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벨 소리가 들린다. 언제나처럼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작업중 하나 - 잠자리에서 일어나기를 시전해야 할 시간이다. 이불을 제끼고 자세를 바로하고 앉아 본다.
 어으으... 머리야.  세상 모르고 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픈지 모르겠다. 나는 이마에 손을 얹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어 보았다. 마치 두개골 안에 무언가가 출렁출렁 움직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제 술마시고 잤나?

 

 아닌데. 술은 안 마셨는데.

 

 마셨나?

 

 ...어제 나 뭐했지?

 

 분명히 저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물론 그 때는 충격에 의해서 이런 일은 다 잊어야 된다는 방어본능 때문에 잠깐 잊어 버렸던 거고, 오늘은 아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치 책 중간의 페이지가 통째로 뜯겨 나간 것 처럼.
 나는 침대 아래에서 각 잡고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는 리돌에게 물어 보았다.

 

 "리돌아. 어제 나 늦게 들어왔냐?"

 

 리돌은 갑자기 화들짝 놀란 듯 나를 쳐다보더니, 당황한 듯이 대답하였다. 여기서 당황이라는 말은 물론 이 녀석의 말투로는 알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다. 말투 자체야 여전히 번역기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지만, 갑자기 나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시선이나,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 등으로 추측한 내 예상이다.

 

 "아닙니다."

 

  ...거 참 이상하네. 생각해 보면 여러가지가 이상하다. 이 녀석이 나보다 일찍 일어나서 앉아 있는 것도 이상하고, 보통 하나를 정해 두면 계속 보는 이 녀석이 안절부절 못하면서 채널을 계속 돌리는 것도 이상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방금 보여준 표정이 가장 수상하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아닙니다. 아닙니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하였다. 고개까지 세차게 저어 가면서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분명히 뭔가 있다. 혹시 집 천장에 또 어떤 마개조를 해 놓은건가?

 

 "너 또 천장에 뭐 들여 놨냐?"

 

 리돌의 고개가 도리도리 도리질을 친다. bpm 80으로.

 

 "아닙니다."

 

 "오늘은 그냥 아닙니다 날이로구만."

 

 "아닙니다."

 

 ...답답하기는 한데, 물증이 없다. 분명히 이 녀석이 나한테 거리낄만한 무언가를 저지른 것은 맞는데, 그 무언가를 증명해 주는 단서는 어젯밤의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젯밤의 기억이 없기 때문에, 나는 내가, 혹은 이 녀석이 무엇을 했는지 알 길이 없다. 엄청난 딜레마다.

 나는 일단 내 신변을 파악할 수 있는, 최고 유력 용의자를 회유해 보기로 하였다.

 

 "그러지 말고 말해봐. 뭐 잘못한 거 있어도 화 안 낼게."

 

 "아닙니다."

 

 "너무 그러지 말고. 그렇게 거짓말 계속 하면 경찰아저씨가 이놈 하고 잡아간다."

 

 초등학생한테나 쓰일 만한 수법이지만, 왠지 이 녀석한테는 통할 것 같았다. 물론 리돌을 신고하거나 어딘가에 맡기겠다는 생각은 저 멀리 떠난지 오래지만.

 

 "경찰에게 잡히면 묵비권을 행사하고 변호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동네 미란다 원칙이냐, 그건?

 

 "...그거 누가 알려줬어? 또 캐롤라인이냐?"

 

 "그렇습니다."

 

 오늘의 첫 번째 긍정.

 

 "그 아줌마는 왜 이렇게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계속 해대는지 몰라. 어쨌든 그럼, 너는 진짜 어제 아무것도 안 한 거지?"

 

 "아닙니다, 맞습니다."

 

 "둘 중에 하나만 해라."

 

 "맞습니다."

 

 "그래."

 

 ...뭔가 계속 의심가는 말을 할 때마다 몸을 부들부들 떠는게 이상하긴 하지만, 본인이 저렇게까지 아니라고 하는데 더 물어보기도 그렇다. 무엇보다, 만약에 진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녀석이 말하는 번역기에서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가 너무나도 까다롭다는 것은, 근 1주간의 생활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만국공용으로 쓰이는 언어 - 눈빛으로 제압해 보기로 하였다. 진실을 요구하는, 강렬한 눈빛을 그녀의 눈동자에 주입하였다. 리돌의 시선처리는 더욱 더 불안해지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다. 누군가 말했다.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라고. 말이 많아지면, 그만큼 자신에게 불리한 부분도 노출된다 정도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굳이 침묵하더라도 무언가를 숨기는 데는 너무나도 취약한 것이 아닌가 싶다. 진짜 거짓말 못 하는구먼.
 그리고,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물건이 하나 더 있었다. 

 

 "이건 뭔데?"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리돌 옆에 놓여있던 식탁 위에 있는 하얀 봉투를 집어 들었다. 리돌은 깜짝 놀란 듯이 내 손에서 봉투를 뺏어들려 일어나다, 침대틀에 무릎이 걸려 그대로 매트리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이제는 슬랩스틱까지 섭렵한 건가.

 

 "안됩니다."

 

 아닙니다의 바리에이션이냐. 리돌은 방금 전의 충격 때문인지, 일어나지는 못하고 앉은 자리에서 어떻게든 봉투를 뺏어 보려고 손을 버둥거리고 있다. 퍽이나 갖고 갈 수 있겠다. 저렇게 다급해 보이는데도, 여전히 침착한 번역기의 목소리와 함께. 그런 그녀를 한심하게 한 번 쳐다 보고서는, 나는 봉투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 곳에는 약 30만원가량의 돈이 들어 있었다.

