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멸망했다.

마야문명의 예언대로 지구는 2012년에 멸망한다는 지구멸망설이 유행했던 올해였고, 이를 주제로 한 영화도 나왔었지만, 진짜로 2012년에 지구가 멸망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로 생각한다. 지구멸망의 이유는 자연재해도, 외계인의 침략도 아니었다. 그냥 인간들끼리의 핵전쟁에 의해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살아남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대한민국에 북한의 핵폭탄이 발사되기 직전, 이 지역의 선택받은 백 명의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방공호에 몸을 피신할 수 있었다.
생존자들은 비밀 승강기를 타고 방공호가 있는 지하로 피신했다. 승강기에 탄 백 명의 사람은 각자 짐을 들고 숫자가 적힌 번호표를 목에 걸었다. 내 가방 안에 손전등과 식량같은 생존 물품이 들어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왔을 것이다.
승강기가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느껴진다. 승강기 안은 밝은 전등들 때문에 무척 밝았는데, 밖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과 친구, 연인들이 떠올라 괴로워하는 생존자들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중 몇 명은 아직도 눈물, 콧물을 훌쩍거리는 사람도 있었고 울음이 전염될까 봐 혹은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을 위로했다.
“허억! 하아악!”
어느 여자가 무슨 이유 탓인지 숨을 못 쉬고 컥컥거리자 승강기에 같이 타고 있는 방공호 시설의 의사가 호흡기를 사용해 그녀를 안정시켰다. 승강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지하 방공호라 해서 토굴 같은 모습을 상상했던 것과 달리, 방공호 내부는 밝고 깨끗한 병원 같은 분위기였다. 정면에는 영화관만큼이나 큰 화면과 단상이 있었고, 가운데에는 원탁과 의자 수백 개가 배치되어 있었다. 예상외의 광경에 놀라서 우왕좌왕하고 떠들고 있을 때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단상 위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KR013 지하 방공호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모두 질서를 지키시면서 앞에 자리에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어수선하게 웅성웅성 소리를 내면서 남자가 말하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탁자와 의자는 충분히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한 원탁에 한 명만 앉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가장 뒤쪽의 원탁에 혼자 앉았다. 모두 자리에 착석하자 단상 위의 남자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방공호의 주민 여러분, 저는 이 방공호의 총 책임자인 김진윤이라고 합니다.”
남자가 자신을 소개하자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박수를 쳤다.
“여러분이 계신 방공호는 원래 최대 천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충분한 식량을 준비하지 못한 관계로 안타깝게 여러분 백 명만을 이곳에 보호하게 되었습니다. 십 년이란 긴 시간 동안 제한된 구역에서 제한된 식량을 가지고 생존하는 건 아주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돕기 위해 방공호에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할 것입니다.”
책임자는 양옆에 흰색 가운을 입은 사람들을 일일이 소개해주었다. 의료팀, 기술팀, 식량팀, 이 외에도 이름만 듣고는 무슨 일을 하지는 알 수 없는 팀들이 있었다. 책임자의 말이 길어지면서 더욱 격정적인 말투로 변했다. 그는 우리가 인류의 새로운 희망이며, 인류를 지속시켜야만 하는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어느새 그의 연설에 몰입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아까까지 있었던, 슬픔과 불안감이 사라지고, 굳건한 표정으로 책임자를 바라봤다.
“꺄아악!”
갑자기 들린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이 책임자의 연설을 중단시켰다. 시선을 소리 나는 곳으로 돌리니 아까 승강기 안에서 호흡 때문에 소란을 피웠던 여자가 발작하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손톱으로 할퀴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이 여자가 왜 이래!”
“아줌마 저리 좀 가요! 누가 좀 도와줘요!”
순식간에 하얀 가운을 입은 의료팀이 달려와 여자를 붙잡고 주사를 놔 진정시켰다. 여자 때문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도 그 자리에서 간단히 치료를 받았다. 단상 위의 총책임자는 헛기침해서 주의를 끌었다.
“방금 여러분이 보신 것과 같이, 방공호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장시간을 살아가는 건,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점까지 고려해서 이 방공호는 설계되었고, 시스템까지 갖춰 놓았습니다.”
책임자는 한번 숨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이곳에서 제일 처음 하게 될 일정은 사회성 구축입니다. 사회성 구축이란 이곳에 계신 여러분들이 다섯 명씩 한 조를 만들어 같이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시스템은 여러분 모두가 하나의 공동체라는 인식을 확립하기 위해 실시하는 시스템으로, 십 년이라는 긴 시간을 같이 해야 할 여러분한테는 꼭 필요한 시스템입니다.
이 시스템이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인다고 확신하면 개인 방을 사용할 수 있게끔 허가할 것이니 당분간은 협조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조는 여러분이 목에 걸고 계신 번호표 순으로 편성하게 될 것이며, 1번부터 5번까지가 1조, 6번부터 10번까지 2조 이런 식으로 20조로 편성하겠습니다. 여러분 쪽에서 왼쪽에 있는 문으로 나가시면 긴 복도와 함께 문 위에 각 조가 적혀진 방이 있습니다. 서두를 필요는 없으니 천천히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책임자의 말이 끝나자 생존자들이 술렁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자신이 몇조인지 알기 위해서 손가락을 꼽으며 수를 계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 번호는 오 번이었기 때문에 바로 사람을 사이를 해치고 나아가 복도로 나갔다.

