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너가 바람피는 내용임 (NTR도 아니고 BSS도 사실 좀 애매한데 마땅히 다른 장르명이 없는것 같더라.)


-우마무스메가 아니라 트레이너 쪽이 얀데레임. 


-심경서술이 좀 장황해서 내용이 꽤나 김.


-띄어쓰기 오류 ㅈㄴ 많을거라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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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빙판이 녹아내리고, 바람이 온기를 전하고, 잠자고 있던 벚꽃이 피어나는 계절, 소녀들에게도 사랑이 피어날 시기다.


그 사랑의 상대가 거의 담당 트레이너들이라는 게 문제긴 하지만, '사제관계에는 연애금지'와 '잔디밭에 출입금지'가 동급인 이 학원에서야 당연한 수순이겠지. 


근데, 그게 내 동료의 담당마 자랑을 두시간 가까이 듣고있어야하는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더니 부르봉이 갑자기 표정이 이렇게 되서는 말이야."




"1분에 부르봉을 몇번 말하는건데."




"아차, 너무 내 얘기만 했나? 요새 좀 같이 여기저기 다니는 일이 많아서 말이야. 미안미안, 넌 네 담당이랑 좀 어때? 이름이 분명... 라이스였지?"




가뜩이나 요새 그것 때문에 고민인데, 사람 열받게 하는 재주도 좋다.


이 녀석도 최근에 담당마인 부르봉과 사귀기 시작한 모양이다. 당연히, 교사로서 한소리 해야하겠지만 나도 남말할 처지는 못 된다.




"요새 성과도 좋고, 건강에도 이상 없어. 훈련도 잘 받고있고."




"그쪽 얘기 말고"




"..."




"하하하, 그 정도면 니가 매력없는 거 아냐?"




진심으로 뭐라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꾸역꾸역 삼켰다. 




"내가 연애선배로서 팁 좀 알려줄까?"




"일없거든."




"약간 위험하지만 질투심을 유발하는 방법도 있지. 은근슬쩍 다른 여자아이랑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 됐다고."




"그러지말고 좀 들어보라니까, 호감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데에도 제격... 잠만... 지금 몇시지?"




지금은 11시 47분. 굳이 확인하는 걸 보아하니 뭔가 12시 정각 정도에 약속을 잡은 모양이다. 내 사무실에서 떠들어대고 있는 걸 보면 트레센 안에서 약속을 잡았을테니 지금 뛰어가면 아마 늦진 않을테지만.




"... 11시 57분."




"뭐!? 12시에 부르봉이랑 만나서 점심 먹기로 했는데! 아, 이거 큰일났네! 이만 간다. 주말 잘 보내라!"




그대로 그는 허둥거리면서 사무실 문을 열고는 나가버렸다. 이젠 좀 조용하겠다. 


하지만, 끝까지 염장질이라니, 거기다 문도 안 닫고 나가버렸다. 


하는 수 없이 문을 닫으려고 의자에서 일어났는데, 내 사무실로 조그만 우마무스메가 들어왔다.




"부르봉 씨의 트레이너 씨... 굉장히 바쁘신가보네..."




흑갈색의 길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토끼인지 우마무스메인지 헷갈릴만큼 크고 쫑긋한 귀, 한쪽 머리를 눌러쓴 듯한 진청색 모자에 달린 앙증맞은 파란색 장미장식, 그리고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는듯한 보라빛의 맑고 초롱초롱한 눈. 그리고, 그 많은 매력을 어찌 다 담아내는지 신기할 정도로, 고등부라는 나이에 맞지않는 조그마한 체구.




"아... 안녕, 라이스."




"아, 좋은 점심이야, 오라버니...!"



이 아이는 '라이스 샤워', 작은 체구와는 걸맞지 않게 높은 스테미너와 근성을 자랑하는 우마무스메이자, 나의 담당마이다.

 

라이스는 언제나 나를 오라버니라는 호칭으로 부른다. 듣기로는 내가 라이스가 좋아하는 동화책 속 오라버니와 닮았다는 모양이다. 


작년 이맘때, 난 우연한 기회로, 라이스의 모의레이스를 관람하게 되었다. 게이트에 그녀가 서있을 때부터 난 어째서인지 그녀에게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끌렸다. 우연이였을까.


