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사람을 죽였다.




 "태풍은 내일 온대." 

 나는 대뜸 이렇게 말한다. 너는 고개를 천천히 한 번 끄덕인다. 딱히 특별한 반응을 기대하지는 않았으므로 대화는 끝이 난다. 시작하지도 않았다고 해야 하나? 네 시선은 창밖에 못 박혀 있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에서 나선으로 요동치는 짙고 어두운 먹구름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다.


 네가 보고 있는 것이 저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얼핏 네가 웃었다고 생각한다.




 너에게 있어서 오늘은 유쾌한 날이 아니다. '유쾌하지 않다.' 는 실제를 몇 단계 희석한 유의어이긴 하지만 비속어는 중요한 대목을 위해 아껴둬야 한다. 핵심은 행복을 느낄만한 하루는 절대 아니었다는 점이다.




 출근길에서. 사나운 소나기가 너를 맞이한다. 꼬리에 비를 매단 바람이다. 타고난 천성 탓에 전우보다 부지런한 너는 여느 때처럼 0721i에 생활관을 나선다. 무모하게도 그것의 세력이 가장 강할 때에 파란색의 앙증맞은 우산 하나에 의지한 너를 바람은 격하게 환영한다. 부대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길게 깔린 주도로에 첫발을 디디는 순간 빗줄기가 몰아친다. 바람은 이리저리 날뛰며 너를 때리고, 핥고, 물어 뜯고. 너는 우산의 볼록한 면을 정면으로 세워 자기 보호를 시도하지만 변화무쌍한 기압의 지휘를 받은 수억 물방울 병사의 진군을 막아낼 재간은 없다. 너는 속절없이 젖는다. 네 잘못이다. 10분만 기다렸다면 출근길은 쾌적했다. 우산은 쓸모가 없다. 비가 한 방향이 아니라 사방에서 날리기 때문이다. 너는 결단을 내린다. 겨우 부대에 도착할 무렵에는 네 허리 위와 달리 허리 아래는 잔뜩 물을 먹어 무겁고 축축하다. 너는 계단에 유광 구두를 도끼처럼 쾅쾅 내리찍으며 2층으로. 교육장으로 올라간다.


 오전의 교육장에서 너는 일기를 쓰고 있다. 교육장은 자기 계발에 좋은 장소이다. 푹신한 매트가 몇 개 떨어져 나갔어도 그런대로 살점이 남아있는 철심 소파와 너에게 알맞은 높이의 책상이 있다. 네가 애용하는, 다리에 바퀴가 달린 일인 전용 의자도. 바다와 정박한 배를 배경으로 하는 창문도 있고...아무렴 너에게는 다 피상적인 요소일 뿐이겠지만 그래도 이런 환경은 도움이 된다. 너무 세련되지도 후지지도 않은 미묘한 조성은 자연스럽게 안락하다. 천생 귀족이라면 또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부대에 그런 멍청한 나르시스트는 없으니까. 내가 있는 자리에서는 네 눈의 꼭짓점이 얼굴선에 간신히 걸친 정도로만 비스듬한 뒷모습이 보인다. 푸른색의 골판지 표지를 받침대로 삼고 열심히 움직이는 샤프도 네 팔에 가려져 꽁무니만 실룩인다. 그렇다 해도 네 손과 도구가 서로 감응해서 추는 왈츠는 침착하고 유연하다. 무언가에 침잠하는 모습. 침잠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아름답다.


 그리고 그 때. 민 하사가 1층에서 너를 부른다. 너는 그 즉시 입술을 깨문다. 범세계적인 표현의 자유를 제공하는 병사는 힘을 잃고 쓰러진다. 나는 네가 지은 표정을 알고 있다.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감정을 최소한의 예의로 가장할 때 으레 쓰는 가면. 언젠가 내가 실없는 농담을 던지자 넌 무관심을 솜씨 좋게 감춘 미소를 지어주었다. 지금 너는 사활의 노력을 끌어 모아 입술에 단단한 호를 그린다. 이제 네 근육은 미소를 흉내 내고 있다. 그래. 누가 뭐래도 우리는 문명인이고 사회인이다. 타인과 부대끼려면 아부와 거짓은 반드시 필요하고 상대가 민 하사라면 더욱이 그렇다. 기저에 산성 용액이 고깃국처럼 펄펄 끓으며 살가죽을 들썩이게 해도 너는 네 충동을 죽이고 평평하게 다져 충직함을 연기할 것이다.


