 적에 이미 수십번은 더 붙어본 상대니까 서로의 특징 정도는 꿰고 있다.


7이닝에 걸쳐 시우의 공을 받으며 얼얼해진 손으로 배트를 꽉 진다.

장타도 필요없다, 그냥 외야로 띄워보내면 된다. 이 지독한 투수전에서는 *고급 야구만 해줘도 팀의 부담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놈이 와인드업 모션을 취한다.

곧이어 커브가 존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1-1, 역시 여자가 되긴 했어도 선구안은 그대로다.


3구, 포심을 받아쳤으나 뒤로 날아가 파울라인 바깥에 떨어진다. 1-2,

방금건 존에 걸치는 하이 패스트볼이다. 아무래도 희생 플라이를 견제하는 눈치다.

이제 카운트가 불리하게 몰렸다. 유인구로 삼진 잡는 것을 좋아해 *색칠놀이가 잦은 놈의 성격상 공을 하나 빼려고 할 것이다. 아니면 날 개무시해 그냥 한가운데 메다꽂아버리거나.


놈은 전자를 택했다. 4구는 존에서 벗어나는 하이 패스트볼이다. 이제 카운트는 2-2

5구, 슬라이더를 받아쳤으나 1루측 파울라인 바깥으로 향한다.

6구, 존에서 벗어나는 체인지업에 배트가 나가기 직전 멈췄다. 다행히 심판은 휘두르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3-2 풀카운트.

7구, 수직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 아슬아슬하게 배트로 건드려 뒤로 튕겨난다.


서로 잔뜩 집중한 상태,

이런 때 타임을 요청해 타이밍을 뺏는다면 놈이 아니더라도 어떤 투수든간에 좋아 죽는다.

심판의 판정이 불만이라 그런지, 내가 공을 7개나 봐서 그런지, 아니면 건방지게 타임을 해서 그런지, 셋 다인진 모르겠지만 녀석은 꽤나 열받은 기색이다.


뒤로 물러나 방망이를 두세 번 휘두르고 다시 타석으로 돌아온다.

내가 예상외로 선전하는 것 때문인지 관객들의 함성 소리가 아까보다 훨씬 커졌다.


놈이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8구를 던진다.

이도저도 아닌 공이 한가운데로 몰린다.

명백한 실투, 기회다. 판단은 짧고, 몸은 그보다도 더 빨리 반응한다.


딱-!

청명한 소리가 그라운드에 울려퍼진다.

순풍을 타고 멀리 날아가는 공을 보며 1루를 향해 냅다 달린다.


공은 담장을 맞추고 외야로 떨어졌다.

좌익수가 서둘러 유격수에게 송구했지만 이미 나는 2루에 여유롭게 들어와있다.

남자 몸이었다면 담장을 거뜬히 넘길 실투였지만, 그래도 1대1 동점의 균형을 깨는 싹쓸이 2타점 적시 2루타, 재데뷔 첫 안타 치고는 굉장히 성공적이다.




(*고급 야구=희생 플라이를 돌려 말하는 것)

(*색칠놀이=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유인구로 볼을 양산해 전광판을 채우는 투수의 습관을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