출발을 알리는 신호와 열리는 게이트. 그 5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라이스의 움직임은 마치 자객과도 같은 날카로움이 돋보였다. 앞에 달려가는 우마무스메를 마치 찌를듯이 필사적으로 쫓아가는 라이스의 모습은 보고있는 나조차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 레이스의 결과는 1착, 하지만 그 결과보다도 라이스가 골라인을 지나면서 지었던 그 환한 미소는 아마, 죽는순간까지도 잊혀지지 않을만큼 황홀했다. 


그녀의 달리기는 내 숨을 멎게 했고, 그녀가 지은 미소는 내 심장을 멎게하었다.


모의레이스 후, 나는 어렵게 라이스를 스카웃을 하는데에 성공했다. 그건 트레이너 자격시험을 통과한 것보다도 행복한 기억이다. 그리고, 지금껏 다른 담당마를 두지 않은 채, 라이스와 함께 단련하고 있다. 그녀가 성장할수록 그녀의 달리기는 더욱 날 그녀에게 매료되게 만들었다.


근데... '잔디밭 출입금지'조차 어기지 않는 그 성실함과 순수함 탓인지, 아님 정말 내가 이성적인 매력이 없는건지... 말로든 행동으로든 몇번이고 그녀에게 호감표시를 해보아도 좀처럼 라이스는 날 돌아봐주질 않는다.


물론, 그럼에도 난 라이스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지만... 바라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지 않는가.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날 바라봐준다면 그 행복함 속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으련만.


아차, 생각에 잠겨버렸다. 라이스가 내 사무실에 찾아온 이유가 있을텐데.




"오늘은 휴식인데 어쩐 일이야?"




"아아, 응 그게 있지... 라이스... 어제 오라버니 사무실에... 라이스의 지갑... 두고가는 바람에..."




라이스는 말을 더듬으면서 사정을 말해주었다. 저 쭈뼛쭈뼛하는 모습, 어쩜 저리도 귀여운 생물이 있을까.


그러고보니 아침에 사무실 바닥에 파란색의 동전지갑이 떨어져 있었다. 일단, 주워뒀는데 라이스의 물건이었던 모양이다.

주머니에 넣어뒀었던 지갑을 꺼내어 쭈뼛대는 그녀를 향해 내밀었다.




"이거 맞지? 라이스의 지갑."




"앗, 맞아! 고마워,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갖고 있어줬구나!"




불안한 표정을 짓고있던 라이스의 얼굴에 빠르게도 화색이 돌았다. 안도감의 미소라곤해도 내겐 그 어떤 금은보화보다도 소중한 그녀의 미소이다.




"고맙긴, 여깄어."




"정말 다행이ㅇ... 흐앗!?"




아까 급히 나가던 동료가 흘린걸까. 바닥에 떨어져있던 볼펜을 밟은 라이스가 휘청거린다. 나중에 찾으러오면 한소리 해야지. 


그래도 다행이다. 그녀와 나의 거리는 1미터 남짓. 내가 얼마든지 잡아줄 수 있는 위치다.




"라이스!"




"하으, 아읏!...."




이럴수가. 하늘이 기회를 주신걸까. 라이스는 넘어지려는 걸 버티려고 한발로 폴짝대다가 '퐁' 소리와 함께 내 품으로 안겨왔다.


라이스가, 너무도 사랑스러운 나의 애마가, 그녀의 작은 몸이 지금 내 품에 안겨있다.


그녀의 향기가, 그녀의 온기가, 그녀의 숨결이,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이 옷을 넘어 피부에 전해진다. 좀 더 옷을 얇은 재질로 입고올 걸 그랬다.


아아, 심장이 터질 것 같다는 게 이런 거였나. 몸이 굳어서 움직여지질 않는다. 그저, 넘어지는 걸 받아주려 했을뿐인데, 그녀와 가까워진 내 심장이 미칠듯이 요동치고 있다.




"우으... 으응?..."




라이스가 나를 올려다본다.비단처럼 새뽀얗던 그녀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평소보다도 쫑긋해진 귀, 당황해서 휘둥그레진 그녀의 눈이 나를 직시하고 있다. 어찌 이리도 사랑스러울까.


아, 안돼. 그녀가 떨어지려한다.




"미, 미안 오라버니!"




'안돼. 가지마. 떨어지려 하지 말아줘.'




"-꺄악!?"




라이스를 끌어안았다.

