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지난 여름날 나타났다.


그것이 일본에서 시작된 것인지, 이곳 중앙에서만 나타난 것인지, 이미 전세계에 퍼져나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것과 함께 전국가적인 정전이 발생했고 당국은 이의 원인을 대규모 폭동이라 발표했다는 것이다. 트레센 학원에도 매뉴얼에 따라 행동하라는 국가의 지침이 내려왔고 이에 따라 학생회는 기자회견 중인 이사장을 대신해 학생들을 각 동에 위치한 대피소로 피난 시킨 뒤 차후 이어질 교사진이나 정부의 대응을 기다렸다.


그것들이 살아있는 우마무스메를 뜯어먹는 것을 보기 전까진.


사태 발생 직후 심볼리 루돌프로 부터 '그것'의 분석을 명령받은 아그네스 타키온은 학생들의 증언을 모아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1] 그것에 감염된 인간은 개체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구토, 어지럼증, 환각과 환청등을 호소하며 고열로 인해 24시간 안으로 사망한다. 치사율은 100%에 이르며 현재 알려진 백신 중 치료나 예방은 물론, 증상을 완화시키는 약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2] 사망 직후, 그것에 의해 사망한 인간의 육신은 다시 '소생'한다. 소생한 인간은 이성을 상실하고 광견병과 비슷한 흥분 증상을 보이며, 신체 능력과 공격성이 대폭 상승한다. 또한 청력 기관을 제외한 모든 신경이 퇴행하며 시각과 통각은 거의 상실하고, 청각에 극도로 의존해 작은 소음에도 예민히 반응한다.


[3] 감염의 매개체는 감염자의 타액과 혈액이며, 공기 감염은 확인되지 않았다.


[4] 우마무스메는 그것에 감염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인간을 제외한 포유류 역시 그것에 감염된 사례는 보고되지 않았다.


전염이 퍼진 초기에는 영화나 게임에서 따와 감염자들을 '좀비'라 부르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자신의 트레이너, 혹은 가족이 감염되는 것을 눈 앞에서 본 학생들의 강한 반발에 그러한 명칭은 곧 사라졌다. 이런 상황 속에도 시니컬한 성격을 유지하고있는 몇몇은 '깨무는 것'이란 이름으로 감염자들을 부르기도 했지만, 현재 트레센 생존자들의 자치를 맡고 있는 학생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이름은 그보다 더 간단명료했다.


'그것'


그리고 그것이 나타난 날로부터 115일 후.


“그 다음부턴 제대로 기억이 안나. 기절한 터보를 끌어안은 체로 정신없이 달렸다는 것 밖에는. 그리고 지쳐 쓰러진 뒤에야 주변을 둘러보니 이 지하철 역이었고.”


네이처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들은 각자 다른 반응을 보였다. 혹자는 믿을 수 없는 참상에 부정을, 혹자는 인간들의 만행에 격분을, 혹자는 희생된 친구들에 울분을 표했지만 그들의 표정 모두에 드러난 것은 다름아닌 가늠치도 못할 ‘경악'이었다.


“다 죽었다고...? 그 많은 애들이 전부 다?”


“내가 알기로는. 엘이 끌고 나간 정찰조처럼 캠프 밖에 있던 애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나도 몰라. 나랑 터보 말고 도망친 애들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지난 3일 동안 이 주변에선 총소리가 끊이지 않았어. 이번에 나갔다가 너희랑 마주친 것도 굶주리다 참다 못해 뭐라도 먹을 걸 찾아나선거고.”


"타... 타키온 씨가 그랬어요... 우리는 이미 우마무스메라... C-바이러스에도 변이가 되지 않는거지... 바이러스 자체를 없앨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시... 신체나... 타액 접촉에 의한 감염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네이처의 말대로... 그... 고, 고기를... 으우우웩-!"


