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 김망난이라고 했소?

내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소."



나의 벗은 말을 이었다.



"그대 말이 맞소.

피리 좋아하던 것도 맞고

병법에 관심이 많았던 것도 맞고

뒷집 소희를 연모했던 것도 맞소."


"그래서?"


"내 아래로 어린 동생들이 있던 것도 맞소.

이제 둘은 독립했지만. 한데...."



벗이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대는 누구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참.


지금 나는 망나니였다.


맹효렴의 막역하던 죽마고우가 아니고.



"나... 는."



말할 수 없었다.


어안이 벙벙해 금붕어처럼 뻐끔거리는 것만 하였다.



"날 아는 게요?"


"알고 있, 아니 모르오.

모르는데 모르는 게 아닐 수도 있고, 저기 그게...."



답답해졌는지 관리도 한마디 거들었다.



"어허, 고해라! 지인이더냐. 어떤 관계였느냐."


"모르는, 아니 아는 사람... 아니 역시 모르는 사람이오.

하지만 아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만 모르는 사람인-."


"바른 대로 말하거라.

지인이라면 죄인, 맹효렴의 처형인을 바꾸는 것이 원칙이니라."


"하지만... 그렇지만...!"



횡설수설. 우왕좌왕.


내 어찌 지인이라 실토하겠는가.

지인이라면 어떤 관계라고 변명할 것인가.

나는 '김망난' 이어야 하는데.


내 어찌 초면이라 거짓말을 하겠는가.

그랬다간 벗을 내 손으로 베야 할 텐데.

나는 '박옥인' 인데.



"이 자는 필히 사형에 처해야 하는 게요? 정말로?"



모두가 끄덕였다.


같잖은 현실부정도 통하지 않았다.


등에서부터 한기가 올라왔다.


한기와는 달리 얼굴에선 땀이 묻어나왔다.


묶여있는 나의 벗이 말했다.



"날 소상히 아는 걸 보니 예전에 이 못난 놈을 도와주신 은인 중 한분이신 보오.

이 분에게 형을 집행케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소?"


"김망난이는 자넬 모른다는데."


"다른 이와 착각한 걸 테지. 김망난 그 녀석이."



이 미련한 친구야.


도왔다면 자네가 날 도왔지, 내가 자넬 언제 도왔겠는가.


냇가에 빠져 죽을 뻔 했을 때도 날 구한 건 자네였지 않은가.


하나 또다시 독촉의 시간은 복귀했다.



"김망난은 어서 죄인의 목을 쳐라!"


"아아아아... 아니 진짜, 아 내 미치겠네."



손에 땀이 났다.


어째선지 검을 쥘 수가 없었다.


메스꺼웠다.



"김망난! 어찌 그리 시간을 끄는 게요!"



덜덜거리는 손으로 검을 잡았다.


내가 살고자 벗을 죽여야 했다.


눈을 질끈 감고 검을 들어올렸다.



"어디선가 연이 있던 모양이오. 이 못난 놈은 기억 못하지만. "


"아, 아니오. 나는 그댈 모르오."



아는 척조차 할 수 없었다.


벗의 최후였거늘.


머리가 띵했다.



"그래도 기왕이면 안 아프게 해줄 수 있겠소? 단칼에."



벗의 부탁은 소박했다.


살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가족을 돌봐달란 말도 아니고,

단지 단칼에 베어달란 부탁.


나는 부탁조차 타협하여 맡겨야만 하는 친구가 된 것이다.



"알았소. 알았소... 미안하오."



연기를 마시지도 않았는데 목이 매캐했다.


가슴은 미어졌다.


벗은 알아들었다는 듯 편안한 얼굴을 했다.



"고맙소."


"잘 가시오. 죄인 맹... 효렴."



벗이 살려주었던 목숨으로 벗의 목숨을 거둬야 하는 배은망덕함.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 앞에서 나는,

비겁하게도 어제 계집의 말을 떠올리며 거짓된 위안을 얻고자 했다.


'괘념치 말아라. 네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했을 게야.'


그래,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했을 것이다.


차라리 다른 사람이 되었다 생각하며 베었다.


열심히 중얼거렸다.


나는 박옥인이 아니다.

김망난도 아니다.

