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철하는 건 최고, 매료시키는 건 아름다움, 바치는 건 사랑. 질투도 부러움도 동경도 투지도, 온갖 생각을 뒤로 하고 달렸다. 눈동자가 응시하는 것은 완전무결한 승리의 영광, 몸도 마음도 오로지 달리기를 위해 빚어졌다.


“더비 우마무스메가 일본제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닿지 않았다. 완벽했다 여겼다. 계획대로 되고 있다 여겼다. 그런데도 닿지 않았다. 하나하나 결과를 확정시키는 게시판의 불빛에 내 번호는 없다. 비가 내리는가, 축축하게 젖은 몸에 옷이 무겁게 들러붙는다. 머리에 쓴 월계관이 땅을 구른다. 그 위에 비가 떨어진다. 승부의 열기가 꺼져버린 잿빛 눈에서부터, 볼을 타고, 비가.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관중석에서 하나 둘 돌아서는 사람들 속에 보라색 모자를 쓴 할머님을 보았다. 그 뒤를 따르는 나의 자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하늘색 머리카락이 나를 등진다. 거절당했다. 나의 사랑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당신, 당신이 서 있다.


날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말했다간, 정말로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 같아서. 대신에 감정을 숨기고 대답했다.


“다음이 있으니까.”


“다음?”


당신은 나를 비웃었다. 다른 이들처럼 고개를 저으면서 돌아선다.


“시시한 여자. 흠결이 생긴 구슬은 완벽이라 부를 수 없는 거야.”


아니야. 당신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야. 당신은 시시한 사람이니까, 레이스보다 날 더 좋아하니까. 내 전부가 아니더라도, 몸 뿐인 관계라도, 날 원해줄 것이다.


“상관 없잖아요? 어차피 당신도 시시한 남자. 시시한 여자가 어울리지 않나요?”


그렇다고 해줘요. 제발. 날 혼자 두지 마요. 끓는 감정에 뚜껑을 덮듯 팔짱을 끼고 희미하게 웃는다.


“안아줘요.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메지로 라모누.”


“네, 메지로 라모누예요.”


“메지로 라모누.”


“어서요.”


“라모누!”


갑자기 당신이 언성을 높인다. 천둥소리처럼 울린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당신까지 나한테 소리치지 마세요. 놀라고 소름이 끼친 몸에 피가 바쁘게 내달린다.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마치 긴 꿈에서 깬 것처럼.



“라모누!”


트레이너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뜬 라모누의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잠옷을 넘어 이불까지 축축하게 적신 식은땀이 기분 나빴다. 차근차근 현실을 받아들이는 라모누의 눈과 머리, 첫 번째로 든 생각은 지금 얼굴을 적시는 액체가 눈물이 아니고 차라리 땀이었으면 좋겠단 것이었다. 그녀의 앞에서 이불을 들추고 정신 없이 부르고 있는 그에게 조금이라도 덜 꼴사납게 보였으면 했다.


아직 알딸딸한지 멍한 표정의 그녀의 허리를 받쳐 가까이 안으면서 트레이너는 침대에 와 앉았다. 어지간히 바쁘게 뛰어왔는지 그의 몸도 조금 뜨겁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아준다.


“땀 좀 봐. 괜찮아?”


“.......”


달래는 것처럼 부드러운 손수건과 손길에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졌는지, 라모누는 평소의 냉랭한 얼굴로 돌아갈 수 있었다. 꿈이었구나, 언제나의 악몽이었구나, 하고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방 한 구석의 시계를 보니 꽤나 시간이 늦었다.


“당신, 언제, 어떻게?”


오늘 밤은 함께 보내는 날이 아니었다. 트레이너는 자기 방에서 자고 있을 시간이다. 트레이너는 손수건으로 그녀의 목 주변을 닦아주면서 대답했다.


“네가 보고 싶어서 잠이 와야 말이지.”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풀어지는 걸 필사적으로 참으면서 라모누는 고개를 홱 돌렸다.


“이쪽도 닦아 주세요.”


“너도 내가 많이 보고 싶었나 봐? 그렇게 안아달라고 부탁하는 걸 보면 말야.”


닦아달란 목은 무시하고 트레이너의 손과 손수건이 실크 잠옷 안으로 슬금슬금 들어간다. 축축하게 젖은 계곡 사이를 트레킹이라도 하는 것처럼 만끽하는 손길, 여러가지 생각이 스쳤지만 이 일관된 시시함이 안심이 된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일부러 길게 빼 한숨을 연출하면서 그녀가 대답했다.


“꿈은 현실과 반대라고 했어요.”


“예지몽이었을 수도 있지.”


“가볍게 말하지 마세요.”


“아무튼 이렇게 된 거, 괜찮잖아?”


그가 천천히 침대 위로 더욱 몸을 올려, 끌어안는 면적을 넓힌다. 들어올리듯이 자신의 허벅지 위로 그녀를 위치시키려 시도한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라모누는 거기 따랐다. 하지만 확인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안 할 이유가 없으니까. 안 그래?”


“......그렇네요.”


가볍게 안도하면서 라모누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몸이 원래 누워있던 자리에서 멀찌감치 옮겨졌다. 원래라면 트레이너가 누워 자는 곳, 땀이 흐르지 않아 뽀송뽀송했다.


