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여버리겠어…! 반드시 죽여버리겠어…! 루크! 루크!”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린 나에기는 순간의 반동으로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손에 닿는 서랍장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손을 묶은 커튼을 갖다 대 찢었다.

잠시 후 몸의 구속이 모두 풀렸다.

 

“감히… 쥐만도 못한 하인 따위가 이아가르 가문의 공녀에게 이런 미친 짓을…! 루크! 루크!! 루크!!!”

 

나에기는 모멸감과 분노에 휩쌓여 눈이 돌아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자신이 남을 괴롭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여태껏 누군가가 자신을 괴롭힌 적은 없었다.

이런 경험이 굉장히 생소하고 낯설다.

루크에 대한 나에기의 적개심은 생각하면 할수록 높아져만 갔다.

 

“…그건 그거고. 이를 어쩐담?”

 

나에기의 재능은 육체적 재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분노가 이성을 침범하지 않는 굉장히 냉철하고 차가운 판단력도 갖고 있다.

가히 후계자인 장녀답다고 말할 수 있다.

 

“최악이네. 가문의 보물인 7호 수정구가 조각났고 6호 청석의 단검과 4호 가변술의 비급서까지 뺏겨버린 건가….”

 

하나하나가 경매장에 나오면 수 만 골드는 간단히 넘어버리는 귀중한 아티팩트.

그런 것을 더러운 하인에게 빼앗겨 버렸다.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야. 후계자 자리가 위험하다.”

 

자신의 여동생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흐뭇한 미소를 지을까?

자신의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난리를 칠까?

머릿속으로 여러 차례 시뮬레이션을 돌린 나에기는 분노를 속으로 머금은 차가운 얼굴로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나에기는 검지에 낀 푸른색 보석의 반지를 빼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몇 분이나 지속되는 주문을 외웠다.

잠시 후 보석에서 푸른 빛이 방안을 삼켰다.

빛이 점차 사그라들면서 나에기의 그림자에서 복면을 쓴 검은 차림의 인영이 무릎을 꿇은 채 나타났다.

나에기는 뒤돌아 말했다.

 

“안녕? 이렇게 만난 건 처음이네? 잘 지냈어?”

“예.”

 

이아가르 가주만을 따르며 가문을 보좌하는 뒷세계의 어쌔신이자 보물 2호인 프렌이었다.

이제는 완전히 여유를 되찾았는지 나에기는 의자에 걸터앉고 턱을 괴었다.

 

“내 방 꼴 좀 봐. 거기에다가 가주가 되면 승계받아야 할 보물까지도 싹 다 털렸어. 보이지? 침대는 치워져 있고 밑에 텅 빈 금고가.”

“…예삿일이 아니군요. 주인님.”

 

나에기가 씩 웃었다.

 

“그래. 예삿일이 아니지. 정말 단단히 돌은 놈이야. 이런 일이니깐 가주도 아닌 내가 널 급히 부른 거니깐. 어때?”

“당장 잡아와 보물과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나에기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생각보다 힘들거야.”

“어째서입니까?”

 

나에기의 눈이 이제는 빛을 잃은 수정구에 닿았다.

하지만 똑똑히 기억났다.

새파란 하늘과 닮은 파란색 일렁임을.

 

“…자세히는 말하기 어렵지만 놈은 비밀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생일 선물인 줄만 알았던 목걸이가 금고의 열쇠였다는 걸 말이야.”

“…….”

“그것만이 아닐 거야. 분명히. 확신한다. 프렌. 네가 가져와야 할 건 그 녀석의 목이 아니라 신병이다.”

“산채로 데려옵니까?”

“그래…. 직감이지만 그 녀석을 확보하면…….”

 

나에기의 눈이 야망으로 들끓었다.

 

“이까짓 보물이 깨진 건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걸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확신이…. 후후후, 후후후후후후!!!”

