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받기도 전에 하는 QnA


1. 얀데레물인가요?


네. 이 시리즈 전부 얀데레로 쓸겁니다.




2. 시리즈요?


판타지 얀데레, 현실 얀데레는 많은데 SF 얀데레는 별로 안보이더라고요.


SF로도 존나 꼴리는 상황을 뽑아낼수 있을거 같아서 쓰기로 했습니다.


아마 세계관은 같은데, 등장인물은 에피소드마다 바뀌는 옴니버스식으로 갈거 같습니다.



3. 읽어보니까 얀데레물이 아닌데요?


1편은 여러분들의 감정 이입을 돕기 위한 빌드업입니다.


2편이랑 3편에 여러분이랑 제가 좋아할만한걸로 그득그득 채워놓을 예정이니 그것만 읽으셔도 됩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저는 얀데레의 '애정 행각' 뿐만이 아니라, '왜 그렇게 되었는지' 에 대한 배경 설명도 캐릭터성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소꿉친구 얀데레' 보다는


'초등학교때 오해를 해결하지 못해 얀붕이한테 심한 말을 마구 퍼붓고 전학갔지만,

뒤늦게 오해를 깨닫고 얀붕이를 향한 죄책감과 무의식에 억눌려 있던 애정이 섞여 집착으로 변해버려,

얀붕이의 고등학교로 전학와 5년동안 억제할수 없을 정도로 쌓인 집착심을 숨기려고 노력하면서, 얀붕이를 고립시켜 자기만의 것으로 만드려는 소꿉친구 얀데레'


가 더 읽는 맛이 있겠지요.


이번 편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그러면, 저 반짝이는 별들도... 언젠간 죽어 버리는거죠?"


"그래, 뭐. 별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다가, 어둠만이 남는거지."


"으.. 좀 무섭네요."


"히, 저 별은 앞으로도 수천만년은 더 갈거야.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별들이 생기고 있지. 아무리 너라도 별이 전부 사라지는 걸 볼 순 없을걸?"


"그런가요..?"


"그래, 저 별 입장에서는 너나 나나, 찰나의 순간밖에 존재할수 없는 하루살이로 보일거야."




"별들도 영원할순 없지만, 우리는 별보다도 훨씬 더 영원할수 없는거지."






***






나는 깨어났다. 눈을 뜨니 단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메운다.


마나 지난 거지?


온몸 위에 소복히 쌓인 서리를 털어내고, 나는 강철로 된 관 밖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방의 폴리스틸 벽면은 영원히 녹슬지 않을 것만 같이 당당히 서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벽의 도금은 누가 난도질이라도 한 듯이 벗겨져 있고, 그 상처는 진청색 덩굴이 뒤덮고 있었다.


식탁과 의자는 부서져서 나동그라져 있었고, 보관함에서는 악취가 진동했다. 방의 모서리란 모서리는 전부 커다란 금과 그 사이를 헤집은 두꺼운 줄기로 가득 차있었다.


이 모든 광경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흐른것인지 확인해야만 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동면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왼쪽 팔이 들어가는 부분의 외벽. 그곳엔 작은 디스플레이가 선명하게 숫자를 표시하고 있었다.




'D+21900'




60년. 잠깐, 60년? 60년만에 방이 이렇게 변했다는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폴리스틸에 이정도로 금이 가기엔 택도 없는 시간이다.


디스플레이 오류일리는 없었다. 날짜 표시기에 이상이 생겼다면 동면관이 날 이렇게 멀쩡히 내뱉었을리 없었다.


대신 반은 얼고 반은 썩은 고깃덩이나, 한 스무조각으로 박살난 얼음 쪼가리들이 튀어나왔겠지.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그 생각을 애써 떨쳐내고선 일어섰다.


일어서기가 무색하게, 끔찍한 두통이 머리를 찔러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몸통이 지탱되지 못했고, 나는 땅바닥에 그대로 넘어졌다.


