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요약




*

뒷산 계곡 아래 정자.


첫인사는 조촐했다.



"이제 왔소? 한잔 드시오."



이제 왔소.


내가 오리라 예측한 듯한 말.


자존심 상하는 재회였다.



"그럼 수락한다는 뜻으로 이해하겠소."



고개를 끄덕였다.


권력가 사내가 손짓하자 주위의 사람들이 물러갔다.


사내가 물었다.



"혹시 그대, 꿈이 있소?"


"소녀의 꿈이라면 배부르고 등 따신 곳에서 한평생을 사는 것이올시다."



꿈? 꿈은 지금의 내겐 사치다.


개똥밭이라도 이승에 어찌 남을까를 고민해야 하는데 어찌 꿈 따위를 논하리.


나는 냉소적으로 답했다.


사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없나보구려. 내게는... 아니 소승에겐 있소."



소승?


기이함에 머리를 기울였다.



"소승은 꿈이 있소."


"귀족의 자식과 그 노예의 자식이 같은 식탁을 쓰는 꿈이라도 되시오?"


"그런 것까진 바라지도 않소. 다른 꿈이지."



사내가 술을 털어넣었다.


꿈의 내용까진 말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한데 꿈에는 시련이란 놈이 붙기 마련이오."


"답답하게 구네.

그 시련이란 녀석과 천경림과는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시련을 넘기 위해선 천경림을 없애야 한다오."


"천경림을 없... 없, 무어라?"



믿기 힘든 말이 떨궈졌다.


눈이 휘둥그래졌다.



"제정신이오? 귀족들이 댁을 죽이려 들 게요!"



천경림天鏡林.


'성지' 란 말로 더 쉽게 통용되는 숲.


흐드러진 물가 위에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우거진 숲이다.



"신령이 깊든 숲이오! 다들 천경림을 그리 믿고 있지 않소!"


"다들이라 하니 그대는 아닌가보구려."


"말 돌리지 마시오! 귀족들이 노발대발 할 것이오!"


"그래, 아마 처형되겠지."


"맞소! 처형될 게요! 목숨이 아깝지 않은... 아."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이 사내는 '사내 자신의 처형' 에 대한 부탁을 하러왔었다.


그런 속셈이었나.


사내는 빙그레 웃음을 띄웠다.



"알아챘나보구려. 바로 그거요."


"하지만 그 거대한 숲을 무슨 수로 없앤단 말이오?"


"없앤단 말은 비유요. 사라지는 건 오직 천경림의 이理에 한할 지니."



오호라.


이 양반, 더 이상은 망나니 나부랭이한테 알려줄 마음이 없단 게로군.


사내와 어울리며 나도 술잔을 너무 기울인 걸까.


살짝 본심이 드러났다.



"사실 피 보는 일은 이젠 두렵소.

당일은 차라리 다른 이에게 맡기고 달아날까 고민 중이었소."


"그래서야 곤란하오. 이런 이야기를 쉬이 발설할 수 없는 노릇인데."


"그리 보이오. 확실히."


"부탁하오. 다른 방법은 없소.

내 죽더라도 이 꿈을 이뤄야 하는데."


"하면 나도 꿈을 밝히겠소."



벌겋게 올라온 얼굴에 술 한잔을 더 쏟아붓는다.


술이 쓰다.



"죽기 싫소.

죽이기도 싫고."


"팔팔히 살아있지 않소?"


"이틀 후에도 살아있고 싶소."


"무슨 말이오?"


"이틀 후가 되면... 아니, 자시가 지났으니 하루구려.

내일이 되면 끝날 목숨이란 말이오."



이런저런 이야길 털어놓았다.



"그래서... 부적도 통하지 않았고."



원혼에게 고통 받는 이야기나



"사람을 가르면 의외로 쉽게 갈라진다오.

그걸로 끝인 거지. 그자가 어떤 인생을 살았건. 어떤 성품을 지녔건.

내가 칼 한자루로 끝내고 만다는 게요.

그딴 무례한 방식으로 한사람의 역사를 빼앗아버리는 게요."



옛 벗을 베고서야 깨달은, 망나니 짓거리의 무서움이나.