 민 하사는 너에게 청소를 시킨다. 너는 질책과 화풀이를 그럴듯하게 가장한 수많은 질문에 어차피 정해져 있는 답을 그대로 읊는다. "이래서 돼, 안 돼?" "안됩니다." "실전 나도 그렇게 할 거야?" "아닙니다." "그럼 네 잘못 맞지?" "네.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죄송하면 군 생활이 끝나?" "아닙니다." "썩을 놈." 너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넌 무엇도 잘못하지 않았다. 더럽힌 적도 없다. 더럽지도 않다. 민 하사가 너를 집어서 작업을 시킨 진짜 이유는 단지 너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일주일 전에 너는 집안의 재판 문제로 부모님을 만나 부대 밖으로 나가 서류를 뗐었다. 외출증을 받는 복잡한 절차도 생략하고. 민 하사는 그런 종류의 특혜를 인정하기에는 너무 원칙주의자이다. 돌아온 너는 그저 휘갈긴다. 샤프심이 강도 높은 노동에 항의의 비명을 지르며 부러진다. 손가락 힘을 욱여넣은 거칠고 투박한 손놀림이다. 너는 샤프를 무기로 종이와 주먹다짐을 한다. 허리가 잘려 그만 일기에 몸져누운 문단에 맞지 않는 글씨체가 강제로 이식되고 봉합된다. 원래 쓰려했던 내용에서 분명 변질되었겠지. 네가 보인 일련의 행동은 네가 겪은 일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말해준다. 재판의 결과까지도.




 기억하지? 너는 사람을 죽였다. 이건 맥락이다. 하루 치의 불행은 너를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게 한 다음 자그마한 틈새를 남겨 놓는다. 정확히 들어맞는 딱 한 번의 실수면 족하도록.




 오후가 되자 태풍을 대비하여 모래주머니를 옮기라는 지시가 떨어진다. 병은 간부의 지휘에 따라 모래주머니를 이고 나른다. 너는 부지런하므로 가장 먼저 동참한다. 양손에 하나씩. 합해서 두 포를 들고 건물의 옆구리와 머리와 구석에 딸린 반지하 창고를 누빈다. 일정한 박자에 맞춰 맥동하던 네 호흡은 점점 가빠지면서 폐활량의 포르티시모와 피아니시모를 넘나든다. 모래주머니 군락에 열두 번째로 올 즈음 너는 고장 난 메트로놈처럼 불안정하게 똑딱거린다. 네 잘못이다. 넌 평소에 운동을 소홀히 했고 여섯 번째에 이미 한계였다. 나는 그보다 전에 너를 말렸고 너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거절했다.


 전우들은 네 억척스러운 고집에 혀를 내두른다. 나는 어렴풋이 짐작한다. 너는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다만 자기만족이었다. 자신이 쓸모 있다는 확신. 거듭하여 가면을 쓴 결과 닳을 대로 닳아 버린 자존감의 회복. 어렵고 힘든 시기에는 늘 존재의 당위성을 부여하는 증거가 필요한 법이다. 민 하사의 눈초리를 피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몇 시간이 지나고 작업이 끝난다. 모래주머니는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할당된 위치를 지키는 병사로 탈바꿈한다. 교육장이 모처럼의 휴식에 신이 나서 재재거리는 소리가 가득 찬다.


 여기서 나는 내일 태풍이 온다고 말한다. 너는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고개만 끄덕인다. 창밖의 풍경은 중심부터 캄캄해진다. 그 옆을 서글픈 미소가 스친다.


