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 정리하다가 찾아서 올려봄.. 이 때도 이젠 한참 지났구만)




 친구에 대해서


 1



 나에게 친구라고 하면 보통 고등학교 동창들이다. 대학에서도 좋은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들에게는 친근함을 느끼기 어려웠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건 내 사회적 스킬이 미숙한 까닭이고, 더 들어가면 내 낮은 자존감 때문인 게 크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다. 아마 다른 글에서 정리해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글에서 말하려는 친구들도 고등학생 때 친해진 애들이다.



 나는 학창시절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사실 그건 집으로부터의 압박 때문이었고, 내 학교생활은 보통 온갖 놀이 거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판타지, 무협, 라이트 노벨까지 소설이라면 가리지 않고 읽었고 또 기회가 날 때마다 유희왕 tcg와 소형 콘솔 게임들을 즐겼다. 한편으로는 음악도 꾸준히 즐겼는데 그 때 그 음반들은 늘 귀에 담고 다니는 공기와 비슷했다. 나는 전형적인 ‘인싸 문화’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놀이 거리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학교 전체를 돌아다니며 놀았고 반이 다른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친구들과의 교집합이었는데, 그 교집합은 그룹마다 달랐다. 그 중에서도 이 글에서 말하려는 친구A, B와 내 교집합은 음악과 그림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A와의 교집합이었지만, A와 친해지면 자연스레 B와도 안면을 트게 되어 있었다. 그런 시스템이었다.


 학창 시절 A와 B는 독특한 콤비였는데 겉으로 보기엔 전혀 다른데도 그랬다.


 우선 B는 성격도 저돌적이고 체력도 좋았다. 반 대항 경기 때는 용병으로 초빙될 정도였는데, 어째서인지 교실 주류엔 관심이 없고 판타지 소설을 읽었다.


 A는 여자만큼 선이 가늘었다. B는 A와 붙어 다니면서 요상한 억지를 부리며 어깨를 치기도 했는데, ‘시끄러 멍청아!’하고 치면 젓가락처럼 휘청거리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건 설정놀음에 가까웠다. A도 그때부터 만만한 성격은 아니었고, 정말 시비가 붙으면 제대로 주먹을 쥘 줄을 알았다. 다만 B와는 중학교 때부터 약간 기믹 같은 관계였다.


 A와 B는 늘 함께 다니며 기행을 저지르곤 했다. 예를 들어 점심시간에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갑자기 내기를 해서 지는 사람이 음료수에 밥을 말아먹기도 했다. 둘은 며칠에 걸쳐서 번갈아 식혜며 스포츠 음료에 밥을 말아 먹었다. (여담이지만 최악은 파워에이드가 아니라 커피였는데, A는 그걸 끝까지 먹고 안색이 하얘지더니 결국 게워내고 말았다.)


 그런 일들은 꽤 많았는데, 나는 차마 참전하진 않았지만 보통 앞자리에서 즐겁게 관전하곤 했다. 그리고 함께 갖은 헛소리를 하며 낄낄거렸다.



 나는 A와 B, 그리고 다른 몇 사람과 자주 노래방에 갔다. 보통 토요일 오전이었다. 그런데 노래방이면 아주 평범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도 결코 평범하지는 않았다. 우선 과정부터 그랬다.


 그 시절엔 코인 노래방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학교에서 좀 떨어진 좀 낡은 노래방에 갔다. 오전에는 손님이 없는 노래방은 셔터를 닫아놓았고, 우리는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주 그래서 A의 휴대폰에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그러면 주인아저씨는 근처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다말고 와서 문을 열어주곤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다음이 이상한데, 주인은 시간을 무한으로 채워 놓고는 다시 운동을 하러 돌아갔다. 그리고 떠나면서 문을 밖에서 잠그고 셔터를 내렸다. 그러면 우리는 네 시간에서 다섯 시간 정도 나가려고 해도 나갈 수 없었다. 아마 안에서는 잠글 수 없는 구조였던 모양이다.


 이상한 감금 같은 신세였는데도 우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우리는 그냥 계속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도 주로 메탈이나 코어 장르의 곡을 불렀다. (가수는 다양했지만 공통점은 보통 음과 가사가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쉴 때는 잠깐 발라드를 부르다가 다시 메탈로 돌아갔다. 그럴 때는 어쩐지 솟아나는 오기와 함께 ‘싸운다’는 감각까지 있었는데, 즉 아저씨가 돌아와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할 때까지 불러보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온갖 노래들을 거의 원시 부족처럼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한 번도 승리한 적은 없었다.