원래 천명을 수용하려고 한 만큼 복도의 길이는 매우 길었다. 복도는 ㄷ자 모양으로 방금 우리가 있었던 커다란 홀을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들어갈 1조는 복도의 가장 끝쪽이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 다섯 개가 나를 맞이했다. 방은 다섯 명이 같이 사용해도 넉넉한 크기였다. 게다가 화장실과 세면장도 붙어 있었고, 배치된 다섯 개의 침대에는 모두 수납장이 붙어있었다. 나는 가장 안쪽 벽에 붙어있는 침대에 자리를 잡고 짐을 풀었다. 짐을 정리하고 있자, 문이 열리며 남녀 두 사람이 들어왔다. 둘 다 중년의 나이였는데, 남자는 등에 큰 가방을, 여자는 어깨에 작은 가방을 가지고 같이 이 방에 들어온 것을 보아 부부로 보였다. 두 사람은 나한테 눈인사한 다음 나란히 있는 침대를 차지하고 짐을 풀었다. 두 사람에 이어서 연달아 나머지 사람들도 들어왔다. 둘 다 남자였는데, 등에 가방을 메고 손에는 천으로 싼 기다란 막대를 든 사람과 빈손으로 들어온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짐 정리를 끝내자, 빈손으로 방으로 들어온 남자가 말했다.
“앞으로 좋든 싫든 십 년 동안 보게 될 테니 자기소개를 하는 게 어때?”
남자의 말투는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경박하고 장난기가 담겨 있었다. 부부로 보이는 사람 중 아내 쪽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좋네요. 그러면 누구부터 시작할까요?”
“내가 먼저 꺼낸 이야기니까 처음은 나부터 하지, 내 직업은 오타쿠, 이름은.”
“으아아악!”
남자가 막 자신을 소개하려고 하려는 순간 끔찍한 괴성이 방공호 안을 가득 채웠다.
“의사! 의사를 불러!”
“누가 이 여자 잡는 것 좀 도와줘! 아아악! 내 손이!”

네 번째로 들어온 남자는 문밖에서 들려 온 괴성을 듣고 상황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문에 가장 가까운 침대를 사용하고 있던 자신을 오타쿠라 소개한 남자가 그를 저지했다.

“무슨 짓이냐 비켜라!”
“아니, 잠깐 기다려 뭔가 심상치가 않아.”
“잠깐 밖의 상황을 확인할 뿐이다. 비켜!”

두 사람이 실랑이를 하는 사이에도 계속해서 비명이 들렸다. 비명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고, 더 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섞여 들렸다.

“비키지 않겠다면, 힘으로 제압하겠다.”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의 천을 풀었다. 천 안에는 목검 한 자루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 방안의 불이 꺼졌다. 나는 가방 안에서 미리 준비해 온 손전등을 꺼내 불빛을 비쳤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승강이를 벌이던 남자 둘도,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전이 된 순간의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비명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쿵쿵쿵쿵! 쿵쿵쿵쿵!

닫혀 있는 방문을 누가 있는 힘껏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다행이 오타쿠와 목검 남자가 실랑이를 하면서 문을 잠갔기 때문에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밖에서는 들리는 비명과 연신 문을 두드리는 소리, 손전등의 비친 사람들의 표정에서 문을 열어주어야 하나 아니면 말아야 하나의 갈등이 보였다. 결정을 내린 건 오타쿠였다.

