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껀 좀 많이 길다.

그리고 즐거운 한가위 보내라 챈럼들아.






정점을 노리는 도전의 결과가 언제나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패는 무의미하지 않고, 비웃음의 대상도 아니다.


실패했을지언정 도전자는 선구자인 동시에 개척자이며 뒤따르는 이들의 안내자이다.

킨(Keen)은 비록 정점에 도달하진 못했을지언정 후대들에게 길을 제시한 개척자였다.





킨의 품종은 여기서 당연한것이나 다름 없을 서러브레드다.


1966년 머니 브로커(Money Broker)와 메이블 빅토리(Mablr Victory) 사이에서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에 위치한 목장에서 월러비(Willoughby)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킨 그니까 월러비는 당시엔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이름을 날리는 하이페리온계였다.


네로나 스노우바운드, 터치 오브 클래스 같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첫 시작은 경마였는데.....기록이 없다.

정확힌 경주마로 이름만 올렸지 출전도 못했다.


성격과 체구 그니까 사이즈가 문제였다. 





이 놈의 체구는 17.2h였다.

감이 안온다면 젠야타보다 0.3h 작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당연히 이 크디 큰 체구는 경마 종사자들에게 조롱거리나 다름 없었다.

그 덕인지 모르지만 당시에 이놈 체구에 맞는 게이트를 찾는것부터 문제였는데........







정작 어찌저찌 그나마 큰 게이트를 찾았지만 안들어갔다.

정확힌 들어가기 싫어했고 그걸로 경주마 커리어는 쫑났다.


목장주가 빡돌아서 말고기로 만들어도 이상치 않았겠으나...경주마가 될 운명이 아니라 판단하고 소몰이 말로 전환시켰다.

물론 말을 팔려는 노력을 안한건 아니었고, 안팔리면 그냥 소몰이용 말로 쓰일 예정이었다.


그렇게 목장에서 들판의 풀을 소때와 처묵처묵하며 소몰이 말로서 나름 살며 놀던 와중

1969년 마침 목장을 방문한 초등학교 교사 힐다 거니(Hilda Gurney 1943~)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다.






(1967년 사진인데 지금도 살아계신다.)

LA출신의 기수로 당시의 그녀는 종합마술 기수이자 초등학교 교사였다.





미국의 승마에서 마장마술은 1948년 이후부턴 매우 마이너한 종목이었고, 

그나마의 기수와 말들조차 유럽에 비해 매우 열세라는 평가를 받았다.


가르치는 사람도 드문데다 관심 있어하는 사람도, 재능있는 말도 없으니 미국 승마협회에서 대놓고 거 '마장마술 대표팀 없애죠?' 이랬는데도 반박을 못하고, 

오히려 윌리엄 스테인크라우스나 마이클 페이지 같은 장애물 비월, 종합마술 기수들의 변호로 보호받았던게 마장마술의 입지였다.






힐다 역시 처음엔 마장마술 기수를 꿈꿨으나 열악한 국내 인프라국제대회에선 유럽의 말과 기수들에게 열세라는 현실에 좌절하고 종합마술 기수로 전환했지만 낙오자나 다름없었고 아직도 마장마술에 미련이 남아 방황중이었다.


그래도 자신이 타고갈 말을 몰색하던 중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이 자기네 목장에 매우 큰 말이 있다며 한번 보러 오라고 권유했다.


그리고 26세의 초등학교 교사가 마주한 것은,







(피아페(piaffe))

비록 혼자서 노는 목적이라 올바른 피아페는 아니었을지언정 홀로 수축하고 제자리에서 속보를 밟는 말이었다.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은 3세마가 혼자 이러고 있던거다.


힐다는 바로 목장주와 만남을 가지곤 기본적인 사항을 다 확인한 뒤 1000달러, 현재로 치면 7450달러를 지불하고 사왔다.