“땀이 식으면 추울 테니까.”


“그런 줄 아시면 닦는 게 우선 아닌가요?”


“아니, 미끌미끌해서 좋을 것 같은데.”


“천박해요.”


“춥지 않게 해줄게. 그건 약속할 수 있어.”


트레이너는 약속을 지켰다. 이번엔 꿈도 꾸지 않고 따뜻하게 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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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마 기념 출주자를 선정하는 팬투표가 벌어지는 11월 중순, 메지로 라모누의 엘리자베스 여왕배 우승을 기념하는 축하연이 메지로 저택에서 열렸다. 이런 자리를 위해 조심스럽게 고른 수트를 챙긴다고 챙겼는데, 한 밤에 급하게 저택으로 오느라고 타이를 빼먹고 말았다. 몇 번이나 가방을 뒤져 확인하는 그를 바라보면서 라모누는 한숨을 쉬었다.


“한심하네요. 보나마나 타이를 빼먹고 오신 거겠죠.”


“아니? 원래 노타이로 가려고 했는데?”


팔짱을 끼고 위아래로 그의 모습을 훑는 라모누의 시선. 오른손으로 가만히 볼을 받쳐 턱을 괴고 바라보더니 가볍게 평가했다.


“어쩐 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네요. 자리의 중요성 정도는 알고 계신 모양이네요.”


“당연히 그렇지.”


“......라고 할 뻔.”


라모누가 싱긋 웃으면서 입을 가렸다.


“먼저 가 계세요. 준비할 게 조금 있어서.”


“알았어.”



“형부, 안녕히 주무셨는지요?”


복도를 걷고 있는데 저쪽에서 사뿐사뿐 가벼운 걸음으로 하늘색 머리의 우마무스메가 다가왔다. 라모누의 제일 가까운 자매, 아르당이다.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면서 마주친 자주색 눈이 조금 피곤해 보였다.


“나는 잘 잤는데. 그...... 처제는 잘 못 잤나봐?”


“그러는 형부도 피곤해 보이시는데요.”


서로 약간 어둑해진 눈 아래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가볍게 웃음을 주고받으며, 둘은 복도를 나란히 걸었다.


“어제는 고마웠어. 갑자기 연락해서 좀 놀랐지만.”


“고민을 하긴 했지만요. 이런 시기이니, 이제는 형부께서도 아실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시기라. 역시 아리마인가.”


“네. 아리마 기념이예요. 라모누 언니의 가장 바라고......”


씁쓸하게 웃으며 아르당이, 메지로 라모누와 가장 어울리지 않을 듯한 단어를 입에 올렸다.


“가장 두려운 것.”


그녀는 기도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모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언니를 잘 붙잡아주세요. 무너져내리지 않도록.”


“힘 닿는 데까지는 할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대답은 원하지 않아요. 형부는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느껴요.”


“고평가는 고마워. 노력할게. 또 내가 도울 일이 있을까?”


아르당은 약간 얼굴을 붉히면서 살짝 걸음을 멈춰, 그가 앞서 지나갈 수 있게 한 뒤 대답했다.


“그, 되도록이면, 밤에는 소리를 조금만 줄여주시면.”


“아, 쏘리. 어쩌다보니 기세를 좀 타서 말야.”


“언니를 너무 거칠게 다루지 말아주세요. 형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연약한 사람이니까.”


“그건 나도 알아. 그치만 처제도,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을 거야.”


어쩐지 우쭐해하면서 식당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아르당은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에 LANE을 보내면서 싱긋 웃었다.


“그런가요. 저도 알고 싶네요......”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준비해 힘을 팍 주고 나타난 라모누에게선 승자의 위엄이 가득했다. 모두가 축하하면서 조촐하게나마 준비해 건넨 선물들에


“어머, 고맙구나.”


하고 가감없는 극찬의 말을 쏟아내면서 라모누는 선물들을 받아 고용인에게 맡겼다. 자리에 앉기 전, 그녀가 눈동자를 움직여 주위를 체크했다. 할머님이 앉으실 주최자 자리, 그리고 그 오른편이 주최자를 제외한 서열 1위로서의 자신의 자리. 단지 할머님의 맞은 편 트레이너가 앉을 주빈의 자리와 그 좌우, 맥퀸과 파머가 앉아야 할 자리에 자꾸만 시선이 멈췄다. 그녀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큰언니, 괜찮으신가요오?”


자기 자리를 찾아 앉으면서 가볍게 하품을 하던 브라이트가 느긋한 목소리로 묻자, 자매들의 시선이 쏠린다. 라모누는 차가운 얼굴로 대답 없이 서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그냥 조금 피곤해서.”


“호와와, 무리하시면 안 되어요.”


굳은 얼굴로 고용인이 뒤로 빼준 자리로 걸어가는 라모누를 끄트머리쪽 좌석에서 바라보던 트레이너가 조금 큰 소리로 물었다.


“어라, 라모누. 거기 앉기로 한 거야?”


“.......여기가 제 자리입니다만.”


“그래? 왜?”


“천박한 사람. 자리 배치는 의전에 따라 하는 거예요.”


“그런가. 잘 몰랐어, 미안. 그래도 아쉽네. 옆에 앉고 싶었는데 말이지.”


