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을 덮고 자는 방식



 내가 그 남자를 처음 만난 건 자주 가는 웨스턴 바 <블랙 벨벳>에서였다. <블랙 밸벳>은 이런 변두리에선 유일하게 차를 몰고 찾아갈만한 술집이다. 비밀 얘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조명이 어두웠지만 음침하지는 않았고, 맥주도 잘 관리될 뿐더러 무엇보다 칵테일이 수준급이다.


 3월 들어 바텐더가 젊은 사람으로 바뀌어서 조금 걱정했지만 이젠 사람들이 ‘윤’이라고 부르게 된 그 친구는 알고보니 롯데호텔에 있는 지하 바에서도 일한 적 있는 실력자였다. 특히 블랙 러시안처럼 커피 리큐르를 쓰는 칵테일에서만큼은 사람들이 ‘신사’라고 불렀던 나이 든 전임자보다도 나은 구석이 있었다.


 분위기도 좋고 술도 맛있는데 어째서 이곳이 조용한가 하면, 여기는 지방인데다 건물 자체도 국도로 들어서는 길 옆에 덩그러니 놓여져있기 때문이었다. 술집으로는 말도 안될 정도로 외지인데 딱히 홍보활동도 하지 않으니 입소문을 타고 어쩌다 한 두명씩 느는 정도가 고작이다. 사실 이런 식으로 가게가 어떻게 여태껏 유지되는 건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가게와 관련해 테이블에 가장 많이 오르는 소재는 그 이윤 문제의 비밀을 품고 있기도 한 <블랙 벨벳>의 사장일 것이다. 그녀는 손님들 사이에서 사실 영국인이다, 일본인이다, 어쨌든 겉보기엔 고작 묘령의 여성으로 보였다는 식으로 소문만 무성할 뿐, 실제로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심지어 바텐더 윤도 아직 얼굴을 본 적이 없었는데, 글래스를 닦으면서 내게 “통화할 때 목소리는 여자분이기는 했다.” 그리고 “처음엔 정말 월급이 들어오는 건지도 의심스러웠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나는 잔을 기울이면서 가만히 웃을 따름이었다.


 <블랙 벨벳>은 그런 술집이었다. 필립 글래스의 연주가 나오고 칵테일이 훌륭하고 아는 사람들만 찾아와 조용히 얘기하다 가는 휴식처. 그래서 그 남자 d씨가 내게 그런 식으로 말을 걸어왔을 때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그런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처음 말을 걸어왔을 때 첫인상은 취객이 옆자리 여자에게 주정을 부리는 딱 그 정도였다.


 사실 몇 자리 떨어져 앉아있던 남자의 분위기가 벌써부터 위태롭기는 했다. 그는 거의 일곱시부터 가게에서 혼자 진토닉을 마시고 있었는데 내가 본 것만 해도 여섯 잔이 넘었었다. 그는 얼음을 띄운 온더록 잔을 거의 맥주처럼 들이켰다.


 깔끔한 와이셔츠를 입긴 했지만 벌써 넥타이까지 풀어헤친 그가 잔을 들고 걸어와 내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성매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 건너편에서 글래스를 닦던 윤이 손을 멈췄고, 남자의 얼굴을 거친 후에 내 쪽을 바라봤다. ‘맡을까요?’ 윤은 아직 이십대였지만 말해 본 결과 술집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잠시 판단을 유보해 둔 채로 다가온 남자의 얼굴을 잠시 쳐다봤다. 그는 자리에 선 채로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고 안경 너머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에 있는 건 성욕은 아니었다. 알코올으로 충혈되어있긴 했지만 꽤 진지해보였고, 너무 진지해서 좀 불쌍해보이는 구석도 있었다. 나는 잠시 후에 윤에게 괜찮을 것 같다고 눈짓을 줬다. 일단은.


 남자는 내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내 옆자리로 걸어와 잔을 테이블에 올려다놓고 앉았다. 그의 키는 크지 않아서 여자치곤 큰 나와 비슷한 정도였다. 덩치가 있기는 했지만, 어깨를 늘어뜨리고 양 손을 모으자 바텐더 윤보다도 왜소하게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미안합니다.”라고 몇 차례 중얼거리다가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사실 저는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아닌데요... 아무래도 그쪽은 그런 걸 할 것 같지는 않아보여서요... 의견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는 계속 말꼬리를 흐렸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성매매에 대해서.” 나는 잠시 후에 말했다. “여자쪽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사는 남자?”


