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모사 대령님, 이 새끼가 레스톡에서 납치한 사람들을 구출하려다가 잡힌 놈입니다. 사람들 다 이송시키고 마지막 한 놈까지 데려가려다가 운없게도 포위망에 보기좋게 걸려들었죠. 그럼 이 새끼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엠모사 켈리인 대령의 부하 츠미라 쿼크 중령이 보고했다. 츠미라 중령의 손에는 셀 수 없는 구타와 고문을 당한 레스톡의 공작원이 무정하게 들려있었다.
"일단 마력부터 빼내보자고. 여기까지 쳐들어온 공작원이라면 마력도 넘쳐나겠지."
엠모사 대령이 귀찮아하며 말했다. 츠미라 중령은 공작원을 강제로 끌고 세게 밀치며 바닥에 앉혔다. 이미 눈에 생기가 빠진 공작원 에스텔라는 힘없이 풀썩 주저앉았다.
여기서 죽으면 안 되는데, 이렇게 고백도 못 해보고 죽는구나 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에 체념했다. 카그란 제국의 잔혹함에서 주민들을 전부 구하지 못한 자신이 후회스러웠고 원망스러웠다.
에스텔라가 본 카그란의 군인들은 포로를 잡아 므네몬 마을로 보내고 있었다. 평시에도 소규모 교전이 잦은 국경지대라 납치해도 일개 전쟁범죄로 생각되었고, 군인들도 그 포로들이 받는 대우를 상상도 하지 못하는 듯 싶었다. 그들이 납치한 포로들은 므네몬 마을에서 대기하고 있던 윗사람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마력을 갈취당했다. 착취 불가능한 희귀 마력을 가진 극소수 주민들은 제외하고는, 그곳은 완전히 피바람과 사악한 악마들로 가득한 철처한 비상식과 끔찍한 비윤리의 현장이었다.