 일주일 전이었다. 네가 오전에 나가서 오후 일과를 통째로 빼먹은 그날. 교육장에서 나와 전우들은 응당 그래야 했던 것처럼 이야기의 주제로 너를 꺼냈다. 동정과 질시가 반반인 대화는 물이 흐르듯 네 가족이 치러야 하는 재판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뭐가 급해서 네 부모님은 너를 부대에서 빼내셨을까? 무슨 마술을 부렸길래 꺾인 작대기와 금강석을 설득했을까? 누가 병장도 전염병이 퍼져서 휴가를 못 나가는 판국에 고작 일병이 꿀을 빤다고 투덜댔고, 넋두리를 신호탄으로 다들 일시에 너를 헐뜯기에 열중했다. 남의 일거수일투족을 논하는 일에 박탈감은 언제나 사실 관계보다 앞서니까. 없던 살도 붙이는 군인 특유의 상상력과 사디즘은 어느덧 널 고급 와인 속을 헤엄치는 살찐 새우로 만들었다. 


 우리만의 유언비어가 한창 무르익어 경 상병이 네 이름을 비틀어 저속한 농담을 뱉으려 한 찰나에. 네가 도착했다. 교육장의 문이 벌컥 열렸고 무지하기에 떠들 수 있었던 우리는 네 죽어있는 낯빛에 꽁꽁 얼어붙었다. 교육장이 오롯이 병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면 상스러운 비방이 오고 갈 일도 없었겠지. 너는 또렷이 들었다. 당황한 경 상병은 어색하게 너를 반겼다. 오래전에 밀쳐두었던 동정을 서둘러 집어 들고서. 그 먼지 낀 동정. 남보다 낫다는 우월감과 혀만 차고 마는 비겁함의 역겨운 혼합물이란.


 하지만. 젠장. 너는 빌어먹게 사회인이었다. 진즉에 동이 났을 인내심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서 완벽한 가면을 만들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너는 나갔다. 너를 쫓은 사람은 나였다. 경 상병이 네가 할지도 모르는 신고에 겁을 먹고 일어서려 했지만 내가 빨랐다. 나는 너와 친했으니까. 잘 이야기 해보겠다고 설득했다. 사실은 나도 수치에 절어서 나 자신을 변호하려 했던 것을 그렇게 포장했다. 너는 흡연장에 있었다. 모래주머니의 원래 거처. 밀집한 타르 냄새와 나무들. 건물 어디에서 봐도 시야가 닿지 않는 움푹 들어간 공간에 의자도 있었다. 은밀한 대화에 제격인 곳이었다. 내가 달려오자 너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일기 쓰는 거. 그만 둘까봐."

 너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진지했다. 나는 마땅히 대화의 무게추를 넘겨주었다.

 "갑자기 왜? 일기는 너한테 되게 소중한 거잖아."

 "으응. 꼭 감정 쓰레기통처럼 쓰고 있는 것 같아서..."

 네 목소리는 아련하고 화가 나 있었다. 둘이 어떻게 동시에 가능한지 알 수가 없었다.

 "일기는 그래도 되는 거 아니야? 너만 보는 거잖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만 안 끼친다면. 나는 이 말을 입에서 굴리다가 뱉지 않고 삼켰다. 얼마나 모순적이고 허황된 문장인지. 너는 내 얼굴을 보다가 목을 지나 가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내가 투명 인간이라면 시선의 궤적은 분명 음식물의 궤적과 일치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지도 몰라. 근데 그건 옳지 않아."

 너는 곧바로 이어서 덧붙였다.

 "오늘 일은 일기에 못 쓸 거야."


 너는 네 이야기를 해주었다. 말해서는 안 되는 비밀일 터인데...어느 추리 소설 작가가 비유한 심술궂은 작은 악마가 너에게도 붙어 있었다. 다만 너는 다른 종류의 인상적인 비유를 들었다. 가면 안에 눈물이 들어차면 결국 가면도 운다고. 친가는 도박 빚에 시달렸다. 유산이 없지는 않지만 상속 받을 만한 가치는 없으므로 빚을 갚기도 요원했다. 아버지의 형제들은 외가의 피를 이어받은 네가 빚을 떠안기를 바랐고 물밑에서 작업을 벌였다. 네 아버지는 납골당의 배를 불리느라 바빴으니 너와 네 어머니만이 외로운 싸움을 해야 했다. 외가는 '우리도 사정 상...'으로 시작하는 간편한 핑계로 꼬리를 잘랐다. 네 어머니는 가장의 역할을 해내면서 법원과 변호사와 판례의 늪에서 뒹굴어야 했다. 남이 들으면 "아!" 하는 절망의 감탄사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네가 제일 잘 알았다. 너를 탓할 수는 없었다. 네 잘못이 아니었다. 너는 썩어가는 감정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고 싶을 따름이었다.


