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열하던 태양이 흔적을 남긴 여름 밤.

 시원한 맥주가 당기는 때다. 지유는 캔 맥주를 따서 마시고 있었다.

 바람이 부는 옥상에 걸터앉아,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 치이익거리는 소리가 청량했다. 후끈하고도 불쾌했던 열기가 가셨다. 무성한 나뭇잎들은 여름 바람에 흔들렸다. 부는 바람은 후덥지근하지 않았다.

 지유는 그대로 옥상에 누웠다. 어두운 하늘의 아래. 단조롭게 검은색만은 아니었다. 짙은 보라색이 깔리고 그 위에 어두운 남색이 깔렸다. 지평선 가까이 갈 수록 짙어진다. 예쁘냐고 물으면 솔직한 마음은 예쁘다 다. 그 위에 뜬 달은 유자의 진한 노란색이었다. 유자 맥주의 유자향이 은은히 퍼졌다.

 옥상 문이 열렸다. 지유는 계단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현이다.


"왔어?"

"어."


 도현은 지유의 옆에 앉았다. 손에 든 것은 마찬가지로 시원한 맥주. 그리고 그것들을 담은 얼음통이다.


"시원한 거로 가져왔어."

"좋은 거로 잘 가져왔네."


 지유는 도현이 건넨 맥주를 받아들었다. 적당히 시원하다를 넘어서 차갑다. 여름에는 딱 알맞는 정도였다.


"치킨도 한 15분만 있으면 올거야. 여름에도 치맥은 못 포기해. 조금 덥고 말지."

"뭐, 그건 그래. 맥주는 치킨이랑 먹어야 맛있지. 치킨은 어떤 거 시켰어? 후라이드에 양념 반반?"

"응응. 거기에 무 많이로."

"그러면 조금 있다가 내려가서 결재하면 되려나?"

"그럴 필요는 없어. 계좌 이체로 미리 결제해놨거든. 내가 먹자고 했는 데 내가 사야지."


 지유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손에 든 캔 맥주가 찰랑거리면서 시원한 소리가 났다. 차가운 맥주를손에 쥔 채로 한가롭게 치킨을 기다리고 있다.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 밤이래도 좋았다. 늘 그렇듯 도현이 옆에 있다는 전제조건 하의 일이다. 떨어진다는 건 아직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아직은 조금 대학의 새내기다웠다.


"해도 늦게 지고, 여름은 여름이네. 조금 신기한 건 덥긴 더워도 그거 때문에 안 좋은 것만 떠오르는 게 아니더라. 솔직히 좋은 일도 많았어, 물놀이도 같이 가보고. 그러고보니 우리 사귀게 되던 날도 여름이었지? 내가 고백 했었잖아."

"그건 그렇지. 어제까지 잘 놀던 애가 갑자기 꽃다발 들고 고백해서 조금 놀라긴 했어. 장미꽃다발 들고 좋아한다고 크게 외쳤었지."

"음, 솔직히 좀 바보처럼 고백하긴 했어. 근데 너도 특이하게 반응했었잖아. 담담하게 그래 사귀자 래. 놀라서 눈 커진 채로 몇번이나 다시 물었는 지 몰라. 그때도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들 놀랐어, 여러모로로."

"정확히 다섯 번이었어. 더 물었던 거는. 나도 너 좋아하니까 받아들였지. 사실은 언제 고백할까 고민 했었거든."


 도현은 캔 맥주를 들고 들이붓듯이 마셨다. 시원한 맥주가 목을 타고 넘어 갔다. 그 옆에서, 지유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때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했다.

 고백했던 날. 지금보다는 조금 어렸을 때. 그러니까, 학창 시절이었다. 하교 때의 시간대. 남아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몇몇을 제외한 나머지는 바쁘게 학교를 나가고 있었다. 몇몇은 둘 보다 많았다. 둘을 제외한 그 몇몇이란 장난기 넘치는 연놈들인데 도와주러 왔다기 보다는 놀리려는 것도 섞여있었다. 아니, 섞여 있다 수준도 아니고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였다.

 그래서 끝나고 나면 싹 다 족쳐버린다 그런 다짐을 하고서 지유는 도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조금 많이 떨렸다. 일평생 최대이자 마지막의 긴장이란 지각 후 담 넘는 것을 학주한테 걸리는 것 뿐이었음에도 그랬다. 그 최대의 긴장이 새롭게 갱신되는 중이었다.

 더운 운동장에서는 흙먼지가 작게 일었다. 그것들 조차도 신경에 거슬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는 말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는 지금 당장 겪고 있었으니까.

 기다리는 곳은 교문과 조금 떨어진 운동장 가장자리였는 데, 학교를 나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쳐야 하는 장소였다. 거기서 기다린 지 몇 분 후에 도현을 만났다.

 분명히, 준비한 말은 많았다. 작게 써도 종이 한 장 정도야 쉽게 채울 정도였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튀어 나온 것은 지극히 단순했다.

 좋아해. 그 한마디가 큰 목소리로 울렸다는 것은 지금도 또렷했다. 정말로, 바보 같게도. 지금이야 쉽게 웃을 수 있지 그 당시에는 머리가 고장난 듯이 버벅 거리고 있었다.


"뭐 생각하는 데 그리 멍을 때리고 있냐?"

"그냥, 옛날 생각이지. 치킨이 올 때까지는 몇분 남았어?"

"한 5분쯤 남았어."

"그러면 조금만 기다리면 되겠네."


 지유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자연스럽게 시야가 높은 곳을 향했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떠 있었다. 그 사이에서 그 때의 꽃다발을 본 것은 착각일 것이다. 나쁘지는 않았다.

 조금은 덥지만, 적당한 정도의 여름. 여름이 시원해진 것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였다. 신기하게도.

 소중한 때야 언제나지만, 떨어지지 않는 이상 그 어느 날이라도 그럴 테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행복한 날은 여름에 있었다.

 손에 든 맥주가 정말로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