 A, B와 나는 사실 수능 전 날에도 함께 노래방에 갔는데 ‘찍는 신을 부르기 위한 의식’을 치른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나는 성적을 평소보다 꽤 못 받아서 마음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 뭐 어쨌든 별로 후회는 없었다. 그 때는 그게 우리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 때로부터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면, 내가 어쩌다 걔들과 이만큼 친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고등학생 시절에도 꽤 친하긴 했지만, 그런 친구는 많았다. 나는 다른 그룹들과도 자주 놀러 다녔고, 다른 이상한 일도 많이 했다. A, B와는 오히려 평범한 사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 이십 대 초중반에 어떤 변화의 계기들이 있었을 텐데 그 부분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거의 A와 붙어 다니고 있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던 걸까? A도 나도 누가 먼저 연락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을 텐데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가끔 느끼지만 내 기억력은 굉장히 편중적이어서 어떤 시기는 정말 까마득하게 잊어버린다. A와 나는 대학도 달랐고 집도 멀었는데도, 아무튼 자주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2



 내가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들 중에 ‘정상’은 없지만 A는 그 중에서도 독특하다. 온갖 부분에 대해 광범위한 지식을 갖고 있는데 그 면모를 하나하나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냥 나열해서 설명해서 적어보자면


 기본은 베이시스트로 여러 밴드를 거쳐 지금은 광고 음악계통에서 프리랜서로 일한다.

 잠깐 바텐더로 일한 적이 있고 양조를 하는 친척이 있어 술에 대해 전문적이다.

 일러스트를 그린다. 레진 코믹스에서 일하는 만화가들과 친분이 있다.

 대학에서는 철학과 미학 공부를 한다.

 겉모습은 자주 바뀌지만, 혀와 입술에 피어싱을 하고 머리를 길러 묶고 다닌다.

 주로 검은 박스티나 치렁치렁한 약간 펑크한 검은색 옷을 입고 다닌다.


 인데, 사실 친구들은 무감각하지만 꽤 이상하고 특이해 보이는 것 같다.

 언젠가 일이 있어 내가 다니는 대학에 불렀을 때가 기억난다. 나는 생각 없이 같이 돌아다녔는데, 대학 동기가 그걸 보고 말을 못 붙였다고 했다. A가 목에 걸고 있던 징 박힌 목걸이 때문이라는데, 나는 그게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던 기억이 난다. (내 감각도 꽤 기울어진 셈이다.)


 아무튼 이십 대 초중반에 A는 나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줬다. 대표적으로 나는 고등학생 때만해도 ‘술은 평생 마시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A때문에 갖은 칵테일을 마시고 또 집에 진이나 럼주도 가끔 들여놓게 되었다. 그리고 인지하진 못했지만 옷에 대해서도 꽤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검은 옷을 즐겨 입는 건 물론 내 취향에 맞았기 때문이지만, 남포동을 돌아다니면서 옷을 사는 버릇은 A 때문에 들인 게 맞는 것 같다. 그런 식으로 나는 A에게 소소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A와 내가 친구로서 주고받은 ‘진짜’ 영향은 다르고 좀 더 복잡한 면모들이다. 인격적인 성장이라고 해야 할지, 사고방식이라고 해야 할지. 그런 부분은 아주 개인적이고 복잡해서 말로 설명하기가 힘들다. 스스로도 명확히 정리하기 어려운데 아마 A도 그럴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사실 그런 부분에 대해 적고 싶어서였지만 쉽지가 않다. 그래도 B에 대해 언급한 후에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B는 시간을 거쳐 직업 부사관에 지원하게 되었다. 사실 취미에 있어서라면 B는 평범하다. 그는 lol을 하고 여러 블리자드 게임을 한다. 하지만 B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리고 담배도 피지 않고, 여자도 만들지 않아서 그런 면에서 특이하다. 실제로 주변의 간부들은 ‘무슨 낙으로 사냐’고 자주 물어보는 모양이었다.


 B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휴가를 나오는데, 나오면 늘 A와 나를 비롯한 고등학교 동창들과 만난다. 거기에 특별한 일은 없다. 우리는 같이 밥을 먹고, 노래방에 가고, PC방에 간다. 보드 게임을 하러 가거나, 보드 게임을 사서 C의 집으로 가기도 한다. 거기서 우리는 여러 게임 OST나 재즈 음반을 틀어놓고 시간을 보낸다. (자세히 설명하기 힘들지만 C의 집은 어지간한 호텔보다 아늑하다. 집이 좋은 건 아니다. 하지만 C의 성격을 비롯한 여러 가지 특징들이 C의 집을 내 집 이상으로 편하게 만든다.) 그런 후에 B는 부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특별한 점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모임을 거의 매 달, 5년이 넘는 시간을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꽤 즐겁다. 다만 B는 창작과도 거리가 멀고, 음악을 즐기지도 않는다. ‘교집합’이 부족한 셈이다. 하지만 나는 B에게 A에게서 만큼이나 동질감을 느껴왔고, 늘 어딘가 배우는 점도 있었다. 차차 알게 되었지만 그건 B가 가진 가정사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점은 A에게서도 그렇다.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사실 거기에 있었다.




