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를 만나 집으로 돌아온 그날 밤, 나는 파자마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그 말을 계속 떠올렸다.

‘앞으로 잘 부탁해, 유현아. 너의 친구이자 문예부의 부원으로서.’

친구이자 부원으로서. 무언가 의미심장한 그 말은 내 머릿속에 깊게 남았다.

“그 아이는 누구였을까.”

도시의 마천루에서 나오는 빛으로 만들어진 야경이 보이는 침대 바로 앞의 큰 창문을 보며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소녀의 모습도, 소녀가 한 말도, 소녀의 손길도 나는 계속해서 기억하고 있다. 유령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가 갑작스럽게 존재를 확인했을 때의 충격은 아직까지 생생하게 남아 있다.

“혹시 이건 꿈일까.”

하지만, 어쩌면- 

그 소녀도, 방과 후의 서고도, 그 책갈피도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전부 나의 환상이라면 어떨까.

나는 창가에 있는, 소녀에게 받은 책갈피를 집어 들었다. 책갈피는 방과 후의 반투명한 그림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사실적이야.”

대개 꿈이라는 것은 세계의 일부가 완성되어 있지 않거나 불완전하며, 그것을 꿈이라 인식하는 순간 즉시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 그렇게 꿈에서 깨어난 후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세계를 잊어버린다.

또한 꿈 속 세계에서 신체 부위를 다치거나 하는 상황이 일어나면 고통이 뇌리에 전달되기도 전에 꿈에서 깨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오늘이 꿈인지, 현실인지 직접 확인해 보기 위해 손등을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으로 꼬집어 보았다.

“....!”

고통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당연하게도 꿈에서 깨어나는 일은 없었다. 나는 여전히 환상 속 꿈이 아닌 사실 속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었다.

“역시 꿈은 아니구나.”

후우, 하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 소녀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내일 학교에서 소녀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할까. 그렇다면 나는 소녀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소녀가 옛날에 만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책갈피는 어떻게 만든 것일까.

“아.. 졸려.”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피로감이 들어 나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일단 숙면을 취하기로 했다.

흰 원기둥 형태에 벚꽃 무늬의 구멍이 새겨진 수면등을 키고 방의 전등을 껐다. 방 안에 은은한 주황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책갈피랑 무늬가 같아.”

나는 소녀에게 받은 책갈피를 집어 들었다. 확실히 내 등에 새겨진 무늬와 상당히 유사했다.

무의식적으로 책갈피를 눈에 가져다 대 전등을 바라 보았다. 하지만 그저 반투명한 무늬가 덧씌워져 보일 뿐 다른 효과는 없었다.

“딱히 능력은 없는 것 같은데..”

모르겠다. 나는 책갈피를 다시 원래 자리에 돌려 놓고 침대 위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지금은 너무 피곤하다. 내가 궁금해하는 이야기는 내일 소녀에게 물어봐도 괜찮을 테니 우선은 잠을 자고 싶었다.

“잘 자. 오늘도 수고했어.”

나는 눈을 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것은 하루가 끝날 때마다 나 자신에게 주는 일종의 격려 같은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천히 잠에 드는 듯한 감각이 전신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 날 밤은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더 푹 잘 수 있었다.



나는 오늘의 점심 식사를 끝내자마자 바로 구교사의 서고로 향했다. 

“수학 문제 답 몇 번이야?”

“과제 언제 다 끝내냐...”

“다음 교시 무슨 과목?”

평소보다 조금 소란스럽고 혼잡한 교실과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그 익숙한 소리를 듣고선 한쪽으로 흘린 후 서고의 문 앞에 다다랐다.

천천히 문을 열고 서고 안으로 들어갔다. 서고 안에는 어제처럼 나 말고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어라, 유현이 왔네?”

서고에서 유일하게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한 것은 창가에 걸터 앉아 책을 든 채 나를 향해 미소지으며 인사하는 유령 하나밖에 없었다.

“너 왜 벌써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나는 소문과 다른 소녀의 행동에 의문이 들었다. 분명 소녀는 오후 5시 30분이 되어야 모습을 드러낸다고 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점심 시간인 지금 모습을 드러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벌써라니? 난 처음부터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모습을 보일 수 있었는걸.”