재능도 재능이었지만 이력을 듣고 나름 자신과 같은 낙오자라는 동질감서로 실패한거 미련없이 도전해보자 라는 마인드였다 한다.


그리고 이름을 월러비에서 킨으로 바꿨는데 자신이 생각하기에 너무 거만하게 들리는 이름이었다고...









힐다가 서러브레드로 전문적인 마장마술에 도전하는 것은 지금보면 미친짓이지만 당시로선 별 수 없었다.

미국에서 8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의 웜블러드 그니까 스페인-포루투갈 혹은 독일 품종이 없다시피 했다.

대신 경마는 죽어라 발달했다보니 경마덕에 넘치다 못해 과잉이던 서러브레드를 가져다 승마를 하는게 일반적이었다.


일단 킨의 혈통은 비록 우연이었을지언정 부계는 하이페리온~바야르도로 이어지고, 모부는 선인로우 그니까 다크 로널드로 이어졌다.

당시 유럽 승마에서 점차 대세로서 자리를 잡던 베이 로널드계의 혈통으로 혈통의 잠재력은 충분했다.


더군다나 킨은 네로 스노우바운드, 터치 오브 클래스와 달리 경마로 얻은 부상도 없었고,

승마의 특성상 큰 체구를 지탱할 뼈가 굳고 근육이 자리잡을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문제는 당시 캘리포니아에 승용마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조교사나 구무원이 전무했고, 그마저도 웨스턴 스타일이었다.

정기적인 도움을 받기가 어려웠던 만큼 킨을 조교하고 관리하는 것까지 힐다의 몫이었다.


킨은 기수 특히 힐다에겐 애교가 많은 성격이긴 했지만, 

이게 좀 화끈해서 힐다가 등에 타면 가끔 마장마술 훈련중에도 전력 질주를 하곤 칭찬을 요구했다.


다행히 힐다의 거주지는 산타모니카의 산기슭(언덕)이었고 

매일 아침 킨과 같이 언덕 꼭대기까지의 왕복 2.4km를 걸으면서 킨을 안정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그래도 결국엔 독학이었고 한계를 느낀 힐다는 초등학교가 방학을 하는 여름마다 킨을 트레일러에 태워 지인이 있는 뉴욕으로 떠났다.

미국 동부해안은 승마가 활성화되있었고, 마침 뉴욕에선 미국 대표팀에서 초청받은 유럽의 승마기수, 조교사들이 아마추어 마장마술 기수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당연히 이 아마추어들중 힐다와 킨은 독보적이었고 이에 관심을 가진 기수만이 아닌 조교사, 관리사 그리고 수의사가 힐다와 킨을 따라 캘리포니아로 따라갔다.

킨과 힐다가 국제무대에서 경쟁을 할 잠재력이 있다 판단했다곤 하는데...당사자는 정작 고맙긴 해도 너무 꿈이 큰거 아니냐며 반색했다고 한다.




(75년 멕시코시티 팬아메리칸)

아무튼 74년 킨과 힐다는 첫 데뷔를 함과 동시에 그 해에 미국 승마협회에서 올해의 말과 기수 마장마술 아마추어 부문의 상을 받았고,

이듬해인 75년엔 미국 대표팀에 선정되어 팬아메리칸에서 개인 은메달, 단체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국내에선 킨과 힐다에게 마장마술로 대적할 말과 기수가 없었다.

미국 마장마술계에선 그들이라면 유럽의 말과 기수들을 상대로 국제무대에서 경쟁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희망의 불씨가 지펴졌다.








1976년 

몬트리올 하계올림픽


비록 유력한 금메달 후보가 있었다 할지라도 킨 그리고 힐다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마장마술의 볼모지나 다름없는 미국이었고, 아무리 국내를 석권했을지라도 유럽과는 분명한 격차가 있었다.


오히려 유럽에서 공수해온 하노버리안 모나코와 달비츠에 더 관심이 쏠려있었다.