아쉬운 듯 픽 웃어버리는 트레이너, 하지만 거짓말을 하고 있다. 몰랐을 리가 없다. 그는 입구에서 가까운 끄트머리, 가장 서열이 낮은 자리에 앉아 있다. 삐딱하게 앉아있는 것도 예법을 몰라서라기보단, 언제든 안내자가 주빈석으로 안내할 때 바로 찾아갈 수 있게 하려는 것이리라. 어느새 들어온 파머가 자리에 앉으려고 할 때 자리를 뒤로 빼주려고 몸을 움찔이려다 아닌 척 기지개를 켜는 걸 라모누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뭘 해야 하는지, 어떻게 앉아야 하는지 모르지 않는다. 그저 모르는 척 떼를 쓰고 있는 것이다.


“형부, 실례지만 형부께서는 여기가 아니라 저쪽 가운데에 앉으셔야 해요.”


“어라, 그래? 몰랐네. 미안.”


파머가 조용한 목소리로 지적하자 즉시 일어나 주빈석으로 걸어가면서, 파머의 자리를 살짝 뒤로 빼주는 걸 잊지 않는다.


“그래도 이건 맞지? 레이디 퍼스트?”


“음.......네에......”


조금 멋쩍어하면서 자리에 앉는 파머를, 라모누는 팔짱을 끼고 바라보았다. 조금 더운지 파머가 초조하게 가슴께의 리본을 약간 느슨하게 했다. 주빈석에 앉은 트레이너가 자기 옆자리와, 자신을 향해 오고 있는 맥퀸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환하게 웃으면서 부탁했다.


“아, 맥퀸. 미안한데 혹시 라모누랑 자리 바꿔줄 수 있어?”


“네? 네?? 형부?”


“아무래도 내가 라모누 옆에 꼭 앉고 싶어서 말야. 그, 예절은 잘 모르지만 너희도 형부라고 생각하면 혹시 양보해주지 않을래? 뭐, 아직은 트레이너와 학생 관계니까 사실상 남남이긴 하고, 너무 무례한 부탁이면 무례한 거라고......”


“아뇨, 아뇨. 제 생각에는 충분히 괜찮을......”


맥퀸은 고개를 끄덕이려다 라모누의 눈치를 힐끗 보고 말을 멈춰버린다. 무감정해보이는 그녀의 표정, 팔짱, 눈썹의 각도를 보고 위험하다 느낀 건지 굳어버린 맥퀸 대신 트레이너가 라모누 쪽을 돌아보았다.


“괜찮대! 이리 오지 않을래? 라모누? 너만 괜찮다면?”


트레이너는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자기 옆자리에 오기 위해, 차기 당주가 앉을 자리를 맥퀸한테 양보하고 오지 않을래? 하고. 그런데도 라모누는 자기 다리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가는 것에 놀랐다. 고민조차 하지 않는 자신에게 놀랐다. 하지만 실제로 몸이 땅을 디뎌서진 않았다. 그대로 뭉개고 눌러버릴 수도 있다. 그녀가 일단 조금 진정하려는 듯 깊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천박한 사람.”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원래 맥퀸이 앉아야 할 자리에 가 앉으면서 인상을 찌푸리며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절 어디까지 굴러 떨어트리실 거죠?”


“네가 굴러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게 될 지점까지.”


의자 팔걸이 아래로 살짝 팔을 빼 몰래 라모누의 손을 매만지면서 트레이너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라모누는 그를 불편한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얼마나 제 체면을 떨어트려야 직성이 풀리시겠어요?”


“네 체면? 이건 그냥 예절도 모르고 천박한 내가 멋대로 떼쓴 것에 불과한데? 깎이는 건 내 체면이지 않을까?”


그녀가 다그치듯이 그의 손을 꽉 잡았다가 놓아 빼면서 작게 말했다.


“그래서 하는 말이예요.”


“어흠, 어흠.”


어느새 들어와 앉으셨는지 할머님이 자리 배치와 트레이너, 라모누를 보고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모자를 벗어 집사에게 맡기면서 메지로 아사마가 옅게 웃었다.


“라모누 트레이너, 자네도 여기 방이 하나 있어야겠구먼.”


“하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요.”


그녀의 열기로 얼얼한 손바닥을 멋쩍게 테이블 아래 감추면서 트레이너가 마주 웃었다. 라모누는 별다른 이견 없이 앉아서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축하연이 끝나고, 자연스럽게 라모누의 방에 함께 돌아와 시간을 보낸다. 저녁 시간이 되어 트레이너가 가방을 챙겨 일어난다.


“잠시 집에 좀 다녀올게. 내일 입을 옷이랑 트레이닝 자료 챙겨서 올 테니까.”


“기사를 대기시켜 놓을 게요.”


“배려 고마워.”


“시시한 감사는 됐어요. 이건 배려가 아니니까.”


정말로 배려가 아니었다. 기사가 한참을 오지 않아 무슨 일인가 싶어 보니 뒷좌석 문이 열리면서 라모누가 들어와 앉았다. 기사가 캐리어 하나를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


“진짜 배려가 아니네?”


“어쩔 수 없었다는 것만 말해둘게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 저택을 바라보면서 라모누가 짧게 쏘아붙였다.


“매트리스 안쪽까지 엉망이 돼서, 교체될 때까지는 제 방에서 못 자게 되었으니까요.”