참다못한 탄호이저는 결국 바닥에 속을 게워냈다. 쉽과 나캬아마도 속만 개워내지 않았을 뿐 표정은 그녀와 다를 것 없었다.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네이처 뿐이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정보는 여기까지야. 난 아직 죽고 싶지도 않고 살아서 여길 뜨고 싶어. 그리고 가능하면 트레센이 우릴 받아줬으면 좋겠고. 그러니 너희도 우리한테 트레센이 어떤지 정보를 공유해줘.”


“트레센에서도 상가의 상황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그걸 확인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 우리 4명이고. 나카야마 학생회하고 연락은?”


“미안해 쉽 대장. 이게 내 심장을 지켜주는 대신 운명해버려서 작동을 안해. 참 가끔은 내가 운이 나쁜건지 좋은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럼 더 말 할 것도 없겠네. 우리도 너희랑 같이 트레센으로 돌아가겠어.”


쉽은 아무 말 없이 힘겹게 숨을 내쉬는 스즈카를 바라보더니 결국 고개를 저었다.


“우리 임무는 상가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 뿐만이 아니야."


“하아? 저기 당신네 동료가 총맞고 죽어가는 거 안보여 쉽 씨? 게다가 스즈카 씨는 당신네 팀원이잖아? 대체 뭔놈의 임무길레 그보다 중요하다는거야?”


“타키온이 백신 개발에 힌트를 잡았어. 상가에 있는 약물을 회수해오는 것도 우리 임무야.”


“백신...?”


탄호이저는 여태 네이처가 조소 짓는 모습을 수도 없이 봐왔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짓는 비웃음은 그보다 횔씬 더 차갑고, 지독하고, 무엇보다도 그 대상이 그녀 자신이 아니였다.


“그렇다면 나는 더더욱 이해가 안가는데. 그게 왜 필요하다는 거야? 어차피 우린 그거에 걸리지 않잖아?”


“...인간들한테는 필요하겠지.”


“아니. 내 생각은 달라.”


네이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들한테 더더욱 필요 없어 백신 따위. 감염됐든 감염되지 않았듯 그것들은 전부다 괴물이야. 아니 차라리 감염되면 지능이라도 없으니 낫지.”


“네... 네이처 일단 진정하...”


“진정하게 생겼냐고 지금!!! 이쿠노의 말이 맞았어! 그들을 믿은 내가 병신이었던 거야! 그 괴물들한테 우리는 개돼지같은 가축에 불과했다고!!!”


격분해 소리치는 그녀에게 터보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나. 사실 도망치다가 헤일로를 봤어. 완전 정신이 나가있더라. 눈 앞에서 건물이 불타는데도 그 안에 우라라가 있다고 소리지르더니 그대로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가 버렸어."


그녀의 두 눈 속 날선 핏줄기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꿈틀거렸다.


“그래스의 경우는 어땠는지 알아? 이미 산 건지 죽은 건지도 알 수 없는 스페를 엎고선 마지막까지 무기를 휘둘렀어. 악에 받쳐셔 마지막까지 고함질렀지. 살아있다해도 더이상 우리 말 따위 그녀에게 들리지 않을 거야."


격노를 죄다 쏟아내자 텅 비어버린 그녀의 가슴 속 머리 위에서부터 내려앉은 것은 악몽과도 같은 기억이었다.


“그나마 도망이라도 친 우리는 운이 좋았던 거야. 붙잡혀버린 애들은... 산 체로 묶여서 불길 속으로 내던져졌어. 아직도... 아직도... 살려달라는 그 아이들의 비명이 귓가에 맴돌아...”


“네이처...”


“인간들은 구원 받을 자격 따위 없어. 오히려 감염을 퍼트리고 다니는 세균에 지나지 않아! 단 한명도 살아있을 자격 없이 모조리 박멸해야한다고!!!”


이미 이성을 상실하고 내뱉는 그녀의 말을 멈춘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한방이었다.


"탄호이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꽉 진 체, 그녀는 방금 자신이 턱을 갈긴 그녀를 붙잡고 울먹였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 하지만 이것 만은 말해야겠어... 그것이 처음 나타났던 그날... 트레이너들은... 자길 희생해 우릴 지켰어... 이사장님과 함께 자신의 몸으로 그것들을 막았어... 나는... 나는..."


