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에에엥~~"


"울지 마렴, 뚝. 약 발랐으니 금방 나을거란다."


"히이, 히이잉.... 선생님~~~"


"그래, 그래."


강아지처럼 앵겨들어오는 엘렌시아를 품에 안은 채,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머리에 툭 튀어나온 강아지 귀에 손가락이 살짝씩 걸리며 기분 좋은 촉감을 선사해준다.


품에 안기고 나서야 아픔이 가시기 시작한 건지, 훌쩍거리던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손을 멈추지 않은 채, 엘렌시아를 조용히 타일렀다.


"맨발로 뛰어다니는 건 이제 금지. 특히 실외는."


"히잉.."


"정 원하면 주말에 숲에 데려다 줄게. 부드러운 흙에서 걷다보면 발도 익숙해질거야. 그때까지 꾹 참기. 선생님이랑 약속?"


"...약속 잘 지키면 상 줄거야?"


"물론, 물론."


"히힛."


여전히 발바닥이 아픈지 눈물을 머금고 있었지만 기분은 좋아진 덕에 미소짓기 시작한 엘렌시아의 머리를 정성담아 쓰다듬었다.


그래, 말썽꾸러기면 어디니.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그런 마음을 담아 머리를 쓰다듬었다. 


엘렌시아가 "선생님, 머리카락 쓰다듬을 때마다 이상해."라며 먼저 도망가버리기 전까지 계속.


물론 내가 여자 머리를 쓰다듬는 걸 좋아하는 변태라서는 절대 아니다. 엘렌시아의 머리카락이 사람을 홀릴 정도로 매력적인 거지.


*


중립지대, 혹은 회색지대.


마왕군이 절멸한 지금에 이르러서는 각 국에서 개발논의가 한창 이루어지는 곳이다만, 마왕군이 건재할 때에는 죽음의 땅이라고도 불리던 곳이었다.


마족이든 아니든 그 종을 가리지 않는 시체가 매일 매일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으며, 마왕군과 대륙연합군의 무력적인 충돌이 끊임없이 일어나던 곳.


각자의 종족, 혹은 국가 내에서는 이름을 날리던 강자도 단 하루만에 파리 날리는 시체가 되어 떨어져나가던 곳.


물론 지금은 나와 아이들의 안전한 보금자리가 되었다만.


이 곳에 정착한 초기에는 나지 않는 피냄새가 나는 것만 같아 코를 틀어막을 때도 있었다.


아이들을 보살피고, 또 길러나가며 트라우마를 떨쳐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아직까지도 가끔 철분의 비린 냄새가 코를 찌를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아이들도 그렇듯,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시간이, 시간이....!


"렌자리."


"...넵."


"이게 몇 번째니."


"아, 아하하... 일곱 번?"


"이번 달에만 열두번째란다."


멋쩍은 듯 머리를 긁는 렌자리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방 구석에는 셔츠였던 천쪼가리들이 비참하게 찢어진 채로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욕구를 해소한 뒤에야 제정신이 들었는지 나름 정리해놓은 것이겠다만, 애초에 욕구 해소 대상이 된 입장에서는 꽤나 심경이 복잡하다.


"참지 못하는 때가 있다는 건 알고 있다만, 셔츠를 매번 사야하는 입장도... 하아."


"에헤, 에헤헤..."


렌자리는 웃곤 있었지만 자신도 부끄러운 건 아는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고개를 구석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혼낼 생각도 싹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 드래곤이라곤 해도 아직은 어린 해츨링이니 욕구대로 행동할 수도 있지.


오히려 사춘기 때 나를 생각해본다면 렌자리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 때의 나는 어른의 옷을 훔쳐다가 자신의 욕구 풀이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긴 했지만,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한창 때의 성욕 때문에 혼나는 건 상당히 부끄러운 일이겠지.


"성욕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야. 다만 건전한 해소방식이 있다는 거지."


"네엡..."


렌자리의 녹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잔소리를 계속했다.


"운동도 좋고, 아니면 폴리모프를 풀고 운동 나가는 것도 괜찮고. 정 원하면 엘렌시아와 숲에 갈 때 같이 가자."


"...엘렌시아랑 숲에 가기로 했어요?"


"응? 응. 정확한 약속은 안 잡았지만."


"헤에..."


갑작스레 치켜든 렌자리의 눈은 보기 드물게 번들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꼭 데려가줘요, 약속!"