“이제 내 방에서도 못 자게 되겠네.”


“천박한 농담은 듣기 싫어요.”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라모누의 손등을 간질였다.


“농담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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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오자마자 무서운 기세로 엉겨오는 트레이너를 라모누는 딱히 거절하지 않았다. 어쩔 수가 없다. 다른 방으로 가거나 고용인을 부를 수 있는 메지로 저택과 달리, 여기는 도움을 요청할 고용인도 없고, 도망칠 수 있는 다른 방도 없으니까. 마지못해 그의 목에 양 팔을 감고 무력하게 입을 벌린 채로 천박하고 시시한 욕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어설프게 거리를 두면 더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다리를 감았을 뿐이다.


“당신. 할 말이 있어요.”


완전히 지친 그를 무릎 위에 눕히고, 달래듯이 땀에 젖은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면서 라모누가 약간 쉰 소리로 속삭였다.


“뭔데?”


“당분간은 레이스에 집중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사교 활동은 잠정적으로 중단......”


그의 표정을 살피면서, 라모누가 발언을 정정한다.


“자제......”


“한 가지만 해줄래, 라모누? 자제야, 중단이야.”


“......당신은 저랑 달리 천박하고 시시한 사람이라, 중단하자고 하면 견디지 못하겠죠.”


트레이너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긴 시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둠을 오래 바라보면 일렁이는 듯 느껴지는 것처럼, 무감정해보이는 그녀의 눈도 오랫동안 바라보면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이 있다. 그는 그 느낌을 좋아했다. 그가 손을 올려, 그녀의 볼을 세심하게 매만졌다.


“엄청 힘들겠지. 근데, 그렇다고 다른 여자한테 손 댈 만큼 힘들진 않을 것 같아.”


“상식이 있는 사람은 욕정을 참기 힘들다고 여자한테 손 대지 않아요. 당신과 달리요. 당신은 뻔뻔하고 천한 속물이예요. 지금도 어떻게 저한테 그런 말을 하셨는지 이해가 안갈 때가 있어요.”


“그건 미안하게 됐어.”


그가 힘없이 웃으면서 그녀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그치만 속물이라 오히려 말이 통할 때도 있을 거야. 속물인 만큼 거래는 철저하게 지킬 수 있지. 신뢰같이 고고한 가치가 아니더라도, 신용이라면 말야. 어때? 나랑 거래를 하나 할래?”


“너무 뻔뻔한 거래가 아니라면요.”


“사교활동을 하지 않는 대신, 나랑 다른 시시한 일을 하나씩 하자. 물론 지극히 건전한 활동이야. 이것만큼은 확언할 수 있어.”


“절 여기서 더 시시한 여자로 만들고 싶으신가요?”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되겠지.”


트레이너가 그녀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내 눈에, 지금 너는 완벽하게 아름다워.”


“흥. 남자들은 한 번 할 수 있다면 무슨 말이든 한다는데요.”


“한 번 하고 나서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적고 말이야.”


라모누는 잠시 생각하다가, 아까부터 거슬리게 구는 그의 엄지손가락을 살짝 물었다.


“흥.”


“거래 성립인거지?”


“좋으실 대로.”



땀이 식으면 추워지고, 감기에 걸릴 위험이 증가하고, 감기에 걸리면 컨디션을 망치고, 컨디션을 망치면 훈련을 망치고, 훈련을 망치면 레이스에 악영향이 간다는 장황한 논리로 꼭 끌어안은 채 잠든 두 사람은 일어나 평소와 다름 없는 하루 트레이닝 메뉴를 소화했다.


오후 트레이닝이 끝난 뒤, 오늘의 시시한 일로서 트레이너가 레이스장으로 라모누를 데려갔다. .


“......흙냄새.”


“정말로 흙냄새가 난다는 뜻?”


“그럼, 다른 의미가 있나요?”


모리오카 경기장의 꾀죄죄한 좌석에 앉은 라모누가 더트 트랙을 내려다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이런 좌석은 마음에 안 들어? 그럼 내 위에 앉을래?”


“거기에 비하면 여기는 퍼스트 클래스네요.”


트레이너의 말을 가볍게 씹고 패덕으로 입장하는 우마무스메들을 바라본다. NAU 주관의 교류 G1, JBC 스프린트, 관중들을 향해 각오와 준비를 내보이는 모습들 사이에서 라모누가 핑크색 머리의 작은 우마무스메를 발견한다.


“......과연.”


“4번, 하루 우라라, 2번 인기입니다.”


그러고보니 아리마 기념에 출주한다고 했다. 제법 많은 팬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시시한 논쟁의 주인공을 보여주려고 하셨군요.”


“시시한지 아닌지 지켜보자고.”


“똑바로 들어주실래요?......<시시한 논쟁>의 주인공이라고 했어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게이트가 열리고 우마무스메들이 쏟아져나온다.


“저런. 조금 늦었군요.”


“뭐, 너무 늦진 않았고, 후방에 머무르는 걸 선호하니까 그렇게까지 타격이 크지 않을지도.”


“단거리 레이스인데 말이죠.”