숨이 폐에서 나오지 못하고 기도를 맴돌았다. 가슴이 마구 부풀었다가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사지가 발작하듯이 떨려왔다.


머리에서 수많은 창살이 튀어나와 내 온몸을 꿰뚫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동면통이었다. 그것도 아주 극심한.


고통이 살짝 잦아들고 동면관에 몸을 지탱해서 겨우 일어섰다. 아직도 더럽게 아팠다.


아까 겨우 진정시킨 손은 다시 덜덜 떨리고 있었고, 머리에 맺힌 땀이 방울져 관 안에 떨어지고 얼어붙기를 반복했다.


평범한 동면통이 아니었다. 수많은 동면을 해왔지만, 이정도의 동면통은 느껴본적도 없었다.


아직 고통이 훑고 지나간 흔적을 정리하지 못한 머리 속에서, 잊으려 했던 불길한 생각이 다시 떠오른다. 만약 진짜로 이 생각이 맞다면?


나는 휘청거리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 


난장판이 된 다른 곳과는 정 반대로, 문 부분은 이상하게도 깨끗했다. 벽을 뒤덮은 덩굴도 문에는 뻗어나가지 않고 누가 자르기라도 한 마냥 뚝 끊겨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아..."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정갈했던 복도의 천장이 아예 통째로 뜯겨나가 함선의 발전실이 머리 위에 펼쳐져 있었다.


위에서 들려오는 핵융합의 웅웅거리는 소음이 복도에 간신히 닿고 있었다.


엔진실 곳곳에서 침침한 붉은빛이 점멸하면서 녹슬고 부서져 가는 설비들을 언뜻 비추었다.


그리고, 진청색 덩굴은 천장이었던 곳으로 들어와 (혹은 자라나가) 복도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동면관의 디스플레이는 최대 7개의 문자를 표시할수 있었다. 이 모든 광경을 본 나는 그 불길한 생각을 마침내 인정하고야 말았다.


0 하나가 표시되지 못했다.


21900에 10을 곱해야 했다. 600년. 나는 동면에 든지 600년이 지나서야 깨어났다.



"이런 미친!"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이 배는 조르주급 중순양함이었다.


아무리 길어도 분명 30년 안에는 태양계에 도착할수 있었을 테고, 그렇지 못했더라도 손실 금액에 눈이 돌아간 연방이 탐색선을 떼거지로 보냈을 것이다.


그들이 우리를 찾아내 인양했어야 할 것이다.



"아, 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미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어딘가에서 공포에 질린 듯 한 절규가 들려왔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


에버...?


에버? 에버?! 에버!!!


분명, 분명히 에버의 목소리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목소리의 방향으로 달려나갔다.


복도에 널린 줄기들에 자꾸 걸려 넘어져 파편과 잔해에 온몸이 긁혀나갔지만, 나는 계속 일어나서 달려가기를 반복했다.


슈트가 찢겨나가고 피가 스며나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달렸다.


이렇게 긴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에 절망하기도 전에 들려온 에버의 비명은, 내 뇌의 가장 깊숙한 곳에 틀어박혀 끊임없이 하나의 주장만을 내뿜었다.


에버를 찾아야 한다.


그녀의 방으로 달려가며 언뜻 본 풍경들은 처참했다.


외장재가 전부 부스러져 골조만 남은 계단 외벽, 완전히 박살난 문과 잠금장치, 암갈색으로 말라붙은 피가 흩뿌려진 복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침식하고 있는 덩굴까지.


함선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나는 머리를 마구 흔들며 몰려오는 불길한 예감들을 떨쳐냈다. 에버는 살아있을 것이다. 그렇게 근거없는 주장을 스스로에게 되뇌이며 계속 발을 움직였다.