"그래. 대신 욕구도 건전하게 풀어보기로 약속해."


한참이나 망설이던 렌자리는 이내 큰 결심을 내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렌자리가 내민 새끼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엮으며 약속한 뒤에야 안심하고 방을 나올 수 있었다.


그럴 의도는 없었다만,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보니 싹 다 여자인 탓일까.


이렇게 노골적으로 욕구해소의 대상으로 보는 건 렌자리 밖에 없긴 하다만, 다른 아이들도 나를 이런 식으로 보고 있을까봐 조금 걱정이 되긴 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남고에 부임한 여자교사 느낌이 아닐까.


건강하게만 자라서 세상에 나가 제 짝을 찾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뿐이다. 


*


고아원을 운영하는 일은 생각보다 고되다.


가사노동을 하는 전업주부들만 하더라도 가사를 마치고 나면 하루가 꼬박 지나가는데, 하물며 먹여살려야 할 사람이 열을 넘어가는 고아원은 어떻겠는가.


그렇지만 용사란 곧 초인. 일반인이 10분 걸려 해치울 일을 1분이면 끝낼 수 있었다.


고아원 운영의 고충은 따로 있었다.


아이들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것.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선뜻 식량을 내어주는 상단은 없었다.


모든 국가가 예의주시하고 있는 고아원에 함부로 식량을 건넨다면 어떤 경계를 받을지 모를 뿐더러.


눈 앞의 공주의 소심한 분노를 마주하게 될 테니깐.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가요."


"공주님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또 거짓말을."


"솔직하게 얘기하든, 거짓으로 이야기하든 믿지 않으시면서."


"흠."


그런 짧은 헛기침만 내뱉곤, 공주는 포크를 움직여 잘 잘린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 안으로 넣었다.


물론 나는 식탁에 놓인 요리를 진즉에 해치운지 오래였다.


이런 고급진 요리는 왕궁에 방문할 때 아니면은 먹을 수가 없었으니까.


아이들을 먹일 때에는 부족함 없도록 챙기고 있었다만, 정작 그러다보니 내 식사는 빈곤해지기 일쑤였다.


"필요할 때에만 와서 식량을 달라고 조르는 꼴이라니, 말로만 듣던 기둥서방이 이런 느낌일까요."


"어느 나라든 꺼려할 아이들을 품고 보살피고 있는 대가라고 생각하시죠."


"품지 않으면 길거리에서 죽거나, 이빨이 모조리 뽑힌 채 노예로 굴려질 텐데요."


날카로우면서도 잔인한 말에 아무 대답 없이 빙긋 미소를 지어주기만 했다. 


엘레나 공주는 내 미소를 찬찬히 뜯어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식욕이 싹 가셨다는 듯 포크를 내려놓았다.


"참 고상한 대화 방식이시군요. 협박이라니."


"저는 아무 말도 안 했답니다."


"하아."


자리에 놓인 천으로 입을 가볍게 닦아낸 엘레나는 와인 잔을 들어 입 안을 헹구듯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아무리 그래도, 식량을 공짜로 내어드릴 수는 없답니다. 대가를 치루셔야죠."


"대가라면 금도 보석도 가져왔습니다만."


"예나 지금이나, 제가 원하는 대가는 단 하나 밖에 없답니다."


"그건 내어드릴 수 없답니다."


"흐음."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신 엘레나는 순간 날카롭게 이 쪽을 쏘아보았다.


"그 여자 때문인가요?"


"헬레니아 말씀이시라면, 그건 아닙니다. 다만 제가 싫을 뿐이죠."


"당신과의 혼약이 깨어진 탓에 왕궁 내에서 설 자리가 없어진 불쌍한 공주에게 용사의 씨앗은 내어주실 수 있지 않나요."


"씨앗을 바란다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시는 건 여자로서 어떠한가 걱정이 듭니다만."


"용사라는 줄이 떨어져버렸으니, 용사의 자식이라도 품어야 제가 이 왕궁에서 살아남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쪽의 죄책감을 유발하려는 전략이다만, 이 쪽도 들은 게 있다.


"설 자리가 없어졌다는 게 서있지 않고 앉을 왕좌가 생겼기 때문인지요."


"흠. 회색 지대에 사느라 소식이 느릴 줄 알았는데."


"저도 분위기라는 건 읽을 줄 압니다."


"왜 제 마음은 못 읽어주신 걸까요."