나는 백정이다.

머리 자르는 일엔 도가 튼 백정.



'스걱'

'투욱'

'촤아악'



겨우 벗의 목을 끊어낼 수 있었다.


다른 이가 내가 되지 말란 법도 없었고

내가 다른 이가 되지 말란 법도 없었다.



"후우. 별 거 아니구만요. 긴장해서 손 봤수다."



한번 다른 이가 되어보니

끈적끈적하여 코에 들어오지 않던 공기가 상쾌하게 개었다.


식은 땀도 거짓말처럼 멈췄다.


메스꺼움도 사라졌다.



"빨리 진행하겠습니다요.

다음은 이 양반 목일 테지요?"


"응? 어, 으음.... 맞다네."



상큼한 기분을 만끽하며 칼을 집어올렸다.


오늘의 마지막 죄인.


세번째 죄인이었다.


다행히 이번엔 나의 지인도 아니고 처음 보는 이였다.


뭐, 이젠 지인이어도 상관없지만.



"할 말 있슈? 퍼뜩 뱉으슈."


"사, 살려주시오 처형인 양반. 난 누명이란 말이오...!"


"이거 길어지는 종류구먼요. 먼저 쳐버리면 안 되겠슈?"



얼떨떨해하면서 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백정. 일을 하는 백정.



"잘 가슈. 이영차!"


"커헉!"



4번째 살인은, 아니 4번째 '업무' 는 손쉽게 끝났다.


앞에서 했던 다른 업무들관 달리.



"역시, 진즉 이리 했으면 편했겠구만요."


"어디 가시오 김망난?"


"오늘 일 끝나지 않았수?"



할 일이 끝났다.


퇴근해야지.


관아에 있던 이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잘들 계슈! 다음번 당번 때 또 보십다요~!"



머리 두개만 땅바닥을 굴러다녔다.


보따리를 꾸리고 시장을 향했다.


산뜻한 기분.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업무가 끝났으니 산뜻한 기분인 게 당연하지만.



"흐음 흐흥~. 기분이 고기압이니 오늘은 고기 앞으로 가야겠구만요~!"



소 머리를 하나 사러 갔다.


머리는 먹어본 적 없지만 본능적인 끌림이었다.


없으면 토끼라도 사지 뭐.



"이보슈 주인장! 소 머리나 하나 있소?"


"어서 오세요. 마침 하나 남는 게... 에구머니나 놀래라!"



여주인이 날 보더니 경악했다.



"뭐에 그리 놀랐수?"


"소, 손님 몸에 피가...."



몸에 튄 피도 전처럼 징그럽고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장식품처럼 느껴졌다.


업무와 관련된 장식품이랄까.


빗대자면 목수에게 있어서 톱이나

어부에게 있어서의 낚싯대 같은.



"신경 쓰지 마슈. 일하다 튄 것 입니다요."


"일하다 피가 튀어요?"



여주인이 정성스레 머리를 보자기로 쌌다.


보자기를 왼손으로 받아들며 답변했다.



"그런 일이유. 주인장도 관심 있수?"


"여자도 할 수 있는 일인가 보죠?"


"... 여자는 못 봤습니다요. 듣고보니."



여자도 되려나.


물어본 적이 없으니 모르겠다.


여주인이 내 흉부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쪽도 여자 아니에요?"


"난 예외입니다요."


"대체 어떤 일인데요?"


"칼 쓰는 일이우!"



보자기는 꽤 묵직했다.


짐이 둘이어서 힘든 측면도 있었다.


원래 들고 있던 보자기 하나와 방금 받은 소 머리 하나.


양손에 하나씩 든 채로 뒤를 도니 다른 손님이 있었다.


사내였다.


사내의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몸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


기이하기도 하지.



"이런! 내 너무 오래 떠든 모양이구먼요."



사내의 옆을 지나며 떠들었다.



"실례했수다. 그쪽 용무 보슈."



그러자 사내가 허리를 굽혔다.


세상에, 감사의 인사인 모양이다!


머리가 없어서 말은 못해도 공손한 사람이로세.



*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콧노래 실력 한번 끔찍도 해라-.


아씨가 혀를 차는 소리가 문 밖까지 들렸다.