츠미라 중령이 마력을 뽑는 기계를 가져오자 엠모사 대령이 그것을 손에 들고 에스텔라의 머리 오른쪽에 댔다. 그리고 기계를 작동시키자 보라색 물결이 피어오르며 마력이 빨려들어갔다. 그러나 기계는 이내 느낌표가 든 붉은 삼각형 모양의 경고신호를 화면에 띄웠다. 그 밑에는 덤으로 굵은 글씨로 무언가가 나타났다.
보통이라면 마력이 전부 다 빨려서 양쪽 눈이 모두 갈색이 되어야 했을 에스텔라의 눈은 절반만 빨려들어가 왼쪽 눈에는 보라색이 아직 남아있었다.
"이게 뭐지?"
엠모사 대령이 뜻밖의 상황에 말했다. 츠미라 중령이 답했다.
"이건 기계가 마력의 총량을 다 감당하지 못할 때 뜨는 문구입니다. 그리고 밑에 써진 글씨는 희귀한 종류의 마법이라 원천까지 빨아들이는 게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발전기처럼 계속 빨아먹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근데 이게 또 일부 대마법사에서만 내려오는 희귀한 부류의 마법이라 계속 빨아먹기도 애매합니다만... 그래도 지금 보니까 개발중인 무기에 최적화된 마법 부류라 놓치기는 또 아깝기도 하고..."
"그럼 아예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거 어때?"
엠모사 대령이 살짝 고민하다가 제안했다. 츠미라 중령이 살짝 놀라며 말했다.
"예? 아니, 그러면 반란을 일으킬 게 뻔합니다만..."
"그거야 기억 조작시키면 되는 거고. 그렇게 하면 신선한 마법을 영원히 발전기처럼 써먹을 수 있게 된다는 거잖아? 왜, 고문하거나 감금되거나 하는 등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으면 마력의 질도 같이 저하된다잖아."
"음... 그럼 그렇게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물어보자. 얘가 가지고 있는 마법은 어떨 때 최상급의 질을 내지?"
엠모사 대령이 이 분야에 뛰어난 츠미라 중령에게 물었다. 츠미라 중령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싸울 때 최상의 질을 냅니다."
"그럼 군인으로 삼으면 딱이겠네. 그럼 우리나라의 군인이라고 기억을 조작해보도록."
"예!"
츠미라 중령이 방을 나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기계를 하나 들고 왔다. 에스텔라는 지쳐서 분노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상상 그 이상으로 잔혹한 카그란 제국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혐오스러웠을 뿐이었다.
츠미라 중령이 헬멧을 에스텔라의 머리에 씌웠다. 그러나 뭔가 떠오른 듯이 엠모사 대령에게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데 군인으로 삼으면 레스톡에서 이 새끼가 에스텔라인 걸 당연히 알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러먼 '알고보니 레스톡이 악마인 걸 깨닫고 카그란 제국에 전향한 군인'이라고 하자."
츠미라 중령이 난감해하며 반문했다.
"그러면 얘의 기억이랑 모순됩니다. 지금의 기술로는 어렸을 때의 기억을 죄다 포멧시키지 않으면 그 작은 기억으로 다시 전체를 기억해내어버립니다. 그런 고로 원래랑 완전히 다른 기억을 주입시켜야 하는 지라..."
엠모사 대령은 말대꾸에 조금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러나 맞는 말인 것은 분명했다.
"그러면 '악마인 걸 깨닫고 전향했다'는 건 단지 선동용 문구일 뿐이라고 해두지 뭐. 그래서 만약 레스톡에서 돌아오라고 하면 그들이 선전에 넘어갔을 뿐이니 믿지 말라고 하면 간단하지."
"예.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발전기의 이용가치가 없어져버렸을 때는 자연스럽게 전사처리 시키면 되는 거고."
츠미라 중령이 기계를 가동시켰다. 기계에서 색색의 찬란한 빛들이 나오며 기억을 뜯어고쳤다. 에스텔라는 이신다와 그의 가족과 그의 고향을 생각하며 자신을 한탄했다. 그러나 오랜 고문과 구타에 의해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작게 신음할 뿐이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와주다니 참 고맙군. 마침 레스톡 왕국을 정복할 명분이 없었는데, 마침 이렇게 딱 나와주니 말이야. 그리고 레스톡 출신인 놈이 레스톡의 군인들을 짓밟아야 한다니, 얘를 볼 때면 웃음이 절로 나오겠는 걸."
띵 소리와 함께 에스텔라의 기억이 포맷되었다는 기계의 알림이 떴다. 그리고 기계는 이센그린 가드너라는 새로운 인격을 그에게 주입하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죽어 고아가 되었다가 애국심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카그란 제국의 사람으로 변해가는 에스텔라를 보며 엠모사 대령은 재미있다는 듯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

이센그린이자 에스텔라인 남자는 서서히 정신이 들며 눈을 떴다. 베크마 국정원장, 이숨브라스 중령, 에뉴린 대마법사, 프레드가 중위, 이신다 경찰관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베크마 국정원장과 이숨브라스 중령은 이미 예상한 결과라 놀라워하지 않는 모습이면서도 에스텔라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에 성공했다는 뿌듯함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에뉴린 대마법사는 그 느낌에 더해 진정한 재회의 기쁨에 눈물이 절로 흘러져 나왔다. 프레드가 중위는 엄청난 충격을 먹고 넋이 나있었으며, 이신다 경찰관 또한 몰랐던 사실에 다소 충격에 먹었지만 에스텔라의 기억이 완벽하게 돌아왔다는 것에 감격스러워하며 당장 그를 덮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에스텔라!"
이신다가 결국 주체를 못하고 에스텔라의 품으로 달려들어 얼싸안았다. 이에 에스텔라는 살짝 뒤로 넘어지며 밀쳐났다. 그런 에스텔라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다.
"이신다, 나도 좋아해!"
그토록 하고 싶었지만 미뤄두어 하지 못했던 그 말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에스텔라의 입 밖으로 저절로 튀어나왔다. 에스텔라는 이신다를 두 손으로 와락 끌어안고 부드럽게 안겼다.
에스텔라의 어머니 에뉴린도 감격에 젖어 에스텔라를 포옹하였다. 에뉴린의 표정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해보였다.
심성이 여린 프레드가도 오랜 전우의 눈물겨운 상봉을 보며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는 프레드가의 선글라스 아래로 무언가가 한 방울 흘러져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베크마가 그들만의 시간을 주자고 나오라고 하자 그제서야 나올 수 있었다.
카그란 제국에 의해 강제로 분리된 그들의 그리움이 기쁨으로 바뀌며 그 기류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프레드가는 문 밖에 서서 벽에 기단 채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