이윽고 그녀의 방 앞에 도착한 나는 숨을 고르지도 않고 패드에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730216, 내 생일이다. 그리고 그녀의 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문이 스르륵 열리자 방을 살폈다. 피나 살점 같은건 보이지 않았고, 내 방보단 깔끔했다.


구석으로 눈을 돌리자, 벽에 붙어 쭈그려 앉아 떨고있는 사람이 보였다. 얼굴은 눈물 범벅이었다.


공포에 질려 떨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물기 맺힌, 투명한 호박색 눈동자.



"에버..."



턱 끝까지 차올라 날뛰려고 하던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전부 새어나갔다. 온 몸에서 힘이 풀리고, 힘 풀린 몸을 안도감이 지탱한다.


갑자기, 그녀가 일어서서 달려와, 나에게 힘껏 몸을 부딪히며 나를 껴안았다.



"끅, 끅, 끄윽, 하아, 흡, 흐으윽, 함, 흐읍, 흑, 장님, 흐윽, 하아, "



에버의 체온이 내 몸에 온전히 전해져왔다. 얼굴을 내 왼쪽 어깨에 마구 부비며, 숨도 제대로 못쉬며 눈물을 흘렸다.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그녀의 팔이 내 등을 휘감고 점점 세게 옥죄온다.


나는 조용히 에버의 고운 머릿결에 얼굴을 묻고, 껴안았다. 그 머리칼엔 왠지 모를 달콤씁쓸한 향이 함뿍 어려있었다.


에버크롬비 버넷. 그녀는 후천적 텔로미어-역행 증후군 환자다. 신체 노화가 엄청나게 느려지는 희귀병.


몇십년이 걸릴지 모르는 태양계로의 항해를 멀쩡히 버텨나갈수 있는건 그녀뿐이었다.


그게 내가 그녀를 함장 대행으로 세운 이유다.


하지만 내 짜증나게도 이과스러운 뇌는 한가지 의문을 내놓았다. 그녀는 늙지 않는게 아니라, 느리게 늙는다.


600년이 지난 것 치고는 그녀의 얼굴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중간에 그녀도 동면에 든 것일까?


그러나 지금 그런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수백년 만의 그녀와의 재회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서로 껴안은 상태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의 울음도 점점 잦아들었다. 나는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에버."


"..."


"에버크롬비."


"..."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고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함장님..."



그녀가 머뭇거리며 내 등을 감싸던 팔을 풀고, 의자에 앉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녀는 바닥에 시선을 깔고서 한참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에버, 내가 동면에서 600년만에 깨어난 거라는건 알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설명이 필요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고, 함장 대행인 너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멜루나요."



뭐? 나는 얼굴을 심하게 찌푸렸다. 다시는 듣고싶지 않은 이름이었는데.



"멜루나가, 함내에 아직 남아있었어요."



멜루나. '악마의 석탄' 이라고들 부른다. 정제 후 특정 형태로 가공하면 거의 몇십년 동안 막대한 열을 뿜어낼수 있는 초고효율 연료다.


하지만 그런 장점들을 전부 묻어버리는 특유의 정신파를 발산하는게 문제였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그 부작용을 역이용해 마약으로 사용하는 정신나간 작자들까지 생겨났다.


그로 인해 연방에서는 이미 채굴이나 사용이 금지된 물건이였다.


그 빌어쳐먹을것 때문에 선상 반란이 발생했고,


반군들과 함선 좌현을 통째로 우주에 버려야 했고,


내가 팔자에도 없는 함장 짓거리를 하다가,


결국 그것마저 에버한테 떠넘기고선 동면에 들어가게 되었다.


근데 뭐? 그게 아직도 남아있었다? 그것 때문에 상황이 이 꼬라지가 된거라고?



"하. 하하, 하.."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 참 지랄맞다.


의자에 털썩 엉덩이를 얹었다.



"더 자세히 말해줄래.."



아무래도 끔찍한 기억이었는지, 그녀는 중간중간 다시 몸서리치며 우려고 했다.