킨을 처음 본 유럽의 기수들은 킨을 작은 홀슈타인 혹은 트라케너로 취급했고 서러브레드라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장애물 비월, 종합마술이면 몰라도 마장마술에서 핫블러드의 시대는 실질적으론 60년대에 끝났으니까.




(1976년 몬트리올의 킨과 힐다)

미국 승마 대표팀중 장애물 비월에서 미국팀이 침몰하고 있을때, 

킨과 힐다는 당시의 심사위원 그리고 참가했던 유럽의 기수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건 좀 이야기가 긴데...무턱대고 뉴비들 경험치 먹인다고 뉴비만 3명에 고인물 1명으로 구성했다 결국 실패...)


스위스의 기수 크리스틴 스튜켈버거와 독일의 기수 라이너 클림케는 저 둘은 보는 것만으로 즐거운 마장마술의 본질이라 평했고,

크리스틴을 가르쳤던 게오르그 발은 비록 킨은 네로와 같은 절제되고 섬세한 움직임은 아닐지언정 동작마다 넘치는 힘과 역동성이 담겨있다 평했다.



(좌측부터 킨, 달비츠, 모나코. 기수들이 웃는 이유가 있다.)

킨과 힐다는 개인은 10위였으나 단체는 4위를 함으로서 미국팀에 마장마술 단체 동메달을 안겨줬다.

1948년 런던 하계올림픽에서 기병장교들의 분투이후로 얻은 2번째 마장마술 메달이었다.


비록 킨과 힐다는 최정점에 오르진 못했을지언정 미국의 말과 기수들에게 유럽의 수준에 다가갈 수 있음을 증명했다.


킨과 힐다의 수준은 당시의 국제수준에서도 상위권이었다.


올림픽에 참가한 유럽의 기수들이 왜 지금까지 유럽에서 열리는 마장마술 대회에 참가를 안했냐며 한탄했고,

독일에선 킨의 몸값으로 백지수표를 그리고 프랑스와 영국에선 서러브레드 말고 우리의 웜블러드를 타는게 어떠냐며 제의까지 받았다.









어찌됬든 킨과 힐다의 다음 목표 중 하나는 당시의 다른 기수 그리고 말들과 마찬가지였다.

예나 지금이나 압도적인 상대를 어떻게든 끌어내려 칼찌를 놓아 자신의 승리를 증명하는 것은 종목불문 공통이다.


73년부터 전설을 써내려간 그라나트 그리고 그의 기수 크리스틴.

그들에게 칼찌를 놓는것은 당시 기수들과 말의 소망이었다.


78년에 영국 굿우드 세계선수권대회나 CHIO 아헨에서 비록 입상은 아닐지언정 미국의 말과 기수라는게 믿기지 않을 호평을 받았다.

(로테르담과 같은 몇몇 네이션스컵에서 입상도 하긴 했다.)





하지만 킨과 힐다는 주로 국내대회를 뛰었다.


몬트리올의 동메달이 미국 승마에 끼친 영향은 거대했다.

장애물 비월에서 메달을 따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도 있었겠지만, 

여성도 마장마술이 가능하고 미국의 말과 기수도 유럽수준에서 경쟁이 가능함을 증명했다.


특히 힐다가 서러브레드를 사서 직접 훈련시켰다는 사실미국내 마장마술의 인식을 전환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승마협회에선 지금이 기회다 판단하고 힐다와 킨에게 부디 마장마술 시연행사 및 국내대회를 참가해달라 부탁했다.

힐다는 마장마술이 대중화된다면 미국은 꾸준하게 유럽과 경쟁하며 언젠가 정점을 차지하리란 희망을 품었다고 회고했다.


결국 힐다는 교사를 그만두고 캘리포니아에 자신의 마구간을 만들어 캘리포니아 주에서 마장마술을 가르치며 국내대회를 뛰기로 했다.


킨의 성격 역시 한몫 거들었다.

대회에 나가는 것과 사람의 관심을 받는 것을 즐기는 성격이었던데다, 박수를 받으면 그에 화답하는 성격이었다.