흙먼지를 날리면서 어느새 트랙의 반절을 지나고 있는 우마무스메들의 행렬, 선두에서 최후미까지 대략 10마신 가까이 나던 차이가 빠르게 좁혀진다. 빨간 블루머를 입은 우마무스메가 머리띠를 휘날리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선다.


“자, 남은 거리 400의 표식을 지났다, 과연 뒷열의 우마무스메가 때에 맞출 것인가?”


“최종 코너, 하루 우라라가 올라온다.”


“......호오.”


라모누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경기장의 풍경과 어울리지 않게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지만, 주먹을 꼭 쥔 채 달리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최종 직선에서 기어이는 선두 우마무스메를 제치고 2마신 차이로 결승선을 넘어버릴 때까지, 라모누는 입을 꾹 다물고, 숨마저도 멈춘 채 굳어 앉아 있었다. 전광판에 하나하나 불이 켜질 때에야, 그녀가 손을 들어 턱을 괴었다.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꾹 누른 자국이 빨갛다.


“......철저하게 계산된 스퍼트 타이밍, 전광석화같은 가속. 마지막에 보여준 날카로운 말각까지. 이길 만한 우마무스메가 이겼군요. 솔직히 놀랐어요. 어떤 트레이너께서 교육하신 건지, 부러울 정도네요.”


관중들을 향해 반갑게 양 손을 들고 화답하는 하루 우라라를 내려보면서 라모누가 평가했다. 이 경기는 하루 우라라에게 아주 중요한 경기였다. 아리마 기념에서 달리기 위해 자신이 경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려는 경기, 그런 상황에서의 승리, 자격의 증명. 마지막 한 문장만 아니었다면 트레이너는 좀 더 즐겁게 그녀와 얘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게 아닌데......”


“헌데 저 아이, 평소랑 기뻐하는 모습은 비슷하네요.”


“응? 그렇지. 그저 달린다는 게 기쁜 아이거든. 그저 전력을 다해 달리는 아이 말야.”


라모누가 흠흠, 하고 말하더니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사랑이군요. 아이처럼 순수한 사랑.”


“시시한 달리기라고 생각하진 않았어?”


“붓 터치가 수수하다고 그림이 갖는 의미가 수수한 게 아니거든요. 마음을 바친 그림은, 그 뒤에 여운을 감춘 법이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라모누가 짧게 대답했다. 아직 자리에 앉은 그에게 손을 내밀면서, 조금 더 화사하게 웃었다.


“당신이 시시한 것도, 그 수수한 외모 때문이 아니랍니다.”


“한 마디 잘못 했다가 외모로 얻어맞네.”


내민 손을 잡은 그의 손에 다른 쪽 손을 포개면서 라모누가 짧게 대답했다.


“말이라는 게 그래요. 한 마디를 잘 하면 천 냥 빚을 갚는 법이구요.”


“와, 내가 너한테 이런 말까지 들어야 하냐?”


“그럼 어떤 말이 듣고 싶으신지요?”


“아니다.”


트레이너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턱으로 입구 쪽을 가리켰다.


“슬슬 돌아갈까. 더 늦기 전에 한 바퀴 더 달리자고.”


라모누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그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이 아첨꾼. 당신은 항상 제가 듣고 싶은 말을 해 주시네요.”


“왜 그런 것 같아?”


그의 고막을 아주 작은 웃음소리가 간질였다.


“몰라요.”



한 달이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다. 하루 트레이닝이 끝나면 트레이너가 주도해 오늘의 시시한 일을 하러 갔다.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고, 산을 오르기도 하고, 차가운 밤 바다를 구경하기도 했다. 자선 야구 경기를 보러 갔다가 맥퀸과 마주치기도 하고, 코믹 마켓에 갔다가 디지털과 도베르를 마주치기도 했다.


“솔직히 놀랐네요. 당신이 이렇게까지 인내심이 강할 거라고 생각 못했거든요.”


“나도 매일 놀라는 중이야.”


아리마 기념이 얼마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 이브,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거리를 걷고 있는데, 길가에 눈에 익은 진녹색 마츠다 앙피니가 세워져 있고, 건물 사이 골목 안쪽에서 환호하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파머! 파머! 파머! 파머! 파머!”


“와정말무슨일인지궁금한걸.”


트레이너가 과장되고 높낮이 없는 소리로 말하며 라모누의 손을 잡아끌었다. 보통이라면 절대로 들어가지 않았을 골목 사이 비좁은 길을 손을 잡고 게걸음을 걸어 가며 지난다. 라모누가 이렇게 서두를 거면 손이라도 놓으라고 쏘아붙이지만 듣는 척도 안하고 계속해서 잡아끌었다. 골목을 지나자 형형색색으로 꾸며진 프리스타일 레이스 코스가 나타났다.


코스 주변에 드문드문 모인 사람들, 저 멀찌감치 앉은 마츠다 앙피니 차주 파머 트레이너, 조그만 앰프 두 개 사이에 마이크를 잡고 주자를 소개하는 해설자, 그리고 코스의 앞에 서 관중들에게 손을 흔드는 메지로 파머가 있었다. G1 승부복까지 차려 입고 제법 각이 잡혀 있다. 빨간 스프레이로 되도록 똑바르게 칠해둔 스타트 라인에 가서 서는 표정이 비장하다. 트레이너가 듬성듬성 파손된 펜스 앞으로 라모누를 이끌어 세워두고 말했다.