"읽더라도 이뤄드릴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아.


엘레나는 나른하면서도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고는, 와인잔을 깔끔하게 비웠다.


"저는 홀로 살고, 홀로 죽을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당신을 사랑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또 당신이 사랑을 저버리고 도망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담도. 공주님은 이 세상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분 아니십니까."


"그런 저라도 당신이라면 사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답니다."


탁-


공주는 더 이상의 대화는 거부한다는 듯, 깨질 듯이 큰 소리를 내며 와인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요즘 들어서 드는 생각이라곤, 그 때 당신의 다리를 잘라서라도 곁에 가둬둘 걸. 그랬다면 나도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착각으로 살았을 텐데."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죠."


"그래요, 뭐. 식량은 늘 그렇듯 이미 고아원에 도착했을 거랍니다."


"늘 그렇듯, 감사합니다."


"하아."


엘레나는 더 이상 대화하기 싫다는 듯, 대답조차 하지 않고 손을 휘저었다. 진작에 식사와 소화를 끝낸 터라, 축객령이 떨어지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식당을 나섰다.


탁-


등 뒤에서 문이 크기에 맞지 않게 작은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리고 식당에 홀로 남겨진 엘레나는 용사가 멀어질 때까지 기다린 뒤-


쨍그랑-!


그가 앉았던 의자에 와인잔을 내던진 뒤, 머리를 쓸어넘기며 골몰히 생각에 잠겨들었다.


"괜찮아요, 용사. 기다리는 건 익숙하니까."


공주는 기나긴 생각 끝에 그 말만을 내뱉곤, 자리에서 일어나 제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왕궁에서 쉬지 않고 말을 달리면, 고아원에는 해가 뜰 때 즈음에 도착한다.


왕궁에 방문할 일이 있을 때에는 토요일에 출발하는 터라, 일요일 아침에 도착하면 그제서야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자고 있을 때에는 고아원의 부원장이 늘 마중을 나와준다.


"헬렌시아."


"제때 왔네요. 조금 더 늦었으면 찾으러 갈 뻔했는데."


"그건 참아줘."


아름다운 흑발의 여인이지만, 머리에 솟아난 검붉은 뼈가 평범한 여인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헬렌시아, 고아원의 부원장이자 내가 쓰러뜨린 마왕의 딸.


"이번에도 정조는 지키신 모양이네요."


"거 참, 말을 해도."


"후후."


고아원을 굴려나가는 동료답게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자, 이 고아원을 세우게 된 가장 큰 이유.


마왕을 쓰러뜨리는 데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지만, 정작 마왕군을 무너뜨리고 난 뒤에는 몸을 의탁할 곳이 없어졌다.


마지막 격전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마왕성에 머물 수도 없었고, 잔존 마왕군이 배신자인 그녀를 받아들일 수도 없었으니까.


대륙 연합군 역시 그녀의 공이 지대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녀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아무리 연합군의 편에 섰다고 해도, 손가락을 까딱하는 것만으로 도시 하나를 날릴 수 있는 폭탄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여기 하나 더. 마왕을 쓰러뜨린 뒤에 쓸모가 사라져버린 용사, 그리고 마왕의 딸이 뭉쳐 고아원을 운영하게 된 것이었다.


맡아줄 사람 없는 전쟁 고아들 역시 이 고아원에 흘러들어오게 된 것이고.


"따뜻한 물 받아놓았으니 얼른 씻고 나오세요."


"늘 고마워, 헬렌시아."


"별 말씀을."


*


헬렌시아는 용사가 벗어던져놓은 옷을 주섬주섬 바구니 안에 담아넣었다. 


회색 지대라고 해도 살기 좋은 곳은 있기 마련. 고아원도 회색 지대 중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명당 중 하나인 덕분에 앞마당에 넉넉한 우물이 있었다.


간밤에 쉴새없이 말을 내달린 탓일까, 땀에 흠뻑 젖은 셔츠를 집어든 헬렌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셔츠에 코를 천천히 가져다 댔다.


진한 땀냄새.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향기를 즐기던 헬렌시아는 눈을 뜨자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 쌍의 녹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일찍 일어났네요, 렌자리."


"뭐하는 거야?"


"뭐하긴요. 간밤에 바깥 일하고 오신 원장님 빨래 해드리려는 거죠."


"그래? 그러면 나 건네줘. 내가 빨래할 테니까."


