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린 라앨. 그녀는 사람을 죽인 뒤 살가죽을 박제해 전시한 살인범이다. 

그리고 현재 레헬른 중앙형무소 지하 2층 무기수 독방에 수감되어 있다. 누구에게도 잊혀질리 없을 것 같은, 잔인한 범행 수법은 악명을 더욱 떨치게 하는 원인이었다. 어느 날 그녀의 한 동료 수감자가 소중한 물건을 훔쳐갔다. 다른 동료였다면 없던 아량을 발휘해서라도 넘어가주었을지 모르겠지만, 그 여자의 사고는 지독히도 냉정하고 이기적이었다. 수 시간 내로, 그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대가를 치르게 됐다. 같은 수감자 신세여도 결코 가까이 하고 싶지 않고 가까이 해서도 안 될 사람. 그것이 바로 엘리시스 라이엘이라는 인물에 대한 단상이었다.


그렇지만 여기, 그녀를 만나러 가는 하나의 발걸음이 점점 속도를 붙여간다. 그 발걸음은 절박하고, 또 어떤 면에서 보면 애처롭기까지 했다. 그 행동이 삶의 마지막 희망이지 샘물인 것처럼, 필사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중절모를 꾹 눌러쓴 그 남자는 스스로에게도 아직 확신을 가지지는 못한 상태였다. 아무리 극단의 상황이라 할지언정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불변하는 사실을 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무시해야 할 각별한 이유가 존재했을 뿐. 한 사람의 윤리를 파괴한다 해도 전체 사회의 윤리와 도덕을 수호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한다면 그 정도로도 충분한 이용가치가 있지 않을까, 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황급한 구두가 또각거리는 소리는 점차 목적지에 다가가며 잦아들었다. 그리고 눈 앞에 있는 문 손잡이를 사시나무 떨듯이 떨리는 손으로 잡아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손잡이를 손목을 비틀어 돌리고 문을 연다. 열려버린 그의 시야로 뒤돌아 서 있는 한 여성이 보인다. 위협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면담자와 죄수는 방에서 몇 센티미터 가량의 강화유리 벽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선도 맞추지 않았음에도 몸을 움찔했다. 눈앞에 서 있는 인물이 두려워서였을까, 그게 아니라면 이런 일에서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낀 것일까. 둘 중 어느 쪽도 만족할 만한 대답은 되지 못한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그는 조용히 속삭이듯 생각을 정리했다. 


 서 있는 죄수의 머리카락은 옅은 분홍색이었다. 스테인리스 창살 속 단칸방에선 관리받지 못해 헝클어져 있어야 정상이었겠지만 어쩐지 머릿결은 꽤나 매끄러워 보였다. 그리고 보이지는 않았지만, 파란색 죄수복과 강한 대조를 이루는 작고 흰 손이 있었다. 목련처럼 희었지만 동시에 붉은색이었고 시간이 지나면 암적색으로 변하곤 했다. 내면의 심상에 의해 창조된 환상은 때로는 실제로 보이는 사물보다 뚜렷하게 드러나고는 한다. 차마 올바른 예시를 들기가 어려운 생각이었지만, 시곗바늘에 쫏기는 시간이라는 추격자가 뒤를 추적해 오는 것을 느낀 그는 반대의 입장을 차마 내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마음속으로 다가오는 것을 에써 뿌리치며, 그가 힘들게 직선을 그리고 있었던 입술을 때러고 할 때였다.


“가까이 와.”


부드럽지만 냉랭한 매끄러움. 목소리는 출처 불명의 소음 속을 뚫고서는 목적지로 사뿐히, 그러나 날카롭게 즈려앉았다.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시선을 마주할 필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대화에는 언어적 수단만을 동원하면 충분했다. 그 외의 것은 공치사 같은 겉치레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느 한 쪽도, 서로에 대해 마음 깊이 존중해줄 의사를 바라지 않았다. 앞으로 다룰 일이 감정과 마음의 인내력을 시험하는 일인데도, 고집을 부려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들처럼 그들은 마주보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이야기할 대상은 내가 아니다.”