“오늘의 시시한 일은 이거야.”


“스타트!”


신호총에서 난 폭음이 울리자마자 파머가 뛰쳐나간다. 첫 세 걸음부터 눈에 확 들어오게 차이가 벌어진다. 코스는 울퉁불퉁하고, 잘 정비되지 않아서 장애물 코스라 착각할 정도였다. 잔디도 아니고 흙 바닥도 아닌, 때로는 둘 다이기도 한 무질서한 곳을 파머가 능숙하게 뛰어다닌다.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몸을 높였다 낮췄다 하면서, 막판에는 가젤처럼 다리를 허공으로 휙휙 휘두르기까지 하자 환호성이 커졌다.


애초에 장애물 경기 승리도 있는 G1 우마무스메를 상대로 아마추어 우마무스메들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사실상 파머의 독주쇼로 끝났지만, 파머는 간단한 세레모니 이후 뒤이어 들어오는 우마무스메들과 하나하나 하이파이브를 하며 즐거워했다. 또 다시 울려퍼지는 파머 콜.


“파머! 파머! 파머! 파머! 파머!”


“완벽한 퍼포먼스였어!”


어느새 코스로 난입한 트레이너의 어깨 위에 올라타 관중들을 향해 1착 포즈를 선보이면서 “예-이!” 하고 외치던 파머가 굳어버린다. 펜스 너머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라모누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눈 위에서부터 시퍼런 그림자가 내려앉는 듯한 분위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파머를 지나 라모누에게 모여들었다. 그녀가 팔짱을 끼고, 잠시 파머를 노려보다가 물었다.


“무슨 일이지? 세레머니 중 아니었니?”


“아, 응, 아니, 네!”


파머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다시 ILY 사인을 한 오른손을 얼굴 옆으로 치켜들어 포즈를 잡아 외치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개쩔지? 이게 내 실력이라고!”


“......그래. 개쩌는구나.”


입을 가려 즐거운 듯 웃으면서, 라모누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왔던 길 그대로 좁은 길목을 돌아나가다가 문득 멈춰섰다.


“분명 예전이었다면, 저런 건 순수하거나 자유로울 순 있어도 완벽한 레이스라 하진 않았겠죠.”


“재미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말이지.”


“지금도 제 생각은 변함 없어요. 하지만, 저렇게 파머가 달리는 걸 보니, 완벽하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직접 말해주지 그랬어.”


“조금 혼란스러워요. 완벽의 정의가 달라진 것처럼.”


“라모누.”


트레이너가 다정한 눈으로 그녀를 돌려세웠다. 눈을 바라보면서 읊조렸다.


“이 세계는 불완전한 것도 아니고, 완벽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지도 않아. 아니지, 아니고 말고. 이 세계는 매 순간, 매 순간, 완벽해.”


“하.”


라모누가 차갑게 웃으면서 그의 눈을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당신이 인용하니까 <싯다르타>조차 천하게 들리네요.”


“그럼 네가 말해볼래? 완벽하게?”


“......그러면 모든 것이 선하고, 모든 것이 완벽하고, 모든 것이 바라문과 같지.”


“......세상 모든 것의 이치가 분명 그렇고, 그건 오로지 나의 동의, 오직 나의 응낙, 그리고 선선한 양해만을 필요로 할 뿐이야.”


“이것들은 내게 좋은 일이야. 나를 후원해줄 뿐, 나에게 결코 해를 입힐 수는 없으니 말야.”


라모누는 뜨뜻한 피가 온 몸을 내달리는 걸 느꼈다. 그녀의 모든 부분이 생명력으로 가득찼다. 그녀가 목 안으로 즐겁게 웃었다. 너무도 즐겁다는 듯이, 그에게 기대왔다.


“아, 정말. 당신의 시시함은 질리지가 않네요. 완벽하게 시시한 사람.”


“기왕이면 시시하게 완벽한 사람이라 해 줄래?”


“같은 말이예요.”


그녀가 조금 더 몸을 가까이 붙여 왔다. 좁은 골목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건물 사잇길을 전세낸 것처럼 밀착한 채로 점거하고, 둘은 잠시 깊은 밀착 상태를 나누고 서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시해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나는 완벽해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고 말이지.”


“시시한 사람. 당신은 이미 완벽해요. 더하고 뺄 것이 없어요.”


이리저리 사랑스럽다는 듯이 매만지면서, 발을 이리저리 스텝이라도 밟듯이 옮기던 두 사람은 어느 순간 멈춰서버렸다. 라모누가 살짝 웃으며 발돋움해 그의 귀에 속삭였다.


“취소할게요. 뺄 것은 좀 있는 모양이네요.”


약간 현기증이 나는 걸 느끼면서 트레이너가 멋쩍게 고개를 돌려 웅얼거렸다.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후훗, 그럼요.”


라모누가 그를 안아 당기면서 말을 이었다.


“색은 곧 비워버림인걸요. 비워야만, 비로소 채워지는 것들이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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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오후, Girl’s Legend You가 울려퍼지는 나카야마 경기장, 게이트에 16명의 우마무스메가 들어갔다. 스타트 신호와 함께 일제히 파도쳐 나온다.