"저런. 이번에도 셔츠 갈갈이 찢어먹으려고요?"


"시끄러워. 내놓으라고."


렌자리는 짜증 담긴 손짓으로 셔츠를 노렸지만, 헬렌시아는 가볍게 그 손길을 피해 셔츠를 바구니 안으로 던져넣었다.


"으득."


"애초에 본인 속옷도 빨래를 안 하는 사람이 원장님 빨래를 어떻게 한다고."


"클린 마법 쓰면 돼."


"그래요? 그 정도 마법 쓸 줄 아시면 독립을 하시지."


"헹, 원장님도 뭐라고 안 하시는데 왜 네가 먼저 까불어."


"저는 이래 봬도 연장자이자 성인이고, 부원장인 걸요."


언쟁이 계속될수록 말소리는 점차 커져갔고, 이내 말소리를 들은 것인지 엘렌시아가 빼꼼 고개를 내밀어 분위기를 살폈다.


"둘이 싸워요?"


"개는 신경 꺼."


"렌자리, 친구에게 무슨 말버릇이에요."


"헹, 이 속 시커먼 개랑 같은 취급하지 말아줄래."


"속 안 시커멓거든!"


"안 시커멓기는. 원장님한테 둘이서 몰래 숲에 놀러가자고 한 주제에."


"흥! 주인ㄴ, 이 아니라 원장님이 먼저 데려가겠다고 하셨거든!"


"주인님은 무슨 주인님이야!"


"흥, 흥이다!"


그런 유치한 말싸움을 지켜보던 헬렌시아는 문득 저런 해츨링과 기싸움을 한 자신이 부끄러워져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종종걸음으로 둘 몰래 욕실 앞에서 빠져나왔음에도 불 붙은 아이들 간의 말싸움은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목욕을 마치고 나온 반라의 원장과 마주치게 되고 만 것이다.


진지한 얼굴을 한 채, 왜 싸운거냐고 거듭 물어보는 용사에게 차마 사실대로 대답을 할 수 없었던 둘은 어물쩍거리며 도망치듯 욕실 앞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


"그런 일이 있었답니다."


"흠."


진지한 얼굴을 한 채로 헛소리를 늘어놓던 제자를 바라보던 검성은 끊었던 담배를 꺼내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뭐 어쩌라는 게냐. 나보고 혼기 놓친 늙은이라고 꼽이라도 주려는 게냐?"


"네?"


"아니, 아니다."


검성은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엘프로 오래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이 이 녀석을 제자로 받아들인 일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 순위를 좀 하향조정해도 될 것 같았다.


"둔감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그 아이들이 너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걸 모르겠느냐."


"..저도 모르는 건 아닙니다만."


검성은 목 끝까지 치솟아올라온 '헛소리!'라는 고함을 겨우 도로 밀어넣었다.


뭐? 둔감하지가 않아? 모르는 게 아니라고?


그러면 마왕을 물리치겠다면서 떠나갈 때,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내 마음은?


제자로서 성장하던 너의 꿈을 위해 내 마음을 죽인 채, 너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던 내 마음은?


검손잡이 위에 놓인 손이 점점 격하게 떨리기 시작하자, 용사는 슬쩍 스승의 눈치를 살폈다.


불편한 마음을 감출 생각조차 안한 채,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스승.


용사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려고 했다만, 그것보다 스승의 검이 뽑히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서걱-


"앉아라."


"..넵."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이 잘린 검흔 앞에서, 용사는 스승의 제자이던 시절처럼 공손히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가 '여심'이라는 것에 대해 가르쳐주마."


"....네엡."


'스승님, 모솔이시잖아요.'


그런 말을 목 안으로 꾹꾹 눌러담은 채, 용사는 얌전히 스승의 훈계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알겠느냐? 자고로 여자란 몇 살을 먹든 여전히 여자인 법. 그 아이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너보다 연상이더라도 여전히 여자인 마음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내 얘기는 아니다만, 그런 둔감함에 상처받는 이들도 있단 말이다.


그렇게 한참동안 용사의 스승은 제 새하얀 뺨을 붉게 물들여가며 겨우겨우 제자에게 일장연설을 이어나가던 것이었다.


물론 용사가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릴 일은 없었다만.


그렇게 그 누구도 용사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각인시켜주는 것을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그 날이 오고 말았다.


고아원의 최고 연장자인 렌자리가 성년이 되는 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