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키타산 블랙은 다시 없을 행복을 느끼고 있다.


좋은 일이 생기면, 음. 흔히들 그러지 않는가.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고. 


지금의 키타산이 딱 그런 기분이었다.


줄곧 늘어져있던 귀는 수많은 격려를 통해 쫑긋 솟아올랐고, 내려놓았던 교우 관계도 다시 회복되었다. 


훈련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이게 되었고, 처음으로 도전한 미승리전은 단번에 1착을 해내며 라이징 스타로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 모든 일이 지금의 트레이너로 바뀐 후에 일어난 것이다. 


전 트레이너와 달리 그는 담당과 함께 여름 합숙을 보낼만큼 헌신적인 남자였고, 또한 누구보다 유능했다.


그렇기에 키타산은 하루하루 즐거워진 일상을 만끽하는 한편, 이 이후의 삶도 이렇게만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것이 설령 트레이너 곁에 있는 여자를 밀어내는 한이 있더라도.




키타산, 그녀가 생각하는 '삶의 행복'은 트레이너가 없다면 도저히 성립할 수 없었다.


이따금씩 키타산은 트레이너와 평생을 함께하는 상상을 한다.




아침에 트레이너보다 먼저 침대에서 일어나서, 부지런히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고 남편과 아이들을 배웅한다. 그리고 나면 집 안 구석구석을 청소한다. 매일 청소하는 덕분에 치울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아이들의 침대를 정리하고 간단하게 걸레질을 한다.


그러다보면 이웃집에서 좋은 찻잎을 구했다며 찾아온다. 그 찻잎을 받아들고 따뜻하게 우려 이웃과 담소를 나누거나 독서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점심 시간이 다가온다. 전날 만들어 둔 소고기 스튜가 남아 있으므로 적당량을 퍼내어 손님들께 대접한다. 그렇게 담소를 나누며 즐겁게 식사를 마치면 어느새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 돌아가는 이웃들을 배웅하고 아이들을 맞이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트레이너와 자신의 사랑의 결실들. 사랑하는 내 아이들. 함께 손을 잡고 가볍게 산책을 나선다. 아이들은 웃고 새들은 지저귄다. 날은 너무나도 맑아 간단하게 놀러 나가기에 제격이다. 아이들은 지겹지도 않은지 또 놀이터에 가자며 조른다. 그러면 그녀는 어쩔 수 없다며 아이들과 함께 놀이터로 향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벤치에 앉아 구경하며 싱그러운 바람과 따뜻한 햇살을 즐긴다. 그러다 보면 근처 동네의 새댁도 얼굴을 비춘다. 귀여운 아이가 유모차에서 새근새근 조는 사이, 단란하게 수다를 떠는 것이다.


아, 새댁이 모여 수다를 떨고나면 석양이 지기 마련. 지치지도 않고 놀고 있는 아이들을 불러 집으로 향한다. 돌아가는 길에 장을 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아이들의 손을 씻기고, 자신은 저녘을 준비한다.


부지런히 요리하는 소리가 부엌에 울려퍼지며 아이들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집 안에 잔잔히 울릴 때면, 창 밖에 들어온 노을이 그 모든 따뜻한 일상을 비춰내린다. 한참을 요리하다 보면 현관문이 열리며 트레이너, 이제는 세 아이의 아빠가 된 남편이 귀가한다. 아이들은 제 아비에게 달려가 품에 안기고, 그이가 웃으며 말하는 것이다. '오늘도 엄마 말씀 잘 들었지?'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한다. 그 모습에 남편은 아이 한 명 한 명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미소짓는다.


남편의 외투를 받아들며 옷걸이에 걸쳐준 뒤 그이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 식사 자리로 이끈다. 가족 모두가 식탁에 둘러앉아 행복한 웃음을 띄우며 요리가 맛있다고 칭찬해준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고 자신과 그이는 그것을 경청한다.


그렇게 단란한 하루가 진다면,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조금씩 다를지언정 평생을 함께하며 그와 함께 살아갈 일상을 상상한다.


키타산이 꿈꾸는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은 그런 것이다.




과거 키타산은 방탕한 트레이너를 만나 모든 것을 포기했었다. 


자신의 커리어는 이미 끝났으며, 하루 빨리 트레센이라는 지옥을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그 때, 트레이너를 만났다. 


주눅들고 움츠렸던 자신을 기꺼이 포용해준 남자. 


전 트레이너를 고발하고 밀어내준 것도 모자라 담당 트레이너까지 맡아준 은인. 


가문에서도 어찌하지 못한 일을 그는 너무나도 쉽게 해내버렸다.


키타산이 줄곧 생각하던 구원은 멀리 있지 않았다.




삼여신께 맹세컨데 틀림없이,


키타산 블랙이라는 소녀는 트레이너라는 남자에게 구원 받았다.