“연말의 그랑프리, 아리마 기념 지금 스타트했다. 기대대로의 결과를 보여줄 것인가? 1번 인기, 마더즈 블러드. 선두 경쟁 중인 덴세츠 테이오, 메지로 라모누, 벨 퍼레이드, 사쿠라 유타카 오......”


최전열에서 후열까지 꽤 밀집한 형태로 치러진 레이스, 3코너에서 넘어가는 직선에서부터 경합이 심해지더니 4코너에서부터 거의 한 덩어리가 되어 구른다.


“바깥 바깥, 벨 퍼레이드가 간다. 빠르게도 한 덩어리가 되어 고착되었습니다만, 바깥에서 벨 퍼레이드, 사이에서 힘차게 사쿠라 유타카 오 입니다!”


“최후의 순발력 대결이 되었습니다만, 사이에서 마더즈 블러드, 마더즈 블러드입니다! 안쪽에서 다이나 후이넘! 다이나 후이넘이 안쪽에서! 바깥쪽을 크게 크게 돌아 올라오는 탱고 다이나!”


꿈같은 순간이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메지로 라모누의 눈 앞에서 꿈의 내용이 재현되고 있었다. 최종직선을 내달리는 동안 밀려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닿지도 않는다. 여러 우마무스메들의 등을 바라보면서,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이기고 싶다고 여기는 한 편, 그들의 등에서 느껴지는 기백, 순수하게 레이스에 보이는 정열, 투혼, 그리고 사랑을 느꼈다.


생각해보면 레이스에 사랑을 바치는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그녀만이 완벽을 위해 애쓴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한편으로 공허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만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스러운 진실을 느꼈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 비어버린 마음에서 새로운 설렘이 차오른다. 진정한 의미에서, 라모누는 우마무스메 레이싱에 새롭게 입문한 셈이었다.


“다이나 후이넘! 다이나 후이넘! 탱고 다이나! 탱고 다이나! 나란히 골인!”


“더비 우마무스메, 다이나 휴이넘! 일본 제일이 되었습니다!”


반 마신, 반 마신, 1과 반 마신, 코, 목, 동착, 목, 코.


우르르 몰려 들어왔지만, 확정된 순위는 1착과 라모누 사이에 8개의 칸막이를 그어놓았다. 2번 인기, 9착, 대패. 악몽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후우, 후우......”


거친 숨을 몰아쉬어 진정시키며 속도를 죽이는 동안 그녀의 머리장식이 떨어져 굴렀다. 승자를 상징하는 월계관 장식이 흙을 뒤집어쓴다. 완벽한 그녀의 무패 커리어가 산산조각났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그녀의 머리를 마구 흐트렸다. 한 걸음에 무거운 감정이, 한 걸음에 차가운 현실이 속도를 줄이는 그녀의 걸음을 더욱 늦췄다.


그러나 오늘 지금은, 그녀의 또 다른 사랑, 그 좁은 골목에서 몸을 맞대고 서로의 귀에 속삭여준 말들이 떠올랐다. 그 뒷내용이 라모누의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그가 읽어준 적이 없지만, 그가 읽어주는 것처럼 생생했다.


<나는 내 자신의 육신의 경험과 영혼의 경험을 통하여 이 세상을 혐오하는 일을 그만두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더 이상 이 세상을 내가 소망하는 그 어떤 세상, 상상하는 세상, 머릿속으로 생각해낸 일종의 완벽한 상태와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위해, 그리고 기꺼이 그 일원이 되기 위해.......>


라모누는 화답하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어떻게든 웃어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어두운 수평선 너머에서 솟구쳐 오르는 태양같은 감정 탓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내가 죄악을 매우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그리고 가장 수치스러운 절망 상태도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아첨꾼, 이 천박한 사람, 이 시시한 사람, 어떻게 안배한 것인지 단 한 마디 말도 그녀의 마음에서 그냥 사라지지 않았다. 라모누는 눈물을 흘렸다. 악몽이 그녀의 현실을 휩쓸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 걸음도 흔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쓸려나가고, 남은 것은 평화였다.


메지로 라모누는 멈춰섰다. 그리고 관중석을 돌아봤다. 기대가 빗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좌절감을 본다. 가족들의 눈을 보는 것이 두려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실패를 경험했던 자들이다. 그리고, 실패를 경험했든 아니든,


“큰언니! 잘 달려줬어요!”


여전히 그들의 가족이다.



메지로 라모누는 여전히 메지로 라모누였다. 그녀는 돌아서서 흙투성이가 된 머리장식을 들어올려 한참을 바라보았다. 환호성과 여러 응원, 격려, 치하의 말로 둘러싼 앞선 8명의 우마무스메와,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온 우마무스메들을 뒤로 하고 골 지점 지난 어중간한 지점에 서서 기다렸다.


“형부, 언니에게 가보지 않아도 괜찮아요?”


파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잔뜩 긴장해서 물었다. 그녀는 라모누의 뒷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트레이너는 퀭한 눈으로 손사래를 치면서 자리에 깊이 기대어 앉았다.


“괜찮아. 어제 너도 봤으면 알 거 아냐.”


“형부, 언니는 무너지지 않은 거죠?”


아르당도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 라모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무너졌어.”


트레이너가 그 점에 대해 미리 사과했다.


“하지만 한 번은, 무너져야 했어. 그녀가 스스로 새롭게 세울 수 있게.”



