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해가 뜬 다음 날,


함교 창문 너머로 새어들어오는 빛이 윤서를 깨웠다.


눈을 떠 보니, 안락한 방은 온데간데없고 삭막한 회색빛의 선실밖에 없었다.


“여가 어디고..”


비몽사몽한 윤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 자기가 누워 있던 자리 옆에는 유리가 벽에 기대어 새우잠을 자고 있었고,


어제 오랜만에 재회한 준식이는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준식이 얜 또 어디 간겨?”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선실 바닥에 있던 다락문이 열렸다.


“깜짝이야! 니 거기서 뭐하노?”


“잠깐 이리로 와봐. 여기 밑에도 뭔가 있어.”


준식이는 윤서에게 한 마디 던지고는 다시 다락문 안으로 쏙 들어갔다.



“안에 뭐꼬?”


윤서는 다락문 바로 아래의 사다리에 발을 디디며 한 칸씩 천천히 내려왔다.


사다리 오른편으로 침대 5개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


“보다시피, 침대 5개.”


윤서가 바닥에 발을 딛자, 준식이는 침실 한켠에 달린 문을 열었다.



“여긴 화장실인데, 꽤 좁더라고.”


“마침 잘 됐네. 니 저짝으로 좀 가 있어라.”


윤서는 준식이에게 가라고 손짓했다.


준식이는 잠깐 뒤돌아보다가 다시 사다리를 타고 선실로 올라갔다.



슬슬 선실 한쪽에 걸린 시계는 12시를 가리켰다.


준식이는 주린 배를 움켜잡고, 점심밥이 될 무언가를 찾으러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 때, 조종석 뒤의 서랍이 준식이의 눈에 들어왔다.


“여기 안에 뭔가 좀 있을려나.”


당연하겠지만, 갓 진수된 새 배이니만큼 서랍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씨 배고파 죽겠는데 밥도 없고 미치겠네.”


“여기 먹을 거 없나?”


“없어. 전혀.”


“그럼 사러 나가야지.”


윤서가 후방갑판 쪽 문을 열자 문 너머로 작은 마을이 보였다.



“근데.. 얘는 안데려가나?”


이미 해가 중천을 넘어갔지만 유리는 아직 꿈나라에서 되돌아오지 않았다.


“걍 놔두자. 어차피 우리 올때까지 자고 있을거니께.”


윤서는 준식이와 함께 배에서 내려 마을로 걸어갔다.



어제의 그 광경과는 달리 대마도는 꽤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바닥에 뿌려진 의문의 찌라시를 제외하면 말이다.


정박지에서 지척의 거리에 있던 작은 마을은 이상하리만치 썰렁했다. 당연히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윤서는 낡은 구멍가게로 보이는 건물로 발길을 돌렸다.


“저기요~ 장사 합니까?”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뭐꼬, 사람 없나.”


“하긴, 핵이 날아와 꽂혔는데 가게가 제대로 돌아가겠어?”


윤서는 가게 한쪽 벽을 장식하고 있는 라면 봉지를 쓸어담았다. 눈으로만 세어봐도 족히 20개는 되어 보였다.


“와, 도둑질 제대론데?”


“CCTV도 없다 아이가. 일단 우리 먼저 살고 봐야지.”


그 말에 설득당한 준식이도 이것저것 주워담았다. 물론, 주인장은 나오지 않았다. 



“뭐,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나?”


“앞으로 나흘을 먹을 정도인데 한동안은 버티겠지. 슬슬 돌아가자.”


윤서와 준식이는 구멍가게를 알차게 턴 뒤, 다시 포구 쪽을 향했다.


생각치도 못한 방문자가 또 이들을 맞이할 것도 모른 채로..



- 철썩.



파도와 함께, 작은 수상버스 하나가 포구 앞 백사장을 가로지르며 육지로 밀려왔다.


“아야.. 드디어 육지에 닿았네.”


“거제도가 이리 멀었던가..?”


선체 위로 자욱하게 덮힌 먼지구름 너머로 두 사람의 실루엣이 눈에 띄었다.



윤서와 준식이는 가던 발길을 멈추었다.


“와 등장씬 쩌는데?”


“이건 또 뭐꼬?”


먼지가 걷히자, 아주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윤서의 사촌동생, 하진우와 친구 서은하였다.