특정 시간이 되어야 소녀를 불러낼 수 있다는 것도 거짓이었다. 나는 어제부터 연속으로 느끼는 허탈감을 받으며 정말 소문이란 건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나는 조용히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구나..”

“후후. 완전히 소문에 속은 거야? 그래도 유현이가 소문을 못 들었으면 날 만날 수도 없었을 테니까 양날의 검이네.”

소녀는 그렇게 말하고선 살짝 웃었다. 그러고선 책을 덮고 날 바라보더니 질문을 던졌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난 유현이가 방과 후는 되어서야 서고에 올 거라고 생각했어.”

“점심 시간은 긴데다 할 일도 없어서 쉬는 시간이 끝날 때까지만 여기서 시간 때우려고 왔어.”

“그러면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수 있는데?”

“지금이 오후 12시 40분이고 수업 시작이 1시 40분이니까.. 한 1시간 정도?”

흐음, 하고 소녀는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평소처럼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혼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네.”

그렇구나.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분명 소녀는 오랜 시간 동안 혼자서 이 서고를 지켜 왔다고 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라도 누군가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소녀에게는 큰 만족을 줄 것이다.

“여기는 문예부니까... 역시 책을 읽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맞다.. 난 이제 네 문예부의 부원이었지.”

사실 처음부터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가정 하에 이 서고를 시간을 때우기 위해 사용할 의사가 있었다. 난 독서가 취미이기도 하고, 이 서고는 조금 좁아 학생들 대다수가 신관의 도서실로 가기에 찾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아늑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소녀는 굳이 문예부라는 이름으로 날 서고에 잡아 두고 싶었던 걸까. 나는 소녀의 심리를 알 길이 없어 소녀의 행동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했다.

“자, 유현이에게 선물하는 오늘의 추천 도서.”

분명 소녀가 직접 고른 소설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했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내가 직접 엄선해서 고른 작품이야!”

소녀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하며 미소 지었다. 확실히 이 작품은 나도 감명 깊게 읽은 소설이었고 오래된 명작 중 하나였다.

“그래. 이미 읽은 작품을 다시 읽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네.”

내 기억에 의하면 이 소설은 일본의 대문호인 나츠메 소세키가 쓴 소설이다. 고양이의 시점으로 인간들의 생활을 본다는 부분에서 색다른 느낌이 들어 감명을 받았던 작품이었다.

또한 내가 이 소설의 제목에 대해 알고 있는 이야기로는, 소설 속 ‘나’는 일본어 원문으로 ‘吾輩(わがはい, 와가하이)’ 인데, 이는 현대 일본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고풍스러운 1인칭 단어라는 것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일본어의 1인칭은 ‘私(わたし, 와타시)’ 나 ‘僕(ぼく, 보쿠)’ 정도밖에 없었기에 그런 생소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단어는 이 소설이 감명 깊게 읽혀지는 것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그거 알아? 이 소설의 제목 말인데...”

“제목의 ‘나’ 가 일본어 원문으로 ‘吾輩(わがはい, 와가하이)’ 라는 거?”

나는 소녀의 말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확신에 찼었는지 반사적으로 그 말이 튀어나왔다. 소녀는 많이 놀란 표정을 하고선 날 바라보았다.

“알고 있구나? 어떻게 알았어?”

“나는 독서가 취미거든. 한 번 읽고 재미있는 책이면 그 책에 얽힌 이야기도 찾아 보는 것도 좋아하니까...”

“아, 나도 그런데! 유현이랑 나는 친구니까 역시 통하는 게 있나 보다.”

소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너도 다른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

나는 약간 호기심이 생겨 소녀에게 물었다. 단순한 호기심 뿐만이 아니라 문예부의 부원이었다면 책을 좋아할 확률이 높기에 그것을 증명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방금 전의 책을 제외하고 이야기를 하나만 해야 한다면, 러시아의 대문호인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인 <<죄와 벌>> 을 이야기하고 싶어.”

소녀는 그 말을 하고선, 그 작품에 얽힌 이야기를 나에게 막힘 없이 말했다.

“이 소설의 배경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인데, 실제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집이 관광 명소로 남아 있어. 근처에는 도스토옙스키가 거주했던 집도 있고. 그리고 근방에는 소설의 주요 장소 센나야 광장도 있어. 도스토옙스키는 실제로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배경으로 한 거지.”