행복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와 함께라면 견뎌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든다. 지옥 속에서 희망이란 불꽃을 건넨 트레이너를 위해, 그 따뜻함에 평생 감사드리며 살고 싶다.


키타산은 결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트레이너와 이어지게 해주세요.' 


그렇게 삼여신께 간절히 기도드리며, 눈 앞의 트레이너에게 제 사랑을 열렬히 고백했다. 트레이너의 대답을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신은 자신의 기도를 이뤄주지 않았다.




고백을 건넨 후, 대답을 채 듣기도 전에.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연인의 행색을 한 우마무스메가 트레이너를 껴안았다. 


당장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자신을 안아주었던 크고 단단한 그의 품 속이 다른 여자에게 더럽혀진다. 


가슴과 배를 맞대고, 팔로 서로의 등을 껴안는 애정행위는 결코 저 년의 것이 아니다. 키타산 자신의 것이어야만 했다.


키타산은 무의식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으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머리에 피가 오르며 짜증이 밀려온다. 흥분한 심장은 어느새 펌프질하며 피를 실어 나른다. 지금 당장이라도 아야베를 떼어놓고 트레이너는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하고 싶었다.


하지만 키타산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트레이너와 자신은 동등한 관계가 아니었다. 그녀가 일방적으로 구원받은 수직적인 관계일 뿐.




키타산은 트레이너를 원한다. 트레이너가 없다면 살 수 없다.


하지만 트레이너는 아니었다. 트레이너는 이미 자신같은 볼품없는 여자가 아니더라도 사랑해 줄 여자가 있었다. 


그것도 서로 동등하게 애정을 주고받는 연인관계 말이다.


모든 상황이 키타산에게 그저 트레이너의 애정을 갈구하고, 구걸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말해온다. 이성적으로는 이해하고 있다. 그에게 고백하는 것이 분에 넘치는 짓이라는 걸. 함부로 질투심을 드러내다간 트레이너가 자신을 성가신 여자라며 내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정은? 이성을 떠난 진짜 감정은?




질투심, 상실감, 배신감, 우울, 초조, 분노, 살의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느껴진다. 중얼거림, 동공의 확대 수축, 손톱을 물어뜯거나 하며 애써 정신을 가다듬는다.


아야베가 자신에게 다가온다. 키타산은 최대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야, 사랑하는 트레이너에게 이런 추한 감정을 보여주고 싶지 않으니까.


작은 고슴도치가 가시를 세우는 것처럼, 아야베를 향해 맹렬히 중얼거린다.




"감히트레이너님을창녀처럼몸으로유혹하다니트레이너님은제구원자이자반려인데당신따위가몸을비빌수있는남자가아니야내가사랑하는사람을건드리지마더러운년온갖가식으로그의눈을더럽히고창녀처럼트레이너님을유혹하다니지옥에나떨어져버려개같은년그더러운손으로트레이너님을만지지마트레이너님과말도섞지마트레이너님과같은하늘에서있지마뒤져버려너같은창녀는뒷골목에서몸이나파는게어울리는데어딜감히..."




처음 봤지만, 키타산은 알 수 있었다. 


아야베는 트레이너와 끈끈할 정도의 연인 관계다. 


어쩌면 이미 몸을 섞었을지도 모른다.


트레이너를 바라보는 아야베의 눈빛이 말하고 있다.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어요', 라고.


그렇다면 어드마이어 베가는 적이다. 자신만의 소중한 행복을 방해하려는, 배제해야만 하는 명확한 적.




"저기, 그거 알아?"




어드마이어 베가가 스산한 미소로 다가와 귓가에 속삭인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트레이너 담당이었거든."




그 말 속에는 경멸과 짙은 우월감이 담겨 있었다.


다음에 이어질 말이 예상되자, 키타산은 아무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어드마이어 베가는, 키타지마 가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조금이라도 그녀의 가문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다가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너는, 그이가 두 번째 트레이너지?"




[스스로의 위기를 연출함으로써 상대의 방심을 끌어내고, 깔끔한 반격으로 목을 쳐낸다.]


어드마이어 베가는 키타산의 함정에 완전히 걸려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그녀를 향해, 키타산이 작게 뇌까렸다.




병신같은 년.








아야베는 키타산을 광분시키기 위해 도발적인 말투로 속삭였지만 


그녀는 키타산에 대해 잘 몰랐다. 아니, 아무것도 몰랐다. 


과거 전 트레이너 시절이라면 모를까, 현 트레이너의 사랑을 듬뿍 받아온 키타산은 예전보다 더욱 강인한 정신력을 갖고 있었다.


불안해하는 모습 따위, 아야베를 끌어들이기 위한 연기였을 뿐.




멀리서 지켜보는 트레이너와 귓가에 다가온 아야베의 표정을 살피며 키타산의 비상한 머리가 최적의 상황을 계산한다.