나는 그렇게 부담되는 기억이면 나중에 진정되고 말해도 된다고 하고, 그녀를 다시 껴안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는 결국 끝까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정리하자면 이랬다.



선상 반란때 반군과 우리 사이에서 박쥐 짓거리를 하던 놈이 하나 있었다.


그놈이 '탈피' 작전때 좌현이 작살나기 직전에 거기서 멜루나 몇덩이를 쌔벼와서 전파상쇄장에 넣어뒀다.


근데 우리가 동면 들어간 사이에 상쇄장이 망가져서 정신파가 새어나갔단다.


그래서 동면관에 들어있던 사람들이 나빼고 전부 깨어난것도 모자라, 원래 깨어있던 사람들은 이미 완전히 맛이 가서 폭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결국 폭도중 하나가 엔진에 아광속 추진기까지 꽂아버렸다.


순식간에 클레라 호는 항로를 이탈해 심우주로 튕겨져 나갔다.


결국 폭동을 진압하고 남은 멜루나를 전부 우주에 버리는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 버리는 과정도 순탄치 못해서, 에버도 멜루나의 영향을 받아버렸다.


그래서 에버는 현재 위치를 확인할 시간도 없이, 급하게 동면 기간을 '멜루나의 영향이 사라질 때까지' 로 설정해두고 동면에 들어갔다.


그리고 600년이 지나 멜루나의 영향이 사라진것을 확인한 동면관이 에버를 뱉어냈고, 함장인 나도 뱉어냈다.





"다른 생존자들은 어딨어?"


"없어요."


"뭐?"


"전부 폭도들이랑 싸우다 죽었거나, 아니면 폭도가 되었죠. 지금 이 배 안에 살아있는건 함장님이랑 저 뿐이에요."



참 골때리는 상황이다.


600년동안 이 배는 우주를 표류했고, 탑승자 중 살아남은건 나랑 에버뿐이다. 아마 태양계에 다시 돌아가면 이 사건은 몇달, 아니 몇년동안 세상을 뜨겁게 달굴거다.


선상 반란도 모자라, 폭동까지 일어나서 우주를 몇백년간 표류? 에드먼드 제독의 항명급 대사건이었다.


아마 몇주동안 감찰부 0급 심문실에 묶여서, 내가 지금까지 이 배에서 본걸 하나도 남김없이 뱉어내야 할 거다.


그게 끝나고 나면 언론의 무수한 인터뷰 요청이 쏟아지겠지.


역대급 스케일의 선상 반란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투하는 자들! 2번째 함장과 그의 함장 대리의 결단! 눈물 없이는 볼수 없는 첫번째 함장의 희생!



어쩌면 이 일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가 만들어질수도 있겠다. 존나 블록버스터급 스케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마 그럴 것이다.






돌아갈 수 있다면.







"일단 함교로 가야겠어."



내가 아무리 선장이라 해도, 지금 이 상태에서 모든 것을 확인하고 조종할 순 없었다.


에드먼드 제독의 일 이후로, 나쁜 의도를 품은 함장이 승객을 몰살시키거나 배를 어딘가에 꼴아박지 못하게 할 안전장치를 모두가 요구했다.


이 순양함, 클레라 호가 출항하기 직전에 전 은하계의 우주선에 대대적인 시스템 개수가 이루어졌다. 지금 이 상태로 내가 할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일어서서 에버의 손을 잡았다.



"함교에 가서, 항로를 확인하고 재설정 해야해. 일이 어떻게 풀릴진 모르겠지만 뭐라도 해봐야지."


"..."


"에버, 너도 이미 알고 있을거야. 우리는 심우주로 들어왔고,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거. 그래도ー"


"네, 일단 할수 있는걸 해봐야겠죠."



저거 내 말버릇인데.


그녀가 일어서서, 나와 눈을 마주친다.