차오르는 슬픔에 잠시 목이 막혔지만, 곧 모자를 눌러 쓰고 각오를 다진 탄호이저는 이어 단언했다.


"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할 거야. 네이처가 뭐라고 말하든."


"너..."


"...일단 두 사람 다 머리 좀 식혀라. 나카야마, 임수 수행에 대한 네 의견은?"


“나야 대장님 의견에 따르겠지만 굳이 말하라면야... 탄호이저의 감정론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아. 죽은 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내 목숨을 함부로 도박에 걸 생각도 없고. 하지만 백신이 완성되면 그걸 무기에도 적용시킬 수 있겠지. 그것들을 손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는데다가 소리도 나지 않는 병기라니 기술부가 만든 것 중 최고가 될거라 내 잔돈을 모두 걸 수 있어.”


“네이처... 터보도 다른 애들 말이 맞다 생각해. 저들을 도와주자 응?"


고개를 숙인 네이처는 한참 뒤에야 대답할 수 있었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역시 아직까진 받아들일 수 없어. 감정을 가라앉힐 시간을 줘.”


“어차피 무전기가 없는 이상 우리도 탓짱을 호출할 수 없으니 학교로 돌아가지 못해.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쉽 대장?”


“일단 이곳에 거점을 구축하고 주변을 탐색하며 상가의 상황을 지켜본다. 탄호이저 너는 계속해서 스즈카의 치료에 전념해라.”


“...”


“...이쿠노 일 때문에 착잡하단 건 잘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아직 숨이 붙어있는 스즈카까지 내버려둘 순 없어. 여기서 스즈카를 살릴 수 있는 건 너 뿐이야.”


“...네.”


“나카야마 너도 일단 부상부터 치료해라. 치료하다 시간이라도 남거든 여기 거점에 바리게이트라도 설치하고.”


“와이 오 캡틴.”


“그리고 네이처.”


“...착각하지마. 난 댁 부하가 아냐. 터보도 마찬가지고. 생존을 위해 협력하겠지만 당신의 명령에 따르진 않을 거야.”


네이처의 예상과 달리 그녀에 내려진 것은 명령이 아닌 보따리 속 담겨있던 먹을거리였다.


“우리가 가져온 식량이야. 너희 둘 몫까진 해도 2주는 버틸 수 있는 물량이지. 일단 그거부터 터보랑 나눠먹어.”


이어 쉽은 정찰 나갈 채비를 하며 말했다.


“일주일 안엔 마음을 정해둬라. 그 뒤엔 네가 협력하든 말든 우린 상가로 갈 거야.”


그리고 그것이 나타난 날로부터 120일 후.


“지난 5일 동안 인간들의 움직임을 살펴본 결과 이미 인간들은 상가를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쉽은 탁자 위 지도를 펼치고 자신이 기록해둔 인간들의 순찰로를 손가락 끝으로 짚었다.


“멀리서 상가 주변을 돌며 상황을 확인할 뿐 누구도 안으론 들어가려 하지 않았어. 이미 내부는 그것들에게 완전히 점령 당한 후란 거겠지.”


“운 좋다 생각하자고. 인간들보단 차라리 그것들이 상대하기 쉬우니 이 도박에서 살아남을 확률도 커지지 않겠어? 역시 우리가 가진 비장의 패를 못쓰게된 건 아쉽지만 말야."


“스즈카 씨는... 어떻게든 임무에 참가하고 싶으셨지만 그 몸으론 무리에요. 이제 간신히 정신을 차리셨다지만 조금이라도 무리하셨다간 봉합해둔 상처가 터지고 말 거에요.”


“결국 우리 셋이서 그것들 소굴을 다녀와야한다는 건가...”


“그래. 그래도 이번엔 내가 3번째는 아니네.”


나이스 네이처가 단단힌 중무장을 마친 체 그들에게 다가왔다.


“약국은 D섹터 다섯번째 사거리 오른쪽 길에 있어.”


셋이 무어라 말할 틈 없이 그녀는 앞장섰다.