 3



 지난주 화요일에 B의 아버지 장례식이 있었다. 이전에 전혀 기색을 내비치지 않던 일이었다.


 C가 평소처럼 ‘그러고 보니 이번 달 휴가는 언제 나오는지’를 단톡방에서 물었는데, B는 읽고서도 대답이 없었다. 물론 그건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사실 남자들은 서로의 톡을 자주 씹는다.


 그러나 다음 날 갑자기 B가 부고와, 장례식 일정을 공지해왔다. 그리고 ‘시간 나는 사람은 온나’라고 말했다. 나는 그걸 뒤늦게 봤고 잠시 후에 ‘정신없었겠네. 가면 연락할게ㅇㅇ’라고 적었다. 이상한가? 확실히 그게 친구 아버지의 부고에 대한 대답이라면 이상하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B의 아버지의 죽음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으니까. B에게도 다른 ‘아버지의 죽음’과는 달랐다.


 B씨는 B가 중학교 때 병으로 쓰러져 그대로 뇌사상태에 빠져 있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B의 어머니는 갑자기 가정을 책임져야 했다. B는 운동선수를 지향하던 목표를 잃어버렸다. 가정 사정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심리적인 면이 컸을 것이다. 언젠가 B는 내게 그 시절 느꼈던 무력감을 내비친 적이 있다. 아무리 건강해도 한순간에 그렇게 될 수 있고, 가정에 짐을 드리우게 될 수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 그걸 내가 이해하고 있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B가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느낄 심정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최소한 ‘화목하고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보다는 훨씬 더. 그 점은 확실하다.


 B씨의 죽음은 예정된 것이었고, 그의 장례는 슬픔 뿐 아니라 여러 복합적인 면을 수반하는 의식이었다. 나는 그 점을 명확히 표현할 단어를 모른다. 다만 나는 그게 일반적인 아버지의 죽음과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고 어느 수준은 공감할 수 있다. 나의 아버지는, 다르지만, 어느 시점부터 죽기 위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장례식장에 찾아갔다. 형식적인 절차들을 마치고 우리는 B와 얘기를 했다. 그냥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어봤다. B씨의 죽음에 대한 일은 아니었다. 사정은 이미 알고 있었고, 또 우리는 B씨를 모르니 그의 죽음에 대해 알 이유는 없었다. 다만 B가 언제 부산에 내려왔는지를 물었다.


 B는 초소 근무를 끝내고 밤을 샌 상태에서 부고를 듣고, 운전해 오는 동안 졸아서 위험했다는 일(입관 일정 때문에 B는 중간에 잠을 잘 수 없었다)을 말했다. 나는 B가 C의 메시지를 씹는 걸 보고,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다는 말을 말했다. 그리고 나는 장례 절차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D의 말이 아니었다면 장례식이 끝난 후에 올 뻔 했다는 점을 말했다. B는 내 대답에서 약간 그런 게 아닐까라고 짐작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평범한 헛소리를 했다. 그건 고등학교 시절부터 계속해오는, 내 생각엔 일종의 ‘집단적 독백’인데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주절거리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세종대왕이 태어난 연도와, 내가 군대에서 논어를 읽었던 일과, 일개 병사가 연대장과 주임원사와 함께 걸을 때 걷기에 적당한 위치와, 소크라테스가 태어난 연도와, 얼마 전에 내가 하스스톤을 끊기 위해 계정을 정리할 때 지진이 일어났던 일에 대해 얘기했다. D는 갑자기 입맛이 땡긴다며 수육 접시를 몇 번이나 비웠다. B는 상주였기 때문에 이런저런 사람들을 찾아다니느라 바빴지만 틈틈이 와서 앉았고, 우리가 하는 얘기를 듣고 어이없어 하며 웃었다.


 C와 D가 떠난 후에는 나는 A와 함께 아버지와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11월 중순부터 내 아버지에 대한 단편을 쓰려던 중이었고, 그걸 위해 참고하던 책이 피터 한트케의 <소망 없는 불행>이었다. 자신의 어머니의 자살에 대해 쓴 연대기 같은 수필이었다. 나는 그러던 와중에 B씨가 죽은 걸 들어서 복잡한 기분이라는 점을 말했다. 친구의 장례식에서 얘기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화제인가? 그러나 그렇지는 않았다.