소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나에게 빠른 속도로 전달했다. 나 또한 그 소설의 내용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죄와 벌>>은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가 선과 악에 대해서 갈등하는 상황이 활자를 뚫고 내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졌을 정도로 표현력이 뛰어나 큰 감명을 준 작품이었다.

“이것이 내가 아는 이야기야. 혹시 다른 작품도 이야기해 줄까?”

“아니, 괜찮아. 네가 문예부 부원이었고 취미가 같다는 건 확실히 알았어.”

나는 평소와 같이 부드럽고도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흐음.. 유현이는 뭔가 반응을 잘 안 해 주니까 심심해.”

소녀는 흐으음, 하고 골똘히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 반응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서.”

“뭐.. 그래도 같이 재미있게 놀 수 있으면 된 거지.”

소녀는 금세 내가 반응이 별로 없다는 의문도 마음대로 잊어버린 채 금세 웃고 있었다.

“너도 참 특이한 유령이구나.”

“으음.. 특이하다니 어디가?”

소녀는 특이하다는 말을 듣고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밝고 사교성이 좋은, 나랑은 다른 느낌이 너한테서 느껴져. 많이. 마치 친구를 많이 사귀고 다닐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사실 여러가지로 소녀가 어딘가 제멋대로인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소녀의 특징은 내가 본 ‘인싸’ 라고 불리는 사교성이 좋은 아이들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 아이들은 웃음이 많고, 이야기를 쓸모없이 질질 끌지 않고, 항상 밝은 목소리로 말하며 사람들을 즐겁게 할 이야깃거리를 수도 없이 가지고 있었다. 집단의 분위기를 밝게 유지하며 모두에게 심리적인 안정을 제공한다. 

나도 한때는 그 아이들을 따라해 보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어설프게 따라해 봐야 비웃음을 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즉시 그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소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현이도 내가 보기엔 나쁜 아이가 아닌데, 어째서 친구들이 다가오지 않는 거야?”

“모르겠어.”

나는 후우, 한숨을 쉬고선 책상 위에 엎드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서실 밖으로 보이는 창 밖에는 어제처럼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떠 있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지금은 점심 시간이라 해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았다는 것과 유령 소녀 한 명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착한 아이일까, 아니면 나쁜 아이일까.”

옛날의 내 행동이 나빴던 것인지, 아니면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는지에 대한 문제의 해답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알 수 없었다. 

그 탓에 나는 때때로 괴로움을 느꼈다. 내가 천벌을 받을 악인이라는 생각과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선량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떠올리기 싫은 옛날의 기억이 떠올려졌기 때문이다.

“유현이는 나쁜 아이가 아니야.”

소녀는 확신하듯이 날 보며 말했다. 

“물론 완전히 착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난 최소한 유현이가 나쁜 아이가 아니라고 믿을 거야.”

“무슨 근거로?”

아직 친구가 된 지 하루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소녀는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의문이 들었다.

“유현이가 나쁜 아이였다면 처음부터 내가 친구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소녀는 날 바라본 채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유현이가 타인의 감정을 알지 못하는 나쁜 아이였다면, 나와 친구가 되겠다고 말해 주지도 않았겠지?”

“그런가...”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소녀의 말이 명확한 근거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말은 나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일단은 내 심신을 안정시켜야 논리적인 사고가 작동한다. 근거를 찾는 것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조용히 속으로 생각했다.

“고마워. 네 말을 들으니까 좀 편해졌어.”

나는 고개를 들고선 소녀에게 말했다. 

“응? 편해졌다...니, 아무튼 다행이네.”

소녀는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평소처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처음으로 내가 소녀에게 긍정적인 칭찬을 해 주었기 때문일까. 평소의 내 모습과 약간 충돌이 일어났던 듯 했다.

이내 작별의 시간을 고하듯 수업 시작이 5분 남았다는 예비 종소리가 학교 전체에 울렸다. 피아노의 선율로 구성된 15초 남짓의 곡이 재생되기 시작하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는 거야? 방과 후에도 와 줘.”

소녀는 출입문으로 나가려는 나의 모습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응.”

나는 짧게 대답하고선 서고를 빠져 나와 교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