“이렇게 말해봤자 너희들은 모를 테잖아? 그러니 잘 알아서 따라오라고.”


“터, 터보도 같이 갈레!”


터보 역시 그들과 동행하려했지만 네이처는 단호히 그녀를 제지했다.


“안돼. 넌 남아서 스즈카 씨 돌봐야지. 탄호이저한테 붕대 감는 법은 뭐하러 배운 건데 그럼?”


“그치만... 탄호이저랑 네이처까지 잘못되면 터보는... 터보는 이제 정말... 혼자란 말이야...”


거의 울듯한 표정의 터보에 네이처는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곧 있으면 해가 져. 어두울 때를 틈타서 인간들 몰래 들어가야하니깐 서둘러야해."


다를 때라면 모를까 지금의 그녀는 타인은 거녕 스스로를 돌보기에도 벅찼다.


"부탁할게. 탄호이저."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자신이 감정을 억누를 수 있을 때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친구한테 이 일을 넘겨주는 것 뿐이었다.


"어? 내가? 음... 어... 그러니깐 터보... 이, 일단 울지말고..."


고집부리는 터보를 어르고 달래는 것은 언제나 이쿠노의 몫이었다. 이쿠노라면 지금 어떻게 했을까? 탄호이저는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오히려 그녀 자신까지 감정이 복받칠 뿐 답은 찾을 수 없었다. 탄호이저는 생각했다. 자신은 결코 이쿠노처럼 될 수 없으며, 그녀의 대신도 할 수 없다고.


“우린 그런 괴물들한테 붙잡힐 정도로 느리지 않아!"


하지만 다름 아닌 탄호이저만이 터보에게 해줄 수 있는 말도 있었다.


"금방 약을 찾아서 네이처랑 함께 돌아올게! 그러니깐 에이! 에이! 뭉! 이야!”


그것이 나타난 첫날 공포와 두려움에 빠져있던 자신에게 그녀가 해주었던 그 말. 절망에 사로잡혀 참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그때와 달리, 이번엔 탄호이저가 그것을 다시 터보에게 되돌려주었다. 그 말을 들은 터보는 두 눈을 크게 뜨더니 곧 그녀 다운 밝고 활기찬 미소로 화답했다.


“응! 터보 집 잘지키고 있을테니깐 두 사람도 에이! 에이! 뭉이야!”


"인사 끝냈으면 서둘러서 이동하도록하지. 인간들이 순찰조를 교체하는 그 사이를 노려야해."


쉽의 지시를 따라 움직인 네 사람은 어둠을 틈타 망가진 상가의 바리게이트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저멀리 몇몇 그것들이 배회하곤 있었지만 그것들 대부분은 아직 상가 곳곳에 남아있는 '고깃덩어리'들을 먹는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어렵사리 올라오는 속을 참으며 일행은 네이처의 안내를 따라 약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건...”


그리고 그 앞엔 네이처에게 익숙한 물건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나기나타잖아? 누가 만든건지 몰라도 꽤 잘만들었는데."


나카야마의 말대로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아무 재료로나 만든 임시용 나기나타는 그 조잡한 모습에 비해 꽤 튼튼히 만들어져 바닥에 내버려진 지금도 온전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네이처는 확신했다. 친구인 그래스를 위해 헤일로가 만들어주었던 그 무기가 틀림없었다. 분명 그녀가 마지막 그 순간까지 손에서 놓지지 않고 휘두르던 바로 그 무기임이.


“…”


피로 얼룩진 나기나타를 보며 그녀는 잠시 묵념하듯 고개를 숙였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셋은 그녀를 놔두고 먼저 약국을 살폈다.


“여기도 이미 한번 난장판이 났나보구만. 다들 방범장치 안거드리게 조심하라고.”


“나카야마 씨 여기 불 좀 비춰주실 수 있을까요? 분류상 이 근처인 것 같은데...”


“그래. 두 사람이 약을 찾을 동안 나와 네이처가 주변을 경계하지. 네이처, 이제 준비는 됐지?"


“잠만. 저 안쪽에서 뭔 소리가 났어.”


