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멈은 세 번 죽었다, 그 사람은 자신을 위해 세 번이나 사람을 죽였다.



 할멈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종양이 뇌를 잡아먹는 와중에도 매주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는 걸 까먹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할멈의 독실함에 못미더워 매주 주일이면 할멈을 따라 교회를 나가곤 했다.


이건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이어져 온 이 좁은 집의 숭고하다면 숭고한 의식이었다.


하지만 이 것도 계속 할 수 없었던 것이, 할멈은 교회에 나갈 때 마다 내 어머니이자 할멈의 딸의 이름과 육두문자를 같은 문장에 두고 부르짖었고, 나는 18년 째 되던 날 지겨워져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됐다.


 참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할멈의 간절한 욕설이 그 신에게 닿은 것인지 4년 전, 나와 할멈이 처음 같이 교회를 나간지 19년이 되던 그 해에 내 어머니는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할멈은 그제서야 눈물을 흘렸다, 그것도 아주 목놓아서 하루가 다 가고 일주일이 되도록 울었다. 그 나이에도 굳건히 마귀할멈의 칭호를 지키던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조차 없을 정도로 할멈은 계속해서 울었고, 그 늙은 몸에서 수분이 다 빠져나가 시장판에 널부러진 건조된 생선처럼 야위여져서야 울음을 멈추었다. 공교롭게도 할멈의 울음이 멈춘 날은 토요일이었기에 다음 날 아침 할멈은 교회에 나갈 준비를 했다.


 그 날 일년만에 다시 할멈을 따라갔다. 더이상 할멈은 엄마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욕설을 내뱉지 않았고, 마침내 아주 평범한 교인이 되어 기도를 올렸다. 


 엄마는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제 이익이면 눈이 돌아가 뭐든 하는 그런 악독한 여자였다고 마을사람들은 입을모아 이야기했다. 나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기에 왈가왈부 할 것은 못되지마는, 진짜로 그런 악녀였다면 유전의 무서움에 치를 떨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여튼, 그런 악녀는 내가 두살이 되던 해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날부로 이 좁은 집의 균형은 산산이 조각나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 집은 아주 얇은 그 어머니라는 이름의 기둥이 온갖 재난과 불운을 지탱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무젓가락처럼 별 힘 없던 그 하나의 기둥이 빠진 순간 이 집은 산사태를 직격으로 맞은 집처럼 온갖 불행이 쏟아져들어온 것이었다. 늘 골방에 틀어박혀서 이미 닳아 몇 장을 테이프로 이어붙인 성경책만 보던 할멈은 그때부터 집히는대로 일을 했다. 그럼에도 지방의 24평 집은 세상은 늙은이와 아이에겐 너무 과분하다 생각하기라도 한것인지, 곧 우리는 더 좁은 곳으로 쫓겨났다. 24평 다음은 20평, 다음은 14평, 다음은 9평.