그 눈에 맺혔던 눈물은 이미 말라 사라졌고, 투명한 호박석 같은 눈동자만이 남아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두려움과 불안함이 언뜻 그녀의 각막에 드러났지만, 이내 사라지고선 강한 결의가 떠올랐다.


좋아. 한번 발악이라도 해보자고.






***






복도로 나와, 함선 하부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배의 좌현이 거의 통째로 날아갔기 때문에, 좌현과 중앙부 사이에 있던 수면 구역이 절반이 넘게 날아갔다.


상부행 통로도 같이. 함선 꼭대기에 있는 함교로 가려면 꽤 돌아가야 했다.


계단을 내려가다 보니 널부러진 백골이 보였다. 이곳에 떡하니 있는 것을 보면, 저 사람은 에버가 말한 폭동 때 죽었을 것이다.


이미 살아있을 적의 흔적조차 남지 않은 저 유해는, 우리가 아는 사람의 것일 수도 있었다. 미묘하게 떨리는 에버의 손을 더 꼭 잡으며 계속 아래로 향했다.


이윽고 계단이 끝나고, 우리는 정원 구역에 도착했다. 굉장히 기괴한 광경이었다. 복도 전역에 널려 있던 덩굴들이 완전히 이곳을 지배하고 있었다.


보도 곳곳에는 화단에서 새어나온 흙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나무들은 전부 그루터기만 남아있거나 쓰러져 썩어가고 있었다.


완만한 언덕에는 한때 만발하던 꽃들은 커녕, 잔디조차 짙은 암록색을 띈 채 누워 있었다. 언덕을 거미줄처럼 덮고 있는 덩굴이 자신만이 살아있다고 외치는 듯 했다.



천장과 왼쪽 벽을 꽉 채운 디스플레이들은 지구의 하늘과 구분할수 없을만큼 새파란 하늘과 밤하늘을 보여줬었다. 어디 그것뿐이랴?


주홍빛 하늘로 새까만 지평선이 수줍게 발을 내딛는 노을진 오후와, 새까만 하늘을 지평선이 남청색으로 덧칠해 나가는 고요한 새벽.


그런 오묘한 색채들을 전부 거뜬히 담아 펼쳐냈었다. 아마 이 배에 탄 사람들의 향수병을 가장 열심히 달래준 하늘이었으리라.



이제 그 하늘은 눈을 감고 있었다.



깨진 액정은 몇백년 전에 보여주던 한밤중과 똑같아 보였지만, 그 속에선 아무런 별도 보이지 않았다.


몇몇 디스플레이는 땅에 떨어져서 박살나 있었고, 다른 몇몇은 벽 속에서 게워내듯 튀어나온 전선 몇가닥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이따금씩 스파크를 뱉어냈다.


친환경 강화 콘크리트라던 정원의 외벽은 이끼들의 터전이 되어 있었다. 새햐앴던 그 표면은 이제 갈색과 회색이 흘러내려 뒤섞인 녹색 팔레트였다.


정말로 몇백년이 넘게 지났구나. 예전 모습이 거의 남지 않은 정원을 보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말없이 부서진 정원을 걸었다.



"여기서 우리가 처음 만났었죠?"



침울한 분위기를 달래려는듯한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저 가운데 나무에 기대서 외롭게 괴상한 책을 읽고 있었지."



에버가 피식 웃었다.



"굳이 중간에 그런 표현들을 넣어야겠어요?"


"둘 다 사실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때 니가 읽고 있던 책을 보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뭐, 그럴만 하긴 했죠."



어느새 우리는 정원 가운데에 있던,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 앞에 섰다.


나무는 이제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높아졌고, 줄기는 몇배는 더 두꺼워진 듯 했다.


나무가 있는 흙더미를 둘러싼 보도는 당장이라도 부서질듯이 여기저기가 불룩 튀어나오고, 금이 가고, 뒤틀려 있었다.