"어쩌면 다 헛것이었을지도 모르오.

전부 헛것이고 눈 뜨고 꾸는 꿈이었던 걸지도 모르오.

나 자신은 반쯤 광인이 되어버렸으니."



사내는 잠자코 내 투정을 듣고 있었다.



"처음 광인을 만났을 땐 질색했소.

처형, 그 무시무시한 걸 웃으며 말하더군.

한데 언젠가부터 나도 광인이 되어있었소.

그저 일신의 보신을 꾀했을 뿐인데... 어쩌다 이리 되었는지 모르겠소."



계곡 물이 흐르는 소리와 잔 기울이는 소리만 났다.



"죽고 싶지 않소.

죽이고 싶지도 않고."


"받으시오."



사내가 품에서 팔찌를 꺼냈다.


구슬을 엮어 만든 팔찌였다.



"이게 무엇이오? 주주呪珠?"



주주呪珠.


빌 주呪 , 구슬 주珠.


빌고 저주하는 구슬. 신통한 힘을 발휘한다는 구슬이다.


도사들이 도술을 담아서 들고 다닌다던가.



"내, 힘 좀 써봤소.

지니고 있으면 안전할 게요."


"도사였소?"


"도사는 아니외다."



사내가 일어섰다.


멀리서 동이 터오고 있었다.


헤어질 시간이었다.



"'죽이기 싫다' 도 달리 힘을 쓸 것이오. 안심하시오."


"고맙소. 이름이 어찌 되시오?"


"처형할 때 듣지 않겠소?"


"미리 듣고 싶소."


"박염촉. 성은 박, 이름은 염촉이오."



사내와는 그렇게 헤어졌다.


집에 돌아오며 그제서야 깨달았다.


눈물이 말라붙어있었다.


언제 운 걸까 싶었다.



"아씨, 나 왔소."



집안은 숙연했다. 어둡고.



"주무시오?"



아씨가 작은 몸으로 바닥에 누워있었다.



"허허, 이 아씨 참... 사람이 왔는데 세상 모르고 주무시는군."


"으햣!"



가까이 다가가니 아씨가 번쩍 눈을 떴다.


아씨가 황급히 일어섰다.



"미, 미안하다! 졸려서... 너무 피곤해서."


"그 몸으로는 졸릴 만도 하지. 괘념치 마시오."



아씨는 내 말에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아씨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거리를 두며 말했다.



"잘못했느니라. 때리, 때리지 말아다오."


"예?"


"아아니, 적어도 다리를 때려다오. 멍이 낫질 않아 아직도 눈은 아프니라...."



아씨는 내게 겁을 먹고 벌벌 떨고 있었다.


아씨에게서 내 지난날의 발걸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죄인을 떨게 하는 처형인이

이젠 죄인의 앞에서 몸을 떠는구나."



현실에서 쓴 맛이 났다.


아씨에게 몹쓸 짓을 해왔구나 싶었다.


너무 오래도록 미쳐있었구나 싶었다.


하긴 외출하고 돌아온 날엔 곧잘 아씨를 팼지.


당연한 반응이겠구나.



"죄인 시절엔 한번쯤 망나니란 작자들에게 복수해주고 싶었건만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군."



이런 식으로, 이런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형식으로.



"적어도 손찌검으로 해다오. 도구는, 도구는 부디...!"



두려움이 아씨를 집어삼켜 아씨는 예사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나는 아씨를 끌어안았다.


등을 토닥였다.



"아씨 괜찮소. 지금은 아니오. 괜찮소."



아씨는 날 여전히 신뢰하지 못하였다.


안긴 후에도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으니까.


그래도 계속해서 등을 쓰다듬었다.


그런 것 밖엔 할 수 없었다.



*



몇시간 지나지 않아 약속했던 순간이 도래했다.



"죄인 박염촉, 사인舍人에 직책을 맡은 자가

천경림의 나무를 베고 어명을 사칭했으니 죽어 마땅하다."



두려운 시간의 재림이었다.


죄인은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내가 아는 죄인이었다.



"처형인은 검을 들어라!"



힘겨이 칼을 올렸다.