“거기 목검 형씨! 그리고 아저씨! 침대를 이쪽으로 옮겨서 문을 막자! 일단은 사태가 진정이 될 때까지 여기 숨어 있는 게 최선이야. 내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손.”

“난 동의하네.”
“저도요. 지금은 여기서 상황을 보는 게 좋겠어요.”

부부의 손이 올라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손전등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모였다.

“저도 그편이 좋을 거 같아요.”

나까지 동의하자 목검 남자는 한숨을 쉬고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부부 중 남편도 따라 움직여 침대를 옮기는 목검 남자를 도왔다. 남자들 셋이 힘을 합쳐 침대로 문을 막고, 또 겹쳐 올려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로 문을 못 열게끔 만들었다. 침대를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우리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비명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뭐 하긴 하지만 자기소개를 마저 하는 게 어떨까요?”

부부 중 아내가 말을 꺼냈다. 그녀의 말대로 아직까지 비명소리가 멈추지 않은 지금 태연히 자기소개할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의외로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목검 남자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자기소개하는 거에는 동의하지만 이름을 밝히고 싶지는 않다. 아직 밖의 상황을 확실히 모르니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어떤 사고로 인해 살인이 일어난 거라면 눈앞에서 죽은 사람의 이름 같은 건 알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게 극단적일 필요가 있을까요?”
“여기는 방공호다. 좋든 싫든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이곳에서 10년을 버텨야 하는데, 그동안 죽은 망자의 얼굴과 이름을 떠올리며 살고 싶은 생각은 없어.”
“검도 형씨 말이 일리가 있네, 그럼 이름은 소개하지 말고, 직업이나 방공호 밖에서 하던 일만 소개하는 게 어때? 그리고 나는 그냥 오타쿠라고 불러줘.”
오타쿠는 상황이 이런대도 전혀 침울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오타쿠? 만회하고 게임에 환장한 사람을 말하는 그건가?”
“대충 그런 거지. 당신도 목검을 가지고 있는 거 보니 무기 오타쿠인 거 아니야?”
“나는 수련 중인 검사다. 그러니 검사라고 불러라.”
오타쿠와 검사 두 사람이 소개를 끝내자 뒤를 이어 부부가 소개를 시작했다.
“저는 수의사입니다. 밖에서는 동물병원을 했지요. 이 쪽은 제 아내. 그러니까.”

수의사가 아내를 뭐라고 소개할지 곤란해 하자 아내가 나서서 말했다.
“그냥 아줌마라고 불러 줘요. 총각, 아가씨들.”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왔다. 나는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궁리하면서 억지로 입을 땠다.

“저는……. 특별히 하는 일은 없고요. 그러니까.......”

도무지 나를 소개할 만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나에겐 수의사 아저씨처럼 직업이 있는 것도, 그의 아내처럼, 누군가와 관계가 있는 것도, 검사와 오타쿠처럼 자신을 지칭할 단어도 없었다. 내가 말을 하지 못하자 아줌마가 나를 거들어 주었다.

“학생이구나!”
“과연, 학생이라면 특별히 내세워서 소개할 것도 없겠지. 뭐든지 보통, 평범함을 강요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가장 큰 부작용이야. 안타깝지만, 너는 그냥 학생이라고 불려도 될 것 같다.”

오타쿠는 듣는 사람을 정신없게 만드는 빠른 말투로 말했다. 가만히 우리들의 소개를 보고 있던 검사가 말했다.

“쉿! 조용히.”

검사가 손가락을 입에 대면서 조용히 하라는 사인을 보내자 순식간에 적막이 감돌았다. 모두가 입을 닫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일단 한차례 폭풍은 지나간 것 같다. 이젠 어떻게 할 생각이냐”
“책임자분들이 구해 줄 때까지 기다리는 건 어떤가요?”
아줌마가 말했다. 그러나 오타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책임자가 있다면. 일단 이 불부터 켜 줬겠죠. 그쪽에서 움직이길 기다리는 것보다는 이쪽에서 움직이는 게 뭘 하든 가능성이 더 높을 거라 생각하는데요.”
“그 말엔 나도 찬성하지만 밖의 상황을 몰라서야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이번에 의견을 말한 건 수의사였다. 그 말을 들은 오타쿠는 손으로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대충 1분 정도가 지나자 오타쿠가 손을 떼고 말했다.