수많은 생각이 스쳐갔던걸까. 아님, 머릿속이 하얘졌을까. 내가 무슨 생각으로 라이스를 끌어안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저, 양팔로 그녀를 안고싶었을 뿐.




'그저 이렇게 있고싶어, 떨어지고 싶지 않아.'




"오, 오.... 오라버니...?"




이성의 끈을 다시 잡게 된다면 나는 그녀를 놓아버리겠지.




'싫어, 놓고싶지 않아. 널 보내고 싶지 않아.'




그런 마음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마음이 허물어져버린 나는 1년이란 시간동안 가슴 깊숙히에 숨기고 있던 마음이 입으로 흘러나왔다.




"사랑해, 라이스."




"...!?"




"처음 모의 레이스에서 널 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좋아했어. 너의 달리기를 봤을 때부터, 너의 미소를 보았을 때부터, 너의 옆에서 널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한순간도 네가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아. 널 사랑해. 라이스 샤워."




마치, 폭발하듯이 내 마음속의 모든 걸 남김없이 담아 그녀에게 쥐어짜냈다.


이윽고, 가슴 속에 느껴지는 건 드디어 말했다는 후련함도, 부끄러운 말을 했다는 민망함도 아닌, 이성의 끈을 잡고 싶지 않아 그저 스스로를 흐트려놓으려는 안개같은 몽롱함이었다.


아, 라이스가 새빨개졌다. 커다란 눈동자가 진동하듯이 떨리고 있다. 


이 가쁜 숨결은 누구의 것일까. 이 시끄러운 심장박동은 누구거지. 이 온기는 또 뭘까. 분홍빛인 건 내가 보고있는 그녀일까, 아님 나를 바라보는 그녀일까.


뜨거운 숨결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온다.




"라이스... 도... 라이스도! 오, 오라버니를... 조... 좋아해! 아주 많이 좋아해!"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이게 꿈인 건 아니겠지.

거짓말은 아니겠지.

정말 같은 마음인 거야?




"라이스... 정말..."




"그치만 안돼! 오라버니!"




라이스가 양손을 뻗어 내 몸을 밀어냈다.

우마무스메의 힘은 인간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난 그녀를 안은 팔을 풀고 말았다.




'아, 안돼. 그녀가 멀어져가. 라이스가...'




그녀가 멀어진다. 향기가, 온기가, 숨결이, 살결이 나를 떠나간다.




"라이스... 어째서...?"




홍조가 채 가시지 않은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거짓말이 아니야... 라이스도 오라버니가 좋아... 응, 분명... 라이스도 같은 때부터였다고 생각해... 오라버니를 처음 만난 그날부터... 줄곧..."




고개숙인 그녀의 눈이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그 말이 진심이라면 제발 나를 바라봐 줘.




"그치만, 오라버니는 라이스의 트레이너니까... 라이스는 오라버니 담당마이고... 학생과 교육자니까..."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서로 좋아한다면 그러면 된거잖아... 라이스, 둘이 같은 마음이라면..."




"그치만 그러면 오라버니가 나쁜사람이 되고마는걸!"




가슴 속에서 '쩌적'하며 무언가가 금가는 소리가 들렸다. 




"라이스, 나쁜 아이지만... 오라버니는 그런 라이스를 항상 믿어주고, 바라봐주고... 용기내서 먼저 좋아한다고까지 말해주는 상냥하고 좋은 사람이야... 라이스는 그런 오라버니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걸..."




그녀가 고개를 든 채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로.




'쨍그랑'




'싫어, 라이스의 그런 얼굴 보고싶지 않아. 그런 표정은 보여주지 말아줘.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말아줘.'




노이즈가 낀 것 처럼 점점 그녀의 표정이, 얼굴이 보이질 않는다.

그 맑은 눈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보이질 않는다. 


라이스가 보이질 않는다.





한참의 침묵이 이어졌다. 


몇분이나 흘렀을까. 라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있었던 일... 전부 없었던 일로 하자..."




'싫어.'




"라이스, 아무것도 못 들었던 걸로 할테니까..."




'제발, 그러지 마.'




"다음 주부턴 평소의 오라버니로 있어줘..."




'이대로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고 싶지 않아.'




"응? 오라버니..."




"...알겠어, 라이스."




거짓말이다. 알 수 없다. 알고싶지 않다. 하나도 모르겠어.  




"...주말 잘 보내, 오라버니..."