"왔습니다요. 아씨."



반지하의, 지푸라기로 위를 덮은 집.


집과 땅굴의 중간 언저리 쯤 되는 이 주거지가 우리의 집이다.



"손에 든 물건은 무엇이더냐?"


"시장하여 시장에서 사왔습니다요."



'시장' 하여

'시장' 에서.


히히 아직 녹슬지 않았구만.


아씨는 나의 고오급 익살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에잉 재미 없는 사람, 이거나 받으슈."



오른손에 있던 보따리를 아씨에게 넘겼다.


아씨가 주섬주섬 보따리를 풀더니 히익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이 정신 나간 녀석아! 이걸 왜 들고 왔어!"


"말했잖수. 시장해서 사왔다니까."


"당장 내버려라! 아님 묻어버리든!"


"내가 고기 좀 먹겠다는 게 그리도 불만이슈?"


"먹긴 무얼 먹어! 식인귀 녀석아!"


"식인귀라니. 소고기도 요즘엔 사람 취급 해주슈?"


"네놈 눈엔 이게 소로 보이더냐!"



음식을 가지고 투정을 부리다니.


실로 한탄스러웠다.



"이 아씨는 몸이 꼬마가 되더니 철부지도 꼬마 수준이 되어버렸나."



아씨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보자기를 들었다.


내용물에 손이 닿지 않게 조심조심 신중을 기하며.



"네놈이 싫다면 내가 버리고 오마!"



아씨가 쏜살같이 문 밖으로 나섰다.


아씨는 그대로 보자기를 멀리 던졌다.


화가 났다.


내 돈으로 산 고기였다.


내가 번 수당으로 산 고기였다.


그렇다고 더럽게 흙바닥에 떨어졌던 고기를 주워먹을 속셈은 아니었다.


고기 대신, 나는 아씨를 잡았다.


아씨가 고기를 잡았으니, 나는 아씨를 잡는 것이다.



"이 놈의 꼬맹이가 보자보자하니까...."



아씨의 배를 쳤다.


어린애처럼 약간 볼록하게 튀어나왔던 배가 움푹 꺼졌다가 다시 제자리를 되찾았다.



"커흐윽, 꺄아아악!"



아씨가 시끄러웠다.


나머지 하나의 보자기를 풀었다.


안에 있던 소머리는 달리 옮겨두고 우선은 보자기만 챙겼다.



"꽉 무슈."


"싫다, 집어치워... !"


"꽉 물라니까. 마을사람들이 시끄럽다 하겠슈."



나는 아씨에게 보자기를 물리고 매우 쳤다.


요란하던 주둥이가 움직이지 않으니 통쾌했다.


아씨는 움직이지 못하는 입을 대신해서 몸을 떨었다.


한번 맞을 때마다 몸을 비트는 아씨.


그대로 아씨를 밧줄로 묶고 잠들었다.


잠이 깨서야 내가 한 일을 돌아볼 수 있었다.



"미안하오, 미안하오 아씨. 내가... 정신이 나갔나보오."



아씨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와 동시에 내가 죽인 이들에 대한 죄책감도 밀려왔다.


잠이 들기 전까진 상쾌함만 느껴졌는데.


실감할 수 있었다.


내가....



"내 잠시동안... 정신줄을 놓았었나보오."


"됐다. 이제 안 아프니."



아씨는 멍투성이로도 자비로웠다.



"마음은 이해한다. 나도 예전에 괴로웠으니."


"아씨...!"


"누구라도 회까닥할 수 있는 게 그 자리지. 암."



아씨가 읊조렸다.


아씨가 어린애다운 곱고 작은 손으로 내 머릴 쓰다듬었다.


그러나 자애로운 아씨와 달리 나는 미치광이 밖엔 될 수 없었다.


처형을 하는 날이면 다시 회까닥하여 아씨를 팼다.


밧줄로 묶어두고.



"김망난이, 밤마다 시끄럽던데 무슨 일 있나?"


"글쎄유. 잘 모르겠습니다요."


"누가 자네 집 문을 다 두드린다고."


"참말로 몰라유."


"계집애의 비명소리 같은 것도 들리고."


"제 잠꼬대일 겁니다요."


"하긴 자네도 이젠 계집이지 참."