 A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에 망나니 같은 인물이었다. A는 고등학생 때 그의 멱살을 잡아야 했다. 다행히 주먹다짐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A씨는 극도로 무능했기 때문에 A는 그때부터 자신의 학비를 벌어야 했다. A는 주로 게임 머니를 팔아서 돈을 벌었고, 조금은 불법적인 일에 손을 대기도 했다. 당시에는 나도 B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그런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나는 언젠가 “나는 아버지가 죽어도 도저히 울 것 같지는 않다”라고 누군가에게 얘기한 적이 있는데, “에이, 말은 그래도 진짜로 그렇지는 않다”는 대답을 들은 적이 있었다. 다행히 A에게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언젠가 그 얘기를 A에게 했을 때 우리는 함께 헛웃음을 흘렸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맥락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장례절차에 무지하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에겐 그런 걸 알려줄 친지도 없기 때문에 조금은 걱정된다는 얘기를 말했다. 내 아버지는 B씨처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A는 자신은 그럴 걱정이 없다고 말했다. A는 자신의 어머니와 얘기해서 ‘입장 정리’를 끝냈다고 말했다. 자신은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그래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의무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내 생각에 장례식의 의의는 두 가지인데 1번은 고인의 죽음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기 위한 것이고, 2번은 고인이 아닌 다른 친지와 지인에 대한 의무 때문이었다. 나는 조금 애매하지만 그래도 2번 때문에 장례는 치러야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A는 그건 형이 있다고 말했다. “뭐, 알아서 하겠지.” 아, 나는 납득을 했다. 나에게는 여동생밖에 없으니까. 우리는 그런 얘기를 하면서 술을 마셨다.



 B가 돌아와서 우리는 좀 더 이야기를 나눴다. B도 나만큼은 아니지만 A의 가정사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조금 더 했고, 그 후에 나는 짧게 B에게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이야기 했다.


 물론 B씨는 사고가 있기 전에 성실한 사람이었고, A와 나의 아버지와는 달랐다. 모르지만 B씨는 강인한 가장이었을 것이다. 그런 거리는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B와 함께 자라면서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있었고, 또 철학을 통해 갖게 된 시선도 있었다. 나는 그런 점들을 잘 녹여서 얘기했다. B는 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또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위로의 방식이기도 했다. 슬픈 일은 다각적으로 볼 수 있을 때 좀 더 잘 소화할 수 있다. 그건 내가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B는 나와 함께 벽에 등을 기대고서 내가 하는 말을 들었다.


 B는 어머니가 조금 우셨고, 자신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관을 묻을 때는 조금 울 것 같다고 말했다. A는 조금 취할 때까지 마셨는데, 우리는 B의 친지들을 제외하고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나갈 때 B의 어머니는 웃으면서 ‘우리 B가 군인이라 이럴 때 있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나는 A를 데리고 그냥 ‘우리는 고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냈고, 어차피 평생 볼 사이’라고 말씀드렸다. 그건 사실이기도 했고, 한편으론 내 생각엔 그 말이 B의 친구로서 건넬 수 있는 한도 내의 위안이라고 생각했다. 그 분은 미망인이라기보다는, 아이 세 명을 혼자 책임져야 했던 가장이었으니까.


 B와 짧게 얘기하고, 우리는 장례식장을 떠났다.




 4



 B의 이번 휴가는 아주 길었고, 우리는 그저께 다른 친구들과 만나서 평소처럼 놀았다.


 우리는 C의 집에 가서 스팀 게임을 하고, 폰 게임을 한 후에, 나와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그 후에는 보드게임을 했다. 그리고 PC방에 가서 나와 C가 지독하게 못하는 lol을 했고(1승도 거두지 못했고), 그 후엔 연중행사처럼 벌이는 겟엠프드 내전을 했다.


 우리는 이른 오후에 만나 새벽 세시까지 놀았다. 언제나처럼 술은 마시지 않았고 딱히 특별한 대화는 하지 않았다. 다만 B는 나와 A의 행색이 친지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고 말해줬다. 이른바 ‘성별 논란’이었다.


 사실 나도 A도 머리를 길러 묶고 있는데, 우리가 떠나자 B의 어르신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있었다고 한다. “쟤들은 여자니, 남자니?” 식장에서 꽤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다고 말했다. 말을 들으니 꽤 적당한 술자리 가십이었던 것 같다.