라이스가 떠나갔다.

라이스가 없다.

라이스가 내 품에 없다.

라이스가 내 사무실에 없다.

라이스가 내 곁에 없다

라이스는 떠났다.

라이스가 없다.


절망이 무거워 난 그대로 주저앉았다.

서있을 힘이 없다.

고개를 들 힘이 없다.

눈물을 흘릴 힘이 없다.

이 몸 하나 겨룰 힘이 없다.

그럴 힘을 주었던 네가 없다.

라이스가 없다.


나는 라이스를 사랑한다.

라이스도 나를 사랑한다.

하지만, 라이스는 떠나버렸다.

라이스는 받아주지 않았다.

라이스가 없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성의 끈을 다시금 잡아야 했다.

일어나야 했다.

네가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라이스가 없는 사무실에서 난 일어났다.


창밖은 벌써 해가 지고 있다.

아마 대여섯시간은 흐른 모양이다.

창밖으로 학생들이 기숙사로 돌아가는 모습들이 보인다.

연습용 트랙에서는 몇몇 학생들이 아직 훈련 중이다.

하지만, 그 중에도 너는 없었다.




"...퇴근시간인가..."




아무래도 오늘은 일찍 집에 돌아가기 힘들 듯 하다.

내일은 주말이지만, 하필 요새 집에서 인터넷이 자주 끊긴다.

운도 없지, 정리해야 될 자료들이 수두룩하다.

책상에 컴퓨터를 켜고 오늘 처리해야할 자료들을 훑어보았다.


라이스의 다음 레이스 정보조사, 

라이스의 식단 조절, 

라이스의 훈련 메뉴, 

라이스의 컨디션 자료, 

라이스의 최근 훈련 기록, 

라이스의, 

라이스....




"라이스..."




맘다잡고 작업으로 돌아가려 해봐도 일거리들조차 날 비웃는 것 같이 보였다.




"...트레이너 씨!"




내 목소리도 라이스의 목소리도 아닌 목소리가 내 뒤에서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놀라 넘어질뻔 했다.

책상을 잡아 겨우 중심을 잡고 뒤를 돌아봤다.


뒤에 서있던 건 우마무스메가 아닌 사람이었다. 남색 빛의 짧은 단발에 포니테일. 머리 왼쪽에는 금색에 다이아몬드 형태의 머리핀을 하고있고, 보라빛이 감도는 검은 빛의 눈을 가진 내 또래의 여성이었다.


'키류인 아오이', 유명 트레이너 가문인 키류인 일가의 외동딸이자 내 동료 트레이너이다. 그녀의 담당마인 '해피 미쿠'도 우수한 우마무스메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그녀도 나도 미숙한 초보 시절일 때, 나와 정보를 교환하고 공유하면서 현재까지 나름 친하게 지내고 있는 트레이너이다.




"키류인 씨? 여긴 어쩐 일로..."




"그저께 빌려갔던 서류들 돌려드리려고 왔어요. 근데, 아직도 일하고 계셨네요. 그것도 이름을 몇번이나 불러도 못 알아채실만큼 바쁘게요."




라이스 일로 정신이 한참 팔려있었나보다.

그녀가 내 뒤에 오기까지 눈치를 못 챘다.




"아아, 죄송해요. 사정이 좀 있어서... 오늘 작업을 거의 못했거든요."




"어짜피 주말인데 집에 가져가서 하셔도 되지 않나요?"




"요새 집에서 인터넷이 먹통이라서요."




"저런... 많이 힘드시겠네요."




"자업자득이죠. 서류는 적당히..."




"아아! 그리고... 이거 트레이너씨 물건인가요?"




그러면서 그녀는 내게 파란색의 동전지갑을 내밀었다.

점심의 그녀에게 돌려주려고 했던 라이스의 동전지갑이다.



"사무실 바닥에 떨어져 있었어요."



'라이스... 이걸 찾으러 왔었는데... 그것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또 놓고 간건가...'




"라이스..."




"앗, 라이스 씨의 지갑이었나요?"




아차,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점심만 해도 그 녀석한테 부르봉을 몇번이나 말하는 거냐면서 핀잔을 줬건만, 이번엔 내가 그러고 있지 않나.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네, 라이스가 두고간 모양이네요."




또 온 몸에 힘이 빠져 주저앉을 것만 같다.