지난 사태 이후 한껏 예민해진 네이처는 약국 안쪽에서 나는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았다. 귀를 기우리자 골드 쉽의 귀에도 분명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무기를 치켜들고 소리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들짐승이나 아직 남은 그것 중 하나라 생각했지만 그곳에 있었던 것은 그 모두 다 아닌 뜻밖의 인물이었다.


"네이처...?"


약국 깊숙한 곳 움츠리고 있었던 것은 놀랍게도 히로시었다. 그것도 감염되지 않은 체 멀쩡한.


“아는 사람인가?”


“알긴 하지만 사람새끼는 아니야."


네이처는 곧장 나기가타의 칼날을 그의 목에 겨누었다.


"시간이 있다면 당신한테 우리가 당했던 고통 하나하나를 모조리 체험시켜줬을거야."


그녀의 두 눈은 골드 쉽이 보기에도 섬뜩한 살의로 번뜩이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네이처."


허나 그는 오히려 자신의 목을 칼날에 들이대었다.


"네 말이 맞다. 난 살아있을 자격이 없어. 이걸로 네 화가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그렇게 하거라."


그의 태도에 쉽은 네이처를 제지했다.


"기다려봐. 죽이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어. 하지만 질문을 할 수 있는 건 살아있는 지금 뿐이야."


그에겐 적의도, 저항의 의지도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나중에 죽이더라도 지금은 정보를 얻어두는 것이 이득이었다.


"네이처한테 이야기는 들었다. 일단 가장 궁금한 건 그거야. 당신, 어떻게 감염되지 않은 거지?"


"...나는 안먹었으니깐."


그는 자조 섞인 헛웃음을 지었다.


"캠프에 그 역겨운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건 한 달전 쯤이었어. 물론 처음엔 다들 그딴 멍청한 소리 따위 아무도 믿지 않았지. 하지만 나츠메 씨는... 바깥에 빈집털이를 나갔던 료테이가 물려서 돌아오자 이성을 잃었어."


“그럼 그 다이신이란 자는 어째서 둘에게 협력한 거지? 네이처의 이야기만 들으면 그는 오히려 료테이를 싫어한 것 같던데.”


"다이신 씨는... 맞아. 료테이의 일엔 별 관심 없었을 거야. 감염된 것도 아마 자업자득이라 생각했겠지. 평상시 친분이 있던 나츠메 씨가 사정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가 곧장 료테이를 죽였을거야. 하지만... 세 사람은 자신들도 모르던 공통점이 있었어.”


“가족을 잃었다는 거 말인가?”


“그래. 다이신 씨는 딸과 아내를, 료테이는 여자 친구를, 나츠메 씨는 아들을 이번 일로 잃었지. 그들은... 자신의 소중한 이들은 죽었는데 너희만 물려도 멀쩡히 살아있다는 사실에 분노를 품고 있었어. 다들 남들 몰래 그런 감정을 숨기고 있었던 거야."


“애초에 료테이가 감염됐단 것 따위 그들에게 중요하지도 않았던 거로군.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원망을 풀 대상이 필요했던 거야.”


쉽은 스스로의 입으로 말하면서도 그들에게 불쾌한 동질감을 느꼈다. 맥퀸이 그렇게 됐었을 때부터 그것이란 그것은 눈에 보이는 데로 닥치고 죽이는 다닌 자신도 그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동류에 지나지 않았다.


"나한텐 다들 료테이의 치료를 위해 특별한 약이 필요한 거라 둘러댔어. 내가 사실을 눈치챈 건 이미 그들이 그녀를 죽인 이후였지. 난 그들에게 항의했지만 그들은 나도 공범이라며 분노한 우마무스메들한테 죽고 싶지 않거든 닥치라 협박했고 나는..."


"...겁쟁이."


"그래. 난 겁쟁이였어. 그래서 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시신을... '처리'할 때 그러지 못하고 술만 마셨지. 예전에 부상이었을 때 아키라 씨에게 우마무스메가 병을 옮을 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들었은 것도 있지만... 아니, 그냥 도저히... 도저히 못하겠더라고 그런 짓은..."