약해지지 말자.


약속하지 않았던가.


베겠다고.



"죄인 박염촉,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는가?"


"나는 불법을 위해 형장에 나아가지만 부디 정의와 이익이 일어나기를 바랄 뿐이오."



그 다음 구절은 무척 익숙한 구절이었다.


전생에 한번쯤은 들어봤던 구절.



"부처님께서 만약 신령함이 있다면 신이 죽을 때에는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당황하여 나는 말을 더듬었다.



"다, 당신 이름이 염촉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렇소. 박염촉."


"하온데 어찌...."



내 궁금증이 풀리기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누군가 외쳤다.



"죄인의 목을 쳐라!"



그 말을 시작으로 "쳐라" 라며 주변에서 일제히 소리쳤다.


밀도 높은 고성에 개개인의 말소리는 파묻힐 정도였다.


무언가 전하려던 박염촉은 포기한 듯 허허 웃었다.



"미안하오."



검을 든 손에는 여전히 식은땀이 한가득이었다.


박염촉은 침묵으로 답을 대신하였다.


'미안할 게 뭐 있소' 라는 표정이었다.


인자한 얼굴에 평소의 토할 듯한 느낌도 없어졌다.



"잘 가시오... 나리."


'석둑'

'푸확'



척수액이었을까.


피가 솟아오르기 전, 흰 액체가 잠시 튀어올랐다.



*



밤이 되어서 이변이 생겼다.



"계시오?"



탕탕탕-.


평소처럼 문이 두들겨진다.


주주呪珠, 아니 나리가 줬으니 염주였겠지.


염주를 돌렸다.



"하아... 효렴아. 날 지켜다오."



후들거리는 다리를 내딛었다.


어차피 내가 문을 열지 않으면

저쪽에서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게 뻔했다.



"염촉... 박염촉 나리. 나리를 믿겠소."



조심조심 문을 밀었다.


낡은 소리를 내며 문이 몸을 비틀었다.



"이제야 나오는군! 오늘이 마지막이란 걸 기억하시오?"



이번에도 허리 아래가 없는 그 사내였다.


내가 허리를 베었던 그 죄인.


입을 벌릴 적마다 피가 꿀렁꿀렁 쏟아지지만 틀림 없이 그 사내였다.



"기억하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받아쳤다.



"도망가지 않고 맞서는 꼴이 용기 있구려. 칭찬해주겠소."


"칭찬해주는 김에 살려주면 안 되겠소?"


"아니 될 말이오."


"이래도?"



염주를 내밀었다.


원혼은 코웃음을 치며 염주를 밀어냈다.



"날 너무 우습게 보는 게 아니오?

차라리 전에 썼던 그 부적이 더 신통하겠구려."


"그, 그렇소? 믿을 만한 사람에게서 받은 물품이었는데."



뭐야 이거. 못 써먹는 거야?


염촉 나으리, 어찌 내게 이럴 수가 있소.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하나 좌절은 하지 않았다.


염주를 지니는 것만으로도 왠지 마음이 평안해졌다.



"한데... 그거 아시오?"


"뭘 말이오?"



후우-.


숨을 골랐다.


쿵쿵거리는 심장을 억지로 가라앉혀야 했다.


얼굴은 태연하게. 발은 재빠르게.



"저기 누가 불 질렀구려."


"불? ... 어디 말이오. 안 보이는데."



냅다 달렸다.


있지도 않은 불에 정신이 팔려서 뒤를 돌아본 원혼은 버려두고.


원혼은 금새 상황파악을 마쳤다.



"날 속인 게요?"


"속은 사람이 바보인 게요!"


"이런 야비한... 그래도 그대는 좀 낫다고 생각해왔건만!"



원혼이 분통해하였다.


밤의 찬 공기 앞에 혓바닥을 내밀어주었다.



"허리도 없는 그대가 어쩔 게요?

이 튼튼한 두 다리를 따라올 수나 있겠소?"


"해보자는 게요?"



원혼이 "하앗!" 하고 힘을 주니 몸이 높이 떴다.


원혼은 그대로 망토를 펄럭이며 날아왔다.


매섭다. 무섭다.