낮의 일이 생각날 것만 같다.

그녀의 눈물이 생각날 것 같다.

그녀의 그 말이 생각날 것만 같다.

그녀의 보이지 않는 얼굴이 또다시 떠오를 것만 같다.




"...트레이너 씨, 힘든 일이 있었나요?"




"...?"




그녀가 내 옆으로 다가와 쪼그려 앉았다.




"캐묻지는 않을게요.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요."




라이스와는 다른 보라빛의 눈동자, 그렇지만 분명히 아름다운 눈동자가 낮에 봤던 라이스와는 다른 상냥하고 친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잔인하게도 창문으로 비치는 저녁노을의 빛이 그녀의 피부를 주홍빛으로 예쁘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내 쪽을 향해 뻗어오더니. 힘이 빠진 내 손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미숙한 라이스에게서는 풍겨오지 않는 은은한 향기가 풍겨왔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전달되는 그녀의 손의 부드러운 감촉. 그녀의 노력의 흔적인지, 굳은 살이 좀 배겨 있긴 했지만, 그 손은 발칙하게도 내 머릿 속에서 라이스를 아주 잠깐이나마 흐리게 만들 정도로 농염했다.




"비록, 저흰 라이벌이지만... 아니, 라이벌이니까! 축 쳐져있는 당신의 모습은 보고싶지 않아요. 당신이 그런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있으면, 저도 가슴이 답답해져서... 견딜 수 없을 것만 같다구요. 제가 뭐라도 당신의 힘이 될 수 있다면 어떤 것이든 말씀해주세요, 뭐든지 도와드릴게요!"




그녀의 뺨이 약간 발그스레해진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익숙한 무언가가 보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분명 내가 라이스를 보면서 지었던 눈빛과 같은 것이었다.

아아, 그런 거였나.


하지만, 슬프게도 그녀는 라이스가 아니다.

내 심장을 멎게 한 라이스가 아니다.

나와 지금껏 함께 해온 라이스가 아니다.


그녀는 키류인.

내가 사랑하지 않는 키류인.

내게는 그저 동료인 키류인.


그녀는 키류인 아오이.

라이스가 아니다.




"키류인 씨, 마음은 정말..."




하늘은 내 마음을 오늘 조각내버리기로 한 모양이다.

창문 밖에서 낮에 보았던 우마무스메가.

내게 안겼던 우마무스메가.

나를 좋아한다 말했던 우마무스메가.

내게 상처를 준 우마무스메가 보였다.

라이스가 보였다.

나를 상처입혔던 라이스가 보였다.


트레센 학원을 향해 망설이듯이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라이스의 시선은 불안하게 떨리면서 내 사무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튼이 있으니 밖에서는 안쪽이 보이지 않을텐데, 지갑을 가지러 다시 찾아온 모양이다. 아직 라이스도 그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걸음걸이를 보면 여기까지 오는데 13분 정도 걸리지 않을까.


아, 아까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라버렸다.

나를 상처입힌 라이스의 목소리가 생각나버렸다.




'그치만 그러면 오라버니가 나쁜사람이 되고마는걸!'




신기하게도 아침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동료의 한마디가 떠올랐다.




'약간 위험하지만 질투심을 유발하는 방법도 있지. 은근슬쩍 다른 여자아이랑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면...'




어, 이게 어째서 지금 생각나는 거지.

아무 생각 안하고 있던 이 말이 왜 지금.


이유를 생각하려던 찰나, 내 눈앞에 그녀가 방금 했던 말이 다시금 내 귓가에 메아리치는 듯 했다.




'제가 뭐라도 당신의 힘이 될 수 있다면 어떤 것이든 말씀해주세요, 뭐든지 도와드릴게요!'




그리고 내 눈앞에는 라이스가 아닌 그녀가 있다.

그리고, 라이스가 곧 이곳에 온다.




"...키류인 씨."




"네, 트레이너씨."




"같이 잔디밭에 들어가 주실래요?"




"...네?"




아아, 라이스.

내가 좋은 사람이라서 나를 사랑해주지 않겠다고.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내가 최악으로 나쁜 사람이 될게.


그렇게 하면 너도 날 사랑해주겠지?


그렇지, 라이스 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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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에 쓰고 오늘 다듬어서 완성시킴.

처음 쓴 괴문서인데 어떨지 모르겠네.


다음편은 내가 꼴릴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