보도에 난 균열 사이를 마구 비집고 튀어나와서 위를 향해있는 뿌리는 어쩐지 날카로워 보였다.


그러나 그 거대한 나무는 죽어 있었다. 줄기를 덩굴이 휘감고 올라가 있었고, 줄기 표면은 마치 상처가 덧난것마냥 검푸른 구멍들로 뒤덮여 있었다.


가지는 말라 비틀어져 더이상 이파리를 품을수 없었다. 덩쿨이 영양분을 전부 빨아먹었으리라.



"그거 제목이, 극한 환경 어쩌구였는데.."


"극한 환경용 성간 순양함의 재료공학적 설계 개론"


"우웩"


저걸 지금까지 토씨 하나 안틀리고 기억하고 있었다고? 어떤 의미로는 참 그녀답다는 느낌이었다.



"함장님도 읽어보신 적 있었잖아요. 그래서 저한테 말을 건거 아니었어요?"


"그렇지, 너같은 꼬맹이가 그걸 읽고있는건 난생 처음 봤거든. 대학교 다닐때 마지막으로 본 책이었으니까."


"저도 깜짝 놀랐어요. 저보다 재료공학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처음 봤거든요."


"그때 니 질문에 대답해주느라 한 3시간은 넘게 붙잡혀 있었던거 같은데."


"2시간 47분이었어요."


"그래, 그래, 너 천재라 좋겠다~"


"음, 항상 좋은건 아니었죠. 특히 어릴때는."



그때 에버에게 처음 말을 건 뒤, 그녀에게 2시간은 붙잡혀 있었던 것 같다.


오늘 처음보는 애 입에서 대학원생이나 할법한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놀라움 반, 호기심 반으로 그녀의 말에 전부 대답해 주었고, 그녀의 질문이 다 떨어졌을 즈음에 역으로 그녀에게 질문을 했다.


그때 그녀가 몇분동안 대답하지 못하자, 나는 슬쩍 웃으며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에버.. 에버크롬비 버넷.."


"그래, 에버크롬비. 이름 기억했으니까, 다음에 또 만나자"



그렇게 말하고선 뒤돌아서 걸어갔다. 이번 수리 작업이 끝나면 저 애를 좀 가르쳐봐야 겠다고 생각한 그때, 그녀가 내 팔을 움켜쥐었다.



"답... 모르겠어...... 알려줘.."



그렇게 말하는 에버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그래 뭐, 그렇게 다 보는데서 쪽팔리게 울었으니까 좀 싫었을수도 있겠네"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니, 애가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고 주위에서 다 쳐다보는데 내가 얼마나 당황했늡읍ㅂ읍브붑"



그녀가 내 입을 틀고 빽 소리질렀다.



"더, 더 말하지 마요!"



어이구, 귀여워라. 이젠 아주 홍당무가 다 됐다.


...아무튼, 에버를 진정시키고, 달려온 그녀의 부모님께 상황을 설명드리고, 저녁때 답을 알려주러 찾아가겠다고 약속까지 하고서야 정원을 나설 수 있었다.


에버는 표정을 좀 가라앉히고선, 내 입에서 손을 뗐다.


"그땐 저도 어렸으니까요. 남이 내가 진짜로 모르겠는걸 물어본 것도 처음인데, 답도 안 알려주고 가려고 해서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음.. 잘 모르겠는데?"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짜 무서웠어요. 만약 함장님이 거기서 그냥 갔다면 몇날 며칠동안 아무것도 안먹고 그 문제만만 생각했을걸요.


다시 말하지만, 그때 전 제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애였다고요. 제가 어릴때 있던 일들 가지고 놀리면 삐질거에요. 흥."


"그래, 그거 가지고 놀린건 미안해."


사과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뾰루퉁한 얼굴을 한채, 나보다 살짝 앞서서 걸어갔다. 잠시 후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미안하실 것까진 없고요."


귀엽기는.


***



누가 보고싶데서 올림