이를 악물었다.


치맛자락을 들어올리고 뛰었다.



"거 잘도 뛰는구려!"



딱-.


원혼이 손을 퉁겼다.


원혼의 곁에 있던 나무 한그루가 싹둑하고 잘렸다.


거목이 위아래가 분리되는 모양새는, 끔찍한 기억을 되살렸다.


죄인의 허리를 분리시키던 때가 떠올랐다.



"그걸로 다른 망나니들의 목을 벤 것이오?"


"자른 건 동료들이외다!"



기술 자첸 다르지 않단 말이로구나.


말인즉슨 나도 걸리면 끝장이란 게다.


달리던 와중에 돌부리가 보였다.



"흐읍!"



두발을 모아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생쥐 같은 사람을 다 보겠군!"


'딱-!'


'서걱'



뛰자마자 돌부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호에익!"



그는 내 발을 자를 심산이었다.



"이 놈!"


'따악-!'


'싸악'



허공이 찢기는 소리였다.


머리 위 머리카락이 한 올 떨어졌다.


이번엔 머리를 떨굴 작정이었던 것이다.



"내 잘못했소, 살려주시오!"


"사과해서 끝날 거면 관졸은 필요 없소!"


'따악-!'


'사각'



손에 들고 있던 염주의 끝자락에 맞았다.


'촤악' 하며 염주의 줄이 끊어졌다.


염주에서 빛이 났다.


한낮의 태양마냥 강한 빛.



"큭, 눈부시게... 이 무슨 잔재주요!"



원혼은 손으로 눈을 가리며 허우적댔다.


앞을 보니 미완성의 건축물의 터가 있었다.


딱 바람 막이 정도의 역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수행하지 못할 허접한 진행 상태.



"나오시오. 응당 나오시오!"



그럼에도 눈속임을 하기엔 충분했다.


원혼이 고레고레 소리 질렀다.



"나오란 말이 안 들리는 게요!"



어처구니 없는 독촉에

호흡을 진정시키며 중얼거렸다.



"나오란다고 나오는 바보가 어디 있겠소...."


"김망난!! 동이 터서야 나올 것이오?!"



나 김망난 아닌데....


동이 트면 어찌 될까.


원혼은 낮에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낮에는 나타날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리만 되면 살아남는 게로군."


"김! 망! 난! 부끄러움도 없소!"



원혼이 나타난 시각부터 인시, 한 시진 동안 열심히 버텼다.


인시가 거의 끝났을 테다.


묘시면 해가 뜬다.



"살자. 살아남자."



실이 끊어진 염주의 알을 잡았다.


품에서 부적을 뒤적였다.


아직 서너장 있을 터, 시간은 끌 수 있겠지.



'부스럭'


"아."


"김! 망! ... 난."



고성을 삽시에 멈추고 원혼이 고개를 돌렸다.



"그쪽이오?"



내가 있는 방향이었다.



"아니 되지, 어찌 경거망동을-."


'따악-!'


'써걱'



바람막이로 삼고 있던 기둥이 반으로 잘렸다.


그는 느긋이 말을 이었다.



"-하시오?"


"에잇!"



되는 대로 부적을 던졌으나 원혼에겐 닿지 않았다.



"누가 그런 뻔한 수작을 당하겠소."


'따악'


'사각'



닿기도 전에 찢어져 땅에 떨어졌기에.



"아, 아으으...."



뒷걸음질을 쳤다


발이 멈추었다. 무언가에 닿아서였다.



"더는 도망도 못 가는-."



확인해보니 향후에 동상이라도 얹어질 듯한 단이었다.


금속으로 만든 단.


퇴로가 막혔다는 뜻이었지만 쾌제를 부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하, 하하... 히히, 하하하!"


"무엇이오. 실성한 게요?"



원혼이 귀찮다는 눈으로 물었다.


멀리 손가락을 가리켰다.



"저어기 불이 났소. 이 쇳덩이에 비쳐보이더군."


"한번 속지 두번 속겠소?"


"글쎄, 참말이라니까."



원혼이 한숨을 쉬며 손을 퉁겼다.



"끈덕진 사람 같으니라고."