“아까 들린 비명으로 추리를 해 보면, 밖에서는 살인이 났을 가능성이 매우 커, 아니 이건 확실해. 그렇다면 누가? 왜? 살인을 저지른 것이고, 비명이 장시간 동안 멈추지 않았을까?”
“누가, 왜 살인을 저지른 건 모르겠지만, 비명이 장시간 멈추지 않았던 건, 한 사람이 저지른 사고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다발적으로 사고를 일으켜서 그런 게 아닐까요?”
“맞아, 아줌마. 아주 좋은 발언이었어. 그렇다면 남은 부분을 생각해 보자, 도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사건을 일으킨 걸까?”

수의사가 입을 열었다.

“바이러스에 의한 정신착란이 아닐까 생각하네, 그 있지 않은가? 승강기에서 호흡기로 치료를 받았던 여자 말일세. 나중에는 발작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공격했고 말이야.”
“빙고! 좋은 착안점이야. 난 말이지. 이게 영화나, 만화에서 나오는 좀비 바이러스 비슷한 거로 생각해. 숙주가 아저씨가 말한 그 여자고, 감염자들이 여자에게 공격당한 사람. 사건을 일으킨 건 그 사람들이 발병해서 이성을 잃고 사람을 공격한 탓일 거야.”
잠자코 수의사와 오타쿠의 말을 듣고 있던 검사가 말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라고 말하고 싶지만 일리가 있군. 만약 의료진이 데려간 숙주가 책임자와 그쪽 스텝들을 공격했다면 이곳이 장전된 이유도 설명이 가능하지.”

나는 오타쿠가 사람들을 단결시켜 문제를 해결하는 거에 놀랐다. 첫인상은 경박스럽고 생각 없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뜻밖에 냉철하고 상황판단이 빨랐다. 그리고 이 상황에 가장 빨리 적응했다. 오타쿠는 내가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이 방공호는 3층으로 되어 있어. 1층은 우리 일반인들이 거주하는 곳이고, 2층은 식량도, 3층은 방공호의 책임자와 스텝들이 머물면서, 이곳을 관리하는 설비가 있는 곳. 어차피 지상으로 나갈 수도,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으니까 우리가 선택할 방법은 적어도 2층으로 내려가 식량을 확보해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만약 할 수 있다면 3층으로 내려가 이곳의 통제권을 손에 넣으면 감염자들에게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책임자가 한 말 중에서는 지하 2층의 식량은 조별로 식량을 가져와서 배식한다 했었지. 즉 2층은 우리들도 드나들 수 있도록 문을 열어났을 거다.”
“그렇게 쉬운 이야기는 아니야 검사 형씨. 조별로 당번한다고 했잖아 해당 조에게만 2층 식량고 열쇠를 줄 생각일 수도 있지. 그리고 2층 식량고 문이 열려 있다고 가정해도 가는 길을 모르잖아.”
“길이야 우리가 이곳에 왔을 때 탄 승강기를 이용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검사 형씨. 지금 정전이거든?”
검사는 오타쿠에게 뒤통수를 한번 얻어맞은 표정을 한 뒤 다시 침묵을 지켰다.
“오타쿠, 그렇다면 자네는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나?”
수의사 아저씨가 오타쿠에게 의견을 물어봤을 때. 나는 어느새 오타쿠가 우리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오타쿠는 대답할 내용을 미리 머리로 정리했는지 막힘없이 말했다.
“이 복도는 ㄷ자 형태야. 그리고 우리는 이 복도의 끝인 1호실에 있지. 이 복도를 따라 반대쪽에 가면 분명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을 거야.”
“복도 끝이라. 마지막 20조에 편성된 사람들은 벌써 지하 2층으로 내려가 있을 수도 있겠군그래.”
“이곳에서 복도 끝까지 가는 루트는 두 개야. 하나는 복도를 따라 돌아가는 것, 나머지는 우리가 처음 왔었던 광장을 돌파해서 직진으로 가는 것.”
“불이 켜져 있었으면 돌파하는 쪽을 선택했겠지만, 이런 어둠 속이면 나라도 동시에 여러 명을 제압하는 건 무리다.”

아줌마가 말했다.

