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7월 6일.


저번주에 끝난다던 장마는 오늘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추적추적, 아스팔트 위에 뚝뚝 떨어지는 비들.


내 눈의 빗방울들은 침대라는 아스팔트 위에 떨어졌다.


널부러진 잠자리.


어질러진 책상들. 내 방의 모든 것은 아직도 그이의 것으로 얼룩져있었다.


"아으..."


오늘도 악몽 속에 깨어난 나.


시간은 5시 반. 잠에 든지 4시간만이였다.


시계를 지긋이 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또다시 머리를 싸맨다.


내가 뭘 잘못했던 걸까. 결국 너랑은 안 이어질 운명이었던 걸까.


부스스한 머리를 좀 더 세게 잡아본다.


내가 뭘 잘못했던 걸까? 결국 너랑은 안 이어질 운명이었던 걸까?


평서형이었던 문장은 의문형으로 바뀌고, 고통은 더욱 강해진다.


띠링-!


그 와중에 눈치없이 울리는 핸드폰. 난 겨우 손을 뻗어 핸드폰을 잡았다.


캘린더에서 온 알림. 내용은 "남자친구와의 1년을 축하드립니다!"였다.


탁!


그 알림을 보자마자 난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던져버렸다.


곧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냈고,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부랴부랴 핸드폰을 다시 집었다.


금가있는 액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또다시 하면 안 될 짓을 해버린 것이다.


"하..."


또다시 몰려오는 우울감과 자괴감. 이건 누가봐도 내 탓이었지만 괜히 그이 탓을 하고 싶었다.


너가 헤어지자 안 했으면 핸드폰을 던질 일은 없었을 거야. 너가 그만두자고 안 했으면 비와 같이 울 필요는 없었을 거야...



또다른 의미없는 가정이었다. 


그이와는 1주일 전에 헤어졌고, 좋게 헤어진 거도 아니니.


하지만 난 계속 그가 생각났다. 


그는 나한테 관심도 없을텐데 또 나만 그런 것이다.


또 나만 그런 것이다.


...


또다시 울음이 터졌다.


또다시 베개에 얼굴을 쳐박았다.


완전 엉망진창이었다. 


그리고 어렴풋이 기억나는 눈부신 지난 날들.


"벚꽃, 참 예쁘지 않아?"


"이야~ 바다 정말 시원하다. 너는 어때?"


"저기 은행 조심해! 밟으면 냄새나니까."


"눈사람 만드는 거 재밌어? 다음 겨울에도 같이 만드자!"


.

.


.



'흐으...'


자꾸 그이가 했던 달콤한 말들이 나에게 찾아왔다.


최대한 떨쳐내려고 하면, 오히려 그들은 내 가슴 속에 깊이 파고들어 박혔다.





"추억 한 장 한 장은 한 조각이 될거야." 그 때는 4월이었다. 벚꽃이 환하게 피어 우린 나들이를 나갔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벚꽃 촬영을 막 끝난 내가 환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아,  책에서 읽은 거야. 아름다운 표현이지 않아?"




아냐, 하나도 아름답지 않아.


그 때는 얼버무렸지만, 지금은 확실히 답할 수 있게 되었다.


추억이라는 파편은 하나로 모여 결실을 맺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가 계속해서 내 가슴 속을 찔렀다.


이 패임은 회복되지도 않았다. 너덜너덜해진 마음과 끝없는 상처를 남길 뿐이었다.



아픔이 너무나도 오래가는 탓에, 친구들한테도 내 상황을 알린 적이 있었다.


우린 그 날 밤에 만났다.


곧 음료를 주문했는데, 난 아메리카노를 먹으라는 권유를 무시하고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그 날 너무 써서 에스프레소를 거의 먹지도 못한 걸 보면 그건 미친짓이었지만, 그 땐 쓴 커피로라도 쓴 기억을 잊고 싶었나보다.


어쨌든, 친구들의 의견은 똑같았다.


"야, 걔 원래부터 평판 안 좋았어~ 난 너가 그렇게 오래 사귈지도 몰랐다니까."


"그냥 나쁜 새끼 취급해버려. 어차피 이젠 남남이잖아?"


"시원하게 뒷담이나 까. 다른 얘들한테 절대 얘기 안 할 거니까."


모두 내가 그를 비난하길 원했다.