 아니면 남자가 몸을 파는 경우를 말하는 건지, 하고 덧붙이자 남자는 잠시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더는 혼자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진을 더 들이키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자를 사는 경우요. 그리고 양쪽 다. 두 사람 다요.”


 나는 그가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양 손가락을 소심하게 만지작거리는 걸 봤다. 그리고 천천히 대답했다.


 “불법이고, 잘못이긴 하지만.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사는 쪽도, 파는 쪽도, 살아가다 그럴 수도 있겠죠. 어찌되었든 남에게 해를 끼칠 정도로 극악한 범죄는 아니니까요.”


 “그렇죠?” 남자는 갑자기 열정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무언가 말을 쏟아내려고 하다가 머뭇거렸고, 대신에 다시 토닉 잔을 쥐었다. 잔 속의 얼음은 찰랑거릴 정도로 녹아있었다.


 남자는 윤을 불러 새로운 진토닉을 시켰다. 윤은 빈 잔을 받아가면서 살짝 내 얼굴을 쳐다봤는데, 그의 성격에 다음 잔에는 몰래 술을 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잔이 도착한 후에도 내 얼굴을 쳐다봤다가 고개를 숙였다가 하면서, 하려던 말 대신 자신의 신상을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자기가 어떤 대학을 나왔고(3년제? 전문대였다) 지금은 어떤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지. 자신의 연봉과(꽤 높았다) 지금 회사에서 맡고 있는 직책, 나이는 올해로 서른 넷이라는 것과 자신의 이름까지도 말했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이야기 앞에 오늘 들은 일은 오늘 잊어주십시오, 하고 중얼거렸다.


 “저는 평범하게 살아왔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매매라는 건... 당신 같은 분이 이해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남자들에겐 평범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처럼, 겉으로 잘난 게 없는 사람에겐 더욱 그렇지요.


 전 대학 내내 연애를 한 적이 없습니다. 졸업하고, 곧장 취업한 후에도 여자는 사귈 줄도 모르고 그럴 시간도 없었죠. 그런데 저처럼 하부 업체에 하청을 받고 하면 자연스레 접대가 이루어집니다. 회사 밖에서도 안에서도 그렇지요. 그리고 그런 일을 거절하는 건, 그러는 남자도 아마 있겠지만, 평범한 일은 아닙니다.”


 d씨는 얘기하면서 테이블에 한 쪽 팔꿈치를 대고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시선은 내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나를 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한 번 더 머리를 흔들고는 살짝 인상을 쓴 채로 얘기를 계속했다.


 “그런 건 관문이랑도 비슷합니다. 게다가, 또 저처럼 성경험이 없는 남자가 그런 권유를 뿌리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절대 참을 수 없다는 건 아닙니다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건... 평범한 편에 속합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아시겠습니까?”


 그는 거기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딱히 대답하지는 않았다. 뭐라고 하겠어. 다만 나는 그의 흐트러진 입술을 가만히 쳐다보면서 내 쪽의 네모난 잔을 들어 홀짝였는데 그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다. d는 다시금 당신 같은 여자는 잘 모르겠지만,이라고 중얼거리더니 양 손으로 얼굴을 비빈 후에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그런 얘기를 제게 하는 이유가 뭐죠?”


 그 때 바에는 브래드 멜다우의 발라드 앨범이 나오고 있었다. <And I love her> 피아노 앞에 앉은 철학자 같은 연주에는 사랑이라고 적고도 어지러운 감정이 흘렀다. 사랑인 건 맞지만, 담담한 침묵 속에 소리가 울렸다. 수가 적은 술집의 손님들은 바에선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카운터 바에 앉아 있는 건 나와 남자 d밖에 없었다. 윤은 아무 얘기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때때로 주문을 받고 또 쉐이커를 흔들었다.


그리고 d씨는 자신의 사랑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사랑? 아마 그것이  처음에 내뱉으려는 얘기였을 것이다. 그녀에 대해 말하기 시작할 때, 여태까지 말해왔으면서도 꽤 주춤거렸지만, 그의 말투는 점차 확연해졌고 어느 부분에 이르러서는 감정에 휩싸인 채 얼굴을 감싸기도 했다. 그러니 이 부분은 들은 그대로를 옮길 수는 없을 것 같다. d가 말한 사정은 이랬다.