“그러면 결론은 돌아가야겠네요. 복도라면 앞뒤에서 오는 적들만 신경 쓰면 되고, 위험하다 싶으면 근처에 있는 방에 숨어서 때를 기다리면 될 테니까요.”
“아줌마, 이번에도 좋은 지적이었어. 밖에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도 나는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2층 식량고로 갈 생각이야. 댁들은 어떻게 할래.”
“나도 가겠다. 남의 도움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내 힘으로 살 길을 찾는 게 적성에 맞으니까.”
“우리도 가겠네. 위험하다는 건 알지만, 자네들과 함께라면 무사히 2층 식량고까지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네.”

수의사는 아줌마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나 혼자 이곳에 남아있기 싫었기 때문에 나도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좋아, 그렇다면 만만의 준비를 하고 나가자. 이번에도 검사 형씨하고 수의사 아저씨가 좀 도와줘야겠어.”
오타쿠는 두 사람과 힘을 합쳐 침대를 분리했다. 침대는 여러 개의 파이프를 연결해 만든 조립식 침대였는데, 분리를 하자 파이프가 좋은 무기가 됐다. 남자들이 무기를 준비하는 동안, 아줌마와 나는 필요한 도구를 정리했다. 일단 내 가방 안에 있는 옷가지와 로션 같은 잡품을 모두 버리고, 아줌마가 가져온 구급약과 내가 가지고 있던 물과 초코바를 우선으로 챙겼다.
“가방은 아줌마가 메도록 해요, 그리고 이 파이프도 받고.”

오타쿠는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침대에서 분리한 긴 파이프를 나눠주었다. 단 검사는 파이프 대신 목검을 들었다. 빈손으로 멀뚱히 서 있는 나에게 오타쿠는 방 안을 비추고 있던 손전등을 들어 나에게 줬다.

“학생, 너는 검사 형씨하고 함께 가장 앞에 서도록 해. 길을 비추는 역할과 만약 감염자가 습격해 오면 검사 형씨가 공격할 수 있게 감염자를 놓치지 않고 비추는 역할을 하는 거야.”
“학생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위험한 거 아닌가?”
오타쿠는 수의사의 말을 무시하고 할 말을 이어서 했다.
“가운데에는 가방을 멘 아줌마가, 그리고 가장 뒤에서는 나하고, 수의사 아저씨가 파이프를 들고 후방을 경계할 거야. 아줌마는 싸움이 일어나면 주위의 경계해 주고.”

오타쿠는 그 후에도 몇 번이나 각자 자기가 할 일을 확인시켰다. 준비가 끝나고 문을 막았던 침대를 치웠다. 가장 앞에선 검사는 내 긴장된 얼굴을 보고 손으로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줬다.

“겁먹지 마라. 감염자든 뭐든 상대가 사람이라면 이 목검으로 일격에 제압할 수 있다.”

검사는 목검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문손잡이를 돌렸다. 나는 혹시나 놀라서 손전등을 떨어뜨릴 일이 생길까 봐 힘을 주어 손전등을 단단히 잡았다. 일단 나는 오타쿠가 시킨 대로, 뒤쪽을 먼저 비춰 확인했다. 우리가 있는 곳은 복도에 끝이기 때문에, 처음만 뒤를 조사하고 진행방향을 확실히 체크하면, 습격당할 가능성은 매우 적을 거라고 했다. 손전등을 비춘 뒤 쪽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고 손전등을 앞 쪽으로 향했다. 손전등의 불빛은 그리 강한 편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눈앞 2~3M의 거리만 겨우 보였다. 복도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던 그 복도라는 생각도 안 들었다.

“학생, 저쪽 벽을 좀 비춰 봐.”

나는 검사의 말대로 손전등을 벽 쪽에 비췄다. 벽에는 빨간 손자국과 손바닥 크기의 선이 이어져 있었다. 손전등으로 손을 따라가자 그곳엔 어떤 남자가 목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핏자국이 이어진 모양과 거리로 추측해 보면 아까 우리 방문을 필사적으로 두드렸던 사람인 것 같았다.

“우욱!”

나는 태어나 처음 보는 시체를 보고, 손전등을 돌렸다. 하지만 검사는 손전등을 잡은 내 손을 잡고 시체를 비췄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갑자기 손전등을 돌리지 마라. 모두가 위험해 질 수도 있으니까.”

시체에 다가가자, 비릿한 냄새가 확하고 풍겼다. 나는 당장에라도 손전등을 돌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오타쿠가 후방에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수의사가 시체를 살폈다.

“직접적인 사망원인은 경동맥 절단으로 인한 과다출혈일세. 이건 아주 죽일 작정을 하고 물어뜯은 게 확실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