 그리고 할멈은 첫 번째로 사람을 죽였다. 죄악감인지 죄책감인지 실패했다는 수치심인지 이름 모를 감정에 할멈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할멈의 이빨 빠진 식칼이 복부를 관통한 그 사람은 도망갔고, 할멈은 살인죄로 기소되는 일 또한 없었다. 살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실패한 것이지만, 할멈은 눈을 뜨자마자 나를 설득할 필요라도 느낀 것인지, 나에게 다 나를 위한 것이라고 다 너를 위해 한것이었다며 천박한 욕 몇 마디를 섞어 설명했다. 딱히 나를 공격하려는 욕설은 아니였다 할멈에겐 그저 일상적 추임새일 뿐이지만 이번의 특별한 점이라면 그 욕지거리의 끝엔 서글픈 20대의 목소리를 담아 뱉어냈다 뿐이다. 집에 돌아왔을 땐 9평짜리 집의 고무장판에 눌은 피를 닦아야했다. 물티슈론 닦이지 않아 마트에 가 독한 표백제를 사와선 부어 닦았다. 손끝이 조금 아렸지만 계속 박박 닦았다, 날이 새기 전에 이 곳은 살인사건의 현장이 아니라 나와 할멈의 침소가 되어야 했다. 그 날 처음으로 욕을 했다. 할멈이 미웠다. 손가락의 껍질이 벗겨져 맨살이 표백제에 절여질 쯤에야 우리의 집은 깨끗해졌고, 어수선한 가을 하늘 아래 창을 비집고 들어온 찬 바람을 발에 감으며 어렵사리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할멈은 교회를 나갔다. 그 날 나는 아주 열심히 기도를 했다, 할멈이 죽이기 전에 할멈을 죽여달라고, 제발 그냥 편하게 할멈을 그대의 보좌 앞으로 데려가달라고 기도했다. 11월의 일요일 해질녘이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기침에 피가 섞여 나오도록 한 기도가 무색하게 할멈은 그 다음 주 다시 사람을 죽이려 들었다. 다시 식칼이었고, 있는 힘껏 왼 손목을 썰어냈다. 하지만 뇌졸증으로 노쇠해진 70대 노인의 힘은 손목을 잘라 사람을 죽이기엔 턱없이 부족했고 그 사람은 너무나도 멀쩡히 눈을 뜨고 있었다. 정신도 또렷했다. 할멈은 다시 오른 손목에 날을 대었다. 역시나 실패했고 그대로 할멈은 칼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드러누웠다.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하며 흐릿해질 정신을 기다렸지만 야속하게도 할멈은 너무나도 멀쩡히 양쪽 눈꺼풀을 지탱하고 있었다. 집에 온 나는 그의 손목을 지혈했다. 그리고 그는 도망갔다. 할멈도 이 9평 방에서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좁은 방을 가득채운 수치의 냄새에 질려버려 뛰쳐 나가려던 것일지도 모른다. 할멈은 썩은 피부로 흘린 눈물을 덮고 마루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나도 식탁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냥 자도록 냅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더러울 정도로 끈질긴 할멈은 이내 눈을 떴고, 11월은 아직도 흐르고 있었다. 제발 나가 죽어버려라 할멈, 이 말은 더이상 저주와 악담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할멈이 죽길 바랬고, 할멈 또한 그랬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마침내 할멈은 나를 까먹었다. 이젠 할멈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 또한 피곤해지고 싶지 않았기에 할멈이라고 부르기를 그만두었다. 어색한 동거는 3년간 계속되었다. 초연해진 것일까, 할멈은 집에서만 기도를 드렸다. 그분의 옷깃 한번 만져보려 발버둥치던 할멈의 두번의 노력은 거절 당했지만, 할멈은 그래도 기도를 올리고 그분을 찬양했다. 그리고 11월을 두번 더 보내고 맞은 2월에는 매일매일을 기도하며 보냈다. 이미 광인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세 번째 살인이 머지 않은 날이었다.


 4월 11일 아침, 나는 외출을 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할멈의 세번째이자 마지막 살인을 목도했다. 할멈은 베란다의 앞에서 목을 메달고 있었다. 너무나도 고요한 광경에, 낡은 스피커는 할멈이 생전 좋아하던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내 영혼은 늘 편하다.. 주 오셔서 세상 심판하셔도 나의 영혼은 겁 없으리,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편안해..'


 배에 깊은 상처 하나, 너덜너덜한 양 손목을 자랑하듯 내보이는 할멈은 그 노끈에 의지하여 매달려 4월의 따사로운 오후 햇살을 온 피부로 맞고 있었다. 유독 따듯한 날이었고 난 그제서야 할멈의 편안한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죄악을 지은 자를 지옥으로 데려가신다는 주님의 무서운 말씀과는 대조되게 편안하던 할멈의 표정은 나를 두렵게 했다. 무엇일까 그 마귀할멈을 미소짓게 한 광경은.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할멈의 시신 옆에 가만히 앉아 몇시간이고 4월의 선로에 서있었다. 사월의 하루는 누군가에겐 행복할까. 답은 어렵지 않았다. 4월 11일의 할멈은 너무나도 행복했겠지. 할멈의 성경책을 손에 쥐어주었지만 이내 떨어트렸다. 이미 할멈은 성경책이 필요 없었다. 할멈에겐 이 좁은 9평 방은 골고타 언덕이었고, 나는 로마 병사라도 된 양 할멈을 줄에서 내려, 골고타 언덕에서 눈물을 흘렸다. 할멈을 애도하는 눈물은 아니었다. 하루를 보내고 전화기를 들어 이 더러운 예수의 시신을 수습해달라며 애원했다. 저녁이 되어선 이 좁은 집은 다시 고요해졌고 역겨운 냄새 속에서 나는 이불을 덮었다. 이것이 나의 행복을 할멈이 갈취해간 마지막 날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