특히 행사에 참가한 어린이나 아마추어 기수들을 등에 태우고 마장마술을 선보였다.


이러한 행보로 유럽의 기수나 미국내 관계자들에게 킨은 프런티어(Frontier, 개척자) 혹은 토치라이트(Torchlight, 횃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79년 푸에르토리코 팬아메리칸)


킨이 비록 힘이 넘쳤어도 그것이 폭력적이었단 소리는 아니었다. 

매우 사람중심적인 말이었고 혼자 남겨지면 안절부절해 했으며 지시를 내리면 그를 최대한 이행하려 했다.

(콜란더스 처럼 기수 위에 있던 말이 아니란 소리다.)

먹이를 주면 일부러 먹이를 발밑에 떨어트려 같은 마방에 있는 토끼들이나 다람쥐가 겸상을 하도록 했다.


단 아침산책을 거르는건 얄짤없었다. 무조건 일정 시간, 일정 강도로 걸어야 했다.


79년 팬아메리칸 당시 코치와 관계자들은 힐다와 킨이 아침산책으로 힘을 빼는것보다 온존한 상태로 대회에 참가하는게 어떠냐는 제의를 했고,

힐다는 이를 받아들여 대회날에는 주기적으로 하는 아침산책을 안하기로 했으나...

아침에 일어나서 조교사랑 구무원과 대화하는데 마방에서 킨이 나왔다.


힐다가 안오니까 그냥 킨 혼자 문을 땄다는 것도 놀라운데 매우 화가 나있었는지 귀가 접혀져 있기까지 했다.

결국 힐다는 킨을 데리고 경기장 근처 부지를 돌았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근데 이러고 개인-단체 금메달을 따왔다.



(목부상을 치료하고 재활중인 킨)

1980년


대다수의 말과 기수가 그라나트를 이기기위해 굿우드로 향할때, 방목중 사고로 목뼈와 근육을 심각하게 다쳤다.

관계자들은 킨의 승마커리어가 끝났다고 판단했고 힐다가 할 수 있는건 킨을 매일 관리하며 그저 기도하는것 뿐이었다.

(이 기간동안 힐다는 여러 말을 훈련시키는 일을 했다. 평은 좋았지만 그 말을 타고 대회에 나가달라는 부탁은 거절했다.)


다행히 부상은 1983년에 완치되었지만 육체적 전성기가 끝난 17세의 나이였다.

다시 진지하게 훈련에 임했고 1년만에 다시 국가대표가 되어 자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출전하게 되었다.


1984년.

LA 하계올림픽.


뉴질랜드의 난쟁이와 거인이 참가했던 대회이자,

대비되던 두 마리의 말에게 있어 처음이자 끝일지 모르는 대결의 장이었던 대회였다.


힐다의 고향 LA, 그리고 국내에서 열린덕에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되는것은 킨에게 호재였으나 킨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84년 장애물 비월 2마리는 둘다 암말이다. 터치 오브 클래스, 올버니.)

3년만의 재활로는 전성기의 퍼포먼스를 완전히 되찾긴 힘들었으며, 킨의 육체적 전성기는 훨씬 지난 18세였다.

승마 특히 마장마술에서 서러브레드로 활동하는 것은 킨 혼자뿐이었다.


마장마술은 이미 웜블러드의 시대였고, 미국에서도 서러브레드의 자리는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킨은 미국 마장마술의 선구자일지언정 국제수준의 마장마술에선 최후의 서러브레드였다.



결국 킨과 힐다는 메달을 따는것도, 순위권에 드는것도 실패했다.

그럼에도 그들을 기억하던 관중들만이 아닌 같은 미국 대표팀 그리고 라이너, 크리스틴을 비롯한 해외기수들이 열렬한 함성과 박수로서 답해줬다.

(왠만한 말은 놀라니까 함성이나 박수는 자제하는게 좋다.)