마차가 포장되지 않은 길을 달리며 덜컹거렸다. 검은 양복을 입은 에스텔라와 프레드가는 말 한 마디 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한때 카그란 제국의 군인이었던 두 사내는 마차가 멈추자 묵묵히 내렸다. 그들은 조금 걸어가다가 자리를 잡고 섰다. 그들이 선 곳의 잔디 위에는 관과 비석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렇게 다시 뵙습니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 돌아오지 못해 죄송합니다."
에스텔라가 고개를 숙여 묵념하며 말했다. 프레드가도 그를 따라 추모하였다.
에스텔라가 국화를 꺼내 그의 아버지의 묘지에 바쳤다. 프레드가도 에스텔라를 따라 국화 한두송이가 담긴 꽃병을 묘지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들은 한동안 그곳에서 가만히 서있었다.

제사가 끝나고 에스텔라와 프레드가는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말이 히힝거리며 왔던 길을 다시 되짚어갔다.
"그래서 그건 어떻게 하기로 했어?"
 이날은 에스텔라가 기억을 완전히 되찾은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 베크마 국정원장은 혹시 몰라 켐브리와 프레드가의 기억도 점검해보았다. 켐브리는 기억이 조작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어 에뉴린 대마법사가 다시 복구시켜줬지만 프레드가는 기억이 조작되지 않았던 것으로 판명나 카그란 제국 출신이 맞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아, 그거? 그날 이후로 계속 생각해봤는데, 그냥 여기로 귀화하려고. 학살이 싫다고 해서 이직된 곳도 사실은 또다른 학살의 현장이었잖아. 이제 그 다음은 뭘지 상상만 해도 몸서리쳐지거든. 그리고 어차피 돌아가도 켐브리가 했던 것처럼 바로 죽을 목숨이 될 게 뻔하잖아?"
프레드가가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창 밖으로 그가 전우를 구하기 위해 타고 왔던 장갑차가 숲새들의 의자가 된 채 방치되어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너다운 선택이네. 하긴 군인이나 경찰이 아니고서는 절대 죽이지 못하는 네가 거기로 돌아가긴 힘들겠지."

마차를 타고 가다보니 어느샌가 이신다가 보였다. 에스텔라의 표정이 바로 사랑스러워 못 견디는 표정으로 확 바뀌더니 마치 이신다처럼 마차 창문으로 몸을 내밀며 이신다를 향해 과장된 목소리로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이신다!"
"에스텔라!"
이신다가 무척 반색하면서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그 옆에는 에뉴린이 서서 기쁜 마음으로 반기고 있었다. 프레드가가 그걸 보고는 큰일이 난 것 마냥 선글라스를 다시 집어서 썼다.
"어이구, 너희 둘은 선글라스 없이 보면 하나도 못 버티겠더라."
마차가 도착하자마자 에스텔라는 있는 힘껏 문을 열어젖히고는 바로 귀를 찌르는 목소리와 함께 이신다에게로 달려갔다. 안대를 쓰지 않은 에스텔라의 눈은 완전히 회복되어 양쪽 다 보라색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신다! 나 왔다!"
프레드가가 그 광경을 보며 선글라스 속에서 흐뭇한 미소를 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