그리고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발소리와 함께 분홍색 조그만 우마무스메가 골인 지점을 통과한다. 이미 레이스는 종료된 것처럼 여겨진 시간. 대차, 로 뭉뚱그려지는 착차가 새겨졌다. 숨을 몰아쉬면서도 환하게 웃으며 아직까지 자신을 기다려준 몇 없는 관중들에게 환하게 인사하던 그녀의 앞에, 월계관을 든 라모누가 서 있었다.


“......즐거웠니?”


“응! 정말 재밌었어! 모두 빠르고, 대단해서 빛났어! 기뻤어!”


“그래. 나도 그랬단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라모누는 그제야 돌아서서 코스를 빠져나간다. 그 뒤에서 하루 우라라가 물었다.


“트레이너에게 1착을 주고 싶었어. 그치만 달릴 수 있어서 기뻤어! 기뻐, 기쁜데......그치만, 어째서 눈물이 나지......?”


지하 통로로 들어가면서 메지로 라모누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명이 희미한 어둠이 그녀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나도 그렇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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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커리어에 흠집이 나버린 라모누가 은퇴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점쳤다. 그러나 그런 발표는 나지 않았다. 대신에 트레이너와의 약혼 소식이 중대 발표로서 나왔다. 중대하긴 하지만 새로울 것은 없는 소식이었다.


“당신, 이거 어떻게 된 건지 해명해 봐요.”


트레이너의 방 안, 체육복을 갈아입지도 않고 침대에 드러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라모누가 우마인사이드 화면을 보여주며 쏘아붙였다. 검색어에 ‘라모누’라고 되어 있었고,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글은 다음과 같았다.


<솔직히 약혼이고 뭐고 ㅈ도 안궁금하면 개123추ㅋㅋㅋ>


그 뿐이 아니라 이미 수도 없이 했을 거라느니, 애가 하나 있을 거라느니 하는 악담들이 줄줄이 잡혀 있었다. 트레이너는 황급히 취소버튼을 눌러 우마인사이드를 닫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에고 서치는 하지 말라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다 알고 있는 거죠?”


“그냥 어림짐작한 거야. 우리는 우연히 짐작한 대로 하고 있었을 뿐이고.”


“우리나 가족 중에 배신자가 있는 건 아니구요?”


“넌 가끔 보면 똑똑한 건지 멍청한 건지 헷갈려.”


라모누가 볼을 부풀려 항의의 뜻을 전달했지만 트레이너는 가볍게 무시해버린다. 그녀가 즉시 팔을 뻗어 트레이너를 끌어당겨 안고는 귀를 움직여 찰싹찰싹 그의 뒷머리를 때려댔다.


“내가 이렇게 귀여운 중인데 왜 대답 안하죠?”


“네가 귀여운 걸 방해하지 않으려고.”


“이 아첨꾼.”


“밥 타겠다. 빨리 놔 줘.”


밥이란 말에 라모누가 즉시 트레이너를 놓아 준다. 부엌으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녀가, 몸을 천천히 일으켜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반찬의 간을 확인하던 트레이너의 뒤로 라모누가 커다란 포장지에 감싸인 네모난 물건을 들고 살금살금 다가왔다.


“다 들린다.”


“못 들은 척 하세요.”


“알았어.”


잠시 뒤, 라모누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심장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박진감 넘치는 연기를 펼친 트레이너의 앞에 네모난 물건이 들이밀어진다. 빨간 리본을 잡아당겨 열자, 포장지 안에 뽁뽁이로 엄중하게 싸인, 그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젠가 축하연에 입고 왔던 타이가 빠진 수트 차림의 트레이너가 의자에 기품있게 앉아 있었다.


“원래는 크리스마스에 드리려고 했는데. 미안해요. 조금 더 완벽하고 싶었어요.”


“어, 그러니까...... 고마워?”


“왜 말 끝이 올라가요?”


“그야, 이거 나 맞지?”


적당한 곳에 큼직한 그림을 걸어 멀리 떨어져 보면서 그가 어리둥절해 했다.


“나라기보다는, 뭔가 다른 인물을 모티브로 한 듯한......”


“사진이라면 그렇겠죠.”


라모누가 드물게 얼굴을 붉혀 수줍어하며 웃었다.


“하지만 그림은, 제 눈이 렌즈니까......”


“그런가.”


“저기, 어떠신지......?”


트레이너는 그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마음이 담긴 그림은 역시 여운이 남는구만.”


“어떤 여운이 남으셨는지?”


그가 그대로 돌아서서 라모누를 안아 들어올렸다. 화들짝 놀라 목에 팔을 감아 중심을 잡으며 눈을 둥글게 뜨는 그녀에게 짧게 말했다.


“개꼴리네.”


“천박해요.”


“안 꼴릴 이유가 있나?”


메지로 라모누는 목에서 손을 천천히 뗐다. 그녀가 애써 잡지 않아도, 그녀를 떠받치는 손이 있다. 안심하고 웃을 수 있다.


“음. 그렇네요. 없어요.”


조금 더 시시해져도 괜찮겠다고,  도발적으로 웃으면서, 그녀가 트레이닝복 지퍼를 살짝 내렸다. 한 해를 끝내고 새로 시작하기에 완벽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