"난 내게 정말로 중요한 말은 일기에 쓸 수 없었어. 그냥...처음 한 줄을 쓰면 더 못 쓰겠더라고. 정신을 차리니까 욕밖에 적은 게 없었어."

 너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보통 그날 일어난 일 중 그럴듯한 걸 적지. 한데 과거는? 과거를 선택하고 잘라서 쓰는 건 공평하지 않았어. 게다가 난 그조차도 분해해서 난도질하고 칼질하고..."

 너는 고개를 젓고는 원을 그리며 걸었다. 아직 꺼지지 않고 담배를 붙들고 있던 불씨가 네 발에 밟혀 부서졌다.

 "그래. 난 솔직하지 못했어. 나만의 세상에 있을 때조차 이야기를. 과거를 학대했지."

 너는 돌연 제자리에서 멈췄다. 그리고는 교육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흡연장을 나갔다. 나는 이 일을 굳이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경 상병이 원한 일이기도 했다.




 그날 오후에 너는 사람을 죽였다.




 그날 오후에. 민 하사가 말실수를 저지른다.

 "별 것도 아닌 주제에 특혜란 특혜는 다 받아 처먹고. 제대로 좀 살아. 제대로! 좀!"

 어쩌다 그 사단이 났는지는 모른다. 민 하사가 먹은 아침밥이 맛이 없었거나. 경쟁을 유도하는 오락에서 졌다는 정도만 추측할 뿐이다.


 그리고 그때 너는 이성의 끈이 끊어진다. 왼손에 깨진 유리 파이프를 손에 쥔다. 예리한 광채가 태생부터 주어진 위험을 숨기기에 더없이 적합한 흉기를. 앞으로 향하고 괴성을 지르며 돌진한다. 삽시간에 가속도가 붙는다. 이제 나도 전우도. 너도 멈출 수 없다. 거의 넘어지다시피 뛰는 너는 그대로 민 하사에게로. 민 하사에게로.


 그러나 너는 발을 헛디딘다. 관성은 충실하게 너의 상체를 밀어붙이는 와중에 하체는 덜컥 멈춰버린다. 정면을 보던 칼끝은 더없이 경건하게 기도하듯, 묵상하듯 하늘로 고개를 치켜든다. 너는 그 위로 무너진다. 비명은 없다. 칼날이 네 폐를 단번에 갈랐기 때문이다. 몸뚱이가 해풍에 식은 자갈 바닥에 안기고 상처에서 핏방울과 쌕쌕거리는 신음이 뚝뚝 떨어진다. 숨이 멎는다. 민 하사가 욕설을 뇌까리며 뒤로 넘어진다. 전우들이 부대장을 찾아 달음질친다. 마침내 나도 정교한 고깃덩이로 전락한 네 육신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너는 사람을 죽인다. 스스로를 죽였다.




 너는 이야기를 남기기 위해 일기를 쓴다고 했다. 아니. 일기에 쓰인 이야기는 온전해야 한다고 여겼다. 네 이야기는 더 이상 네 손에서 펼쳐질 수 없으므로 내가 네 이야기를 되도록 원 상태 그대로 남기고자 노력했다. 네가 만족할지는 모르겠지만...최선을 다했다. 저 바다에는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지층 사이에 눌어붙은 검댕으로 묻힌 이야기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기필코 파내고자 바다를 비우려 들고 어떤 사람은 중장비를 끌고 와 딱딱하고 단단한 장벽을 세우려 든다. 어느 쪽이 이기든 간에 이야기는 일부분이 잊히고 손상된다. 나는 네가 그 반열에 합류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일기장을 덮은 나는 앞날을 고민한다. 태풍이 오고 있으매 눈을 똑바로 뜨고 준비를 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