 뭐, 다시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이 녀석이 지금 무슨 경제적인 여건이 되어 어디에서 출처 불분명한 돈을 벌어 왔을 리는 없다. 내가 기억이 없는 사이에 어제 몇 년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이 내일 결혼한다고 느닷없이 이야기하여 내가 축의금을 여기있다 하고 준비해 둔 것도 아닐 것이다.

 

 "어제 캐롤라인 왔다 갔었어?"

 

 마치 괴수 영화에서 급작스러운 등장신에 인간들이 입만 벌린 채 하염없이 멈춰 서 있듯이, 그녀는 입만큼이나 커다랗게 눈동자를 치켜뜨고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 보고 있다. 그렇게 쳐다보기를 대략 10초.

 

 "묵비권."

 

 야, 그게 모든 걸 해결하는 마법의 단어가 아니야. 하지만 많은 정보를 유추해 낼 수는 있지.
 이 녀석이 지금 어제까지는 쓰지도 않았던 단어를 이렇게 남발하고 있다는 것은, 이 말 자체가 배운 지가 얼마 되지 않은 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어제 우리 집에 왔다 갔고,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이 있다는 말인데.

 

 더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분명히 그 아줌마다. 그 아줌마는 어제 분명 우리집에 온 것이다.

 

 전에 얘기했었다. 리돌을 맡아 주면 따로 생활비를 지급한다고. 그 때는 왜인지 봉투를 회수해 갔었는데, 지금에서야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 집에 어제 온 게 틀림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리돌이 보여준, 무언가를 숨기려 하는 행동들과 그 아줌마의 성격으로 보았을 때, 지금 내 기억이 없는 것은 이 둘의 나한테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더라도,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는 확실하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나는 다시 리돌을 쳐다 보았다.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오른쪽 무릎을 주무르며 간신히 일어서 있는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나를 쳐다 보고 있다. 나는 일단 양치기 달나라 소녀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나쁘다는 것을 인식시키기로 했다.

 

 "이 녀석. 누가 거짓말 하래. 누가."

 

 손가락으로 리돌의 이마를 밀면서 채근을 시작했다. 어렸을 적 우리 부모님이 나를 닦달할 때, 머리속에 대체 뭐가 들었냐는 제스처를 이렇게 취했던 기억이 있다. 그녀는 버둥거리며 내 손길을 피하려 하였지만, 이 좁은 집 안에서 피할 곳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결국 아까 걸려 넘어졌던 침대에 다시 주저앉았고, 갈 곳 없이 나의 손가락질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그만 두십시오."

 

 계속되는 손가락 연타에, 그녀는 무미건조한 거부의 뜻과 함께 앙탈을 부리듯 양 팔로 나를 밀쳐 내려 힘겹게 저항해 보고 있었다. 아무리 지금까지 초능력을 보여 준 달나라 사람이라도 여자애는 여자애인 모양인지, 도구를 빌리지 않은 상태에서는 육체적인 능력이 그렇게 좋지는 않은 것 같다. 그 결과 나는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그녀의 이마를 유린할 수 있었다. 미간을 손가락으로 밀자, 눈썹 사이가 말려올라가며 ㅅ자 모양이 되었다. 리돌은 본의아니게 나를 띠껍게 쳐다 보고 있다. 내가 만들어 놓은 표정이지만 내가 기분 나쁘네.

 

 "임마, 지구, 아니지. 그렇게 크게 나갈 필요는 없고, 최소한 이 집 안에서 나한테는 거짓말 하면 안 돼. 알았어? 다른 곳에서야 너도 네 입장이 있으니까, 달나라 사람이라는 걸 숨기려면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겠지. 하지만 나는 다 알잖아. 너도 다 보여 줬잖아. 그런데 지금 너가 이렇게 거짓말로 날 속이고 하면, 내가 널 데리고 있을 수가 없어져. 사람을 못 믿는데 어떻게 같이 살 수가 있겠냐."

 

 나도 말을 하면서 내가 지금 이 녀석에게 어떤 부분에서 화가 났는지 정리가 되고 있다.  선배가 말했던 이야기에서 중요한 골자는 사실 다른 곳에 있었던 것 같다. 바로 동거의 기초는 신뢰에서 부터 시작한다는 것. 세월로 쌓은 우정이나, 애정으로 다져둔 사랑 모두 서로간을 믿기에 시작하는 단계인 것이다. 같이 산다는 것은 이러한 전제 조건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 본지 갓 일주일 넘긴 이 녀석에게 어떤 정신적인 교감이나 신뢰를 바로 요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만약에 진짜로 같이 살 생각이라면, 최소한 그러한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에 대한 노력은 다 같이 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나도 처음에야 반 협박으로 이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기에, 그녀와 계약서를 체결하려 하였지만, 며칠 간을 지내고 보니 그닥 쓸모 없는 일이라 생각이 된다. 국가와 국가간의 협정도 아니고, 사람 대 사람의 일인데, 단순히 신뢰만 있으면 되는 부분 아니겠는가.

 리돌은 어느 샌가 기분 나쁜 표정을 거두고, 나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나 역시 손가락질을 그만 두고서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쉽게 다시 말하자면, 같이 사는 입장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믿어야 되는 거야. 나도 이제부터는 너에 관련될 것 같은 일들에 대해서는 빼놓지 않고 모두 말해 줄 테니까, 너도 그래 줬으면 좋겠어. 알았지?"

 

 갑자기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심하게 떨리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리돌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나에게 안겨들었다. 뭐, 뭐야? 너무나도 갑자기 당한 포옹에, 나는 제대로 뿌리치지도 못한 채 얼떨떨한 표정으로 양 팔을 들고 가만히 서 있을 수 밖에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