비록 전성기는 끝났을지라도 한시대를 견인해온 개척자들에게 보내는 찬사였다.

1985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마장마술마 20마리에 선정되었을 정도로 그들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다.





(은퇴한 뒤 마장마술을 시연중인 힐다와 킨)

비록 힐다는 킨과 대회를 나가진 않았으나 아직 젊은, 경험이 부족한 기수들이 킨을 타고 대회에 나가도록 허락했다.

미국 내에서 국제수준의 마장마술을 선보이는 말은 드물었고, 훌룡한 기수는 훌룡한 말 위에서 만들어진다는 격언을 생각하면 당연하기도 했고,

킨이 더 이상 대회를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전형적인 우울증세를 보이자 이를 완화시키는 목적도 있었다 했다.

(박수 소리 카세트테이프로 커버되는 수준이 아니었다고 한다.)


일단 힐다의 스타일은...분명히 교사로선 매우 친절했는데 스승으로선 매우 무서웠다는 평을 받았다.

독학이긴 해도 역시 말을 쥐여짜느니 기수가 쥐여짜여야 한다는 고전적 스타일에 가까웠고,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문제를 지적하고 압박하는 팩폭형 스타일이라 울었던 기수들도 상당했다고 한다.


아무튼 킨과 힐다덕에 성장할 수 있던 기수들 중 몇몇은 국제대회에 나가 입상하고 국가대표도 하는 등 지금도 바쁘게 살고 계시다.




1989년


킨은 20년간 같이 호흡을 맞춰온 파트너인 힐다의 곁에서 23세의 나이에 뇌졸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미국 마장마술의 앞길을 밝힌 횃불이 꺼진 순간이었다.


공교롭게도 스노우바운드 그리고 그라나트가 세상을 떠났던 해였다.





1997년 킨은 마장마술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힐다는 킨과 함께했던 20년은 매우 특별한 순간이자 모든 것을 빚진 시기였다 정의했으며,

승마협회는 그가 마장마술에 남긴 공헌과 영향력은 그 무엇과 비교도, 평가도 할 수 없다고 평했다.






ps1. 



(맨 좌측부터 올버니-레슬리, 칼립소-멜라니, 터치 오브 클래스-조, 압둘라-콘라드. 미국 승마 장애물 비월 드림팀 혹은 황금시대 마지막 절정기의 주역들.)


84년 LA올림픽에 출전했던 킨 그리고 터치 오브 클래스에 묻히지만 올버니(albany) 역시 서러브레드다.



킨과 마찬가지로 하이페리온의 후손에 터치 오브 클래스처럼 경마도 뛴 적이있지만 

드라마틱한 부분은 죄다 저 둘에게 몰빵된것도 있고, 올림픽도 출전자격 따냈더니 터치 오브 클래스, 압둘라선에서 정리된덕에 칼립소가 그냥 완주만 해도 단체 금메달 확정이라 출전도 못했다..


번식 암말로서는 일찍 은퇴한게 득이었는지 터치 오브 클래스랑 달리 자마들중 종마까지 나오는 등 대성했던 편이었다.

그래도 현역시절 터치 오브 클래스랑 같은 암말인데도 사이가 좋았다. 정작 압둘라랑 서로 못담궈서 안달난 사이라 문제였지....







ps2.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킨과 힐다덕에 마장마술 기수들은 스폰서의 본격적인 후원을 받기 시작했다.

그 중 힐다는 어떤 스폰서에게 후원대신 광고에 출연하게 해달라 부탁했는데...


(................실제 70년대 광고다.)

생소하겠지만 맥주 그니까 버드와이저다.

킨을 거기 출현시켜서 마장마술을 확실히 광고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이었으나.....


정작 버드와이저에서 온 대답은 기준을 통과한 클라이즈데일 품종이 아닌 이상 그 말이 삼관을 따오든 금메달을 따오든 안된다며 거절당했다.


그래도 후원은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