 

순간 소름 끼치는 웃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프렌은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낀 채 나에기가 진정되길 잠자코 기다렸다.

 

 

 

 

*******

 

 

 

 

이아가르 공작령은 대단히 넓다.

당연히 그 중심부에 있는 저택에서 다른 나라로 도망가기 위해서는 두 발을 아무리 빨리 걸어도 족히 2주는 넘게 걸릴 것이다.

거기에다 나에기가 그 반지로 주문을 외워 프렌을 몰래 불러 일을 처리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아무리 <가변술>이 단번에 외관까지 바꿀 수 있어도 아직 1성이기에 13살 루크의 체구까진 변형시킬 수 없었다.

그렇기에 체구가 보이지 않게 다리까지 덮는 망토로 몸을 가렸고 긴 머리는 가위로 싹둑 잘랐다.

거기에 사프란 꽃가루와 유황가루를 섞어 빨간색 염모제를 만들었다.

머리를 염색한다란 개념이 없는 이 세계에서 빨간색 머리는 눈에 띄지만 오히려 그게 변장엔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부족해.”

 

목소리는 변조가 불가능하다.

거기에 신분증도 없다.

사람이 없는 길가로만 이틀을 달려 외곽도시에 도착한 것은 도망가기 위해서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밤이 되자 한 외진 골목길에서 그림자에 몸을 숨긴 남자가 모자를 쓰고 벽에 등을 기댔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일리아르! 아르 아르!”

“!”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대충 암구호다.

 

“꼬마가 우리 암구호를 알다니…. 뭐가 있어 보이진 않은데 무슨 일이냐?”

 

‘일리아르’는 뒷세계의 정보조직이다.

양지에 있지 않고 음지에 있다는 것은 돈되는 일은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는 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차분히 말했다.

 

“신분증이 필요하다. 대충 이름 없는 귀족이면 좋겠고 거기에 공작령을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갈 수 있는 경로도 필요하다.”

“가능하다. 다만 비쌀 뿐이다.”

“얼마지?”

“200골드.”

 

역시나 터무니없는 돈을 먼저 배팅한다.

그래야지 나중에 협상을 할 때 돈이 깎이는 기분이 들테니깐.

나는 솔직히 말했다.

 

“그만한 돈은 없다. 적당하게 협상하지. 50골드는 어떤가?”

“가라. 그정도 금액이면……”

“40골드.”

“…….”

 

남자가 품속에 숨겨놓은 검을 치켜들었지만 나는 쫄지 않았다.

도망자가 된 이상 매사 목숨을 거는 게 당연해져서일까? 나도 내가 굉장히 멋져보였다.

남자는 내 시선을 받고는 다시 검을 품에 넣었다.

 

“흥. 그릇은 있는 꼬마구나. 그럼 나도 솔직히 말하지. 70골드면 네가 원하는 신분증과 탈출할 수 있는 경로까지 마련해주지. 어디 나라를 원하지?”

“셀레아.”

“거긴 마법의 나라라 더 비싸다 75골드만 내라.”

“보증은?”

“후후. 그것까지 알고 있는 건가? 당연히 해주지.”

 

남자는 품 속에서 계약서를 꺼내 깃털로 된 펜으로 쓱싹쓱싹 쓰더니 서명에 자신의 검지에 피를 흘리게해 한 방울 떨어뜨리고 내게 넘겼다.

 

“읽어보고 피를 떨어뜨려라. 계약을 어기는 자는 일평생 갈증의 저주가 붙어다니는 계약이니깐. 어때?”

“그 정도론 약하군. 환각과 공포의 저주까지 붙여주면 서명하겠다.”

“…….”

 

남자는 다시 계약서를 훽 빼앗고 글을 써 항목을 추가했다.

계약서를 다시 돌려받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피를 떨어뜨렸다.

시한도 물론 빼먹지 않았다.

남자가 말했다.

 

“신분증은 쉽다. 여기서 기다리면 곧바로 가져와주지. 하지만 탈출 경로는 이틀이 필요하다.”