“어? 진우야!”


“..윤서누나?”


“뭐야, 아는 사람이었어?”



“여서 뭐하고 앉아있었노?”


떨어뜨린 라면 봉지를 줍던 윤서가 말했다.


“그게 말이지.. 설명하려면 좀 길어.”


“그럼 일단 우리 배로 가자. 니도 따라올래?”


은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윤서를 따라갔다.



“으으 머리야.. 여기가 어디야?”


오후 4시, 해는 한참 전에 중천을 넘어 이제 저물어 가기 시작했다. 유리는 눈을 비비며 선실 밖을 나섰다.


차디찬 바닷바람이 불어닥치는 갑판에도, 온갖 기계장치들과 계기판이 빼곡한 함교에도 윤서와 준식이는 보이질 않았다.


“뭐야 얘네들 어디갔어. 나 버리고 튀었나?”



유리는 어제 먹다 남은 초콜릿을 뜯었다. 약간 녹았다 굳은 듯 했지만 그 텁텁한 단맛은 어디 가지 않았다.

 

‘물 마시고 싶다..’


그러던 찰나, 문이 열리며 윤서가 얼굴을 비췄다. 뒤따라서 준식이와 신입 둘이 선실 안으로 들어왔다.


“오, 일어났나.”


“미안, 밥 좀 가져오느라 늦었어.”


“안녕..?”



“..?!”


갑자기 배로 늘어난 인원수에 유리는 당황함을 감출 수 없었다.


“아, 얘네는 오다 줏은.. 아니 오다 만난 애들인데, 일단 태워주기로 했다.”


“아..”


그리고 유리의 눈은 윤서의 팔 위에 수북히 쌓인 라면 봉지로 향했다.



“그거 다 라면이야?”


“어.”

윤서는 도적질해온 라면 봉지들을 유리 앞에 내려놓았다.


“이제 라면 못 먹을 수도 있으니까, 지금 많이 먹어 둬래이. 외국에선 구하기가 마이 어려우니까.”



한편, 준식이와 진우, 은하는 아랫층의 침실로 향했다.


"여기가 우리 침실. 이쪽은 화장실이고, 저쪽은 창고야.”


“오, 배 안에 침대도 있네?”


“우리 배는 아니지만.”


진우는 자기 가방을 침대에 올려두고,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



위층에서는 윤서가 물을 끓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여까진 무슨 일이고?”


“그게, 그 나루터 할아버지 있잖아? 그 할아버지가 우릴 살렸어.”


“그 할배가?”



“학교 끝나고 시내로 놀러갈려고 배를 탔는데, 갑자기 따신 바람이 불더라고.


보니까 시내쪽은 핵이라도 맞은 거 같았고, 할아버지는 잠깐 짐 가져온다고 기다리래.


한 1분 뒤에 배로 돌아오시던데, 바람에 휩쓸려가꼬 물에 빠지시더라.


..우리만은 꼭 살아남으래.



 ‘빨간색 당기고 파란색 당기면 앞으로 간다’ 이거 하나만 기억하그라.


이게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이었어.”


“지금쯤 이미 돌아가셨겠구마이..”


윤서는 노을이 져 가는 북서쪽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근데 이제 5명이잖아. 식량이 많이 딸릴 거 같은데?”


라면 냄새를 맡고 지하실에서 올라온 준식이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이 마을에 가게는 저기밖에 없었제?”


“그랬지. 굶어 죽고 싶지 않다면 읍내로 나가는 수 밖에.”



“그럼 날 저물기 전에 빨리 가자. 밤에 가면 아무것도 안 뵈니까.”


준식이는 그 길로 바로 함교로 향했다. 


“빨간색.. 동력계 올리고, 파란색 당기면.. 됐다!”


맹렬한 진동과 함께 한산호는 다시 한 번 기지개를 폈다. 


준식이가 이끄는 배는 쪽빛 바다를 가르며 남쪽으로, 정확히는 이즈하라 항구로 향했다.



한편, 한산호 지하 침실.



“재 일본 아메리카인.. 소개령?”


진우의 양 손에는 대문짝만한 벽보가 들려 있었다.


“어디.. 대상은 본인 외 동거 가족. 대피 장소는..



하와이..?”



길바닥을 굴러다니던 벽보가 지도가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