'따악-.'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원혼의 눈이 튀어나올 듯 하였다.



"뭣, 어째서?"


'따악-!'


'따악-!'


'딱-!'



몇번을 퉁겨도 단지 손가락이 퉁겨지는 소리만 났다.


그 무엇도 잘려나가지 않았다.


어안이 벙벙해진 원혼에게 말해주었다.



"말했잖소. 참말이라고."



그제서야 원혼을 뒤를 보았다.


밤의 검던 하늘은 아침의 푸른 하늘로 개어가고 있었다.



"김망난...."



원혼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끝났다 생각하지 마시오."



원혼이 점점 흐려져갔다.



"비록 내가 사라지더라도

그대가 살아있는 한, 그대에게 한을 품은 혼은 끝없이 생겨날 테니."



원혼의 마지막 말이었다.


망나니란 직업에 대한 경고이리라.


그리 판단했다.



"후우, 허, 참."



비틀거리며 걸음을 떼니 단에는 불상이라고 적혀있었다.


아마 불상이 올라갈 계획이었겠지.


유심히 보니 건축물의 기둥에는 다른 글자도 써있었다.



"이게 뭐야, 박염촉 시공?"



별 장난질을 다 쳐두셨군.


땅에 떨어졌던 염주의 구슬을 주워모았다.



"살인, 관둘 것이오.

걱정 마시오."



아침 해가 소란스럽게 나무쪼가리들을 비추었다.



*



"이제 됐느냐?"



화창한 점심, 아씨가 날 재촉했다.



"이 사람까지 만들면 끝이오."



살며시 흙덩이를 덮었다.


안은 공허한 흙덩이였다.



"네 놈도 독특하구나. 나는 이런 건 상상도 못했건만."


"다들 상상도 못하는 걸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게 이 몸이오.

어찌, 이 점에 동경하고 전율할 만하지 않소?"



무덤이었다.


내가... 처형한 이들의 무덤.


유족들이 알아서 그들의 무덤을 만들긴 했겠지만 나는 나대로 만들고 싶었다.


만드는 김에 여자가 되기 전의,

'살인자 박옥인' 시절에 내가 죽였던 이들의 묘도 만들었다.


그때의 충동적이던 살인도 지금 돌이키자면 무게감이 느껴졌다.



"입은 살았구나."



아씨가 말했다.



"이제부터 어찌 할 게냐?"


"박염촉 나리가 윗선에 어찌 건의를 한 지는 모르겠지만...

더는 처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오."



일어서려는 마당에 지지대가 없어서 무심결에 아씨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아씨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얼굴도 일순간 퍼렇게 샜다.


아씨를 때리지 않게 된 지 벌써 한달째인데

아직도 마음의 상처가 남아있는 건가.


시큰해지는 가슴 한구석을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다른 일을 해야겠지."


"무, 무, 무슨 일 말이더냐?"



아씨가 자신의 작달만한 주먹으로 가슴을 억눌렀다.


필시 티 나지 않게 진정하려는 것이렸다.


다 들켰지만.



"여러 곳을 떠돌며 장사는 어떨까 싶소."



여러 경험을 하다보면 마음의 상처가 아물 테니까.


나도, 아씨도.



"이를테면?"


"이를테면...

그래, 아씨는 백제 가본 적 있소?"


"있겠느냐.

한평생을 서라벌에서 살았는데."


"가봅시다.

가서... 배불리 먹고, 신기한 건 구경도 하고.

여기 물건은 좀 사가서 팔기도 하고.

그러고 삽시다."



걸음을 뗐다.


새로이 줄을 맞춘 염주가 찰랑였다.





*

말하는 걸 깜빡한 작중 tmi.



작중 두 ts녀의 집.
잘 보면 반지하 느낌 좀 있음.
"엥 그거 청동기 때나 쓸 법한 디자인 아닌가요?" 
의외로 이거 오래 썼다고 하더라고요.
작중 시간대가 527년 즈음이니까 사극풍의 흙벽집 같은 거 나오려면 한참 멀었음.
작 초반에 나온, '집 아래로 땅굴을 파, 방을 만들었다' 는 묘사는 그런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