“…이틀이라.”

 

남자는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 내게 신분증을 주었다.

 

레이 아프테

 

지금은 멸망한 나라의 귀족출신이란 설정이다.

남자와 이틀 뒤 만나기로 약속하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시간은 아직 긴 밤.

잠을 자고 싶지만 언제 찾아지고 죽을지 모르는 하루는 어찌 그렇게 헛되이 날린단 말인가?

 

“…동행을 만들면 좋겠는데. 목소리는 감기에 걸리면 되니깐. 에,에에에엣취!”

 

망토 속에는 감기에 걸리기 위해 팬티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바람이 부는 서늘한 밤이다.

 

 

 

 

********

 

 

 

 

때마침 노예시장이 열렸다.

나는 속으로 두근거림을 참으며 지하계단을 내려갔다.

 

‘이세계로 오면 엘프 노예는 국룰이지. 뭐 오늘은 손가락만 빨아야겠지만.’

 

엘프는 비싸다. 적어도 수천 골드는 족히 필요할 거다.

노예시장을 찾아온 건 의심을 더 피하기 위해 동행을 만들기 위해서도 있지만 혹시나 싶은 인물이 있을까 싶어 겸사겸사 온 것이다.

 

“꼬마 손님이시군요. 돈만 있으면 저흰 괜찮습니다. 보여주시겠습니까?”

 

웃음이 질색인 지배인이 다가왔다.

나는 품속에 남은 25골드를 보여줬다.

 

“인간 아이면 좋겠다. 당연히 여자로. 내 또래면 더 좋겠군.”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지배인을 따라 들어가자 감옥에 갇힌 소년소녀들이 바닥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목에는 가격표가 덜렁덜렁 붙어 있었다.

전생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광경.

인권이 살아 숨쉬는 현대인의 감각이 살아있는 나로써도 이 광경은 썩 유쾌하지 않았지만 당장엔 어쩔 수 없었다.

 

“이 소녀는 어떠신지요? 처녀고 굉장히 깨끗한 인간 아이입니다.”

 

가격은 딱 25골드로 책정된 소녀가 관리인의 말을 듣고는 무서운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 역시 고개를 저었다.

 

“좀 더 돌아보겠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찾아가지.”

“예. 알겠습니다. 그럼 마음에 드시면 입구로…….”

 

관리인은 고개를 숙이고 멀어져갔다.

나는 눈에 불을 키고 철창 사이의 복도를 걸어다녔다.

 

‘없다. 분명 이때쯤 일텐데……. 너무 빨리 왔나? 아니면 늦었나…? 빨리 온 거라면 몇 일 더 기다려봐야 할까…? 아니야. 그건 위험하다.’

 

그때 벽에 막다른 마지막 감옥에 갇힌 몸 여기저기 멍이 나있고 피가 난 은발의 소녀가 눈이 마주쳤다.

오른팔이 없었기에 가격표 책정은 7골드.

머리칼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나중에 시원한 미인이 될 상으로 보였다.

 

“…찾았다.”

 

자신을 팔아먹은 가문과 인간에 대한 복수심에 똘똘 뭉쳐 훗날 나에기의 오른팔로 활약해 사람들을 살육해버리는 인간불도저!

 

“메이르 알키모스…….”

 

자신의 이름이 불린 메이르는 나를 보며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벼,변태 새끼…!”

“뭐? ”

 

이런. 흥분한 나머지 창살을 두 손으로 잡다가 망토 속을 들어내고 말았다.

감기도 이정도 걸리면 충분한 것 같은데 옷이나 입을걸.

 

“아,아니야. 이건 오해야! 에에에엣취!”

“싫어…. 왜 이렇게 인간은 구제불능인 거야! 이젠 변태새끼까지 날 노린다고? 흑흑흑….”

 

첫 만남은 가히 최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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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의한 집착도 서서히 붙여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