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순백의 기사님께서 오셨군 그래!”

 

겉으로 보기에는 누가 봐도 귀족 신사의 모습이 어울리는 다소 왜소한 체격의 중년 사내.

허나 호탕하게 웃는 소리는 마치 전사의 웃음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윌리엄에게는 익숙한 모습이기도 했다.

 

“루티아노 백작님은 여전하시군요.”

“그건 내가 할 말일세. 경의 그 새침한 얼굴은 어디 안 가는군!”

 

껄껄 웃으며 윌리엄의 어깨를 탕탕 두들기는 로이엔 폰 루티아노 백작.

과거 전쟁터에서 한솥밥을 먹은 뒤로 윌리엄과는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며 나름 허물없이 지내게 된 귀족이었다.

 

“전에는 참 재수 없다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보니 그 얼굴도 반갑게 느껴지는구만! 으하하!”

 

다른 귀족들에 비해 가식이 없다는 것.

윌리엄이 백작에게만큼은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도 과거 평민으로서 살아온 윌리엄으로서는 이러한 백작의 태도가 그나마 편한 축에 속했다.

 

‘뭐, 가끔 도가 지나쳐서 문제지만.’

 

허나 말을 너무 꾸미질 못하고 직설적으로 해대기 때문일까. 

그 탓에 능력 있는 귀족인데도 불구하고 인맥이 윌리엄과 비슷할 정도로 처참한 편이다. 

루티아노 백작도 자신을 동류라 생각하고 있을 공산이 컸다. 

 

여러모로 슬픈 일이다.

 

“왠일로 덕담을 다 하시는군요.”

“이거 보게, 누가 들으면 내가 악담만 하는 사람인 줄 알겠군!”

“아니었습니까? 듣기로는 서부전선에서 돌아온 것도 자발적으로 빠진 게 아니라고 들었습니다만. 서부전선 참모장에게 들은 바로는 잔소리가 너무 심해서 같은 국왕파에서도 학을 떼고 있…….”

“크흠!”

 

뼈가 실린 윌리엄의 태클에 루티아노 백작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거 참, 오랜만에 얼굴을 맞대자마자 별 얘기를 다 하는군.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지 않나?”
“먼저 운을 뗀 건 백작님이…….”

“그래서 공주님은 언제쯤 오실 예정인가?”

 

말 돌리는 것도 여전하시군.

속으로 쓴웃음을 지은 윌리엄이 대답했다.

 

“준비가 조금 늦으신 모양입니다. 그래도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곧 오실 겁니다.”

“흠. 그럼 조금 여유가 있겠군 그래.”

 

루티아노 백작이 보란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 백작의 행동을 모를 윌리엄이 아니었다.

 

“잠깐 얘기 좀 하지, 경.”

“그러시죠.”

 

그리 대답한 윌리엄이 손짓으로 주변 기사들을 멀찍이 떨어지게 했다.

멀찍이 기사들이 떨어진 것을 확인한 윌리엄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애들까지 물리게 하시고.”

“충고나 좀 할까 싶어서 말이지.”

“충고요?”

“그 멍청한 표정을 보아하니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는 것 같군 그래.”

 

피식 웃은 루티아노 백작이 갑자기 엄지로 스스로를 척 가리켰다.

 

“자네는 내가 뭐 하는 사람인 거 같나?”

“세금만 축내는……. 실수.”

“……평소에 날 그렇게 보고 있었나?”

“반은 농담입니다.”

“굳이 반이란 말은 안 하는 게 좋았을 텐데. 뭐, 핵심만 말하자면 나는 백작이라는 계급을 가지고 있네. 자네 말대로 전에는 서부전선총사령관 역할도 맡았지 않았나. 덕분에 수도에서도 어느 정도 파급력은 있지. 물론 내가 능력이 있어서 그런 거지만.”

“갑자기 자기자랑입니까?”

“거 참. 말 좀 끊지 말고 들어보게.”

 

쯧 하고 혀를 찬 루티아노 백작이 진지한 표정으로 윌리엄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나는 꽤 유용한 군인형 관료일세. 영민하신 국왕 폐하께서도 내 능력 정도야 충분히 파악하실 테고.”

“무슨 의미입니까?”

“말했지 않나. 나는 ‘군인형’ 관료라고.”

“…….”

“자네도 트로웰과의 전쟁 가능성 정도는 예상하고 있을 테지?”

 

이미 왕에게 들은 바도 있다.

허나 이렇게 다시 한 번 얘기를 들어도 그 무게가 다소 버겁게 느껴지는 윌리엄이었다.

이미 전쟁이라는 것을 겪은 바가 있으므로.