"그래서 뭐."


네이처가 말했다.


"말렸어야지. 당신이 정말 당신이 말한데로 불쌍하기만 한 피해자였다면 그딴 미친 짓을 벌였을 때 당신이라도 말렸어야지."


당장이라도 터져나올 것만 같은 분노를 부르튼 입술에 이빨을 박아 넣어 막으며 말했다.


"그들 말 중 하나는 맞아. 당신은 그 역겨운 범죄의 공범이고 지금 여기서 분노한 우마무스메한테 죽을 거야."


"그 날 이후... 죄책감에 하루도 잘 수 없는 나날이었다... 스스로 죽기 위해 이곳에서 약을 찾았지만... 그러지도 못해서 이곳에 숨어있기만 했지..."


필요한 정보는 모두 얻었다. 시끄럽게 소음만 내지 않는다면 쉽은 그녀를 제지할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제 3자인 자신이 이번 일에 끼어들 자격 따위 없었다. 판단은 오로지 네이처의 몫이었다.


"네 말이 맞다 네이처... 나는... 별 볼일 없는 겁쟁이야..."


네이처는 있는 힘껏 나기나타를 휘둘렀다.


“이래봤자...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다고...”


칼날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갈랐다.


"이쿠노도... 헤일로도... 다들... 이런다고 돌아오지 않는단 말야...!"


창을 내버린 네이처는 그대로 자리에 쓰러져 조용히 오열했다. 그 모습은 감염된 트레이너를 보았던 그날 쉽 자신과도 같았다. 이미 죽은 자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아무리 세상을 향해 욕설과 분노를 쏟아내도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멈춰있을 순 없었다.


“그래. 하지만 아직 지켜야 할 사람이 남아있잖아.”


아직 살아 그들의 몫을 이어가야 하니깐.


"...꼴도 보기 싫어 당신. 하지만 속죄니 뭐니 구질구질하게 내 눈 앞에서 피해자인 척 구는 모습은 더 보기 싫어. 저리 꺼져. 그리고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


"...마지막까지 미안하구나 네이처. 네 말데로 하마. 부디 너희들이 살아남길 바라마."


히로시는 그대로 약국 밖으로 나갔다. 그가 그것으로 가득찬 이곳에서 천운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아니면 그의 희망대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지 이젠 그녀들은 알 수 없었다.


"어이 거기 둘 다! 찾았다고! 잠깐 와봐!"


때마침 약을 찾은 듯 나카야마가 두 사람을 불렀다. 자리에 가보니 진열장의 유리창 너머 진열되어있는 수많은 약들 중 '본격화 억제'라 쓰여있는 것들도 섞여있었다.


"탄호이저, 이거 확실히 맞는거지?"


"네. 여기 오기전 몇번이고 확인했어요. 틀림없이 이 약이에요. 원래 장기간 복용해야하는 약이라 약효도 남아있을 거에요."


나카야마는 진열장에 매어진 자물쇠를 만지막 거렸다.


"좋아. 그럼 여기서부터 기술부의 역할이구만."


그리고는 챙겨온 클립을 자물쇠의 구멍 사이에 넣고 천천히 돌려나가기 시작했다.


"좀만... 좀만 더... 됐다!"


나카야마는 어렵지 않게 자물쇠를 풀어내고 진열장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이 시발."


사방팔방 시끄럽게 울어대는 방법장치의 소음에 나카야마가 반사적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게.


"이 시발! 뭔 놈의 건전지가 이렇게 오래가는 건데!"


화폐와 치안은 모두 옛적에 그 기능을 잃고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무법자가 된 이 세계에도 아직 투철한 방범 의식을 지키고 있는 이들이 둘 있다. 하나는 멍청이요, 다른 하나가 바로 감정 없는 기계장치들이다. 붉은 껍데기에 쌓여있는 방범 부저는 그녀들의 사정 따윈 모르겠단 듯 맹렬히 울어댔다.


"이미 늦었어! 일단 문부터 잠가!"