 스스로 말한 것처럼 그는 ‘평범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런 것 외에 건설계통 실무업체의 일상 같은 건 알 수가 없다. 그가 자신의 일상에 대해 말한 건 성매매에 대한 것 뿐이었는데 거래처의 남자를 접대할 때도, 반대로 받을 때도 잦은 관례처럼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일을 젊은 나이에 시작한 그는 ‘그런 위치’에 있었다. 그런 일들을 맡아 자주 관리해야 하는 위치. 다만 업무 외에 스스로 업소를 찾아간 일은 두어번 밖에 없었다고 d씨는 강조했다. ...온통 그런 얘기들 뿐이어서 나는 그가 실제로는 굉장히 거기에 엄청 집착하고 있는 거라고 느꼈다. 따로 얘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던 중에, 정확히 말하면 d가 부모님이 진 빚을 거의 다 갚아가던 즈음에, 그의 앞에 여자가 나타났다. 자주 가던 카페에 새로 들어 온 아르바이트생이었다고 했다. (그녀의 이름은 편의상 Y라고 하자) 좀 어수룩할 뿐이지 사람과 두루두루 잘 지내는 d씨는 카페 여주인에게 일하던 그녀를 가볍게 소개 받았다. 검은 와이셔츠를 입고 갈색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d씨가 가게 유일한 단골이라는 소갯말에 Y는 이가 드러나도록 웃으면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d씨는 얼굴을 붉혔다. ‘다른 여자들과는 달라보였다’고 d씨는 말했다.

 이십 대 중반의 휴학생, 근처 대학교의 사학과를 다니고 이런 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모으고 있는 연하의 여자. d씨는 어떻게 해야할 지를 몰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카페 여주의 억척스러움 때문에 계속 접점이 생겼다. 이어져서 겨울에 거리를 함께 걷는 일이 생겼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것 같았습니다.” d씨는 말했다. 이전에는 여자를 안으면서도 늘 상상했을 뿐이었는데. 상사들과 함께 들어간 노래방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입을 맞추면서, 첫 키스는 아마 그랬겠구나. 여자의 배에 양주를 붓는 연장자와 그가 안던 여자와 관계를 나누면서 아마 평범한 첫경험이란 그런 거겠구나. 그는 늘 상상할 뿐이었다. 하지만 YJ와 있는 시간은 모든게 달랐다고 말했다. ‘돈이 사이에 없는 채로 이성과 만나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고. d씨는 자조와 그리움이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는 Y가 자신을 좋아하게 된 것도 선뜻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금씩 그녀가 올려다 보는 시선이 변하는게, 먼저 손을 잡아오는 일이 생기는게. 또 그만큼 오래 만나왔으니까. (두 사람은 2년 동안 사귀었다) d씨는 자존감이 굉장히 낮아보였는데 아마 Y의 관계에 확신을 가지는 것도, 애정의 크기 보다는 그 낮은 자존감을 회복하는데 시간이 걸렸을 거라고 나는 짐작했다.


 그리고 둘은 약혼을 했다.


 “반지를 받아줬을 때의 느낌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d씨는 양 손으로 진토닉 잔을 들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서요.” 나는 이제 반 쯤 비어있는 블랙 러시안을 들고 말했다. 이제 그의 말투가 더 어눌해지지는 않는 걸 봐선 윤이 더 이상 진을 섞지 않는 모양이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계속 말해봐요.”


 우연히 얘기를 듣기 전까지 d씨는 정말 어떤 낌새도 느끼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건 그녀가 처신을 잘한 것도 있겠지만 d씨가 워낙 순진했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 술을 든 채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여자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어쩌면 사람에 대한 모든 것에 그랬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보통이라면 자연스레 들었을만한 의문. Y의 휴학기간이 어째서 그렇게 길어졌는지, 또 아무 지원도 없이 아르바이트만 전전했는데도 월세와 생활비를 무리없이 해결할 수 있었던 건지 의문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으론 Y가 그에게 매력을 느낀 것도 그런 부분이었으리라고, 나는 속으로 짐작했다. 유흥 일을 해본 여자에게는 보통 둔한 남자가 편하니까.


 이야기는 이렇게 진행되었다. 둘만의 조촐한 약혼식이 있고서 얼마 다음이었다. d씨는 여기저기서 알게 된 자기 또래의 남자들과 술자리를 갖기 전에 잠시 Y를 부르는 일이 생겼다. 유난히 그런 모임을 싫어하는 그녀였지만 간단히 인사만 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녀는 돌아갈 때까지 아무런 낌새도 내비치지 않았지만 남자들의 몸에 알코올이 늘어가고 d씨는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에 공교롭게도 이런 얘기를 듣게 되는 것이다.