그가 내적인 동요를 지극히 배제한 상태로 말했다. 토론을 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상대를 이기는 것이 아닌, 반대 입장의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이번 시도를 보다 높은 자들에게 설득하는 것 또한 능숙하게 담당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경력이란 물적 증거에 기반해 튀어나온, 자신감에 가까운 오묘한 감정. 그 감정을 짓밟은 이들에게 자신이 옳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 보이겠다는 어느새 성장한 욕망은, 그를 다시금 최악이지만 최고의 인간으로 만들어 주었다. 숨기고 또 숨겨 마침내 아무도 볼 수 없게 하자. 진정한 심장의 색깔을. 은밀한 다짐은 혈관을 통해 온 몸으로 서서히 번져갔다.


“참 다행이야! 아.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안 그럴게요. 절대!”

 얼굴을 보지 않았지만 무언가 나쁜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았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말투와 습관, 인간들의 억제할 수 없고 제거가 불가능한 습성. 유도리있게 판단할 수만 있다면 순간순간마다 기대 이상으로 도움을 주는 유능한 재료였다. 물론 과한 신뢰는 구렁텅이에 추락하는 것으로 직결되었으니 감안해야 했다.



“발랄한 척은.”


그가 싱겁게 대꾸했다. 이 범죄자의 위험성에 대해선 익히 들어본 바가 있었기에 그로서는 그녀의 활달해 보이는 태도가 놀랍지 않았다. 상황 인식 능력이 뛰어난 것이 원인인지, 아니면 그 반대의 경우여서인지는 직접 더 지켜봐야 할 일이었지만, 어쨌든 꽤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보통의 죄수들의 경우 처음에는 수감된 사실 자체를 부정한다. 이후 단계적으로 감옥 생활의 요소요소를 수용하면서 온순해지는-이라는 표현이 정확하진 않겠지만 다르게 표현하기가 애매했다- 게 평범한 수감자들의 행동 방식이었다. 


물론 실험군이 있다는 것은 대조군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엘린 라앨은 유독 별난 행적을 보이고 있었다. 교도관들의 평가에 따르면 입실 첫 날부터 고분고분하고 차분한 태도를 보이다가, 계절이 바뀌고 교도소장의 달력에 X표가 하나씩 그어질 때마다 그녀는 행동의 수위를 높여나갔다. 그 중 하나 수감생활의 동료들을 ‘괴롭힌’ 이야기는 이미 경찰들 내에서도 널리 알려져서, 감사에서 질문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어째서일까, 그는 한 켠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보통의 범죄자들이 보이는 행동 패턴과 너무 상이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개를 젓는다. 


‘잡생각은 이제 그만.’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검은색 서류 봉투를 면담실 창구로 집어넣었다. 봉투는 창구를 통해 미끄러져 바닥에 툭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방금 전 밀봉을 한 봉투는 아직 접합 부위에 온기가 남아 있다.

손에서 계속 붙잡고 있어서 차이를 쉽사리 느끼지 못했지만, 막상 떠나니 허전해지는 그런 느낌. 감촉이 사라지기 전, 그는 자리에서 돌아서서 벽 안쪽의 한 사람에게 최후의 전언을 남긴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 엘린 라앨.”


그리고 문을 열고 재빠르게 몸을 틈 사이로 집어넣어 빠져나간다. 마치 밧줄이 당겨오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그 자리를 순식간에 떠났다. 듣는 이의 의견은 청취할 필요가 없다는 듯한 그 태도를 본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웃고 말 것이었다. 


엘린 라엘은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시선에서 숨겨져, 아니 그녀가 시선을 피했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같은 오산이었다. 관찰력의 부족이었는지, 수사관은 여자의 손에 쥐어져 있는 물건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 붉은색으로 칠해진 틀을 가진 거울로, 방의 구석구석을 감시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하.하.하. 도움이라고? 그것 참 재미있겠네요, 가 아니라, 내가 누군가를 도울 거라고? 하늘에서 별 떨어질 확률이 그것보다는 높겠다!” 그녀가 사악하게 웃었다


물론 그런 말과는 달리, 솔직함을 드러내는 것은 봉투에 손을 가져가는 그녀의 팔이었다.

“...하지만 따분해, 따분해, 따분해! 재미있으면 모를까, 남을 도와주는 따분함의 제왕같은 일 따위 내가-”

그녀의 말이 중간에서 멈추었다. 순간 눈은 고정된 봉투 속 종이의 글자들로 고정된 상태. 나비가 꽃을 찾은 것처럼, 그 주위를 배회하던 눈동자는 몇 번의 왕복 끝에 다시 정지했다. 그리고 입술이 아래쪽으로 크게 곡선을 그린다.


“...좋아.”

절로 콧노래를 부르면서 라엘이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