그녀들이 닥치는데로 흉기를 휘두르고나서야 약떨어진 AA 건전지로 간신히 연명하고 있던 방법 부저는 그 입을 닥치며 파란망잔한 일생을 끝냈다. 그것 평생 제 역할을 다해 사람들의 안전과 재산을 지킨 적은 없었으나 반대로 네 명의 우마무스메는 생사의 가로에 놓게 만든,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생이었다.


"■■■■■■!!!!!"


그리고 그것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시발 시발 시발 시발!!! 뭐가 저렇게 많은건데!!!"


불과 몇달전만 하더라도 트레센 인근 이곳 상가는 트윙클 시리즈의 팬이라면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는 성지였다. 트윙클 최고의 슈퍼 스타부터 아직 이름 없는 무명의 선수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은 이곳에 찾아와 팬들과 교류를 나눴고 간혹 레이스 일정이 비는 날이라면 팬 사인회나 특별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말 할 여유 있으면 하나라도 더 죽여!!!!!"


허나 지금 이 순간 우마무스메들이 자신을 보고 몰려든 군중들에게 선물해줄 것은 따듯한 포옹과 멋드러진 싸인이 아니라 거친 발길질과 차가운 총탄이었다.


"다들 2층으로 올라가! 그곳 창문에서 뛰어내린다!!!"


쉽은 급하게 일행을 이끌고 위로 올라가 시야를 확보했지만 보이는 것은 그것들과 그것들, 그리고 굶주린 체 신음소리 지르는 그것들 뿐이었다. 제아무리 우마무스메의 근력이라한들 이대로 뛰어내렸다간 땅에 내려앉은 그 순간 굶주린 그것들에 의해 사방으로 찢겨져나갈 것이다.


"젠장! 쉽, 여기말고 다른 출구는 없-"


"무, 문이!!!"


뒤로 돌아가려해도 이미 늦었다. 자신을 짓누르는 그것들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문짝은 그대로 이음새 통째로 끊어져 바닥으로 엎어졌다. 마치 출발신호를 들은 마군과 같이 그것들을 그녀들을 향해 튀어올라와 미친 듯 팔을 뻗었다.


"뒈져! 죽어 죽으라고!!! 탄호이저 내 뒤로 빠져 얼른!!!"


죽음을 앞 둔 순간 인간의 뇌는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린다고 한다. 죽은 자가 죽지 않고 살아 움직이며 생자들의 살을 탐내는 것을 처음 본 그 순간 과학 상식에 대한 탄호이저의 믿음은 산산히 조각났지만 이 순간 만큼은 그녀의 머릿 속에도 생생히 떠올랐다.


'이제 더이상 시라오키님의 이름을 빌려 구원받을 수 있다 같은 계시는 내리지 않아요. 이건 시라오키님이 아니라, 당신의 친구 마치카네 후쿠키타루로서 해드리는 예언입니다.'


트레센을 떠나기 전 후쿠키타루와 나눴던 대화가.


'자아-! 탄호이저 당신의 운세는 길 중에서도 대길!'


사람들은 그녀의 운세가 엉터리며 단 한번도 맞아 떨어지는 적을 본 적 없다고 한다. 특히나 지난 시라오키 사건이 있은 후 이제 트레센에서 그녀가 말하는 운명이니 뭐니 따위를 믿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제아무리 험난한 역경이 닥쳐도 '행운의 럭키 아이템'만 있으면 모두 잘 풀릴 겁니다-!!!'


오직 단 한 명, 마치카네 탄호이저 그녀 만큼은 제외하고.


"행운의... 럭키 아이템..."


그녀는 단 한 번도, 후쿠키타루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젠장! 또 탄창이 비었어! 탄호이저 거기 있는 총알 좀 집어... 너 지금 뭐하는거야...?"


"미안해 네이처. 약, 꼭 모두한테 전해줘."


지금 이 순간에도.


"그게 무슨-"


[따르릉~! 따르릉~!]


그녀는 품 속 깊이 알람을 껴안은 체 그것들을 향해 달려나갔다.