 

잔뜩 굳은 표정의 윌리엄을 잠시 관찰하던 백작이 말을 이었다.

 

“말해두겠는데 이번 전쟁은 무조건 일어날 걸세.”

“확신하시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불안정성.”

 

불안정성이란 아마도 트로웰의 정치체제를 말하는 것이리라.

허나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 윌리엄이 짐작한 것은 그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 윌리엄의 무지를 알고 있는 백작이 말을 쉽게 풀어 나갔다.

 

“저기 트로웰의 민중왕(民衆王)은 지지기반이 미약하네. 시민공화정이니 뭐니 해봤자 자네는 잘 이해하지 못할 테니 쉽게 말하자면……. 그와 뜻을 함께하는 귀족들이 극히 적다는 걸세.”

“그렇다면 더욱 전쟁을 일으키기 힘들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렇기에 전쟁을 일으키려는 걸세.”

“……이해가 잘 안 갑니다. 그렇다면 저희와 싸우기 전에 내전이 일어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상관없을 걸세.”

“예?”

“내전과 함께 우리 님블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어. 트로웰은 그 정도의 국력을 지니고 있네. 거기에 평민들을 등에 업고 왕에 오른 인물이야. 귀족을 신경 썼다면 애초에 왕이 되지도 않았을 걸세. 아마 저쪽의 귀족들이나 전전긍긍할 따름이겠지.”

“…….”

“무엇보다 이미 왕이 된 시점에서 내전은 피할 수 없을 거야.”

 

여기까지 얘기를 들으니 정치에 무지한 윌리엄도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즉…….

 

“언젠가는 폭발할 거니 아예 이번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말 안 듣는 귀족을 정리한다. 그런 겁니까?”

“……왠일로 자네 머리도 잘 돌아갈 때가 있군 그래?”

 

루티아노 백작이 의외란 듯 윌리엄을 바라보았다.

마치 평소 공부를 잘 못하던 학생이 문제를 맞춘 것을 본 듯.

 

“어차피 일어날 전쟁이라면 이렇게 사절단으로 가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까?”

“그럼 그렇지.”

 

허나 이후로 묻는 윌리엄의 말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안심한 미소를 짓는 백작이었다.

 

“자네는 정말 쌈박질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군 그래.”

“아니, 싸우는 게 정해진 거라면 굳이 사절단이 왜 필요합니까?”

“당연히 필요한 거 아닌가? 결국 전쟁이라는 게 땅따먹기지 않나. 서로 어디까지 양보하고 어디까지 먹을지는 대충 정해둬야지. 설마 애들 싸움 마냥 끝장날 때까지 싸울 생각이었나? 물론 그렇다 해도 가능성은 충분하다만.”

“가능성?”

“우리가 인질이 될 가능성 말일세.”

 

인질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말에 윌리엄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사절단을 인질로 잡는다니 그래도 되는 겁니까?”

“비공식 사절단이니 말일세.”

“아무리 그렇다 쳐도 그건…….”

“이럴 줄 알았지. 자네한테는 그걸 경고하려고 이렇게 말하는 걸세. 뭐, 나야 여자든 술이든 즐길 건 다 즐겨서 별 미련은 없다만. 자네는 젊지 않나.”

“이렇게 괴상한 충고는 처음 듣습니다. 그리고 제가 무슨 미련이 있다고…….”

“자네가 공주님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걸 모를 줄 알았나?”

 

갑작스런 폭탄 발언에 윌리엄이 눈을 부릅떴다.

 

“그게 무슨……!”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지 알고는 계시는 겁니까!”

“왜? 불경죄로 폐하께 말하기라도 할 셈인가?”

“…….”

 

자신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안다 이건가.

 

확실히 이런 데서 보면 귀족은 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가들은 지는 싸움은 절대로 먼저 걸지 않으니까.

 

그것이 윌리엄이 귀족들을 기피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나마 눈앞의 루티아노 백작이 ‘덜 귀족적’인 것일 뿐.

 

“아무튼 이후로 행동할 때는 항상 생각하고 움직이게. 혹시 모를 긴급 상황이 생길지 모르니까. 자네도 돌아가는 꼴은 알아야지.”

 

자기 할 말만 쏙 하고는 몸을 홱 돌리는 루티아노 백작.

그런 백작을 향해 약이 오른 윌리엄이 한 소리 하려는 순간이었다.

 

“윌리엄!”

“어이쿠, 도착하셨군. 그럼 인사나 하러 가지.”

“…….”

“뭐하나, 안 가고?”

 

타이밍 좋게 등장한 공주의 목소리를 들으며 윌리엄이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공주 응디에 숨어서 행님 행님

귀족이 이렇게 해서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