이곳에서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폭발시키고 아야베에게 대든다면, 그녀는 가해자가 되어버린다. 


더욱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격한 감정을 드러낸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트레이너가 정말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최선일까.


어떤 행동을 해야 트레이너의 사랑을 얻을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고를 트레이너 중심으로 생각해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명예도 자존심도 필요없다. 그저 트레이너에게만 잘 보이면 된다.


그렇다면 간단하다. 이 모든 감정을 눈 앞의 아야베가 아닌, 트레이너에게 쏟아낸다. 


자신의 구원자이며, 모두의 목줄을 쥐고 있는 트레이너에게 호소하면 된다.




더 이상의 중얼거림은 필요없다.




입을 굳게 다물고 충격받은듯 그저 두 눈물샘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려낸다. 그리고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트레이너가 듣고 깜짝 놀랄만큼 서럽게 소리내어 운다.




"흐윽... 흐으윽...!"




"에...?"




"키, 키타산!"




예상 외의 반응에 당황하는 아야베.


걱정되는 나머지 안절부절 못하는 트레이너.


순식간에 모든 상황이 역전된다.


완벽하게, 누가 봐도 [어드마이어 베가가 일방적으로 키타산 블랙을 괴롭히는 구도]를 연출한다.




그 자리에서 울며 주저앉은 자신에게 트레이너가 황급히 다가와 등을 다독이기 시작했다. 


감정을 더욱 격하게 하며 서러움을 참고 한글자씩, 또박 또박 말한다.




"아야베 씨가... 저는 걸레같은 년이라고... 트레이너 님께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키타산의 말을 들은 트레이너가 무심코 아야베의 얼굴을 돌아봤다. 그 시선에는 '중학생에게 너무한 것 아니냐'는 질책이 약간이나마 들어 있었다.


아야베는 그런 트레이너의 시선에 머리가 새하얘지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저런 말을 하지 않았어.


트레이너, 지금 연인인 내 말보다 다른 년의 말을 더 믿는거야?


걸레라는 말은 속으로만 했어.




잡다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매우지만 도저히 입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당황스럽고 황당하다. 


완벽한 불의의 일격에 당했다. 


평소 당당함과 고결함을 기준으로 살았던 어드마이어 베가에게, 이러한 종류의 치정극은 너무나도 생소했다.


레이스에서는 단순히 적의 빈틈을 노리고 내달리는게 고작이었는데. 질척한 감정과 거짓이 난무하는 여자들의 싸움은 맹세코 겪어본 적 없는 부류의 것이었다.




반면 키타산은 달랐다. 


어렸을 때부터 키타지마 가문에서 온갖 술수와 모략을 경험해온 키타산에게 이정도의 정치질은 기본 소양이었다. 


기본조차 안되는, 기본 중의 기본.


키타산은 당황해하는 아야베를 향해 더욱 공격을 가했다.




"저는, 저는 더이상 트레이너 님이 없으면 살 수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저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




트레이너의 품 속에 안겨들며 서럽게 울어재끼는 키타산을 보며, 아야베는 기가 찬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누가, 침대 위에서 사랑까지 나눈 연인에게 꼬리치는 여자를 보고만 있을까? 그녀는 자신의 연인을 지키기 위해 가장 최선이라 생각한 방법으로 공격했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거짓 울음으로 트레이너를 속이고 자신을 몰아가는 키타산.


어딘가 차가워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트레이너.


순식간에 나쁜 년이 되어버린 자신.




억울함에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차라리 키타산처럼 울어버릴까 싶었지만, 그런 찌질하고 추한 모습 따위. 트레이너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결국 아야베가 선택한 것은 도망이었다.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가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뒷편에서 트레이너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내달렸다.


정신없이 달리고 달려 집 앞까지 도착했다.




"에에? 아야베 씨? 무슨 일이에요? 그렇게 뛰어 오고."




집 앞에서 다과를 들고 있는 카렌짱이 아야베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그녀는 카렌짱에게 인사를 건낼 여유마저 없었다. 그저 허리를 숙인 채 무릎을 붙잡고 숨을 고르고만 있었다. 카렌짱은 그런 아야베를 이상하게 보던 중 그녀의 모습에 놀라 외쳤다.




"아, 아야베 씨? 우는 거에요 지금?!"




내가, 운다고? 아야베는 땀 때문에 뿌옇다고 생각했던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땀이라기엔 너무나도 뜨거운 물줄기가 볼을 타고 흘러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어드마이어 베가는 울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카렌짱은 아야베를 부축하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아야베는 등을 토닥이는 카렌짱에게 안겨 더욱 눈물을 터트리며 소리내어 울었다.




한참을,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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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가나 불리한 상황일수록 그걸 역이용해서 다시금 일어서는 사람들이 있음


축구에도 그런 식의 역전을 자주하는 걸로 유명한 선수가 있는데

바로 스티븐 제라드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