"의심되면 한번 들어와서 보시겠슈?"



폭력에 열중하던 와중 집에 손님이라도 찾아오면

집 아래로 뻗어놓은 구덩이에 아씨를 던져놓으면 그만이었다.


아무도 아씨를 발견하지 못했다.



"다 아씨를 위한 겁니다요."



하루는 아씨에게 국을 먹이며 말했다.



"생각해보슈.

아씨가 만일 내게 앙갚음이라도 한다고 관아를 찾으면 어찌 되겠습니까요."



그 즈음의 아씨는 이미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아씨는 '때리는 나' 가 된 내 앞에선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얌전한 나' 앞에선 한사코 친절하면서도.



"아씨의 입장은 지금 사형수입니다요. 걸리면 곧장 죽지 않겠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씨는 기진맥진하여 내가 떠주는 국을 받아먹기 바빴다.



"그 씩씩한 눈도 간데 없고 아주 순둥이가 됐구먼요."



*



구타가 끝나면 다음날 상은 호화롭게 차리곤 했다.


아씨에 대한 죄스러움이 담긴 행위였다.



"미안하오. 또 내가...."


"괜찮대도."



멍투성이 작은 아씨가 말을 덧대었다.



"나 아니면 달리 누가 네놈을 이해하겠느냐."


"아씨...."



때리고 화해하고,

다시 때리고 화해하고.


반복되는 나날 중 그날은 '화해하고' 의 날이었다.


말인즉슨 내가 정신줄을 놓지 않은 날이었단 뜻이었다.


그날은 정신줄을 놓지 않은 나에겐 위협적인 자극이 들어왔다.



'탕탕탕'


"누구시오?"


'탕탕탕'


"누구냐니깐."



성을 내며 문을 열어젖혔다.


문 밖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오랜만이오."


"누구시오?"



익숙하면서도 기억은 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 자는 남자였는데, 부자연스럽게 키가 컸다.


발까지 내려오는 붉은 색 망토로 온몸을 숨겨 복장을 고르는 솜씨는 알기 어려웠다.



"날 기억 못하는 게요?"



누구였던가.


낯이 익었다. 자주 본 얼굴은 아닌 듯 했음에도.


떠올릴 수록 숨이 턱턱 막혀왔다.


미지의 위화감.


사내가 실망한 듯 말했다.



"위치상 어쩔 수 없는 역할이었을 뿐,

그대도 냉혈한은 아니리라 믿었건만...

내가 틀렸나보구려."


"이름을 말해줄 수 있겠소? 어디서 뵀는지 가물가물하오."


"이름은 밝혀도 모를 테요. 이거라면 기억이 날 테지."



사내가 망토로 덮어두었던 자신의 아랫도리를 보여주었다.


사내의 배꼽 언저리는 붉게 물들어있었다.


배꼽 아래론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상반신만 둥실둥실 떠있었던 것이다.



"다시 묻겠소."



떨며 사내의 상반신을 다시 올려보았다.



"날 모르겠소?"



흙과 사내 자신의 피로 범벅이 된 상반신이었다.



"아... 꺄아아악!"



알고 있었다.


사내가 누구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서둘러 문을 닫았다.


문 너머에서 사내가 주절거렸다.



"떠올랐나보구만. 잊지 마시오. 열흘 남았소."



열흘의 의미를 되짚어볼 여유는 없었다.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는 데에만 열중했다.



"환각이야. 분명 환각이다."



가슴에 손을 얹었다.


가슴 아래로 손이 파묻혔다.



"환각이다. 환각이어야만 해. 괴력난신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어."



시야가 울렁거렸다.


시선을 집 안으로 거두었다.



"누구였느냐?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로구나."


"아무 것도... 없었소. 아무 것도 아니었고."


"바람소리였나보구나."


"그래, 바람소리였을 것이오. 내가 헛것을 본.... 엇?"



더 쉽고 더 편안한 쪽으로 믿으려고 했다.


말을 멈추었다.


집 안의 어둡고 퀴퀴한 벽엔 못 보던 것이 수놓여 있었다.


눈에 들어온 '그것' 은 아씨의 짓은 확실히 아닌 듯 보였다.


내 건 더더욱 아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