"탄호이-"


저 뒤 멀리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등굣길에든, 트레이닝 중이든, 하굣길이든 듣기만 하면 언제든 반가워 바로 달려간 그 목소리다.


'달려야해달려야해달려야해달려야해달려야해'


하지만 돌아갈 수 없다. 물러설 수 없다. 양보할 수 없다.


'죽고싶지않아죽고싶지않아죽고싶지않아죽고싶지않아죽고싶지않아'


몇번이고 마음이 꺾이고, 도망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나는..."


'저기... 이사장님... 실례가 안된다면 뭐 하나만 물어볼 수 있을까요...?'


'당연! 학생들의 의문에 답하는 것이야 말로 교육자로서의 의무가 아닌가! 실례될 것도 없이 무엇이든 물어보세나!'


우마무스메는 살면서 많은 것을 남긴다.


'저... 저는 메지로나 심볼리처럼 딱히 이름 높은 명가 출신도 아니고...'


그것은 혈통일 수도 있다.


'또 G1에선 이겨본 적도 없는 데다가...'


그것은 도전일 수도 있다.


'딱히 사람들의 기대를 받는 이름도 아니고...'


그것은 이름일 수도 있다.


'그렇다해서 특별히 목표로 노리는 원대한 것도 없는데...'


그것은 의지일 수도 있다.


'어째서 저 같은 걸 이리 신경 써주시는 건가요...?'


그리고 그것은-


'우문! 무슨 그런 것을 묻고 있는가 말인가!'


'네...?'


'성적이 어쩌하든 혈통이 어쩌하든 외부의 평가가 어쩌하든 다 그게 다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이 되었든 태어나 살아가는 것을 사랑하는데 이유같은 것은 필요할 리 없다네! 굳이 여기에 이유를 붙이자면...


모든 우마무스메들이 행복할 수 있는 세계를 위해서라네!'


꿈일 수도 있다.


그 꿈에 맹세하길, 그녀는 멈출 수 없다.


"하아... 하아... 하아아아..!"


최후의 최후의 순간, 정신없이 들어선 작은 방. 이제 더이상 들려오지 않는 친구의 목소리에 안도감을 느끼자마자 기력이 다해 넘어지듯 쓰러진 그녀의 손 끝엔 무전기 하나가 놓여있었다.


"이건..."


운명의 장난인가, 아니면 이또한 후쿠키타루가 말한 필연이란 것일까. 무전기는 아직도 작동하고 있었다.


"그럼..."


그녀는 마지막 남은 기력을 짜내 주파수를 맞추고 무전기에 입을 가져다 댄다.


"마치카네 탄호이저 보고. 상가 생존자 그룹 궤멸. 사일런스 스즈카 빈사. 쉽과 나카야마 교전 중. 현재 포위 상태. 귀환 불가능."


그리고는 끊임없이 같은 말을 반복한다.


"마치카네 탄호이저 보고. 상가 생존자 그룹 궤멸. 사일런스 스즈카 빈사. 쉽과 나카야마 교전 중. 현재 포위 상태. 귀환 불가능."


[탄... 나... 회복... 가?]


됐다. 통신은 아직 살아있다. 그렇다면, 아직 이런 자신이라도 전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마치카네 탄호이저 보고. 상가 생존자 그룹 궤멸. 사일런스 스즈카 빈사. 쉽과 나카야마 교전 중. 현재 포위 상태. 귀환 불가능. 임무는... 실패입니다."


본래의 임무는 원정대의 무사 귀환까지 포함된 것. 그것은 이미 처참히 실패했다. 하지만-


"하지만 '희망'은 끝나지 않았어요."


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절망 따위가 아니다. 이것이 끝이라는 비관 같은 것이 아니다. '하얀 모자'를 힘껏 쥐며, 그녀는 외친다.


"아직 전부 다 끝난 게 아니니깐...!"


목청이 터져라, 이 잔혹하고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세계에 소리 높여 외친다.


"다들 마지막까지 에이! 에이! 뭉이야!!!"


곧 문이 부셔지고, 검은 그림자가 쏟아져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