 유흥업소에서의 무용담. 어쩌다 번갈아 안게 된 같은 여자에 대한 체험담. d씨도 익숙한 편이었다. 하지만 묘한 흥분으로 번들거리는 남자들에 입에 오르고 있는 건 방금 떠나간 Y였다.


 “남자들은 곧 착각인지도 모른다고 사과했지만 그녀에게 넌지시 물어보는 순간 알 수 있었어요. 오랫동안 두려워하던 일이 마침내 일어나고 말았다는 표정이었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야. 그런 게 아니야.


 “결국 그녀는 울었어요.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었어죠... 여자가 엉엉 울면서 손바닥을 비비는 것을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그는 자조하며 말했다.


 “...그게 사흘 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하고 있죠?” 내가 물었다.


 그러자 d씨는 갑자기 무례한 질문이라도 들은 것처럼 고개를 빠르게 돌려 나를 노려봤다. 하지만 내 얼굴을 보던 눈은 다시 초점이 흐려졌고, 멍하니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자기가 여기서 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저는. 회사를 잘 다니고 있습니다. 퇴근 후에는 혼자 술을 마십니다. 그리고 늦지 않게 출근을 합니다.”


 “Y씨는요?”


 “...그녀에게선 자주 문자가 옵니다. 우리는 계속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약혼도 했으니까요.”


 그 날 d씨는 Y에게 아무런 것도 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비는 그녀를 멍하니 쳐다봤고 문앞에 내버려 둔 채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그는 Y에게 문자를 보냈다. 잘 돌아갔는지. 그러자 그녀는 잘 돌아갔다고 대답했고 d씨는 밥은 먹었는지 물었다. Y는 대답했다. 그리고 같은 걸 물어봤다. d씨는 대답했고, 대화는 그런 식으로 반복되었다. 그들은 이전과 똑같이 연락하고 있었다. 지난 며칠 간 서로가 바빠서 얼굴을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일단은 그랬다.


 “성매매에 대해 그렇게 말씀하셨죠?” d는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살아가다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 저도 정확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평범한 축에 속하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녀의 경우도 그럴 수 있는 거겠죠. 저는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d씨는 말을 멈추고 아주 느리게 잔을 비우더니 다시 멍하니 고개를 들어 바 안쪽에 늘어선 술병들을 봤다. 그리고 멍한 눈으로 잔을 쥐고 있지 않은 손을 들어 이마를 짚고서 말했다.


 “...잊혀지지가 않는 건 제 약혼녀를 두고 말하던 그 세 남자의 얼굴입니다. 그 중에는, 차장급의 나이 많은 사람도 있었고. 대머리도 있었습니다.” 남자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그 남자들이 돈을 주고 가슴을 만졌고,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고, 서로 웃으면서 알몸에 대해 떠들어댔습니다. ...압니다. 저도 깨끗한 남자가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그 얼굴들을 기억한 채로 도무지 어떻게 계속 해나야가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나는 잔을 입가에 대고서 d 씨의 어두운 표정을 쳐다봤다. 그리고 잠시 후에 말했다.


 “당신은 Y씨를 사랑하는게 아니군요.”


 “...네?”


 그러자 d씨는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나는 그대로 마주보고 있었다.


 잠시 후에 d가 지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흔들고서 말했다.


 “...당신 같은 여자는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겠죠. 하지만 유흥업소에서 그런 일을 했다는 건, 또 자기 여자와 잔 남자들을 안다는 건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지는 일이 아닙니다. 우습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직접 체험해봤으니까 더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 여자들은-”


 “제가 왜 체험해 본 적 없다고 생각하시는거죠?”


 “...예?” d씨는 갑자기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얼음이 다 녹은 잔을 내려놓고서 그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는 왜 그런 여자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냐구요.”


 d씨는 처음에는 내가 거짓으로 떠보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어색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보고 있었고, 그는 곧 믿을 수 없다는 듯 앉아있는 내 모습을 훑어봤다. 그렇지만 겉모습이 대체 어떻다는 말인가? 마침내 d씨는 입술을 꽉 다문 채 고개를 흔들었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그는 마지막으로 중얼거렸고 흐느적거리며 일어나 윤에게 술값을 지불했다. d씨는 그대로 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 바를 빠져나갔다. 그 남자를 본 건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새로 코스모폴리탄을 주문했다. 그러자 윤은 빈 잔을 집어들며 내게 말했다.