 머리를 기르면 종종 겪는 일인데, 어르신들은 보통 머리 길이로 성별을 구분하는 듯하다. 그래서 공중 화장실 등등에 가면 가끔 당황하시는 분들이 있다. 서둘러 표지판을 점검하신다거나, 옆으로 다가와서 “여기 남자 화장실인데?” 라고 말하는 식이다. 그럴 때면 나는 웃으며, 일부러 발성을 깔면서 “하하, 남자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뭐, 익숙한 일이다.


 A는 사실 겉모습치고는 약간 소심해서, 장례식장에선 내내 자신의 행색을 신경쓰던 느낌이 있었다. 피어싱에 까맣고 치렁치렁한 옷을 입었으니 보통 장례식에 맞는 모습은 아니었다. 내 생각엔 정장이 없어서 그냥 평소대로-비교적 얌전하게- 하고 온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건 쓸데없는 걱정이 맞았다. B와 어머니의 성격을 미루어볼 때, 친지들도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조금 취하신 것 같던 어르신이 우리를 가끔 힐끔거리던 이유를 뒤늦게 알았다.) 사실 장례식장에서 친지 분들이 대화 나누는 모습도 꽤 호탕해 보였다. B는 자기가 ‘아무리 남자라고 주장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함께 놀고 난 후에 B와 나는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 B의 복귀는 아직 꽤 남아서 ‘심심하면 연락하라’고 말했다. 달라진 일은 없었다. 앞으로도 계속 될 것처럼 느껴지는 일상이었다.



 물론 나는 그것도 조금씩 변화하리라는 걸 안다. 우리들의 생활이 조금씩 바뀌니까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A는 얼마 전에 거래선이 있던 독일의 음악 회사에서, 지원해 보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냈다. 지원자가 많아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잘 된다면 독일로 떠날 것이다. 간다면 짧아도 3년 정도 거기서 지내게 될 거라고 A는 말했다. 가끔 A에게 술 얻어먹는 게 일이었던 나는 ‘가면 매달 통장으로 내 유흥비’를 입금하라고 말했지만, 나도 잘 되었으면 좋겠다. 유럽에 가서 악기 들고 거지 노릇을 하는 건, 우리가 고등학생 때 농담처럼 얘기하던 말이기도 했고. 그러나 어쨌든 A가 떠난다면 우리들의 모임도 꽤 변화하는 셈이다.


 또 나 역시 내년에는 여러 가지 일을 계획하고 있고, 아무리 늦어도 내후년이면 일정이 잡혀있는 일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B가 휴가를 나올 때마다 만날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그리고 내 짐작인데, B가 우리 중에는 가장 먼저 결혼을 할 거라는 느낌이 든다. 분명 이번처럼 갑자기 단톡방에 갑자기 결혼식 일정을 공지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또 많은 일들이 변화할 테고, 어쨌든 이런 모임도 가까운 시기에 끝나리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우리는 친구다. 내게는 인간관계에 대한 강박도 많고, 인맥은 굉장히 협소하고, 약간 이상한 부분도 있지만, 적어도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은 보편보다 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내게 친구란 ‘내가 존경할 수’ 있어야 하고 ‘서로에 대해서 스스로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부분’이 있는 사람들이다. 내게는 그런 친구들이 있다. 그런 친구들에게 나는 못할 말이 없다. 나는 A와 B가 나에 대해서, 나는 모르지만, 더 많이 알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한다. 그래서 그들을 신뢰한다. 나는 그렇게 ‘평생 볼 관계’인 사람들이 조금 더 있다. 나는 그들을 ‘친구’라고 부른다.


 사실 나는 오랫동안 그렇게 부를 수 없는 사람이라면 내 에너지를 쏟는 걸 아깝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건 강박이 맞다. 하지만 이제 와 보면 그런 꽉 막힌 태도가 우리들을 가깝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렇다면 이제는 나도 달라졌으니, 누군가와 그들만큼 친해질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뭐, 그렇더라도 별로 상관은 없다.


 나에게는 ‘친구’가 있다. 그게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전부였지만 정확히 설명하기 복잡했기 때문에, 이렇게 적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글재주가 없어서 여전히 얼마나 설명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이런 애매한 개념은 보통 소설을 쓰면서 탐구하는데, 친구에 대해서는 그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엔 아마 그냥 이대로도 충분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언젠가 나는 분명히 한 번은 ‘친구’에 대한 소설을 쓸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내 마음에도 흡족하고, 내 친구들도 재밌게 읽을 만한 소설이 될 것 같다.


 그냥 그런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