하지만 친구들의 말과 다르게, 내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 날도 입 뻥긋 못하고 집에 오고 말았다.


친구들은 날 멍청이로 봤을 것이다.


판 다 깔아줬는데도 말 하나 못하는 벙어리, 비밀 지켜준다해도 끝까지 침묵하던 겁쟁이.



'그래, 내가 쓰레기인 거겠지.'

결국 오늘도 난 이런 결론을 내었다.




그를 비난하기엔 1년 남짓한 시간은 너무나도 마법 같았다.


한 폭의 그림같이 벤치에 앉아있기도 했고, 틈만 나면 하던 키스와 허그.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고, 모두 연기였다고." 라 말하긴 더욱 싫었다.


차라리 내가 쓰레기, 멍청이, 벙어리가 되는 게 나았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이 부정당하면 난 더욱 비참해질 거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난 다시 일어섰다.


"결국 이 일도 일기장의 한 문장으로 잊혀질거야."


"난 잘못없고, 그 새끼가 쓰...하..."


스스로가 답답해 가슴을 두 번 크게 쳤다.


난 왜 얘기를 못 하는가.


혼자있는데도 왜 말을 못 하는가.


정말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애증"이라는 감정은 날 잡아먹었다. 


그리고 난 아직도 그 곳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마치 끝없는 늪에 빠진듯했다.


마음을 다시 다잡는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국 난 그와 관련된 모든 흔적을 지우기로 결정했다.


차라리 완전히 없애버려, 완전히 잊어버리는 게 나을 거 같았다. 


나쁜 새끼로 기억하려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테니 말이었다.



나는 결심했다.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은 모두 마당에 가져다 놓았다.


그와 함께한 사진들이 모여있는 사진첩, 액자.


꽁꽁 숨겨놓은 연애일기장.


그랑 함께 맞춘 커플티 등.


심지어 그와 여행갔을 때 썼던 컵같은 사소한 거 까지 전부 다 말이다.


다음으로 가져온 건 라이터와 망치.


종이는 불태워버리고, 물건들은 망치로 부셔버릴 생각이었다.


난 눈을 질끈 감고, 망치로 컵을 세게 내리쳤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함께 조각들이 주변으로 튀었다.


눈을 감은 이유는 간단했다.


눈을 뜨고 있으면 또다시 그와 관련된 기억이 상기될까봐였다.


눈을 감아야, 비로소 그 감정이 무뎌질 수 있었다.



깡! 쨍그랑! 짤랑! 


계속해서 들려오는 유리 도자기 스테인레스가 깨지는 소리. 


그 조각들은 주변주변으로 튀었는데, 일부는 내 다리에도 튀어 박히기도 했다.


눈을 뜨고 주변을 봤을 때, 난 내 다리가 선홍색 피로 물들였음을 보았다.


그리고 내가 한 짓을 보았다.


가져온 모든 물건들은 산산히 부셔져 온전한 형태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자 눈물이 났다.


통증 때문일지도 있고, 그 망할 애증 때문일지도 있지만, 난 그냥 통증 때문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완전히 잊어버리겠다고, 그와는 이제 정말 안녕이라고. 난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계속 속으로 되뇌었다.



다음 타겟은 종이로 남겨진 것들이었다.


그들에게 종말을 고하기 위해, 난 라이터를 켰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난 불을 일기장에 살짝 붙였다.


하지만 아직 비가 오고 있어서 불은 그을림만 남길 뿐 별다른 역할은 하지 못했다.


한참 고민하다, 결국 사진과 일기장은 쓰레기통에 버려버리기로 결정했다.


완전히 불태워버리는 게 목표였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게 최선의 선택이였다.


어차피 나중가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건 똑같을 거 였기 때문이었다.



쓰레기통에 그 흔적들을 버리고 집에 다시 들어오자, 비가 더 세차게 오기 시작했다.


고통의 산물들을 모두 버리고 온 나였지만, 왠지 후련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었다.




"...피곤해..."


개어진 잠자리.


정리된 책상들. 이제 그와 관련된 건 이제 하나도 없다.


"아으..."


이번엔 제발 좋은 꿈이길 바라며, 난 또 잠자리에 누웠다.


악몽이란 그림자에 이미 사로잡혔음을, 그 때의 난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