 “기분 나쁜 남자네요. 그렇죠?”


 “그러게.”


 윤은 남자와 내 대화를 듣고 있었다는 티를 구태여 냈다. 그 점은 바텐더답지 못했지만, 그가 내게 품고 있는 감정 때문에 판단이 흐려졌을 수도 있었고 또 그 외에 다른 의견을 펼쳐놓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리 신경쓰이지는 않았다. 윤의 말투는 일부러 태연한 척 하려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윤은 코스모폴리탄을 내려놓고서 굳이 한 마디를 덧붙여놓았다.


 “저기... 이율 씨는 정말로 그랬던 건 아니죠?”


 “그런 거라니?”


 잔을 입술로 가져가다 멈추고 쳐다보자, 윤은 내 눈을 확인하더니 웃으며 물러났다.


 “하하,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 여쭤봤어요.”


 그러고는 걸음걸이의 모양새를 유지하면서 선반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윤의 뒷모습을 보면서 글래스를 입가로 가져갔고 조용히 생각했다. 그는 나이에 비해 실력 좋은 바텐더이기는 했지만 역시 ‘신사’에게 그랬던 것처럼 모든 걸 터놓을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사장의 말이 맞았다. 윤은 나와 그녀의 사이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의 오랜 친구. 베일의 쌓여있는 <블랙 벨벳>의 여사장에 대해서, 유흥업소에서 ‘율이’라는 이름을 썼던 여자에 대해서, 그리고 지금 내가 사랑하게 된 여자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또 다른 얘기니까. 다만 이제 그녀는 성공했고, 유수의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 가게 외에도 다른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가 한 때 몸을 팔았던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유흥업소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를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둘 다 정말 그 일을 원하던 것은 아니었고,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몸을 파는 사람들의 사정은 제각각이다. 그 남자는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사실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떤 여자들은, 쉬운 마음으로 그냥 편한 것이 좋아서 시작하기도 한다. 아마 Y가 처음에 그랬을 텐데, 정말 효율적으로 학비를 벌기 위해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생존이 걸려있을 정도로 필사적인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돈을 벌어놓고서는 막상 명품을 위해 돈을 쓸 수도 다른 성형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다. 우리의 경우는 이를 물었다.


 유흥 일을 하면서 그러는 것 역시 d씨가 말한 것처럼 평범한 일이 아니었고, 쉬운 일도 아니었다. 다만 때로는 그러는 여자도 있었고 우리는 그렇게 했을 뿐이다.



 들은 얘기를 돌이켜 보건대 d씨는 그 자리에서 결국 Y에게 뒷사정조차 물어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남자가 아닌 나는 잘 모르지만 여자를 사는 남자들이 빠져들기 쉬운 착각은 성매매를 한다고 모두가 ‘그런 여자’라고 생각하는 부분인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그들 중에 ‘그런 여자’는 별로 없었다. d씨가 자신의 약혼녀를 정말로 사랑했다면, 먼저 그녀에게 사정을 물어봤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자존심을 챙기기보다도 먼저 그녀를 위로해야 했을 것이다. 물론 그건 Y에게 과분한 대우가 맞다. 하지만 사랑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남녀간의 사랑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d씨를 나쁜 사람으로 기억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가 바에 다시 온다면, 그리고 마음이 내킨다면, 후에 일어난 일들을 가만히 들어줄 생각도 있다. 왜냐하면 나도, 그리고 아마 <블랙 벨벳>의 여사장도 가끔은 그 시절의 일들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를 만지면서도 가끔은 돈을 주고 그녀를 더듬은 수많은 늙고 젊은 남자들에 대해서 생각하고는 한다. 그녀의 몸에 들어가고 고무를 쓴 채 사정했을 남자들에 대해서. 그건 바꿀 수 없는 사실이다. 휴일 아침 눈을 찌르며 쏟아지는 빛처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로가 서로를 원한다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커튼을 덮고 자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서툰 햇살 때문에 정말 소중한 감정의 색이 바래지지 않도록. 너무 사나운 감정에 삼켜지지 않도록. 커튼 아래서 서로의 몸을 껴안고 잠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내가 그가 말한 ‘이런 세상’에서 찾아낸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내 생각에 아무래도 d씨는 좀 더 세상에 대한 감각을 깨우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세상은 이미, 혹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끝



 

소설 속에 나오는 <And I love her>


브래드 멜다우 실제로 틀어주는 술집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